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56화 (56/113)

< 송하맹호 (3) >

호환의 가면은 유경명이 여태까지 쌓아온 전투 경험과 유연한 사고를 잃게 하지 않으면서도, 불필요한 생각은 하지 않도록 주인인 요호가 정성 들여 만들어낸 수제 주물이었다.

그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괴물 호랑이 가면을 한 번 쓰면, 자신보다 훨씬 강대한 적이라도 어떻게든 이겨내 쳐부숴온 호걸의 능력을 그대로 가진 채 요호의 적을 모조리 분쇄하는 처형자가 된다. 가면에 미리 담아놓은 저주는 착용자를 흉폭화시켜 신체능력을 상승시키는 도핑 작용까지 행했다.

그리고 가면을 쓰고 싸울 때 유경명의 의식은 저주의 늪에 빠져 지옥을 맛보았다. 이성적인 사고가 멀쩡히 살아있는 채로, 감정과 인격만이 가시덩굴에 휘감겨 피를 흘린다. 일반인이라면 한 번 가면을 쓰고 날뛰는 것만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며칠은 후유증에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유경명은 그게 요호가 내려준 최소한의 자비라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벌을 받아야만 구원받는 부류의 인간이 있다. 호환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의식이 끔찍한 지옥에 빠져있을 때만큼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편안함을 느꼈다.

어떤 의미로는 너무 강한 정신력이 일으킨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기둥이 부러지고 꺾인 채로도, 결코 무너져서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편해지는 것조차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옥을 인내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지금, 얼굴에 호환의 가면을 덮어쓴 유경명의 의식에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향을 끼치려는 가면의 간섭을 옆에서 누군가가 차단해버렸다. 더 이상 지옥은 없다. 방 안에 서있는 유경명의 어깨가 공포로 덜덜 떨렸다.

“안 돼. 안 돼, 안 돼. 이게 없으면 나는···!”

유경명은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긁어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딱딱한 가면에 막혔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같이 데려온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차군, 어린애 지켜. 자세빈은 검은소리.”

차대엽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아이 옆에 섰다. 시체처럼 조용하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의 유경명은 상당히 흥분해있는 상태라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곧바로 납득하고 행동을 끝낸 차대엽과 달리 자세빈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 저렇게 불안정할 때 악몽을 보여주면 악영향이···.”

거부감을 표한 이유는 자기 능력을 사용하는 데에 나름대로 규칙을 정해놨기 때문일 것이다. 악몽을 보여주는 몽마의 능력은 자칫하면 상대방의 정신에 큰 후유증을 남길지도 모르니, 확실한 적이 아니라면 조심스러운 사용이 요구된다.

그 탓에 사람들이 몽마를 괜히 두려워하는 분위기 또한 있기에, 마왕의 아들로서 자신부터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생각하겠지. 훌륭한 사고방식이었지만 이번에는 문제 없었다. 오히려 유경명을 진정시키고 대화하게 만들기 위한 조치였다.

이 남자는, 악몽 속에서만 안심해서 제정신이 된다.

“괜찮으니까 믿어.”

내가 단언하자 쯧 혀를 찬 자세빈이 덜덜 떨고 있는 유경명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접촉한 것과 동시에 방 안에 검은 음표가 쉴 새 없이 몰아치더니 이내 새까만 막으로 변했다. 나와의 순위전에서 사용한 적 있었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조금 기다리니 검은소리의 효과 영역이 완성되었다.

“뭐야.”

그리고 자세빈이 이상하다는 듯 놀라 숨을 들이켰다.

검은소리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과정은 크게 나눠 세 단계였다. 상대방과 접촉한 채로 시선을 맞추는 게 첫 번째, 효과 영역을 만들어내 상대방을 꿈 속에 빠뜨리는 게 두 번째. 그리고 그 조작한 꿈 속에서 상대방이 악몽에 잡아먹히게 만든다면 완전히 제압되어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가 된다.

그리고 지금, 자세빈이 놀란 건 능력이 발동한 그 순간 조건이 만족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자세빈이 악몽을 만들어내 꾸게 할 필요도 없이, 유경명은 8년 전부터 눈을 뜨고 있을 때도 계속해서 악몽에 짓눌려왔으니까.

생기 잃은 눈동자가 꿈 안에 갇혀있었다. 자세빈은 유경명의 꿈 속으로 들어가보려 시도했으나, 곧바로 포기하고 빠져나왔다. 자신이 들어간 꿈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건 뭐건, 유경명이 자기 혼자 꾸고 있는 악몽에는 애초에 발을 들일 수가 없을 만큼 격한 감정의 탁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검은 막이 다시 음표로 흩어져 사라졌다. 검은소리는 해제됐다. 그러면 쓰러져 기절하든 다시 눈을 뜨든 해야 할 텐데, 유경명은 초점 없는 눈동자를 뜬 상태로 계속 가만히 서있었다. 호흡만을 계속하고 있는 시체 같았다.

한 발짝 물러섰던 자세빈은 꿈이 해제되지 않는 것에 의문을 느끼고 유경명을 깨우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염동력을 발동해 자세빈의 목덜미를 잡았다.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5>

“읏!”

다음 순간 자세빈의 얼굴 앞에 유경명의 팔이 부웅 휘둘러졌다. 한 박자 늦게 몰아친 바람이 휘잉 자세빈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내 염동력에 끌어당겨진 자세빈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식은땀을 흘렸다. 반응할 수 없는 속도와 힘이었다. 맞았다면 아마 저만치 날아가 벽에 처박혔을 것이다.

사실 공격이라 말할 것조차 아니었다. 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려 할 때 조금만 더, 하고 잠꼬대로 몸을 뒤척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호환 수준의 존재라면 그런 잠꼬대조차 우리가 전력으로 맞서야 할 수준의 위협이었다.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아 하는 건가···?”

방금 휘둘러진 팔에 날아갈 뻔했는데도, 자세빈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자신의 능력으로 벌어진 일이니 원인에 짐작가는 바가 있을 것이다. 자세빈의 추측대로 유경명의 무의식은 지금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걸 거부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살고 싶지 않아 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너무 괴롭기에 꿈으로 도피하려는 게 아니다. 정확히 그 반대였다. 따르고 있던 아이들을 자기 손으로 참살했다. 영원히 악몽 속에서 고통받아야 할 자신이, 혼자서만 뻔뻔히 살아남아 현실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게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잘 해줬어. 여기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나는 자세빈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유경명의 정신을 느꼈다.

<마인드맵 개척 : 의식 제어 Lv.3>

그리고 내 의식체를 움직여 유경명의 정신과 접촉했다. 그의 의식은 커다란 검은 소용돌이에 휩싸여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사념의 폭풍이다. 자세빈이 손을 뗀 이유를 납득했다. 무방비한 의식이라면 닿는 것만으로 휩쓸려버릴 것이다.

정신 능력자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의식체의 표면에 막을 두른 뒤 내게로 오는 간섭을 차단했다. 새까만 폭풍 속을 산책하듯 걷고 있으면 고개를 떨군 채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유경명은 누더기같은 옷이 아니라 제대로 된 코트를 입고, 흐느적거리며 밑으로 흘러내리는 지금의 더벅머리와 달리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서있었다. 그리고 눈동자가 빛을 잃지 않았다. 호걸이었던 시절, 멀쩡해보이는 유경명의 자아였다.

“너는 뭐지?”

대검에 등을 기댄 유경명이 말했다. 현실의 그와는 달리 총명한 관찰력과 곧장 행동에 나설 수 있는 행동력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의식 안의 유경명은 아직도 멀쩡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선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그의 의무이기 때문이었다. 타성에 젖어서는 안 된다. 고통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이 안에서만큼은 제정신을 유지한 채로, 끊임없이 처음처럼 생생한 지옥에 괴로워하는 게 그의 속죄였다.

<우릴 죽이려고 온 거야!>

<현실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우리들을 아저씨의 마음 속에서도 죽이려고. 그런 아픈 꼴을 또 겪기는 싫은데!><아저씨, 막아줄 거지? 아니면 다시 죽도록 놔둘 거야?>

앉아있는 유경명 옆에서 속삭이고 있는 아이들은, 악령처럼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저건 여우가 유경명을 괴롭히려고 만들어낸 주술 따위가 아니다. 자신을 탓해주는 이를 원하는 유경명의 마음 자체가 스스로 만들어낸 존재들이다. 어떻게 말하면 유경명의 분신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너희가 또 죽는 건 절대로 싫다.”

성큼성큼 다가온 호걸이 등의 대검을 한 손으로 치켜든 뒤 망설임 없이 내게 내리쳤다. 남의 무의식 안에서 내가 보낸 의식체가 죽어버리면 정신에 심대한 타격이 간다. 나는 살짝 검지를 들었고, 손가락 하나로 내려친 칼날을 멈춰세웠다.

막아서는 건 뭐든지 분쇄하는 대검이 너무나 간단히 멈춰버린 것에 호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호걸이라도 자기 무의식에 남이 멋대로 찾아온 것은 처음일 테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너무 약해.”

그대로 두 손가락으로 검을 잡아 찌그러뜨렸다.

이곳은 육체적으로 강한 자가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을 개발하고 훈련한 자들이 주도권을 쥐는 곳이었다. 현실에서는 혼혈들에게 한 대 맞으면 훅 가버리는 약골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모든 혼혈들을 제치고 바로 내가 최강이었다.

‘사실 최강이어봐야 별 거 없긴 한데.’

의식 제어에 상당히 요령이 잡힌 지금, 난 당장에라도 앞에 있는 호걸을 박살낼 수 있었다. 제대로 이미지만 하면 하늘에서 트럭의 비가 내리고 땅바닥에서 기차가 솟아오르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무의식의 공간에서 몇백 번 죽어봐야 현실에선 묘한 찝찝함에 컨디션이 나빠지는 정도였다.

중요한 것은 대화였다. 무의식의 형태 자체를 스스로 바꾸게 하기 위한 설득. 그리고 내가 바라본 것은 대검을 들고 있는 호걸이 아니라, 그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악령이 된 아이들이었다. 저것이야말로 상실에 절망해 나뉘어진 유경명의 인격이자, 유경명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본체였다.

나는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연기를 너무 못해, 아저씨.”

내가 한숨을 쉬자, 유경명 곁에서 깔깔깔 웃던 아이들의 악령이 일제히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내 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정말 그 애들이 당신 보고 그런 말을 할 것 같아? 자기 멋대로 혼자 망상하면서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걔네들이 보면 명예 훼손이라고 아저씨 뺨에 싸대기를 날릴걸.”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버린 뒤, 누군가 전부 다 너 때문이라고 욕을 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의로 가득찬 환각을 만들어, 그것이 진짜라고 믿는 건 끝까지 아저씨를 믿은 아이들에 대한 모욕이었다.

<아저씨, 죽여! 지금 당장 죽여버려!>

<저딴 녀석 말은 듣지 마!>

<아파, 우리 이렇게 아프다고!>

호걸의 곁에서 속삭이는 악령들이 스스로 대검에 토막난 형체로 변하며 비명을 질렀다. 호걸은 아이들의 명령에 따라 대검을 휘둘렀지만, 나는 손가락 하나로 다 막아냈다. 이곳에서 실력행사로 입을 다물게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나는 이것도 다 아저씨 잘못이야, 아저씨가 약한 탓에, 하고 저주를 계속 퍼붓는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사실은 잘못 같은 거 안 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원념을 쏟아붓고 있는 저 아이들의 정체는, 아이들이 아니라 유경명 자신이었다.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서 모든 게 너의 잘못이라고 채찍질하는 존재를 만들었다. 내가 후, 바람을 불자 원령의 집합체가 흩어져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호걸 자신이었다.

“나쁜 놈을 못본 척 하지 않고 싸운 게, 그 아이들을 구해냈던 게 잘못일 리가 없다고. 사실은 자기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래도 정말 잘못한 건 요호라고 인정해버리면, 호걸은 또다시 검을 쥐고 달려들어버릴 테니까.”

나에게 대검을 휘두르고 있던 호걸 유경명이 축 늘어졌다. 이건 필요한 때를 위해 과거의 호걸을 그대로 무의식에 보존해둔 껍데기일 뿐. 진짜 유경명의 의식은 그 곁에서 계속 저주를 퍼붓고 있던, 눈앞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였다.

“그게 무서워서. 아무리 분하더라도 싸움을 걸면 안 된다는 걸 아니까. 전부 다 자기 탓이라고 이 악물고 가해자를 연기하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거잖아.”

무언가를 보고도 못본 척하는 걸 제일 어려워하는 이 남자에게, 오늘까지의 8년간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무릎 꿇은 유경명에게 다가가 말했다. 정세나의 부하인 흑호도, 요호의 부하인 호환도 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내 옆에서라면 싸워도 돼. 아저씨 가지고 장난 못치게 내가 막아줄게. 봤지? 가면 써도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준 거.”

요호에게 이길 수 있는 승산이 있고 말고는 관심이 없다. 환술에 조종당하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호랑이는 지금 당장이라도 여우를 향해 이빨을 내보이겠지. 유경명은 그런 남자였다. 물론, 나는 승산 없는 싸움을 할 생각이 없다.

백 퍼센트 이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줄 것이다.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유경명의 심상에 휘몰아치고 있던 새까만 폭풍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불어오기 시작한 건 붉은 바람이었다. 몇 년 동안이나 검은 소용돌이 아래에 갇혀서 나오지 못했던, 투지를 형상화한 듯한 적풍.

참 나. 이렇게나 분하면서. 8년이면 정말 많이 참은 것이다. 내가 휙 호걸의 코트를 던지자, 호환이 된 사내가 그걸 받아들었다. 나는 피눈물을 흘리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싸우자.”

그리고, 피눈물을 흘리는 그가 뭐라고 입을 열었다.

* * *

“···한솔이는?”

“몰라. 또 정체불명의 능력이라도 써서 치료든 뭐든 하고 있겠지. 분위기 보니까 상당히 오래 걸릴 것 같더만.”

거실로 나온 자세빈이 차대엽의 질문에 대답했다. 짜증나게 상황이 대단히 귀찮아졌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경명의 집 문앞에는 양복을 차려입고 있는 남자들 십수 명이 저 아래 계단까지 포위하고 있었다. 맨 앞에 서있는 웃는 얼굴의 남자는, 차대엽 뒤에 서있는 여자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공손한 얼굴로 차대엽에게 말했다.

“저희 집에서 가출한 아이라서요.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맡아주고 계셨던 거예요? 이거 뭐 따로 사례를 해야 되나.”

“아이 찾으러 온 것 치곤 인원이 많은데.”

“아, 이 분들은 심부름센터 분들이예요. 같이 그 아이 찾아다니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다들 인상이 험악하셔서 저도 처음엔 놀랐는데, 참 좋은 분들이니까 걱정 마세요.”

차대엽은 이쪽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을 보았다. 그건 도와달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짧았지만 즐거웠던 여행에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보이는 표정. 아쉽지만 납득하고 체념한 얼굴이었다. 이쪽에 사정을 말하면 폐를 끼치니까.

정말 어린애한테 짓게 해도 될 표정은 아니었다. 작게 한숨을 쉰 차대엽이 신발장에 서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래, 가족인가 보지. 호적은 있고?”

“아, 친척 아이를 맡아 기르고 있어요. 제 딸이나 마찬가지인 아이랍니다. 자. 집에 가야지. 나리야 이리 오렴?”

남자의 부름에 유경명의 집에서 살고 있던 아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앞으로 나선 순간, 자세빈이 그녀의 머리에 툭 손을 얹었고, 차대엽이 손을 들어 막아섰다.

애초에 시간이 날 때마다 폭력배들 박살내고 다니는 게 취미였던 차대엽도, 그들끼리의 항쟁을 중재하고 관리하는 게 일인 마왕성에서 자란 자세빈도. 저런 말도 안 되는 변명에 그렇군요, 하고 넘어가줄 수 있을 만큼 얼뜨기가 아니었다.

“잠깐 기다려. 맡고 있어달라 부탁받아서.”

“네? 누구한테···.”

“친구.”

차대엽이 엄지로 안쪽의 문을 가리켰다. 아마 집주인을 말하는 것일 거라 생각한 남자는, 계단에 쫙 깔려있는 남자들을 그대로 대기하도록 한 뒤 직접 얼굴 보고 우리 아이 돌봐주셔서 고맙다고 감사라도 표하겠다며 안에 들어오려 했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자세빈이 피식 웃으며 막아섰다.

“뭡니까?”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라 부탁받아서.”

“누구한테.”

“알 거 없고. 밖으로 꺼져.”

무례한 걸 넘어서 어이가 없는 대답에 남자가 벙쪄 입을 벌렸다. 휙 옆을 쳐다보면 차대엽은 나랑은 관계 없는 일이라는 듯 아이를 지키고 서있었다. 정면에서는 놀리는 기 가득한 얼굴로 보라빛 머리의 청년이 조롱하듯 크크큭 웃어댔다.

“이것들이 장난하나···.”

공손하게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대엽과 자세빈이 눈빛을 교환하고, 몸을 움직일 준비를 끝냈다.

< 송하맹호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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