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예황국 (3) >
나는 염력을 담은 손으로 금양호와 악수했다.
<마인드맵 확장 : 텔레파시 Lv.5>
꽁꽁 숨기고 있는 비밀이나 의식의 저변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은 읽을 수 없지만, 상대 쪽에서 강하게 이미지를 떠올리면 표면에서 그것을 건져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내가 무언가 하려는 걸 눈치챘는지 금양호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특별한 탐색 주문이라도 쓰시려는 겁니까? 그런 마력적인 간섭이 들어오는 시점에서 주술의 속박은 발동될 텐데···.”
“괜찮아, 괜찮아.”
금양호와 악수한 나는 그의 심상을 읽어냈다.
‘오···. 뭐야 이 양반.’
금가 최고의 두뇌라는 말이 아깝지 않게, 그가 떠올리고 있는 이미지는 사진처럼 구체적이고 선명했다. 안개 낀 골짜기 깊은 곳의 결계. 그 안에 있는 건 살아있는 장승이 지키고 있는 줄지어선 한옥들, 밤인데도 환한 등불의 거리였다.
슬라이드쇼처럼 여러 가지 풍경들이 휙휙 지나간다. 나는 백귀야행의 본거지 안쪽 모습을 전부 머리에 집어넣었다.
정신 능력자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잊어버릴 일이 없다는 것이다. 까먹었다 생각한 기억도 꺼내는 방법을 모를 뿐 머릿속에 제대로 남아있었고, 자신의 의식을 다룰 수 있다면 그걸 확인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제일 중요한 건 백귀야행의 안쪽 모습이 아니라, 그걸 덮고 있는 출입구이자 결계인 여우고개가 어디에 있는지였다. 결계 바깥에서 싸웠다간 이쪽이 이겨도 아무렇지 않게 주술을 이용해 산골 속에 숨겨진 여우고개로 돌아가버린다.
보통의 경우 이쪽이 적진에 머리를 들이미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지만, 요호 사냥에 필요한 절대조건은 상대방의 본거지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요호 본인에게나 요호를 잡으려는 이들에게나,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결전의 장소.
‘사실 좀 더 스마트한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
예를 들어 대뜸 본거지에 쳐들어가는 것보다 전력을 나누어서 바깥의 요호와 싸우다, 혼자 도망친 요호만을 여우고개에서 대기하고 있던 별동대가 해치우는 방법도 있었다. 주술을 통한 전이로 도주하는 것 자체를 막는 방법 또한 있었다.
하지만 그런 책을 쓰기엔 아직 갖추어진 패가 너무 적었다. 전력을 나누긴커녕 지금 있는 총전력을 집결시켜도 요호 하나를 확실히 쓰러뜨리는 걸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어찌 됐든 시나리오의 흐름을 반쯤 무시하고 엄청나게 이른 타이밍에 잡아내려는 것이니 무리하는 건 감안해야 했다. 전력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도, 이쪽에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이상적인 구도로 싸우게 할 수 있는 정보들이 있었다.
나는 금양호의 이미지를 전부 읽어내고 악수를 풀었다.
“청명산? 가는 길 좀 찾아봐야겠네.”
위치가 어딘지는 알았지만 난 지리에 그다지 밝지 못했다. 내 말을 들은 금양호의 눈동자에 빛이 번쩍였다. 손을 잡은 것만으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을 쏙 빼내가버린 것이니, 당연히 금가의 장로로서 크게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금양호의 표정은 그런 것보다 그저 지적인 호기심에 불타고 있는 상태였다. 음지의 교단에 전해져내려오는 대주술부터, 지방 산골 마을의 사소한 의식까지. 온갖 주술을 섭렵한 자신조차 전혀 짐작가지 않는 기술에 당장에라도 다른 일을 제쳐두고 질문을 퍼붓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금가의 역대 1장로들은 다들 이렇게 지식을 탐욕적으로 추구하는 성향의 인간이라고 했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만이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지식이 유실되는 것에 강한 미련을 갖고, 후대 1장로에게 연구를 전달해줄 사념을 남길 수 있기에.
방금 기술의 원리가 어떠한 것인지 이 자리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듣고 싶단 기세였다. 특수한 체질 덕분이란 변명으론 넘길 수 없는 분위기였다. 적당히 화제를 바꿔야했다. 하지만 이 장로의 주의를 어떻게 다른 데에 돌릴 수 있을까.
“그, 그러고 보니.”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을 조작해 장로에게 보여주었다. 금양호는 놀라며 화면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릎 꿇고 울상을 지은 채 이를 갈고 있는 진소란과, 여유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부채를 활짝 편 금예린의 사진이었다.
“오오, 옆에 아가씨는 예린님의 친구입니까?”
“친구? 친구라···. 애매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 상대를 자기 밑에 깔아뭉개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다기엔 매일 서로 의식하면서 대련을 잡아 싸워댄다. 라이벌이라는 말이 제일 어울릴 것이다.
금예린이 진소란을 꾸준히 의식하고, 그녀답지 않게 신경을 툭툭 건드는 말을 내뱉는 이유에는 대강 짐작이 갔다.
흑익. 자연적으로 태어난 완벽한 돌연변이. 금가가 그토록 원해도 얻을 수 없었던 존재. 자신이 모조품이라 생각하는 금예린으로서는, 딱히 자랑 같은 게 아니라는 듯 검은 날개를 감추고 다니는 진소란이 금가에 대한 모욕처럼 보였겠지.
하지만 진소란은 진소란대로 가문의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가문의 중심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금예린을 내심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열등감과 질투를 품고 있다. 이제 와서는 진짜 적의는 대부분 사라진 모양이지만.
슬쩍 장로 쪽을 바라보니 그는 완전히 금예린의 사진에 집중하고 있었다. 언제나 당주로서의 책임감을 의식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 또래 아이와 신경전을 벌이며 진심으로 깔깔깔 웃고 있는 표정. 본가에서는 결코 보여주지 않을 금예린의 얼굴에, 금양호는 다행이라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까 첫 수업 때도, 둥지 통과해야 돼서 애들 다 고생하고 있는데 혼자 결계로 먼저 날아가서는···.”
나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얻어야 할 정보는 전부 얻었다. 장지문으로 닫힌 방에 앉아, 1장로는 밤새 세한기전의 금예린을 이야기하는 내 말을 경청했다.
* * *
다음날 아침, 나를 연무장에 불러낸 것은 금가의 핵심 전력이자 특수부대라 할 수 있는 갑옷 무사대였다.
금가에서는 지금도 장로의 감독 하에 수많은 주술적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그들은 특히나 우수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주문을 튕겨내는 주술 갑옷과 일체화한 것으로, 웬만한 마법은 아예 통하지 않는 몸이 되었다.
갑옷 자체가 몸이기에 칼을 박아넣기도 힘든데, 주문에 대한 내성 탓에 강력한 마법으로 한 번에 날려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 무사들이 다같이 적진에 들어가 주술까지 쓰며 적들을 도륙한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갑옷 무사들은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를 1장로의 실험에 누구보다 먼저 지원하고 나선 용맹한 전사들. 그러한 특성을 전부 제하고 순수한 무용만으로도 일류를 자칭하기 아깝지 않은 자들이었다. 갑주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한솔 공, 아침부터 부탁에 응해주셔서 감사하오.”
“연무장 와달라는 게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갑주의 투구 눈구멍 안에서 빛나는 눈동자가 나타났다.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갑옷이었다.
“어제는 연회이기에 함께 어울렸소만, 그렇다고 공을 인정한 것은 아니오. 정보 제공자로서 도움을 준 것은 분명 감사할 일이나, 새파랗게 어린 학생이 금가의 협력자로서 같이 싸우겠다니. 아직은 자신을 갈고 닦는 데에 전념할 시기요.”
앞으로 나선 붉은 갑주가 갑옷 무사대를 대표해 말했다.
한 마디로 말해 배신자를 잡아내준 건 잡아내준 거고, 약한 주제에 현장에 나서려 들지 말란 소리였다. 어린 학생을 배려해주는 상식적인 말이 참 눈물나게 고마웠다. 나도 마음만 같아서는 뒤에 앉아서 편하게 구경이나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다같이 몰려간다 해도 요호를 잡아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무례하군. 이 분은 당주님이 직접···.”
“아니, 놔두세요. 겨뤄보면 알겠죠.”
눈썹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가려던 무사장을 부채를 들어 제지한 건 금예린이었다. 이쪽을 보며 눈웃음을 짓는 금예린은 이렇게 된 거 당신의 힘을 조금만 보여주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뭘 기대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내가 금가의 갑옷 무사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뭐, 싸워서 이길 수가 없다는 거고 이렇게 앞에 마주한 시점에서 파고들 틈이 보이긴 했지만. 붉은 갑주가 말했다.
“전장에서 미숙한 자는 발목을 잡을 뿐. 하물며 한솔 공같은 아이여서야 신경 쓰여서 어쩔 수가 없겠지. 그런 이유로 제대로 싸우지 못하게 되는 건 사양이오. 이 몸을 납득시키지 못하겠다면 직접 전장에 나서겠다는 의향은 포기해주시오.”
갑주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었다. 이러니 저러니 말해도 내가 걱정된단 말이었다. 위험한 주술 실험들도 그렇고 금가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자들이란 인상이 있었는데, 의외로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당신, 상당히 착하네. 아이 취급하는 건 좀 그렇지만.”
“친구를 잃게 만들면, 당주님을 뵐 면목이 없을 뿐.”
“좋아. 당신을 쓰러뜨리면 오케이인 건가?”
기지개를 편 내 말에 갑옷이 부르르 떨었다.
“쓰러뜨리다니 무슨 소리를. 버티기만 해도 충분하오. 확실히 말해두지만, 우리들은 전원 당주님보다 훨씬 강하오.”
그야 지금의 금예린보다는 갑옷 무사들이 훨씬 강하겠지.
검술과 주술을 섞어서 쓰는 변칙적인 전투 스타일에, 주문 공격 대부분을 격감시키는 갑주. 아예 갑옷과 융합해버린 탓에 관절부나 안구를 찔러버리는 약점 공략도 소용이 없었다.
이런 것들이 하나나 둘도 아니고 스무 명 가까이 있다. 유경명 같은 순수한 파괴력이나, 차대운처럼 갑옷째로 아무렇지 않게 베어버리는 절삭력, 한시혁처럼 움직임 자체를 봉해버리는 특수능력이 없으면 처치하기 대단히 곤란한 상대였다.
나도 이렇게 앞에 서기 전까진 나로서는 상대할 답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마주하고 보니 너무나 간단한 방법을 찾아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거기 뒤에 서있는 갑옷님들도 대충 같은 생각인가? 나는 방해만 되니까 같이 싸우겠다 까불지 말라고?”
조금 과격한 표현에 주저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결국 붉은 갑주 뒤에서 있던 갑옷 무사들은 다들 철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들끼리 이야기를 끝낸 뒤 대표로 한 명을 내보낸 것인 듯했다. 그리고 나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럼 전부 다 나와.”
내 말에 놀란 것은 갑옷 무사들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장로들과 금예린, 무사장이라고 불린 남자 또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갑옷 무사대는 금가의 병력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강력무비한 소수 정예들이었다.
그들 전부를 혼자 상대하겠다는 말은 자신감이 과한 걸 넘어 금가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었다. 마음대로 하게 둬보라던 금예린이 휙 무사장을 돌아보았다. 이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무사장이 냉정히 말했다.
“겨뤄보면 알 테죠.”
무사장은 아까 금예린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 또한 금가에 속한 무사의 한 사람으로서, 방금 내가 한 말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잃는 것까지 불사해가며 금가의 검이자 방패가 되기를 택한 용사들이다. 그런 무사들 전부를 혼자서 상대하겠다니, 아무리 손님이라도 농담이라 고 넘어갈 수는 없다는 거겠지.
그리고 갑옷들이 하나하나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나를 향해 마주한 갑주의 숫자는 자그마치 열둘.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무사들을 빼고서도 병대의 반을 넘는 숫자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당신들보다 훨씬 약해. 일 대 일로 붙는다 해도 기적 비슷한 게 일어나야 이길까 말까지.”
어깨를 으쓱인 내 말에 갑옷 무사들이 소리를 냈다. 다 나와보라 해서 정말로 나오니 이제 와서 겁먹은 거냐 묻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무사장 또한 얼굴이 굳어갔다. 금에린은 무슨 생각이냐는 듯 이쪽을 보며 부채 끝을 잘근 씹었다.
“하지만 당신들도 금가라면, 이 세상엔 그런 전력차를 아무렇지 않게 뒤집을 수 있는 요술이 있다는 걸 알 텐데.”
그리고 그러한 환술, 저주 계통에 혈통시대의 누구보다 정통한 것이 바로 요호였다. 단순히 힘이 센 것만을 가지고는 사냥할 수 없는 속임수와 이간질의 대가. 시간은 충분히 끌었고 준비는 다 끝났다. 나는 눈을 뜨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모든 갑옷 무사들이 일제히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쓰러진 갑옷 위에 앉았다.
<마인드맵 개척 : 의식 제어 Lv.3>
내가 찌른 허점은, 인간의 정신과 주구를 억지로 융합시킨 것의 부작용이라 할 수 있었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주술로 겨우 엮어둔 것인 만큼, 정신 자체를 다루는 능력자가 있다면 이어폰 구멍에서 단자를 빼듯 살짝 잡아당기는 것만으로 연결이 헐거워져 의식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내가 의식체를 잡아당기고 있는 걸 놓으면 당장에라도 다시 움직일 수 있겠지만, 내가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금가가 자랑하는 갑옷 무사대 전체가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다.
싸워서 이기는 건 불가능하지만, 싸우지도 않고 이길 수는 있다. 무사장과 금예린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내가 깔고 앉은 갑주의 투구에 주먹으로 똑똑 노크했다. 갑옷을 움직이기 위한 명령이 전해지지 않을 뿐, 갑옷 무사의 의식 자체는 지금도 멀쩡히 내 말을 듣고 있을 것이다.
“이런 걸 당하면, 당신들로는 대응을 못한다고.”
실전이었으면 바로 전멸이다. 무사장에게 이만하면 됐냐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널브러진 갑옷들에게 웃으며 그만 일어나라 짝짝 박수를 쳤다.
< 금예황국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