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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53화 (53/113)

< 적풍회 (4) >

응접실 안에 싸늘한 바람이 흘렀다.

진고요는 섬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자신들이 요호 토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아낸 것인가. 처음부터 이 말을 하려고 일부러 미믹 경매까지 찾아와 자신을 불러낸 것인가.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추궁하는 순간 내가 이 자리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요호의 환영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자는 그가 몇 년 동안 절실하게 찾아온 인력이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진고요의 얼굴엔 도망쳐버릴지도 모르니 당장 감금해서 확보해두고 싶다는 표정과, 도망쳐버릴지도 모르니 그런 과격한 수단을 사용할 수는 없다는 표정이 반씩 섞여있었다. 이내 적풍회의 주인이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요구사항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원하는 것이 있을 텐데. 무조건적으로 협력해주겠다는 형편 좋은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응? 먼저 테스트 같은 것부터 안 하나.”

내 질문에 진고요가 우습다는 듯 콧숨을 쉬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지금 준비할 수 있는 물건 중에 미믹보다 은폐성이 뛰어난 건 없어. 그걸 꿰뚫어볼 수 있었다면 남은 검증 수단은 실전에서 적을 마주하는 것 뿐이지.”

다시 말해 이미 제일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으니 더 이상 테스트할 방법이 남아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직접 요호를 데려와서 얘한테 당신 환술 진짜 안 통하나 보게 잠깐 능력 좀 써봐주실래요 할 수도 없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요구사항. 요구사항이라···. 한 가지 있기는 한데.”

“뭐지?”

“내가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때만, 내가 지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내가 전달한 전략대로 싸울 것.”

내 말을 들은 진고요가 눈썹을 찌푸렸다. 말 그대로 요호 사냥의 지휘권 전체를 통째로 여기에 넘기라는 뜻이었다.

진고요는 요호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만 자그마치 8년 동안 생각해온 인간이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르는 꼬맹이가 내 작전대로 하라고 우기는데 순순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리가 없었다. 나는 조용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신들, 너무 약해.”

내 말에 응접실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옆에 앉아서 무슨 말이지 하고 눈을 끔뻑이며 듣고 있던 배은호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입꼬리를 올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진고요의 눈빛은 이쪽을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로웠다.

“정말 환술만 깨면 이길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아니지? 요호랑 정면에서 싸워 이길 수 있을 만한 전력을 모았다고.”

내 말에 재미있는 발언이라는 듯 진고요가 대답했다.

“너야말로 우릴 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갖춰진 손패는 완벽해. 몇 년에 걸쳐 한 장 한 장 카드를 모아왔다. 대형 기사단 하나랑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 단언하지. 지금의 구성이라면 얼마나 강한 마물이든 쳐죽일 수 있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진고요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적풍회의 소수 정예는 하나하나가 돌출된 전력이자, 요호를 상대하기 위해서 신중히 고른 최상의 포진이었다. 대형 기사단 하나에 버금가는 전력이라는 건 결코 허세가 아닐 것이다.

대형 기사단 하나 수준. 뒷세계에서 장사하는 일개 조직이 보유한 화력 치고는 너무 과한 힘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고 생각했다.

‘기사단 하나 정도 투입해서 정리가 될 수준이었으면 내가 대요괴들 잡겠다 이 고생을 왜 하냐고.’

사실 적풍회주의 판단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 번 요호와 직접 대면해본 적이 있다.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보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인간은 정말로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친구가 눈앞에서 요호에게 부러져버렸다. 오로지 환술 하나만으로 갖고 논 것이다.

진고요는 그 기억을 잊지 않고 곱씹으며, 신중하게 요호를 죽일 수 있는 패를 하나하나 준비하고 있다. 환술을 간파할 수 있는 내가 가세한 걸로 구상은 거의 완료되었을 것이다.

과거에 적풍회주가 본 요호는, 직접적인 전투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악몽 같은 환술에 의존해 싸우는 존재였다. 물론 요호 정도 되는 존재면 나머지 능력치도 만만치 않겠지만, 그 압도적인 환술에 비하면 비교적 떨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치명적인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호가 환술만 쓰는 건 단순히 그게 그녀의 취미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갖고 놀면서 장난치는 걸 재밌어한다. 연인끼리 서로 죽이고, 친구가 원수로 돌변하는 걸 보며 드라마를 보는 감각으로 정말 재밌다고 짝짝짝 박수를 치는 악질이다.

그리고 취미와 전문분야는 다른 것이 당연했다. 요호의 진가는 적을 속이는 환술이 아니라, 재해와 같은 저주와 주술의 화력에 있었다. 적풍회의 전력이 대형 기사단 하나 정도의 수준이라면, 요호 사냥에 있어 승산은 요만큼도 없었다.

실제로 적풍회는 내가 없어도 얼마 안 있어 환술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낸다. 조금 어중간한 물건이긴 해도 진고요는 싸워볼 만 하다고 판단했고, 요호의 위치를 파악해 기습까지 성공한다. 그 직후 요호에게 한 명도 빠짐없이 몰살당한다.

적풍회는 그대로 요호의 것이 되어, 요직에 꼭두각시들을 앉혀놓은 뒤 그녀의 편리한 도구가 된다. 진고요는 요호의 손에 직접 주술로 개조당해 강시로 전락한다. 이후 바람으로 요호를 태우고 다니는 교통수단 비슷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에서부터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요호의 무서움에 덜덜 떨며 굴복해, 그녀에게 검을 향하는 것조차 두려워진 남자. 친구인 적풍회주가 죽는 것을 눈앞에서 본 그는, 무서워서 검을 들지 못하겠으면 강제로 싸우게 해줄 테니 내 노예가 되라는 정세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전대 어둑시니에게 물려받은 장기말이 아니라, 정세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오른팔. 흑호(黑虎)의 탄생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다면 이미 반쯤 실패였다.

요호가 진고요가 키워온 적풍회와 그의 강시를 홀라당 손에 넣어버리면, 지금도 답이 없는데 공략 난이도가 몇 배는 올라간다. 대요괴를 잡을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해서 공격해도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가 도망치기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적풍회가 요호에게 덤벼서는 안 된다. 파워인플레가 엄청 진행되기 전에는 정면에서 요호를 죽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준비를 하고 잡아야 했다. 그 타이밍은 나만이 알고 있었다.

“그러면 조건을 추가로 하나.”

외부인에게 지휘권을 줄 생각은 없다는 대답에, 나는 검지를 슥 치켜올려 그가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졌다.

“호환을 이쪽 편에 붙게 하겠어. 내가 성공하면 당신들은 전부 내 말을 듣는 거야. 이 정도면 납득하겠지?”

호환.

내 입에서 나온 단어에 진고요의 몸에서 돌연 거센 바람이 일어났다. 웃고 있는 내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옆에 앉아있던 배은호가 꺅 하고 놀랐다. 날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는 눈은, 그런 게 가능하다면 뭐든 못해주겠냐고 말하고 있었다.

그야 그것은 요호에게 굴복한 친구의 이명이었고, 요 8년간의 준비는 전부 그 친구를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자, 동맹 체결.”

웃으며 악수를 하고 진고요와 협상을 체결하자, 옆의 알림창에서 요괴 사이드 시나리오의 퀘스트가 떠올랐다.

<시나리오 퀘스트 : 호환(虎患)>

<요호의 무사, 호환을 아군으로 끌어들이시오>

<보상 : 20,000 Credit, 염동 방출 Lv.1>

나는 웃으며 경매장의 응접실에서 일어났다.

* * *

적풍회주는 8년 전, 요호와 대면한 적이 있다.

그에게는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온갖 불의를 못본 척 하지 않고 약자를 위해 싸우는 친구였다. 얼마나 강대한 적이 상대라도 튼튼한 몸 하나만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대검을 든 산군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 남자를 호걸이라 불렀다.

그때도 뒷세계에서 일하고 있던 진고요는, 거악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친구를 옆에서 서포트해주는 역할이었다.

“널 보고 있으면 왜 아직 살아있는 건지 참 신기해.”

혼자 돌입하면 죽을 것이 확실한데도, 지하에 납치된 아이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간다. 그리고 정말로 모두 구해내 자기 혼자만 피투성이가 된 채 걸어나왔다. 그러고는 자기 옆구리에 뚫려있는 구멍이 아니라, 울고 있는 애들을 당분간 재워줄 수 있는 곳이 없다며 걱정한다.

“좋아. 인력이 부족했던 참이니 이쪽 숙소에서 재워주지. 어린애라고 봐주는 건 없어. 제대로 일 못하면 퇴출이다.”

친구가 바보처럼 날뛰면 자신이 그 틈을 이용해 떡고물을 받아먹는다. 그런 핑계를 대면서 돕고 있었지만, 사실은 호걸의 팬일 뿐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영웅. 옆에서 더욱 커다란 존재가 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물론 실패할 때도 있었다. 구해내지 못한 사람의 흔적을 눈앞에 두고 밤새 둘이서 비를 맞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호걸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수많은 불의를 때려잡아 영웅이 될수록, 더욱 커다란 악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어느 날, 호걸은 정체 모를 단서들을 진고요에게 가지고 와 부탁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자신도 모르지만 반드시 무엇인지 알아내 달라고. 어이가 없는 요구였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뒷세계에서 수십 수백 번 상처입으며 싸워온 그의 직감이 무언가를 읽어낸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두 사람이 너무 유능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못본 척하지 않고 싸워온 호걸은 아주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았고, 옆에서 수많은 사건들의 데이터를 취합해온 진고요는 그 의미 없는 단서들에서 정답을 이끌어내버렸다.

그렇게 발을 들여서는 안 될 영역까지 발을 들여버렸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 단서의 조사 따위 시작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던 진실의 꼬리를 붙잡은 두 사람은, 조용히 미소짓고 있는 여우를 만나고 말았다.

미숙했던 두 사람은 마주한 거악의 실체에 조금쯤 흥분해있었다. 눈앞의 적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그래왔던 일이었다. 호걸의 마음이 꺾이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친구는 어떤 불의든지 물리칠 수 있다.

그러한 선언을 들은 여우는, 오랜만에 이런 인간들을 만나 기쁘다는 듯 입꼬리를 귀끝까지 올리며 웃었다.

그 뒤는 그저 악몽이었다. 오른쪽과 왼쪽도, 앞과 뒤도, 상식과 비상식도 구분할 수 없는 환상. 호걸은 착란한 채 지금껏 자신이 구해온 아이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하나하나 죽여버렸다. 악몽에서 깨어난 뒤에 남아있는 건 토막난 시체들이었다. 요호는 자신이 본 광경을 보여주며 깔깔 웃었다.

두 사람의 눈앞에 환상에 홀려 자신들이 행했던 일이 강제로 재생되었다. 호걸이 검을 휘두르자 건물이 무너졌고, 지금까지 구해온 사람들보다 많은 인간을 죽였다. 그를 믿고 있는 아이들은 호걸이 사람을 죽이는데도 도망치지조차 않았다.

아이들에게 언제든지 자신을 믿으라고 말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호걸를 믿은 결과 아이들은 도륙이 났다. 그리고 요호에게 있어 이건 몇 번이든 다시 반복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호걸이 비명을 질렀다. 제발 부탁이니 그만해달라고, 다 큰 어른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애원했다.

“그러면 넌, 지금부터 호걸이 아니라 호환(虎患)이야.”

마음이 꺾여버린 호걸은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는 부탁에, 요호는 스스로의 의지로 복종하는 걸 대가로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무릎을 꿇고 기어간 호걸이 요호의 발에 입맞췄다. 진고요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그 이유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친구는 요호의 무사이자 호환이 되었다.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불의의 화신이 되어, 잘못 없는 이들을 때려부수는 불합리한 폭력으로. 복종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었지만, 그 순간 요호는 호걸에게 소중한 이들을 전부 호걸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한다. 그러한 계약이었다.

일부러 강시로 만들지 않고 따르게 한 건, 아마 괴로워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재미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8년.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은 8년이었다. 이를 악물고 키워낸 적풍회는 결국 여기까지 왔다. 전쟁의 준비는 갖추어졌다. 이쪽에서 요호를 죽이고서 호걸을 해방시킨다.

적풍회의 본진. 앉아있는 진고요의 뒤에 간부들이 서있었다. 지하에 납치되어 호걸이 구해낸 아이들은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기형적인 재능을 품은 탓에 뒷세계와 엮여 인생이 비틀린 아이들이, 지금은 그 힘을 스스로의 의지로 다루고 있다. 은인을 구해내고, 죽은 식구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마지막 열쇠인 환술을 파훼할 능력자도 나타났다.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참아라.”

입술을 꽉 깨물며 흘려낸 한 마디는 누구에게 말한 것인지. 조용하게 읊조린 진고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적풍회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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