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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59화 (59/113)

< 금예황국 (1) >

주말의 오후, 나는 연회의 한복판에 앉아있었다.

목조 가마처럼 꾸며진 기묘한 디자인의 자동차가 캠퍼스 정문까지 마중을 나와, 나와 금예린을 태우고 출발한 것이 아침 열 시. 나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장로와 할 이야기에 대해 생각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상상한 것과 상당히 달랐다.

금가의 대저택엔 여우 혼혈 뿐만 아니라 다른 혼혈들도 상당수 섞여있었다. 혼혈이고 뭐고를 따지기 이전에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미묘한 것들도 함께 앉아있었다. 저 멀리선 아예 두 발로 선 자그마한 짚단 인형들이 탬버린을 흔들었다.

“그러면 저 금양호, 한 곡 뽑습니다. ‘금잔화’.”

와아아아아! 노인이 분위기를 잡으며 마이크를 쥐자, 술을 마시며 연회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연회장 안을 비추고, 노래방 기계에서 트로트 반주가 흘러나온다. 지금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생쇼를 하고 있는 저 노인이 바로 금가의 1장로였다.

나는 상에 놓인 산적 꼬치를 집어들어 먹었다. 사실 이 자리는 좀 더 가라앉은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배신자를 잡아내 내부 숙청을 끝낸 것이니, 이렇게 어수선하게 다같이 잔치를 벌이면서 축하할 만한 안건은 아닌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긴 한데.’

개인적으로도 우중충한 것보다는 떠들썩한 편을 좋아하기도 했다. 나는 옆에서 술을 따라주려는 아저씨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사양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나는 제대로 금가의 평소 모습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혈통시대에서 금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건 전부 강시가 되고 난 다음이니까.

완전히 취해 얼굴이 새빨개진 장로는 노래를 부른다기보단 괴성을 지르며 2절부터는 아예 노래도 안 부르고 마이크를 쥐고 춤만 췄다. 몇몇 사람은 흥에 취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에 난입해 장로와 함께 반주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아아. 정말 참···.”

주최석에 앉아있는 금예린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하다는 듯 침통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주었다. 보기 좋기만 하구만 왜. 이내 무대에서 내려온 1장로가 내 쪽의 테이블에 다가와 술병을 들었다.

“하하하! 송 대인, 즐기고 계십니까?”

“편하게 불러도 돼.”

“기쁜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그럼 한솔 군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봐, 금태식이. 여긴 내 자리니까 어디로든 가봐!”

그리고 1장로가 내 옆에 앉아있던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고 저리 가라 휘휘 손을 저었다. 옆에서 같이 떠들던 남자는 빌어먹을 늙은이, 하고 욕했지만 순순히 비켜 다른 테이블을 찾아갔다.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은 1장로가 미소지었다.

“한솔 군, 예린님이 어울려주지 않아서 섭섭하신지요?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당주인 예린님은 잔치의 책임자로서 이것저것 지시하고 조율할 것들이 산더미니까요.”

“당신은 안 도와주나?”

“평소에 뼈 빠지게 일하는데 오늘 정도는 놀아야지요!”

잔치를 대단히 좋아하는 듯했다. 1장로는 늙었는데도 아주 팔팔했다.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린 노인은, 오장육부에 스며든다는 듯 입으로 크으 소리를 내며 잔을 쿵 내려놓았다.

“한솔 군도 많이 드십시오. 이곳은 살아서 즐겁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우리 은인인 한솔 군에게 감사의 박수를!”

노인이 손을 번쩍 들자, 주변 사람들이 짝짝짝 박수를 보냈다. 박수소리가 멎음과 동시에 장로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한 자리니까요. 즐기지 못하면 손해입니다. 저희 식구들만 잔뜩 있어 불편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다 이런 식으로 얼굴을 익혀가며 친해지는 것이니까요.”

다른 장로를 숙청했든 말든, 불행보다는 행복에, 큰일 날 뻔했던 위기를 피해 금가가 멀쩡히 살아남았단 행운에 기뻐하자. 그건 그것대로 긍정적이고 훌륭한 마음가짐이었지만, 평범한 감성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뭐야?”

나는 이전부터 신경쓰이던 것을 물어보았다. 구석의 테이블엔 밥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갑옷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옷인데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좋은 점에 주목하셨군요. 저들은 주술이 깃든 무기, 주구와 융합한 금가의 전사들이죠. 살짝 실험이 실패해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만···전력의 증강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사자들도 상당히 만족하고 있죠.”

갑옷 인간들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의 형체가 아닌 이형들이 여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그런 것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말하는 짚신 인형과 여우 여자가 사이 좋게 떠들고 있다. 누가 보면 백귀야행이라 착각할 만한 광경이었다.

“이봐, 그걸 가져오게!”

그러자 일꾼들이 항아리처럼 커다란 병 하나를 가져왔다. 거대한 산삼 비슷한 식물이 안에 들어가있는 유리병은, 꿀처럼 농밀한 황금색 액체가 가득 차있었다. 장로와 일꾼들은 금빛 음료를 몇 번이고 잔에 따라 다른 테이블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도 가득 채워 잔을 넘겼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장로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주술로 빚어낸 물건입니다.”

손에 든 잔 가득히 담긴 금빛 액체에 내 얼굴이 비쳤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욕구를 더욱 크게 만들죠. 속고 속이는 게 일상인 금가의 인간들이, 잔치에서만큼은 솔직해지기 위해 마십니다.”

장로가 능숙하게 자리의 분위기를 잡고 잔을 들어올리자, 건배사와 함께 연회장에 있는 자들이 다같이 황금빛 음료를 마셨다. 나도 빼지 않고 같이 건배해서 잔을 비웠다. 확실히 정신에 은은한 수준의 영향력이 미치는 게 느껴졌다.

”뭔가 거짓말하기 싫어지지요. 그래봐야 강제력 따위는 없고, 보통 술보다 더 기분이 고취되는 수준일 뿐입니다만.”

그야 애초에 그런 게 가능했다면 다른 장로가 배신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을 리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장로가 계속해서 주는 잔을 쭉쭉 받아 들이키자, 이쪽 테이블에 사내들이 다가와 형씨 거 참 시원하게 마신다며 어깨동무를 해왔다.

“얕봤는데 안 되겠구만, 오늘 죽어보자고! 한 잔 받아!”

“이 버릇없는 놈, 손님한테 그게 무슨 예절이냐?”

“뭐야 할아범, 남자의 대화에 끼어들지 마!”

“제대로 죽어버리도록 섞어서 드려야지 이놈아!”

“아하, 그렇구만! 와하하하!”

무대에서는 여우 혼혈들이 부채춤을 추고, 짚으로 된 인형들이 이리저리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다 먹은 접시를 회수해갔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남자들은 뒷걱정도 안 하고 술을 입에다 들이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같이 황금빛 음료를 마셔주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장로님. 나는 여기까진가 보오···.”

“무사장, 죽으면 안 되네! 무사장!”

“장로님···.”

“자네가 없으면 안 돼. 무사장, 무사장!”

한 남자가 장절하게 최후를 맞았다. 다른 남자들도 대부분 페이스 조절을 못하고 달리다 쓰러져버렸다. 잔치를 좋아하는 1장로가 끊임없이 마셔야 하는 분위기로 몰고 가며 다 죽여버린 것이다. 내 쪽은 의외로 맑은 정신으로 멀쩡했다.

딱히 염력으로 의식을 통제하는 반칙을 쓰려던 건 아니었지만, 정신 능력자에겐 언제나 의식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내성 비슷한 게 생기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퍼마셔도 약간의 취기가 돌았을 뿐 이성적인 사고에 영향은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이만한 양을 마시고 아직도 멀쩡한 1장로였다. 순수한 주량으로 여기까지 따라오는 건가. 아니면 이 노인 또한 무언가 다른 ‘꼼수’를 부리고 있는 건가.

그리고 누군가가 이쪽 테이블에 다가왔다.

“또 이렇게···. 잔치만 되면 딴 사람처럼 변하신다니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볼에 손을 얹고 있는 건, 한복 풍의 드레스를 입은 금예린이었다. 당주로서 금가의 연회에 무슨 일이 있으면 대응해야 하는 위치였기에 당연히 음료는 입에 대지 않았다. 금예린을 본 1장로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예린님 오셨습니까? 한솔 군은 참 용장입니다. 벌써 몇 병을 비웠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다니요. 이 늙은이, 밤을 새서 떠들고 싶은 친구를 만난 건 오랜만입니다!”

“네, 네. 그것 참 잘 됐군요.”

테이블의 접시를 치우는 금예린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술 취해서 귀찮게 하는 아버지의 말을 한 귀로 대충 흘려넘기며 대하는 딸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잔에 금색 음료를 쪼르륵 따른 장로가 말했다.

“예린님도 한 잔 어떠십니까? 한솔 군을 정식으로 금가의 은인이자 손님으로 맞이하며 감사드리는 자리인데. 연회의 주인이 한 잔도 입에 담지 않는 것은 오히려 무례겠지요.”

“그, 그런 게 무례인 건가요?”

“역시 예린님은 어리시니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금예린이 슬쩍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하라며 눈썹을 으쓱였다. 그러자 금예린은 조심스레 장로가 따라준 잔을 입가에 가져다더니 한 모금 홀짝였다. 그리고 목에 넘긴 순간, 힘이 풀린 것처럼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기, 이거.”

“괜찮습니다. 십 초쯤 지나면 깨어납니다.”

내가 쓰러진 금예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1장로 할아범은 느긋하게 자기 안주나 집어먹고 있었다. 그리고 과연 장로가 해준 말대로 얼마 안 있어 금예린이 스스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쪽에 다가와서 내 멱살을 잡았다. 금예린의 얼굴은 새빨개진 채, 나를 노려보는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 위기 감지가 없어도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라 알 수 있었다. 금예린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뭐라뭐라 웅얼거리더니 말했다.

“쓰다듬어 줘.”

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다. 이게 뭔데? 내가 장난치는 거냐고 장로 쪽을 쳐다보자, 두 손으로 쾅 테이블을 내리친 장로가 진지한 얼굴로 매섭게 호통쳤다.

“한솔 군! 쓰다듬어드리라지 않습니까! 아무리 손님이라도 금가의 본관에서 당주의 명을 거역하시려는 겁니까?”

“이봐, 당신.”

“무사장! 깨어보게, 금가에 거스르려는 자가 있어!”

장로는 흔들지 말라 웅얼대는 남자를 절박한 얼굴로 흔들어댔다. 절대 취해서 저러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처음부터 빌어먹을 성격의 할아범인 것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장로가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바닥에 앉은 금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금예린이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흐뭇한 얼굴로 바라본 장로가 사람들을 불러 금예린을 데려가라고 말했다. 금예린의 부관처럼 옆에서 쭈욱 따라다니던 여우 혼혈 여자가 금예린을 들쳐안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한밤중이 되어 연회는 슬슬 끝나는 분위기였다. 황금색 액체가 가득차있던 병이 완전히 비어버리고, 쩝 입맛을 다신 장로가 나를 불러 잠깐 바람을 쐬며 바깥을 산책했다.

밤하늘에는 밝은 보름달이 떠있었다. 이내 둘이서 돌아간 것은 다 끝나 정리되고 있는 연회장이 아니라, 1장로가 거처하고 있는 별관이었다. 표면에 주황색 각인이 빛나고 있는 장지문은 나라도 무언가 주술이 걸려있다는 걸 알았다.

“하찮은 결계입니다. 쥐새끼가 있으면 곤란하니까요.”

“······.”

“잔치는 끝났지만 뭐, 아직은 시간이 많습니다. 아침까지는 아직 기니까요. 한 번 밤새 떠들고 싶은 상대라는 건 그냥 했던 말이 아니예요. 어울려주실 수 있겠지요, 한솔 군?”

그리고 나와 1장로가 둘 다 방석에 앉자, 장지문이 쿵 하고 저절로 닫혔다. 노인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그 눈동자 안에서 어떠한 빛이 번쩍였다. 먹을 나이 다 먹고 잔치에서 주책이나 부려대는 웃기는 할아범이 아니라, 금가의 1장로이자 방심할 수 없는 늙은 여우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둘뿐인 대작이니, 진지한 이야기가 좋겠지요.”

“예를 들면?”

“우선은 한솔 군은 금가의 손님이니 장로로서 금가의 역사를 설명해드려야 할 테죠. 저희는 조금, 상당히 특수한 부류이므로. 그리고 이번 당주님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장로가 한 번 숨을 내쉬며 뜸들이고 말했다.

“아니면, 아홉 꼬리 달린 요물의 이야기일까요.”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에,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내 염력으로 의식의 표면을 씻어내,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취기도 모두 날려버렸다. 길었던 잔치가 끝나고 이제야 본론이었다.

“다 재밌어보이네.”

나는 웃으며 1장로가 내민 잔을 받아들었다.

< 금예황국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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