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49화 (49/113)

< 차대운 (2) >

방과후의 교실에는 네 명의 학생이 남아있었다.

자리에 앉아있는 셋은 유매와 차대엽, 그리고 진소란이었다. 교탁 앞에 선 금예린이 칠판에 복잡한 술식을 막힘없이 그려가며 앉아있는 세 사람에게 주술을 설명했다. 불이 꺼진 교실에 들어온 노을빛이 금예린의 옆얼굴을 물들였다.

“이게 주물의 위치를 추적하는 주술이예요.”

송한솔은 다행히도 자신에게 빼앗은 금가의 가보인 여우구슬을 지니고 있다. 물건의 능력을 생각하면 언제나 몸에서 떼놓지 않을 것이다. 이 주술을 사용해 여우구슬을 추적한다면 송한솔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주변 동네 수준이 아니라 탐색 범위에 제한이 없는 대주술은 금예린 혼자서는 펼칠 수가 없었다. 금가의 사람을 불러 주술을 도와달라 부탁해야 했다. 이것 또한 큰 문제는 없었다. 송한솔은 공식적으로 금가의 은인이었으니까.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이미 송한솔이 생명을 위협받아 여우구슬이 깨져버렸을 경우였다. 그렇게 되면 추적할 단서가 없어져버린다. 송한솔이 지닌 또 하나의 가보인 적원령주는 자신에게 향한 저주를 자동적으로 먹어치우는 능력 탓에 외부에서 주술을 이용한 추적이 거의 불가능했다.

“주술을 보조해줄 사람은 늦어도 저녁엔 도착할 거예요. 그때까지 어떻게 할 건지 작전을 짜둬야 되겠죠.”

“한솔을 데려간 건 교수들도 쉽게 제압하지 못한 거대한 마물이다. 싸워 이기는 건 무리야. 우리가 왔다고는 생각지 못할 테니, 상황을 보고 몰래 빼돌리는 게 맞겠지.”

진소란이 정론을 말했다. 아무리 그들이 세한기전에서 날고 기는 다크호스들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학생 수준일 뿐이었다. 다같이 달려들어 기습해도 그 거대한 마물 하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 증거로 차대엽은 시합장에 난입한 마물에게 일격을 맞은 것만으로 튕겨나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 것이 캠퍼스 한복판에 갑자기 날아왔다. 위험도로 따지면 최상 중의 최상. 현역 기사들 중에서도 최전선에서 싸우는 1급들이 담당해야 할 사안이다. 그렇기에 송한솔의 추적에 대해서, 학생은 절대 개입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어른들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기다리고 있으란 것이다.

물론 세한기전은 그런 말을 듣고 순순히 앉아있을 모범생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최소한의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진소란과 달리, 앞에 앉아있는 유매와 차대엽은 귀신처럼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차대엽의 상태는 심각했다.

차대엽은 송한솔의 능력 중 하나에 대해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옆에 붙어다니면서 어렴풋이 예상했고, 직접 싸우면서 확실하게 알았다. 정말로 미래를 본다거나 하는 거창한 것은 아니겠지만, 송한솔에겐 앞에 있을 위험을 민감하게 감지해내는 감각이 있었다. 이번 건도 뭔가를 미리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시합 직전에 자신과 옷을 바꿔입자고 말했고. ‘차대엽은 누구냐’라고 물었던 마물의 주인은 자신 대신에 송한솔을 데려갔다. 원래는 자신이 잡혀가야 한 것이었다. 자신이 당해야 할 사고를 억지로 밀쳐져 송한솔이 대신 당해버렸다.

지금까지, 눈앞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주변 사람을 잃어버리는 게 싫어서 매일매일 검을 휘둘러왔다. 하지만 실상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힘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결승까지 올라와 조금은 강해졌다 생각하며 뿌듯해한 자신을 죽이고 싶다. 좀 더 힘이 있었다면. 좀 더, 좀 더, 좀 더···.

“그만.”

꽉 쥔 차대엽의 주먹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나오기 직전. 차대엽의 몸 안에서 들끓듯이 터져나오려던 무언가가 강제로 진정당했다. 마력이 담겨있는 음성. 교실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문에 기댄 채 서있는 자세빈이었다.

“나 화났다 광고하면서 마력이나 칠칠맞게 뿌려대긴. 그러다 기진맥진해져서 무력감에 취할 생각이냐? 이런 한심한 게 수석이었다니. 이제 보니 차석에 한참 못 미치는군.”

평소라면 이제 진정했으니 걱정 말라고 담담히 대답할 차대엽이었지만, 지금의 차대엽에게는 전혀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잡혀가야 했다는 생각과 죄의식에 짓눌려있다. 비꼬려고 온 거냐는 듯 고개를 돌린 차대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쟤가 하는 말이 맞아. 앉아.”

당장 자세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려던 차대엽의 몸을, 유매가 마력독재로 멈추었다. 이렇게 쉽게 멈출 수 있는 시점에서 차대엽은 지금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다. 최소한의 냉정을 되찾게 하지 않으면 가능한 작전도 망쳐버릴 것이다.

유매 또한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채 불안에 휩싸여있었지만, 평소의 상태를 잃어버리진 않았다. 평정을 잃지 않은 건 단순히 익숙함의 문제였다. 세한에 들어와 송한솔을 만나기 전에는, 언제나 이 비슷한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건은.”

“너희들로는 역부족이란 말이다. 놈을 구하는 건.”

사납게 쏘아붙인 유매의 말에 자세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교실의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다리를 꼬고 앉았다.

“빠르기만 한 녀석에, 속임수밖에 못 쓰는 녀석. 그나마 쓸만한 둘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 한숨밖에 안 나오는 팀이지만, 장기말로서는 일급품이야. 내가 사용해주지.”

자세빈이 당당하게 구출대의 리더를 선언했다. 실제로 자세빈은 자기 부하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데에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혈통능력인 흰소리는 난전에서 명령을 전달하고 지휘하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녀석에겐 받아야 할 물건이 있어.”

자세빈이 이를 빠득 갈면서 말했다. 그리고 교실에 따라들어온 것은 자세빈의 패거리인 담민우와 현미나였다. 그저 자세빈을 따라서 온 것이 아니라, 자의로 구출팀에 참가하기 위해 교실에 들어온 것이었다. 담민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비슷한 사정을 품고 있는데, 그 녀석을 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서. 뭐. 중간에서 적당히 조율하는 역할이라 생각해줘. 내가 할 수 있는 서포트는 최대한 해줄게.”

늑대귀를 쫑긋대는 현미나 또한 팔짱을 끼며 외쳤다.

“그렇게 굴욕적으로 졌는데 이기고 도망치는 건 섭하지! 같은 방법은 더 이상 안 통해. 다음 학기에 갚아줄 거야.”

담민우와 현미나가 하나씩 의자를 뺴고 자리에 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네 명이었던 구출팀은 단번에 일곱 명으로 불어났다. 단순한 전력의 향상 이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이 들어왔다.

“나도 끼워줄 수 있을까?”

모두가 드르륵 열린 교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쇠사슬이 잘그락대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반장인 주하리였다.

“한솔이한텐 도움받은 게 있어서.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

반장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에는 강고한 결의가 담겨있었다. 송한솔은 자신이 몸 안의 불꽃에 발작하고 있을 때, 단지 곤란해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뜻 나서서 도와주었다. 그러니까 자신도 그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면 도와줄 수 있을 만큼은 도와줘야 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은 주하리에게 있어서 의무였다. 게다가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 멤버로 송한솔을 되찾아오기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마물 하나라면 몰라도,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소녀 쪽이 문제다.

“이길 방법은 있어. 그 정도 마물이라면···.”

주하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시합장에선 역시나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나서지 못했지만, 여차할 경우 마력을 해방한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자세빈이 피식 웃었다.

“반장인데 교수의 명령을 무시하는 건가?”

“더 우선해야 할 게 있을 뿐이야.”

주하리의 대답에 자세빈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위험한 일이지만, 자세빈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만한 장기말들을 지휘하며 실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기회가 기뻤다. 구해준 뒤 엎드려 절하면서 내단을 바치라고 웃어제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즐거웠다.

이내 자세빈이 품에서 서명이 적힌 메모를 꺼냈다.

“송한솔과 인연이 있는 선배 여자에게 뜯어낸 거다. 스무 명 정도까진 불량배들 인력을 빌려쓸 수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이쪽도 나름대로 내 직속에 있는 녀석들이 있어. 긴급호출로 부르면 일하는 중에도 당장 여기까지 달려오겠지.”

자세빈의 말에 금예린 또한 부채를 펴 입가를 가렸다.

“우리 금가의 병력도 참가합니다. 아무리 당주라도 마음대로 사람을 부리면 반발이 있겠지만, 은인이라면 도와줄 명분도 의리도 있어요. 앞으로의 협력을 생각해서라도 그 사람을 여기서 잃고 싶진 않아요. 여우구슬도 돌려받아야 하고.”

금가의 병사와 마왕군의 기사들의 참가가 확정되었다. 구출팀의 인원은 순식간에 수십 명으로 불어났다. 일개 학생 두 명이 가질 만한 동원력이 아니었다. 송한솔의 위치만 파악되면 어떻게든 단독으로 탈환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이었다.

송한솔이 이미 죽었을 거라는 가능성은 회의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 불길한 가정은 입에 담기조차 꺼려진다,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 뺀질이는 세상이 멸망해도 어떻게든 요령 좋게 살아남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도망치든 숨든 협상을 하든, 어떻게든 쏙 빠져나가 살아남아있는 송한솔을 자신들이 찾아내 구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앉아있던 유매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우웅 진동했다. 벌떡 일어난 유매가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언니! 찾았어?”

유설은 홀로 공방에 틀어박혀, 마녀공예를 이용해 송한솔의 탐색에 나선 상태였다. 따로 촉매가 없기에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인 작업이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유매는 사소한 단서라도 나오면 즉시 자신에게 전달해달라 당부해두었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에서 유설이 말했다.

“···뭐?”

대답을 들은 유매의 눈썹이 크게 찌푸려졌다. 그걸 보고 옆에 앉아있던 차대엽이 심각해졌다.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길래 저렇게 있을 리 없다며 경악한 표정을 짓는 것인가.

“캠퍼스 정문이라고?”

멍하니 말한 유매가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어 저만치 멀리를 쳐다보자, 리듬을 타는 것처럼 춤추며 걸어오는 뺀질뺀질한 놈의 모습이 보였다. 납치당해서 무슨 짓을 당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혀 긴장감이 없는 걸음걸이다.

입을 벌린 유매를 따라서 다른 아이들도 우다다 창가에 달라붙었다. 학장실을 향해 걷고 있던 송한솔은, 1학년 건물 위쪽 창문에서 버섯 군체처럼 튀어나와있는 여덟 개의 얼굴을 보더니, 뭐하냐는 듯 삿대질하며 웃다가 브이사인을 보냈다.

“야─! 차대엽─! 이따 마이 돌려줘─!”

그리고 큰 소리로 그런 실없는 소리나 지껄였다. 유매가 두통이 인다는 듯 이마를 짚고, 긴장이 풀린 차대엽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세빈은 빚을 지워둘 기회를 잃어 아쉽게 됐다는 듯 쯧 혀를 찼다. 주하리만이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이내 걸어온 송한솔이 학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책상에 앉아 골치 아픈 듯 머리를 짚으며 말한 학장은, 문을 열고 들어온 학생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다른 기사단들과 연계해 수사하고 있는 사건의 피해자. 그 장본인이 아무 상처 없이 스스로 돌아와 학장실에 서있었다.

“자네! 어떻게···.”

“차대엽네 형이 구해줬어요.”

송한솔은 학장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에 떠있는 건 하나의 영상이었다. 신검합일로 변신한 차대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백 마리의 마물들을 갈아버리는 영상. 벽 뒤에 투명화한 상태에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다 찍고 있었다.

“이건···.”

영상을 확인한 천년서생이 놀랍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영상에 보이는 것들은 작은 것 하나하나가 놀라운 사실 뿐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마물의 군단을 조종하는 정체불명의 능력자. 땅바닥에 널브러져있는 검성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괴물. 차대운이 숨기고 있던 진짜 실력의 편린까지.

온갖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천년서생이라면, 더 많은 것을 읽어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 공개해서는 안 될 영상이라고 이해하겠지. 학장 수준의 능력이라면 비난을 감수하고 이번 사건을 적당히 은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다른 누구한테 보여준 적이 있나?”

“아니요.”

“그러면 이제부터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게. 끌려간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대답하지 말고. 이번 사건의 특수성엔··· 민감한 접근이 필요해. 이해해줄 수 있겠지?”

“그럼요.”

송한솔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천년서생이 하려는 정보 은폐가 바로 자신이 부탁하고 싶은 일이었다. 벌써부터 성소의 사건이 수면 위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 천년서생이라면 숨길 것 다 숨기고 그럴듯한 사건으로 포장해 발표해주겠지.

“그건 그렇고, 신검합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었던 건가. 학생일 때부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녀석이야.”

신검합일. 검성의 증거라고까지 불리는 궁극의 기술. 딱히 차대운이 자기 실력을 기를 쓰고 숨기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하지 않으면 쓰지 않고, 필요해서 썼을 경우엔 차대운의 변신체를 보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송한솔의 핸드폰에 남아있었다. 학장이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영상을 돌려보았다. 압도적인 힘. 학생을 구해낸 영웅이라는 존재는, 사건의 본질을 흐려 은폐하기에 딱 알맞은 미끼였다.

“새로운 검성을 추대할 때도 됐지.”

천년서생이 다이얼을 눌러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 차대운 (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