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58화 (58/113)

< 송하맹호 (5) >

호신강기(虎身罡氣).

범의 몸에서 솟아나는 기운. 그것은 산군의 혼혈 중 일부만이 지니고 있는 혈통능력으로, 공방일체의 투기를 자신의 몸과 무기에 둘러 내구력과 위력을 향상시키는 기술이었다.

강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마력을 연료로 불태우는 범의 투기는 육안으로 판별할 수 있는 빛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 때문에 감지능력이 떨어지는 상대도 사용자가 지금 몸에 강기를 두르고 있는지 아닌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결점이라곤 그 정도 뿐이었다. 잘 다듬어진 투기로 덮여있는 신체는 웬만한 칼 따윈 박히지도 않고, 산군 혼혈의 괴력으로 강기와 함께 내리꽂히는 검격은 한 방 한 방이 결정타에 가까운 위력이 된다. 마력의 연비 또한 대단히 좋았다.

근접전에만 특화된 능력이 아니라, 여차할 때에는 무기를 매개로 단숨에 투기를 방출해 전방위 공격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우직하고 단순한 능력이지만, 알기 쉬운 강력함이란 면에서는 신검을 사용하는 검귀보다 한 수 위에 있었다.

그리고 호걸 유경명은 혈통시대의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호신강기 사용자였다. 걸어다니는 마력 탱크 수준의 마력량을 보유하고 있는 그는, 평범한 산군 혼혈들과 달리 끌어모은 투기를 공격 한 방 한 방에 그대로 전부 방출한다.

그 결과 대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 앞은 투기의 폭풍에 통째로 박살이 나버린다. 자기가 마법사도 아닌데 화력 싸움에서 마법사를 압도해버리는 반칙 같은 인물이었다. 날뛰어서 건물 하나를 반파시키는 것쯤은 몇 분이면 충분하다.

몸의 튼튼함은 말할 것도 없다. 멀쩡히 돌아가는 조직에 정면으로 들어가 시비를 걸어도 전부 박살내고 걸어나올 수 있는 묵직한 강함. 유경명의 공격 한 번에 십수 명이 쓸려나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일행은 싸울 기회조차 없었다.

침입자를 알아챈 간부들이 조직원들을 불러모을 새도 없이, 그 불러모을 인간들을 다 박살내고 안쪽에 도착했다. 초토화된 사무실에서 유경명이 능숙하게 자료들을 훑어보았다.

호걸로서 활동하는 것은 정말로 몇 년 만인데도 실전감각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오히려 투기의 운용법은 몇 단계나 수준이 올라가있었다. 호환으로서 일할 때마다 폭력배들이 따위로 보일 정도로 흉악하고 강대한 것들과 싸워왔으니까.

사실 직접 싸우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재활 겸해서 적에 맞서는 척이라도 해보라고 데려온 건데 완전히 원맨쇼가 되어있었다.. 사실 검을 쥘 준비는 훨씬 예전에 끝내놓았고, 단지 무언가가 바뀔 계기만을 기다려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위화감이 있군.”

서랍 안의 서류를 살펴보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입구에 배치돼있던 놈에 비해서 규모에서도 조직력에서도 수준이 너무 떨어져. 혹시라도 잔챙이들이 실수하지 않게 누군가가 일부러 호위 겸 감시역을 붙여줬다는 느낌이다.”

그 말에 차대엽과 자세빈 두 사람이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걸의 일격으로 박살난 탓에 왠지 약골처럼 보였지만, 차대엽이 그 강함을 느끼고 소름이 끼쳐할 만한 강적이었다. 팔짱을 낀 자세빈이 콧숨을 내쉬며 말했다.

“입구에 있던 그 검사, 뒤쪽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남자다. 나도 이름을 들을 때까진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무리 뒤쪽에서 활동하는 인간들의 정보에 정통한 마왕성의 후계자라고 해도, 얼굴 전부를 기억해두지는 못한다.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런 데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차대엽을 가볍게 베어버리는 실력, 눈에 보이지 않는 특이한 참격과 기교를 보면 실물인 것은 확실했다.

“사신이라고 웃기는 이름을 자칭하는 게 허세로 들리지 않을 만큼은 실력이 보증돼있어. 돈만 제대로 챙겨주면 누구의 의뢰라도 받지만, 재산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 돈은 전부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드는 데에 투자한다고 하지.”

다만 기분파인 데다가, 붙잡아야 할 적을 잘게 토막내놓고 미안하니 돈은 안 줘도 된다 사과하는 일이 다반사인 탓에 고용주들은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쓰지 않는 곳에서는 은밀히 고용되어 활약하고 있다나.

방의 금고를 아무렇지 않게 뜯어서 연 유경명이 장부를 거칠게 넘겨보았다. 그리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떤 연구소에서 정기적으로 후원을 받고 있다. 명목상으로는 조사용역에 대한 필요 경비와 대금 지불이군.”

조직에서 연구소 쪽을 후원하는 게 아니라, 연구소 쪽에서 의문의 금액을 입금해주고 있다. 충분히 의심스러운 정황이었다. 호위도 연구소 쪽에서 붙여줬을 가능성이 있었다. 업체명을 확인한 자세빈이 어딘가에 연락을 넣자 답변이 왔다.

“이혈에 대한 연구를 하는 곳이라고 하는군. 제대로 된 연구소로서 소규모지만 상당히 실적이 있는 곳인 모양이야.”

이혈(異血).

대부분의 잡혈들은 부딪힌 혈통끼리 중화되어 신체능력도 약하고, 아무리 단련해도 혈통능력이 발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몸이 약한 건 양반이고 기형으로 태어나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도 가끔씩 태어나버리곤 하는 것이다.

기존과는 전혀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거나, 두 가지 이상의 혈통의 장점만이 융합된 케이스. 아닌 게 아니라 현존하는 기사들의 톱에 서있는 최강자 ‘용사’ 또한 잡혈이었다.

그렇게 무언가 예외로서 특기할 만한 점이 있는 경우를 이혈이라 불렀다. 업계에서 편의상 쓰는 표현일 뿐 정식 명칭은 아니다. 진소란처럼 잡혈이 아닌 순수한 돌연변이에게도 대충 평범하지 않고 특이하다 싶으면 갖다 붙이는 말이었다.

자세빈의 말에 유경명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연구소에서 지속적으로 돈을 입금해주는 이유. 조직이 표본이 될 소체를 찾아 연구소에 공급하고 있다? 그것도 충분히 있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사건의 정황은 그 반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즉 조직이 연구소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설의 아이를 이쪽에서 맡고 있었던 건가.”

소체가 된 아이를 조직에 보내, 조직은 그 능력이 쓸모가 있는지 확인하고 실제 전력으로 사용한다. 연구소에서는 소체의 검증을 겸해서 정기적인 관찰 보고를 받는다. 아마 이곳만이 아니라 온갖 곳에서 비슷한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짓을 했다간 돈이 남아나질 않을 텐데.”

“그런 쪽 문제는 웬만해서 없을걸. 부자 늙은이들한테서 돈을 갈퀴로 쓸어담고 있는 모양이야. 보아하니 만병통치약이라든가, 몸을 젊어지게 해준다는가 하는 사기를 쳤겠지. 임상 따위 당연히 안 거쳤어도 절실한 놈들은 있는 법이니.”

자세빈이 비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이런 뒤가 구린 곳들의 모양새는 대충 알고 있었다. 엄청난 신약을 만들었다 떠들지만 아무리 잘 쳐줘도 미신에 까딱하면 위험한 약물 범벅. 후원자들의 비밀스러운 모임에선 사이비같은 의식을 치르며, 정말 효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혐오스러운 치들.

“그런 거라면 최대한 조심스레 회수하려던 이유도 알겠군. 잠깐 빌려서 맡아둔 아이를 잠깐이라도 잃어버렸단 말이 돌면, 신용이고 뭐고 관계 자체가 끊겨버릴 테니까.”

자세빈이 한심한 이야기라는 듯 쯧 혀를 찼다. 하지만 그 표정과 대조적으로 송한솔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이 연구소에 대해서는 물어볼 것도 없이 알고 있었다. 자세빈의 추측은 대부분 맞았지만,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었다. 이곳의 후원자들은 이상한 미신에 빠지거나 가짜 연구 결과에 속은 멍청이들이 아니다. 이혈을 연구하는 연구소의 주인은, 정말로 병을 고쳐주고 정말로 젊어지게 만들어준다.

부작용은 있지만, 한정적으로나마 생명의 형태를 조작하는 능력. 한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두억시니.’

후천적으로 탈선한 인간들을 모으고 있는 이무기와, 선천적으로 이혈인 인간들을 모으고 있는 두억시니. 아무 데나 툭 찔러보면 사실 흑막과 연관돼있는 쓰레기 세계관답게, 이곳 또한 몇 다리 걸쳐 뒤에 대요괴가 버티고 있는 곳이었다.

사무실 안의 조사를 끝낸 유경명이 자료들을 취합한 뒤, 송한솔은 기둥에 등을 대고 서있는 자세빈을 돌아보았다.

“자세빈.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 네가 수습해줄 수 있어? 바깥에 전해져서 소란이 커지지 않게.”

호걸은 전혀 힘조절 없이 날뛰었다. 이미 엄청난 폭음에 주변에서는 무슨 사고라도 났나 살펴보는 인간들이 왔을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요구에 자세빈이 눈썹을 찌푸렸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시비나 좀 걸고 만 거면 몰라, 이미 건물 안은 난장판에 자료란 자료는 다 봐버렸다. 입막음하려면 아버지의 이름이라도 대고 직접 나서야 할 텐데, 거기까지 너한테 도움을 줄 의리도 명분도 없어.”

자세빈은 곧바로 거절했다. 괜히 나의 도움을 받고 싶으면 조건이 있다 요구하려고 비싸게 구는 것이 아니었다.

마왕의 아들이라는 것을 긍지로 여기는 자세빈은, 괜히 잘난 척을 할 때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대는 건 전혀 개의치 않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받거나 의지하는 건 극도로 꺼렸다. 그것 자체가 마왕의 아들로서 품위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냉정한 거절에 옆에 있던 아이가 자세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싸우는 거냐고 묻는 듯한 눈이었다. 자세빈은 그 시선이 불편한 듯 살짝 입술을 씹었지만 자기 의견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송한솔이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휙 던졌다.

“이게 뭐지?”

“뇌물.”

송한솔이 물건을 받아든 자세빈에게 말했다. 그것은 반지를 보관할 때 쓰는 것 같은 자그마한 상자였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받아든 자세빈은, 상자 안에 있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확인하고서 순간 눈을 빛냈다. 그리고 다시 상자를 닫았다.

“드디어 내 손에 왔나.”

살짝 눈을 감고 상자를 꼭 쥔 채 주먹을 부르르 떤 자세빈은,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휙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 한 번 뿐이다. 다음은 없어.”

송한솔이 자세빈에게 척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곧장 핸드폰을 잡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깥에서 일이 커지지 않게 입막음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번 사건의 내막 또한 공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단순히 이권을 놓고 싸운 조직 간의 흔해빠진 항쟁으로.

“네, 선배. 부탁할 일이 좀 있어서요.”

사정을 이야기하자 곧바로 이쪽으로 향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배은호는 적풍회에 방문한 날 이후로 더욱 고분고분해진 것 같았다. 건물을 난장판으로 만든 원흉은, 호랑이굴의 비밀병기인 의문의 전투원 맹호 정도로 해두면 될 것이다.

전화를 끊자, 눈앞에 알림창이 주르륵 떠올랐다.

<퀘스트 완료 : 호환을 아군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보상 : 20,000 Credit, 염동 방출 Lv.1>

<추가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착란 극복 : 10,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희생자 없음 : 5,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송한솔이 알림창을 확인하고 보상을 받았다. 이 퀘스트는 설득을 끝내고 요호를 사냥하러 갈 때나 완료될 줄 알았는데, 지금 같이 돌아다닌 걸로 조건 달성이 된 모양이었다. 이걸로 적풍회와의 약속도 달성했고, 강력한 조력자도 한 명 얻었다. 대요괴를 치우기 위한 준비에 한 발짝 가까워졌다.

그리고 유경명이 잠깐 송한솔을 따로 불러냈다.

“···아마 너는 고요의 부탁을 받고 날 찾아온 거겠지.”

“잘 아시네. 부탁은 아니고 내가 아저씨 고쳐주겠다 호언장담한 거긴 한데. 아저씨 없으면 이길 각이 안 나와서.”

송한솔의 말에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본 사이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대단히 염치가 없지만··· 혹시 저 아이를 맡아줄 수 있나. 갈 곳이 없을 거야.”

애초에 이름도 모르는 얄팍한 사이다.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인 폐인이었던 유경명의 집에, 있을 곳이 없던 아이가 멋대로 눌러앉아 살고 있던 것일 뿐이다. 좀 더 제대로 된 환경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쪽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진중한 표정에, 송한솔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갈 곳 있는 것 같은데.”

송한솔이 턱짓하며 가리킨 쪽에선, 아이가 유경명의 코트 끝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했던 듯 유경명이 흠칫 놀랐다. 올려다보는 아이가 걱정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 혼자 두면 걱정돼.”

“······.”

“그래도 이제 괜찮은 거야?”

그 말에 유경명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유경명은 자신이 누군가를 돌봐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였다. 애초에 돌봐주고 있던 쪽은 자신이 아니다. 아이는 처음부터 지낼 곳이 없어서 유경명의 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서있는 아저씨가 걱정돼서 지켜보고 있던 것일 뿐이었다.

고장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유경명의 방에 몇 분마다 들어와 힐끔힐끔 상태를 살핀 것도, 할 일이 없으면 바깥에서 쓰레기라도 줍고 오라 말해준 것도. 데리러 온 사람들이 왔을 때 걱정되는 표정으로 유경명의 방 쪽을 쳐다본 것도.

가만히 놔두면 큰일이 날 것 같은 한심한 남자를, 자기도 힘든 상황인 아이가 무리해서 돌봐줬던 것일 뿐이었다.

“괜찮은 거지?”

아이가 이렇게 물을 때마다, 유경명은 죽은 눈동자로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괜찮지 않다는 걸 알고 계속 유경명의 곁에 있었지만, 이번에 대답한다면 정말로 납득하고 떠날 수 있겠지.

입을 달싹이던 유경명이 가까스로 짜내듯 말했다.

“그래. 이제 괜찮아.”

“그러면, 같이 마트 가줘.”

아이가 유경명의 코트 끝자락을 더 꽉 잡았다.

“카드만 주지 말고 둘이서 같이 가. 동물 그려진 컵 사고 싶어. 쓰고 버리는 나무젓가락 말고 진짜 수저도. 치약도 안 매운 거 사줘. 아저씨 방도 깨끗하게 청소해줘···.”

아이의 목소리는 살짝 화가 나있었다. 유경명이 가까스로 그걸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말하는 이치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이가 자신을 돌봐주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이 아이를 돌봐주어야 한다. 그것을 남에게 떠넘기려고 하는 것은 책임의 방기였다. 아이는 자신을 에둘러 혼내고 있었다.

유경명은 눈을 감은채 과연 그렇다 수긍하고,

“그렇게 하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수긍의 대답을 했다. 멍한 표정의 여자아이가 살짝이나마 기쁜 듯 웃었다. 송한솔은 폐허가 된 건물 속 잔해 위에 앉아 잘 됐네 잘 됐어, 하고 손뼉을 두드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이 유경명에게 말했다.

“아저씨, 어차피 요리도 못하지? 배달만 시켜먹으면 안 좋으니까 나한테 배워. 좋은 스승님이 있거든.”

밥이랑 김치만 먹일까봐 걱정된다, 하는 건 핑계고, 배움을 청하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조금은 그 말도 안 되는 깐깐함과 엄격함이 누그러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 * *

나는 책상에 엎드려 오랜만의 평화를 만끽했다.

세한의 빡빡한 수업 스케줄도 오히려 포상처럼 느껴졌다. 정세나에게 납치된 뒤로 참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겨우 괴물 같은 요괴 사이드에서 벗어나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모습을 숨긴 요호가 당장 움직일 리는 없고, 이쪽도 이런저런 준비나 조율을 끝내려면 몇 달은 있어야 할 터였다.

‘여름방학이 베스트야.’

나는 책상에 늘어진 채 머릿속으로 다음 사건들을 생각했다. 그런데 엎드린 눈가에 부드럽게 비치는 햇빛이 비쳤다 말았다가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내 앞에서 금예린이 부채를 햇빛에 접었다 폈다 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뭐하냐.”

“이러면 신경쓰여 일어나실까 해서.”

내가 눈만 들어 올려다보자 금예린이 대답했다. 자는 것 같으면 그냥 어깨 흔들어서 깨우면 되지 참 멀리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용건을 말해보라 했다. 탁, 하고 부채를 접은 금예린이 이쪽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이번 주말,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시간 내서 어딜 가자는 건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귀를 쫑긋댄 금예린이 내민 건, 멋들어진 국화 모양이 그려진 편지봉투에 담겨있는 금가의 정식 초대장이었다.

< 송하맹호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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