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60화 (60/113)

< 금예황국 (2) >

“금가에 대한 얘기라 하니, 예린님한테서 보물을 받으셨다 하던데. 혹시 지금도 여우구슬을 갖고 계십니까?”

나는 안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 보여주었다. 설마 돌려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경계하는 얼굴로 눈썹을 찌푸리고 쳐다보자, 장로는 날 보고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탓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대단히 귀한 물건이긴 합니다만, 한솔 군의 협력을 받을 수 있었다면 싼값이겠죠.”

그리고 입꼬리를 올린 장로가 유쾌하게 말했다.

“오히려 감사를 표해야겠군요. 호신용 주물 하나도 없이 예린님을 돌아다니게 하는 것도 그렇기에, 여우구슬의 대용품을 생각하던 중 훌륭한 게 머리에 떠올라서 말이죠.”

궁금하다는 내 표정에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저주를 이용해 예린님의 목숨을 식구들과 연결시키는 겁니다. 이러면 무엇보다 일회용으로 끝나지가 않죠.”

순간적으로 내가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듣고 있자, 역시 한솔 군이라도 이 발상에는 놀랐냐는 듯 장로가 신나게 이야기를 떠들었다.

“예린님이 개인적으로 친밀함을 느끼는 상대에, 스스로 목숨을 바치겠단 의지가 있는 자들만 제물로서 기능할 수 있겠지만요. 성공적으로 주술이 안착하기만 한다면 스무 번 정도까진 산제물 쪽이 예린님 대신 죽어드릴 수 있겠지요.”

즉 주술인지 뭔지로 생명을 연결시켜서, 금예린이 치명상을 입을 때마다 가족같은 사람 한 명이 대신 죽어나가게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사람 정신 돌아버리기 딱 좋은 구조다.

이 노인은 다 좋은데 조금 정신병이 있는 게 흠이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금양호에게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거 금예린 앞에서 말 꺼낼 때 조심해. 특히 뺨.”

“뺨이라니. 예린님이 고맙다 뽀뽀라도 해줄까봐요? 당주로서의 체통을 지켜야 하셔서 그런 행동은 안 하십니다.”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대단히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 노인의 낙관적인 사고가 대단히 유감스러웠다. 하긴 싸대기 한두 대쯤은 맞아봐야 고쳐질 것이다. 이내 다시 진지한 분위기가 된 금양호는 가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은 가문의 탄생부터일까요.”

금가는 근본이 없는 것이 근본인 가문이었다.

금가의 시조는 온갖 더럽고 특이한 것들을 거두어들였다. 인체실험의 실패작, 몸이 기형으로 변이한 자들, 금술에 손을 댄 추방자들과 떠돌아다니는 망나니 일족. 가문의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독이든 약이든 상관하지 않고 집어삼켰다.

음습한 모략과 위험한 터부, 입에 담기에도 무서운 기술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몸집을 키운 금가는 이내 누구도 우습게 여기지 못하는 강한 가문이 되었다. 바깥에서 편히 얼굴을 들고 다니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있을 곳이 생겨났다.

가문의 상징은 황국(黃菊).

온갖 것들이 시든 늦가을에 결실을 맺는 꽃. 아무리 적막하고 황량한 처지에도 비관하지 않고 웃으며 피어난다. 우리들의 삶은 아름답다고 가슴을 펴고 살아가잔 의미였다.

그래서 그렇게 일부러라도 연회의 분위기를 띄운 것이다.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침울해하면 끝이 없으니까, 즐거운 일들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필사적으로 행복해지려 한다.

실험으로 몸 전체가 갑옷이 되어버렸다는 남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껄껄 웃던 것도, 연회에서 온갖 이형들이 한데 뒤섞여 놀던 모습도 그러한 금가의 사고방식의 연장일 것이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게 금양호가 입을 열었다.

“저희 연회에 참석한 손님은 보통 좀 더 당황합니다만, 한솔 군은 신기해할 뿐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더군요.”

그야 애초에 나한테는 이 세상의 인간들 모두가 이형이었다. 몸에 날개나 뿔이 달린 녀석들은 양반이고 짝꿍은 손바닥에서 검을 뽑아낸다. 이제 와서 옆에 앉아있는 녀석들 생김새가 좀 특이하게 생겼다고 안절부절 못할 이유는 없었다.

“개성 있어서 좋구만 왜.”

내 말에 인자한 미소를 띤 장로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방 구석에 놓여있던 다기에 차를 끓였다. 여러 가지 모양의 찻주전자를 비롯해, 각각의 주전자에 전용 다포까지 비치돠어 있는 걸 보니 이 노인도 적잖이 차를 좋아하는 듯 했다.

장로는 주전자에 먼저 뜨거운 물을 받은 뒤 곧바로 전부 따라내 버리고, 다시 한 번 검붉은 색의 차를 끓였다. 장로에게 찻잔을 받아든 나는 한 모금 홀짝였다. 색이 진해서 맛이나 향 또한 강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담백한 맛이었다.

“자사호라 해서, 자사라는 돌을 빚어 만든 다기입니다. 차의 잡향을 흡수해 깔끔한 향을 즐길 수 있게 해주죠.”

과연 검붉은 색의 차는 잡향 같은 게 없이 깨끗한 느낌이었다. 장로는 천년서생과 상당히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다.

차를 좋아한다는 취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금가의 1장로인 금양호는, 지식 면에 있어서도 천년서생과 길항할 수 있는 세상에서 손에 꼽는 인간이었다. 대부분 안 좋은 쪽 지식에 치중해있지만. 찻주전자를 접시에 내려놓은 노인이 말했다.

“처음에는 자사호에 그리 광택이 나지 않지만, 마시고 남은 차를 찻주전자에 뿌려주며 찻잎의 성분이 표면에 안착되게 하면 세월이 지날수록 주전자에 독특한 색과 광택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자사호를 길들이는 걸 ‘양호’라고 부르죠.”

나는 맞은편에 앉은 금양호에게 눈길을 주었다.

“당신이 그거랑 똑같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내 말에 금양호가 조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전대한테 특별한 인수인계를 받는다는 것 정도는.”

‘양호’라는 이름은 노인만이 아니라, 역대 금가의 1장로 자리에 올랐던 이들 전원이 가지고 있던 이름이었다. 처음으로 금가를 만들고 이끌었던 시조부터 시작해,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노인에게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져내려온 기둥의 계보.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끄는 1장로의 자리는 다른 장로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차기 1장로로 지명받기 위해서는 지금껏 가문에 기여해온 성과들과 인망, 판단력도 중요하지만, 특별한 조건 하나를 충족해야만 했다. 어떤 종류의 주술에 체질적, 정신적으로 적합한가 아닌가.

그것은 사념을 이용한 저주였다. 1장로였던 인간이 죽으면, 그 즉시 저주가 발동되어 차기 장로가 될 자와 연결된다. 그리고 강력한 미련을 지닌 사념은 후대 1장로를 덮쳐, 자신이 장로로서 살아가며 쌓아온 모든 지식과 비술들을 전달한다.

이내 후임자가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면, 미련을 잃어버린 전대의 사념은 그대로 증발해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이 주술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건 금가를 이끈 시조 금양호였다. 그렇게 역대 1장로들은 다음 사람으로, 또 다음 사람으로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며 금양호라는 이름을 자칭해왔다. 아마 순수한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잊혀진 사술과 비의 같은 뒤쪽의 지식들이라면 천년서생보다도 위에 있을 것이다.

금양호가 자신의 뺨을 긁적이며 눈을 돌렸다.

“이것 참. 알고 계셨다니 쑥스럽군요.”

그것은 역대 1장로들이 모두 품어온 자기혐오였다.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당당히 불사의 영역을 이루어내, 빛나는 마도의 길을 걷고 있는 저 위대한 천년서생과는 다르다.

전대의 인격 따윈 전혀 보존되지 못하고, 사념인 채로 허무하게 죽어간다. 주전자에 끼얹어지는 다 마신 찻물과 같다. 다음 사람에게 미련을 넘기는 것으로 가까스로 지식만을 남기어가는 그들은, 온갖 저주로 추하게 몸을 비틀어가며 천년서생의 조악한 유사품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편 회상할 때 보면 초대 금양호가 어린 시절에 천년서생이랑 같이 공부하던 친구였나 그랬지 아마.’

아무튼 가진 마력이나 주술의 실력은 어쨌건, 최소한 지식 면에 있어서는 금가의 시조가 지금까지 쭉 그대로 살아온 것과 마찬가지인 정보량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는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요괴라고 불리는 부류들에 대해서도.

보통이라면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된 시점에서 절대로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는 게 정상이겠지만, 금가는 상대가 얼마나 사이한 요물이라도 가문의 힘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개의치 않아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렇게 금양호는 요호를 만났다.

아무리 요호라도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1장로의 주술적 지식은 얕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1장로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요호의 본거지에 들어가 서로의 지식이나 정보를 공유했고, 적어도 겉으로는 협력 비슷한 것을 하는 관계가 되었다.

요괴로서 지닌 능력이나 술수에는 능통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주술들엔 비교적 무지했던 요호는, 금가라는 훌륭한 협력자를 만나 더욱 답이 없는 괴물로 거듭났다. 그 조건으로 요호는 어떠한 비술에 자신의 막대한 요력을 빌려주었다.

여우누이의 의식.

금가를 이끌어줄 존재를 만들어내기 위한 대주술.

장로는 어디까지나 안에서 금가를 받치는 기둥일 뿐. 세상에서 배척받는 이들이 있을 곳을 찾아 모인 금가에는 부족한 자신들을 이끌어줄 빛나는 존재가 필요했다. 온갖 주술에 능통하며, 수많은 결계를 거느리고, 처음부터 완벽한 당주가.

한눈에 인간의 거짓과 진실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들어줄 온갖 사념들과, 어떤 주술도 쉽게 다루게 해줄 강력한 저주 덩어리, 태어날 때부터 몸과 일체화될 당주 전용의 결계, 자신들의 위에 서줄 존재를 원하는 금가 식구들의 모든 기대.

그러한 것이 한데 모여 주술의 총체를 이루었다. 금가의 온갖 추하고 열등한 이형들을 통솔해줄 ‘완벽한 기형’을 원한다는 비틀린 기도가 만들어낸 무언가.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특급의 저주였다. 이런 것을 당주가 될 갓난아기의 몸 안에 집어넣으면 의식은 갈갈이 찢어져버릴 것이 당연하다.

그것을 흉행이라고 말리는 자도 있었다. 어린 아이에게 멋대로 지울 짐이 아니라고 거부감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자신들을 이끌어줄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라는 이상에 매료당했다. 여우누이의 의식은 거행되었다.

“그렇게 우리들을 이끌어달라는 일방적인 부탁을 등에 지고, ‘금가의 당주’라는 생물로서 예린님이 태어난 겁니다.”

금가의 모두들은 금예린을 진심으로 따르지만, 금예린 스스로는 자신이 금가의 딸을 죽여 갓난아기의 몸을 빼앗은 요물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분에 맞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 그걸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길이, 언제나 완벽한 당주로서 있는 것이다. 그 이상한 존댓말도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금양호는 요호와의 관계를 끊었다. 애초에 요호는 인간의 주술들을 익힌 시점에서, 금가는 금예린이 태어난 시점에서 서로에게 볼 일이 없었다. 요호는 거래 과정에서 주술적인 계약을 하여 금가를 공격할 수 없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다른 장로들은 다르게 생각한 듯 했다. 어차피 어린애한테 저런 흉행을 저지를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라면, 더욱 커다란 흉행에 복종하는 게 옳다. 그렇게 1장로만이 알고 있을 요호와의 접선 경로를 어떻게든 알아냈다. 정확히 말하면, 알아낼 수 있도록 요호가 유도했다.

전부 그녀가 계획했던 대로였다. 요호와 접선한 다른 장로들은 금예린 따위보다는 요호 당신 쪽이 더욱 강대하고 믿음직하다. 부디 자신들을 이끌어달라 요호에게 부탁했고.

아홉 꼬리 달린 요물은 섬뜩하게 웃는다.

<나는 분명 너희 가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계약에 묶여있었다만, 너희들 쪽에서 먼저 찾아와 가문을 집어삼켜달라 부탁한 거라면 그건 약속을 어기는 게 아니겠지?>

황국관 사건.

요호를 묶고 있던 계약이 풀리자마자, 본관에 있는 식구 전원은 몰살당해 요호의 뜻대로 움직이는 강시가 된다. 금가는 진정으로 이형들의 가문이 된다. 그리고 요호는 금예린의 몸과 동화한 결계를 빼앗아 자신이 이용하기 위해 획책한다.

그렇게 적풍회와 금가 둘 모두를 손에 넣은 요호는, 혈통시대 후반까지 끊임없이 참극을 일으키는 끔찍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지금은 두 쪽 모두 미연에 방지했다. 그리고 금양호의 협력만 있다면, 요호를 신속하게 잡아낼 수 있다.

혈통시대의 시나리오에서는 직접적으로 나온 적이 없는 정보. 이 세상의 겉무대에 있을 곳을 얻게 되기 전, 요괴로서 웅크리고 있던 요호의 백귀야행이 거처하고 있는 본거지.

“당신, 알고 있지? 여우고개의 위치.”

이것이 바로 금가에 찾아와 1장로와 독대한 이유였다. 수백 년이 넘도록 축적된 지식을 가지고 요호와 직접 거래했던 이 남자 만큼은, 그 정확한 장소를 알고 있을 터였다.

“알고 있지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 질문에 금양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위치를 알려줘버리면 당신은 분명 죽으러 갈 거다, 따위의 하찮은 제지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 노인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그 위치를 남에게 전달할 수가 없다.

“요호가 금가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저도 요호의 위치를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도록 주술적인 속박에 걸려있습니다. 해주 자체가 불가능한 강력한 계약이지요. 그게 가능했으면 요호가 벌써 이곳을 집어삼키고 남았을 테니.”

“당신 쪽에선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다고.”

“네. 말하거나 글로 쓰는 건 물론 몸짓으로도 안 됩니다. 그런 의도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순간 속박이 발동해요.”

그리고 씨익 웃은 나는 장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악수라도 할까.”

정보를 남에게 발설할 수 없다면, 이쪽이 알아서 빼내가면 될 뿐이다. 장로에게 내민 나의 손바닥에 염력이 깃들었다.

< 금예황국 (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