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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52화 (52/113)

< 적풍회 (3) >

적풍회의 적풍(赤風)이라는 것은 피바람을 뜻했다.

그 흉흉한 이름답게 그들은 수틀릴 경우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본질적으로는 장사를 하는 조직조차 아니다. 적풍회의 철칙은 오직 두 가지 뿐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필요한 물건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확보한다.

필요한 물건의 종류는 다양했다. 물량을 쟁여두고 싶은 소모품을 비롯해 특수한 무기나 방어구. 사람 찾기나 최신 연구 따위의 실물조차 아닌 정보 자원. 뒷세계 관여자들에 대한 막대한 데이터베이스.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인맥이나 연줄.

그게 무엇이든 회주가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적풍회였다.

뒷세계 최대 규모의 블랙마켓을 형성한 것도, 온갖 곳의 유통경로에 발을 걸친 것도, 원하는 무언가를 쉽고 빠르게 확보할 수 있도록 조금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뿐. 어디까지나 수단으로서 운영하는 것이지 그게 목적은 아니었다.

그 본질은 각 지부의 보조를 받으며 운용되고 있는 무력 집단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적풍회라면 그들 전투원만을 지칭하는 표현이고, 그 외의 지부는 회주에게 고용되어 명령받은 대로 일하며 돈을 벌어다주는 편리한 도구일 뿐이었다.

적풍회가 뒷세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긴 역사를 이어온 거물 조직들과 머리를 맞대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에 올라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회주의 수완이라고 말했다. 무력이 강한 상대는 모략으로, 모략에 능한 상대는 무력으로 짓누르며 단기간에 성장했다고.

‘아니야.’

하지만 배은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비교적 짧은 시간에 경쟁자들의 견제를 모두 쳐내고 이만한 인프라를 구축할 수가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끔찍하게 강하기 때문이었다. 배은호는 전에 한 번 ‘진짜 적풍회’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웬만한 기사단 하나를 괴멸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윗층의 응접실 안에 들어와 앉은 배은호는 긴장한 표정으로 송한솔을 쳐다보았다. 딱히 미믹 안쪽에 뭐가 들어있는지 꿰뚫어보면 안 된다, 하는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짓을 한 증거를 들키면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건 당연했다.

옆에서 봐도 무슨 짓을 한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번 건으로 호랑이굴 전체가 적풍회에게 찍혀서 적대 관계가 되었다간 그냥 일로는 안 끝난다. 이미 같은 배를 탄 처지에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도 없고. 배은호는 그저 송한솔이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 아니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내 안쪽의 방에서 지부의 관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꾸벅여 인사한 뒤 응접실 소파의 맞은편에 앉은 관리자는, 미믹 경매로 한 건 했다는 2인조의 모습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것에 눈썹을 꿈틀했다. 동그란 반무테 안경을 치켜올린 관리자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냈다.

“따로 불러내서 미안하군. 이야기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서 말이지. 우선 첫 번째로, 너희들이 이번에 얻은 미믹 장비를 이쪽에서 매입하고 싶다. 합리적 가격은 보증하지.”

그만한 물건을 직접 쓸 만큼 대단한 기사는 아무래도 아닐 테고, 어차피 블랙마켓을 이용해 거래할 거라면 번거롭게 수수료 떼이지 말고 웃돈 좀 얹어줄 테니 지금 여기서 팔라는 이야기였다. 닫혀있는 문과 이쪽을 노려보는 경호원들, 관리자의 묘한 위압감은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배은호가 식은땀을 흘리며 송한솔 쪽을 휙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송한솔은 이빨을 다 내보이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든단 생각이 얼굴 바깥까지 질질 새고 있다. 지금쯤 속으로 왜 반말이냐 툴툴대고 있겠지.

그리고 송한솔이 콧숨을 쉬었다.

‘왜 반말이야.’

매장 손님을 이런 방에 억지로 끌고 와서 내려다보고 있는 태도는 둘째 치고서라도, 애초에 얼마를 준다 해도 십자가를 팔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구한 대천사의 날개의 진화 재료인데 남에게 넘기겠는가. 송한솔이 관리자를 보고 대답했다.

“싫은데.”

“싫다고? 우린 헐값에 넘기라는 게 아니라···.”

“잘 쳐줄 거 아는데 싫다고. 가격 올리려고 빼는 척 하는 거 아닌가 의심할 필요 없어. 진짜 팔 생각 없으니까.”

관리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송한솔은 아예 관리자 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고 있다. 뭐 연락을 받는 것도 아니고 펜으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제발······!’

배은호는 옆에 거대한 시한 폭탄이랑 같이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비위를 맞추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이렇게 대놓고 도발하는 건 무슨 일인가. 그리고 관리자가 입을 열었을 때.

“참, 예의가 없어.”

한숨을 쉬고 말한 것은 송한솔이었다. 배은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라고 말하려던 관리자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송한솔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무형의 힘이 작용해 관리자의 한쪽 귀에 껴있던 무선 이어마이크를 쏙 뺐다. 그대로 공중에 떠오른 이어폰은 저절로 날아와 송한솔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송한솔이 손 안의 이어폰에 대고서 말했다.

“자긴 멀리서 구경하면서, 대역 하나 세워놓고 이렇게 이렇게 말하라 꼭두각시 놀이 하면 재미있나? 얼굴 마주보기 싫으면 전화를 하자 하든가. 이게 뭐하는 헛짓거리야?”

배은호와 관리자가 놀라서 송한솔을 쳐다보았다. 음량을 최대로 올리자, 부하의 연락을 받기 위함처럼 보였던 관리자의 이어마이크에선 차갑고 낮은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알았지? 차음은 완벽한 물건인데.>

추궁이라기보단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어조였다. 배은호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채 관리자가 쩔쩔매고 있는 걸 보니,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이 지부의 총 관리자보다 위의 직급에 있는 인간이 틀림없었다.

“정 궁금하면 직접 와서 물어보든가.”

송한솔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자, 이어폰 너머에서 대답이 끊겼다. 그리고 응접실 안에 있던 공간에서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이내 격렬한 폭풍이 된 바람은, 정리돼있던 서류들을 온갖 곳에 펄럭이고 빈 자리의 의자를 날려 넘어뜨렸다. 앉아있는 세 사람의 머리카락이 강하게 휘날렸다.

그리고 바람이 그치자, 그 가운데에서 남자가 나타났다. 진한 다크서클에서 피로가 묻어나오는 조금쯤 음침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장신의 남자가 응접실에 등장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관리자가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회주님!”

“됐으니 나가있어.”

나타난 남자가 손을 휘휘 젓자, 관리자는 군말 없이 정중한 몸짓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갔다. 방금 관리자가 뭐라고 말했지. 회주. 그 단어에 배은호는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실제로 바람에 날려 개털이 되기는 했다.

장신의 다크서클 남자는 방금까지 관리자가 앉아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릎 사이에 양손을 깍지껴 올려두었다. 눈을 반쯤 가릴 정도로 길게 내린 앞머리 사이에서, 날카롭고 차가운 눈동자가 송한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궁금해서 왔다만. 이제 알려주는 건가?”

배은호는 어깨를 떨었다. 언제나 폭풍과 함께 나타난다고 하는 붉은 남자. 적풍회주의 실물이 눈앞에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송한솔 멱살을 잡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위화감이었다. 건조한 목소리로 묻는 남자의 태도는 어딘가 힘이 빠져서 우울했다. 누가 보기에 위압감이 들기는커녕 병이라도 걸렸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배은호의 몸은 최대한 빨리 이 자리에서 이탈하라고 계속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실물을 보니 이렇게나 확연하다. 적풍회주 진고요. 그 이름대로, 이 자는 모든 걸 휩쓸기 직전까지 조용하게 웅크리고 있는 폭풍이었다.

“뒤에 내가 있었다는 걸 간파한 건 그렇다 치고.”

“그거 물어보러 온 거 아니었나?”

“그건 대단하긴 해도 경악할 상황은 아니지. 조금 신경쓸 필요는 있지만 이 정도 장치나 상황을 간파할 수단은 나라도 지금 당장 몇 가지는 떠올릴 수 있으니까. 내가 굳이 이 자리까지 전이해온 건, 너에게 경악하고 있기 때문이야.”

엄청 놀라고 있다고 말은 하는데,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목소리 또한 일관적으로 건조해 흥분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는 나름대로 엄청 놀라고 있는 중이라 주장하는 듯 했다. 진고요가 송한솔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미믹 안 물건을 간파한 거지? 그냥 운이 좋아서 그랬다고는 하지 마라. 경멸하게 될 테니까.”

진고요의 말은 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미믹 안은 열기 전엔 무슨 주문을 쓴다 해도 볼 수 없도록 되어있으므로, 그걸 미리 알았다고 해서 부정행위라 다그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대단하다고 칭찬해줄 만한 일이었다.

배은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시치미를 뗐다.

“아니, 그렇게 말해도 미믹 안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온갖 주술사 마법사들이 전부 달라붙어서 이건 불가능하다 답을 내놓은지가 언젠데. 안 그래요, 한솔 씨?”

다가와 팔짱을 낀 배은호가 이쪽 장단에 맞추라는 듯 팔꿈치를 조금씩 움직여 송한솔의 옆구리를 툭툭 찔렀다. 들은 척도 않고 휙 팔을 빼냈다. 진고요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학회에선 불가능하다 발표하지 않았어. 현실적인 방법이 사실상 없다고 말했지. 이론상 미믹 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있다. 미믹의 차단은 체내에만 작용하기에, 상자 내부랑 상관없는 곳에 간섭하면 되는 거니까.”

배은호가 눈썹을 찌푸렸다. 상자에 들어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인데, 상자 안쪽을 관측하지 않고 어떻게 내부를 안다는 말인가. 그리고 진고요가 간단하다는 듯 말했다.

“예를 들어 미래의 광경을 보면 돼. 미믹의 입을 열고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한 자신의 미래를 엿보면, 미믹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도 안에 든 물건을 알아낼 수 있지.”

회주의 말에 배은호는 엄청난 헛소리를 들은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원하는 미래의 광경을 엿볼 수 있는 반칙 같은 짓이 가능하다면 미믹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게 뭔가. 그저 어린애같은 공상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물론 단순한 이론상의 이야기다. 하지만 의미는 있어.”

배은호에게 대답하면서도 진고요의 눈은 송한솔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손깍지를 낀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불가능한 것과, 들어가는 비용이나 역량이 현실적이지 않은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됐으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파훼법이 있다는 걸 전제로 대비책을 세워둬야 하겠지. 그게 장사를 한다는 거니까.”

그리고 그 말에 송한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만한 포인트가 있었나?”

“아니, 반대잖아. 당신.”

송한솔이 거짓말쟁이, 하고 적풍회주를 삿대질했다.

“장사를 해야 돼서 뚫을 방법을 염두에 둔 게 아니고, 은폐를 뚫을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장사를 만든 거잖아.”

미믹 경매는 적풍회만의 특이한 경매 방식이었다. 그 이벤트를 구경하러 온 경매장 손님도 적잖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어떤 조직도 미믹 경매의 구조를 따라하지 못했다. 그들의 유통 라인으론 합리적인 매물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생체 미믹은 그리 쉽게 돌아다니지 않았다.

기사들은 보통 미믹을 둥지에서 곧바로 죽이고 열어본다. 딱히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미믹을 살아있는 채로 둥지 밖으로 꺼내오는 건 드는 수고 이전에 너무 위험한 일이다. 아무리 상자를 열기 전엔 위험하지 않은 마물이라 해도 일반인이 실수로 열어봤다간 죽을 수도 있고, 일단은 마물의 반출이니까.

즉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생체 미믹을 밖에 가져올 만큼 웃돈을 얹어서 매입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제대로 된 장사로 성립될 경매 방식이 아니었다.

이번처럼 사람들이 경쟁에 미쳐서 훌륭한 매물에 끝내주는 거품이 붙어야 아슬아슬하게 적자를 면하는 수준. 경매장의 분위기를 북돋아줄 쇼로서의 의미를 포함해서 생각해도, 지속적으로 손해를 내고 있던 것은 확실할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미믹 경매라는 종목을 폐지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한 마디로 미끼.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며, 미믹 안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불특정 다수한테 일을 시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고요가 웃었다.

“재밌는 가설이군. 하지만 그런 번거로운 방법으로 은폐된 내부를 엿볼 방법을 알아내서 내가 얻을 게 뭐가 있지? 미믹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다른 탐색 주문을 연구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야. 전혀 합리적이지 못해.”

시치미 떼지 말라고 한 주제에 자기는 끝까지 시치미를 떼고 있는 걸 보고, 송한솔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까 핸드폰으로 그려두었던 낙서를 띄워 진고요에게 내밀었다.

화면에 그려진 낙서는 귀여운 여우 한 마리였다.

다만 꼬리가 아홉 개 달린.

배은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진고요는 그 낙서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후웅! 커다란 바람이 돌연 응접실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지금까지의 어딘가 힘이 빠진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날카롭게 곤두선 진고요가 송한솔을 노려보았다. 손에 턱을 괸 송한솔이 핸드폰을 툭툭 쳤다.

어차피 무슨 속셈인지 다 알고 있는데 서로 떠보는 과정을 거칠 필요는 없었다. 송한솔이 미리 결론을 발설했다.

“이거 상대로도 꿰뚫어볼 수 있냐고 묻고 싶은 거지?”

“······너.”

적풍회주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는 듯 추궁하는 눈으로 송한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이 다음에 이어질 말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진고요에게, 송한솔은 오케이 모양으로 만든 손가락으로 눈 앞에 망원경을 만들었다.

“정답은. 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앞에 앉아있는 자신이야말로 요호 공략의 열쇠라고.

송한솔이 자신만만하게 확답했다.

< 적풍회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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