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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57화 (57/113)

< 송하맹호 (4) >

양복을 입은 남자는 꿀꺽 침을 삼켰다.

사실 그들은 아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지는 않았다. 자신들을 심부름센터라 소개한 건 거짓말이 아니고, 그들은 다른 조직에서 외주를 받아 활동하는 소규모 팀이었다.

자기 식구들을 직접 움직여 덜미가 잡히기 싫은 이들에게 합리적 가격으로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번 건 또한 조직에서 도주했다는 아이의 추적과 회수를 의뢰받았다.

사실 목표인 아이의 위치는 한참 전에 특정이 끝나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돌입하지 않은 건 이 조직 저 조직 사이를 옮겨다니며 여태껏 살아남아온 남자의 조심성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이상한 수준의 착수금. 남자는 그것에 이게 웬 횡재야 하고 만세를 하기보단 이쪽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의심부터 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의뢰를 넣은 조직의 최근 동향과, 아이의 과거 및 주변을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알아낸 결과는 놀라웠다.

조직에서 회수해오라 의뢰한 아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잡혈인 아이에게 돌연변이로 발현된 능력은 약물 배합. 잘 개발만 시키면 여러 포션을 만들어 파는 정도가 아니라, 독점적인 마약 루트를 개척해 떼돈을 버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말도 안 되게 커다란 착수금의 의미 또한 알게 되었다. 이건 이른바 입 조심하고 괜한 욕심 부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타겟인 아이의 능력에는 의뢰 따위 집어치우고 자신들이 빼돌려 잠적하고 싶을 정도의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런 모험에 목숨을 거는 것도 좋지만, 남자는 어디까지나 안전주의였다. 착수금이 이 정도라면 성공했을 때의 성과금은 더욱 커다랄 것이다. 무엇보다 패권을 쥐게 될 조직에게 신용할 수 있는 심부름꾼으로서 미리 라인을 대놓을 수 있다.

클라이언트가 대단히 깔끔하다고 만족할 만한 일처리를 해야 했다. 위치를 특정한 남자는 아이의 주변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어딘가에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기미가 보인다면 곧장 신고해야 할 테지만, 딱히 그런 생각은 없어보였다.

신경쓰이는 것은 아이와 함께 지내는 음침한 멀대였다.

무슨 거적떼기 같은 것을 걸치고 있는 장신의 사내. 동네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한심한 인간 정도로 비춰지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름대로 뒤쪽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남자는 눈을 보자마자 알았다.

저 인간은 위험하다고. 자기 손으로 사람 몇 명쯤은 담가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표정이나 몸짓이 곳곳에서 묻어나왔다. 어디서 칼 쓰는 노릇이라도 하다 손을 씻은 거겠지.

접근 방법을 잘못 골랐다가 사건으로 번지거나 다른 기관의 개입을 받게 되면 낭패였다. 굳이 독촉하지 않는 것만 봐도, 의뢰한 조직은 최대한 조용하고 깔끔하게 처리하기를 원한다. 그러니 한 달 동안 여러 가지 준비를 끝내놓았다.

거인 명분과 날조된 증거들, 동네에 흘린 헛소문들을 점검하고. 여차할 땐 실력행사로 나설 수 있도록 잘 싸우는 애들을 끌고 왔다. 사실 남자가 저항하는 걸 기대하기도 했다.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얌전하게 이송시키기 위해선 도망쳐봐야 소용없다는 걸 학습시키는 게 제일 좋다. 그래서 아이가 생활하고 있는 집에 다른 젊은 학생들 몇 명이 있는 걸 보고 이것 참 잘 됐다 싶었다.

아이의 반환을 거부하면 거부하는 대로 본보기를 보일 수 있어 좋고, 순순히 넘겨주면 넘겨주는 대로 아이에게 자길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불신감을 각인시킬 수 있다.

그리고 교복을 입은 두 명의 청년은 당연하다는 듯 아이를 보내는 걸 거부했다. 이상한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어떻게···.”

남자가 계단 아래 마당에서 싸우는 차대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 큰 어른들 몇 명이 포위해 달려드는데도 상처 하나 낼 수가 없다. 든든한 정예들이 단 한 번의 공격도 맞추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박살났다. 차대엽이 조용하게 말했다.

“너흰 운이 좋아.”

어린애 앞에서 피 튀기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오로지 맨손으로만 상대해주고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쯤 이곳에는 참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또다시 달려든 조직원이 힘의 흐름을 교묘히 유도한 기술에 땅바닥에 처박혔다.

“신났군 아주.”

그리고 자세빈은 앉아있는 남자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어두었다. 남자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움직이지 마라, 그렇게 한 마디 들었을 뿐인데 몸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 기사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혈통능력을 완벽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끼익, 문을 열고 또 다른 학생이 걸어나왔다. 그 뒤에 따라나온 건 자신이 관찰해왔던 바로 그 장신의 사내였다.

그런데 무언가가 다르다. 시체같던 분위기와 달리, 지금의 남자에겐 마주한 것만으로 숨이 가빠질 만한 위압감과 패기가 있었다. 뒷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천적. 절대로 이 자에게 반항하면 안 된다고 온몸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방 안에서 나온 학생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또 무슨 난장판이야. 뭔데 이거.”

“자기들이 꼬맹이 가족이라더군.”

“뭔 헛소리야?”

방에서 나온 송한솔과 유경명이 자세빈에게 묶여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진짜냐고 묻는 눈빛 뒤에 거대한 호랑이가 자신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식은땀 범벅이 된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착수금이고 프로의식이고, 이 남자 앞에서 거짓을 고했다간 반드시 들킨다.

“저희는 그, 다른 곳에서 데려오란 명령을 받아서···.”

유경명이 한 번 노려본 것만으로 얼굴이 쭈글거리게 변한 남자는, 조잘조잘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떠들었다.

* * *

심부름센터 소속이라는 남자는 자신들을 고용한 조직의 이름과 위치, 자신이 추측한 아이의 능력까지 전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술술 말해주었다. 아마 유경명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조직을 통째로 짓뭉개어, 그때마다 산군으로서 호걸의 위세는 점점 강해져갔다. 적이라면 마주하는 순간 압도된다.

지금까지는 상대방에게 위협하는 것 자체를 극도로 꺼린 탓에 눈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살았지만, 내면의 투지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지금 산군으로서의 위압감 또한 안쪽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세빈이 짜릿하다는 듯 웃었다.

“피부가 다 찌릿대는군. 이게 내가 알던 호걸이지.”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어.”

일행은 남자가 알려준 조직의 본거지에 와있었다. 전에 있던 곳이 맞냐는 질문에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 없이 정문 앞에 선 유경명은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이것은 하나의 시험이었다. 이전과 같이 뭉개버리고 싶은 놈들 앞에서, 이전과 같이 등에 대검을 매고 있다. 자신은 과연 저주를 떨쳐내고 대검을 쥐어 휘두를 수 있을까.

유경명이 살짝 뒤쪽의 송한솔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이.”

“네, 네. 잘 보고 있어요.”

자전거를 처음 타는 인간이 뒤에서 잡아주는 사람한테 잘 붙잡고 있으라 확인하는 것처럼, 유경명은 몇 번이고 송한솔에게 무슨 일 없게 정신을 잘 붙잡아달라 부탁했다. 송한솔이 제정신을 유지시켜주고 있다면, 자신은 싸울 수 있다.

그리고 쉬익, 하고 호걸의 팔이 채찍처럼 움직였다.

다음 순간. 콰앙! 하는 폭음과 함께 철로 되어있는 문이 통째로 찌그러지며 날아갔다. 가볍게 내지른 참격의 위력에 자세빈도 차대엽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게 호걸 유경명의 방식이었다. 빙 돌아서 가거나 몰래 잠입하는 일 없이, 잘못한 것은 너희들이라고 정면에서 돌파한다.

송한솔이 잘 했다는 듯 짝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마인드맵 확장 : 초감각 Lv.5>

그리고 문 안쪽에 발을 내딛었을 때, 송한솔은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감각을 느꼈다. 곧바로 차대엽을 염동력으로 멈춰세운다. 차대엽은 놀라면서도 곧장 다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차대엽이 있었어야 할 자리에 순식간에 여덟 개의 참격이 박혔다. 콰앙 땅바닥이 파이는 것과 함께 참격이 스친 차대엽의 몸에서 피갸 흘렀다. 검귀의 피부를 아무렇지 않게 잘라낼 만큼 날카롭게 벼려진 마력이 검을 감싸고 있다.

“이거 참···. 그걸 피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온 침입자를 반응할 틈도 없이 토막내기 위한 기습. 면도하지 않은 듯 듬성듬성 수염이 나있는 남자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아쉽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휙 발을 굴리자 천장 위에 딱 붙어있던 몸이 바닥에 착지했다.

“댁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출입증 없이 들어온 녀석은 전부 죽여버리란 게 명령이거든. 뭐어, 나도 그리 일을 열심히 할 생각은 없으니까, 지금 돌아가면 놓친 척 해줄게?”

느긋한 목소리의 남자에게 자세빈이 코웃음쳤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군. 네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우릴 죽일 수 있기라도 하다는 거냐?”

“아마 그럴 거야. 난 조금 비싼 몸이거든. 상식적으로 이런 조직에서 내 몸값을 낸다는 건 말이 안 될 만큼.”

그리고 남자가 휙, 멀리서 얇은 칼날을 휘두르자 전혀 다른 궤도에서 들어온 참격이 자세빈의 어깨를 베었다. 큭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부여잡은 자세빈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옆에서 본 차대엽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귀안으로 읽어내도 제때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동작의 속도가 압도적이었다.

“애초에 꼬꼬마들이 이런 데 오는 게 아니예요. 뭐, 내가 그 나이일 때도 뒷세계에서 한창 날리긴 했다만. 오늘은 좋은 경험 했다 치고 돌아가. 거기서 한 발짝 더 움직이면 죽일 수밖에 없어. 일단 돈을 받은 만큼은 일을 해줘야 하거든.”

그리고 유경명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남자가 참 유감이라는 듯 쩝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형씨, 듣는 귀가 안 좋구만. 어린애들 대신 몸소 토막나서 도망쳐야 된다고 알려주겠단 건가? 그러면 바라는 대로.”

“······.”

“안녕히 가셔···!”

출입문을 지키는 남자가 순간적으로 도를 휘두른 순간, 총합 열여섯으로 나뉘어진 참격이 전후좌우에서 유경명을 급습했다. 하나하나가 차대엽의 방어를 가볍게 찢어버리는 예리함을 지닌 참격이다. 그리고 유경명이 몸에 꽈악 힘을 주었다.

호신강기(虎身罡氣).

호걸의 몸 주변에 마력의 막이 확산되고, 그것만으로 모든 참격이 증발해 흩어졌다. 보고 있던 우리만이 아니라 상대인 남자조차 상황을 순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리고 유경명은 나른한 몸짓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를 무감정하게 내려다보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남자는 다음 참격을 준비했지만, 코앞에 선 유경명은 손으로 칼자루를 눌러 빼지 못하게 막았다.

“···그때만 해도 넷이 한계였던 게 열여섯까지 늘어났나. 뼈를 깎으며 노력한 모양이군, 8년 동안.”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말에 남자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가 유경명을 바라보았다. 힘을 잃고 흐느적거리는 머리와, 퇴폐함까지 느껴지는 어두운 표정. 자신이 아는 그 남자와는 전혀 달랐지만, 그 코트의 모양만은 기억에 있다.

“···호걸?”

“하지만 내가 너를 놓아준 건 사람을 더 이상 죽이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을 텐데. 약속을 어겼군.”

그 말에 드디어 확신을 가졌는지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입꼬리를 떨며 미친 듯이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흐하······흐하하하! 정말로! 정말 호걸이야! 이런 구석진 데서 재미없게 시간이나 죽여야 되나 싶었는데, 당신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나다니!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건가!”

유경명의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아까까지의 느긋해보였던 인상은 어디로 가고 출입문을 지키는 남자는 귀기를 흘리며 온몸의 마력을 갈무리했다. 지금까지는 정말로 시간 떼우기용 놀이 그 이상이 아니었다는 걸 실시간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한 발짝 크게 뛰어 뒤로 물러난 남자가 말했다.

“그때 박살났던 코찔찔이하고는 달라···! 지금은 청부업자 사천왕 중 하나, ‘사신’이라 불리고 있지. 이게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니라,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단련해온 검이다!”

전력을 다해 내질러진 거합의 참격은, 각기 다른 좌표에 재구현되어 읽어낼 수 없는 궤도로 유경명을 향해 쇄도했다. 타고난 혈통능력과 극도로 단련한 검기, 완벽한 마력 제어. 그 모두를 조율하는 센스가 어우러진 기술의 극치였다.

“일섬만화경!”

최종적으로 분열한 참수의 칼날은 열여섯을 넘어 스물넷. 그리고 호걸에게 그런 세련된 기술에 맞설 만한 재주는 없다. 맹호의 강기를 눌러담은 대검을, 단순히 횡으로 휘두른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너무나 압도적인 위력의 차이에, 스물넷의 참격이 여파만으로 모두 증발한다.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휘둘러진 강기의 검은 폭풍과도 같은 폭력이 되어 남자에게 작렬하고, 앞쪽의 모든 걸 모조리 부숴버렸다. 우르르 잔해가 떨어져 1층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자신의 의지로 검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에 무언가 감상이 있었던 건지, 유경명이 손에 든 대검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다시 고개를 든 그가 앞쪽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지하에서 냄새가 나는군.”

그리고 폐허 어딘가에 멈춰 서서 발길질을 하자, 바닥이 내려앉으며 숨겨져있던 계단이 나타났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건지. 무슨 고인물이 게임 하는 거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앞장 서서 내려가는 유경명이 빨리 따라오라 재촉했다.

“승차감 좋네.”

송한솔은 어깨를 으쓱이고 아저씨를 따라갔다.

< 송하맹호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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