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62화 (62/113)

< 군청일화 (1) >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한솔 공.”

금가의 무사장이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단지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사과하는 게 아니었다. 공범.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자신 또한 당신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한 속내를 꾸밈없이 드러낸 얼굴이었다.

갑옷 무사들의 경우엔 내가 볼 때마다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그야 자신의 의식만이 붕 떠서 몸에 전혀 간섭할 수 없게 되는 경험을 한 것이다. 아직 갑옷 무사로 거듭나기 전, 주술 실험에 자원했을 때 몇 번이고 상상해보았던 공포.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상태를 잠깐이나마 실제로 겪어보게 되었으니 그들에게는 특히나 더 충격적인 경험이 되었을 게 틀림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결함이 있었군요. 설마 저희 금가의 자랑인 갑옷 무사대가 손짓 한 번에 무력화돼버릴 줄은.”

“이제 안 통하겠지. 불의의 기습 같은 거였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야 모든 무사들의 의식을 하나하나 감지하고, 정확히 끌어당길 준비를 마치는 건 웬만큼 집중할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그런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안 이상 저쪽도 틈을 보이지 않을 테고, 사람의 몸과 의식을 분리하는 데는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그냥 목을 자르면 된다.

한 번밖에 통하지 않는 깜짝 트릭이라 하긴 했지만, 만약 실전이었다면 그럴 기회도 없이 내가 먼저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함은 결함이었다. 원래 인간의 몸과 정신은 거의 완벽하게 일체화되어있으니 이런 꼼수 따위 통하지 않지만, 억지로 주술 갑옷과 융합해버린 탓에 찌를 만한 틈이 생겨났다. 이 세상에 나처럼 특수한 능력자가 또 있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나는 금양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전에 없던 시도를 하면 생각지도 못한 빈틈이 생겨날 수 있다는 건 계속 생각해둬. 당신쯤 되는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해봤자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겠지만···.”

“아뇨,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입니다.”

금양호가 턱을 쓰다듬었다. 전처럼 어딘가 어린애를 보는 듯한 인자한 미소가 아니라, 기회가 있다면 언제라도 다시 진득하게 의견을 나눠보고 싶다는 탐구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장로에게 갑옷 무사대 전원을 불러모아 달라고 말했다.

“나쁜 경험을 시켜버렸으니 선물을 주겠습니다.”

나는 일렬로 서있는 갑주들에 손을 올려놓았다.

갑옷 무사대가 아직 과도기에 있다고 하는 이유는, 의식이 억지로 연결된 탓에 필연적으로 동작에 약간의 지연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정도 오차는 상관이 없을 만큼 주문과 칼날을 모두 튕겨내는 갑주의 몸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뿐.

주술적인 사이보그 비슷한 것이니, 실제 몸과 비교해 반응의 민감도에 차이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급 기사 이상의 진짜 강자들과 싸울 땐 동작 사이의 틈을 파악당해 맥없이 제압당하는 일이 많았다. 내가 보완해줄 부분은 그 지점이었다. 같이 싸울 전력은 강한 편이 좋다.

<마인드맵 개척 : 의식 제어 Lv.3>

할 일은 간단했다. 무사들의 의식체와 접촉해, 갑옷과 정신을 묶고 있는 매듭을 좀 더 강하게 엮어준다. 염적인 영역에는 문외한인 1장로가 주술을 통해 억지로 엮어낸 것인 만큼, 이렇게 조금 손봐주는 것만으로 접합이 훨씬 강해졌다.

내 감응에 무사들은 곧바로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조정을 받은 뒤 연무장에 선 그들이 목검을 들고 여러 가지 기술을 시험해보았다. 쏜살같은 연계로 허수아비를 후려친 그들은, 놀란 듯이 자신이 든 검을 내려다보았다. 비교적 실험을 받기 전과 비슷하게 몸의 반응이 빨라졌을 것이다.

“한솔 공, 이건 대체···.”

“신발끈 꽉 묶은 것 같은 거라 싸우다 보면 다시 풀리긴 할 텐데. 내 예상이 맞으면 한 달은 효과가 있을 거야.”

내 말에 붉은 갑주의 무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 또한 주술 실험을 받기 전엔 한 명의 무인이었지만, 갑옷 무사가 된 뒤로는 자신의 기술 대부분을 버리고 새로운 전술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민감한 움직임이 가능하다면, 순수한 인간일 때 사용하던 기술도 재현할 수 있다.

금가를 떠날 시간이 다가오니, 연회에서 어울렸던 사람들을 비롯해 금가의 식구들이 대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문 앞에는 타고 왔던 커다란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1장로와 악수한 뒤,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은 금예린이 내 옆에 섰다.

“안녕히 가십시오!”

갑옷 무사대가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보냈다. 투구의 눈구멍 안에서 빛나는 열정적인 시선들은 제발 한 달 뒤에 또 여기 들러서 움직임 조정 좀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뒷좌석에 탄 금예린이 부채를 입가에 가져다댔다.

“뭔가 치사하네요. 고작 하룻밤 지냈을 뿐인데.”

“질투하냐?”

“네. 자기들은 당주님 뿐이라더니 실망이예요.”

금예린은 살짝 볼을 부풀렸지만 정말 화났다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금가의 협력자로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기뻐하는 눈치였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술 한 잔에 그렇게 헤롱헤롱대면 못 미더울 만도 해.”

내 말에 금예린의 꼬리와 귀가 삐쭉 서서 뻗쳤다.

“무, 무슨 소리를.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그냥 술이 아니라 주술로 빚은 음료고, 저는 태생적으로 어떤 주술이든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체질이라 효과를 더 받아들여서···.”

“그렇게 바로 곯아떨어지는 건 난생 처음 봤네. 사진이라도 몇 장 찍어둘 걸 그랬나? 진소란한테 보여주게.”

그러자 금예린의 손이 내 옷깃을 휙 부여잡았다. 새빨개진 얼굴은 그런 짓을 했다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경고하고 있었다. 언제나 진소란을 놀려먹으며 여유롭게 호호 웃던 금예린이 그런 꼴을 보였다간 자존심이 박살이 나버리겠지.

“어허! 이게 무슨 짓이야. 당주 체면 지키셔야지.”

내가 양손을 편 채로 항복 자세를 취하자, 이쪽을 올려다보는 금예린이 손을 부르르 떨다가 놓아버렸다.

“···성격이 참 좋으시네요.”

“너만 하겠어.”

내가 어깨를 으쓱이고, 자동차가 도로를 달렸다.

* * *

나는 남은 휴일을 이용해서 유경명의 집에 들렀다.

유경명과 함께 살고 있는 아이가 현관까지 마중을 나와주었다. 아이는 동물 친구들이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어서 와. 손님.”

“오. 앞치마 뭐야.”

신발을 벗으며 짝 하이파이브를 해주자, 무표정한 아이가 자랑이라는 듯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앞치마의 이름표에는 이나리라는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유경명과 같이 장을 보러 가서 산 물건인 듯 했다. 나는 거실 안쪽을 둘러보았다.

살풍경했던 방에는 벌써 이런저런 가구들이 놓여있었다. 주방을 보면 접시나 컵도 제대로 구비되어있다. 이제야 사람이 살고 있는 곳다운 생활감이 느껴졌다. 나는 주변 마트에 들러서 적당히 담아온 생활용품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커피 타줄까.”

“고맙지만 사양해두지. 아저씨는?”

“방 안에.”

나는 문을 열고 유경명의 방에 들어갔다. 온갖 쓰레기와 세탁물이 널려있는 채 불이 꺼져있던 거무칙칙한 방은, 바닥이 잘 보이는 상태로 책상과 의자 한 쌍이 놓여있었다. 비포 애프터를 찍어서 비교하면 누구나 깜짝 놀랄 것이다. 안경을 낀 채로 책상에 앉아있던 유경명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왔나.”

“뭐 하고 있었어?”

슬쩍 고개를 들이밀자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 서류들이 수십 장 쌓여있었다. 나리의 거처나 신분에 대한 수속들을 대신 작성하고 있는 듯 했다. 이미 몇 번이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맡아본 경험이 있는 유경명에게는 익숙한 일일 것이다.

“요호한테선 뭐라 연락 없고?”

“아직 없다. 지령을 받으면 곧장 전달하지.”

볼펜을 내려놓은 유경명이 안경을 벗었다. 방 한구석에선 지금도 텔레비전이 지직대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전투가 아닌 일상생활을 계속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보였다. 아마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유경명이 이쪽에 눈길을 주었다.

“내가 배신했다는 걸 들킬 위험은 없나?”

“백 퍼센트라곤 못 하겠지만···. 거의 없을걸.”

요호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무슨 일이든 남을 믿지 않지만, 그만큼 자신이 직접 공을 들인 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는다. 그러한 구분이 없으면 애초에 일을 해나갈 수가 없다.

특히나 호환에 대해서는 절대 재기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의지를 꺾어놓았다고 확신하고 있다. 실제로 그건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정세나처럼 아예 호환 자체를 먹어치워 다른 존재로 바꿔버리는 수준이 아닌 한, 유경명을 요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

나는 옷장에 걸려있는 호환의 가면을 집어들어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리고 가면을 내려다보는 채로 말했다.

“요호의 본거지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어.”

그 말에 유경명이 놀라서 휙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턴 준비가 되는 대로 이쪽에서 쳐들어갈 수 있다는 거지. 당장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니 서두르지 말고. 싸울 거라면 완벽한 조건에서 최대한 변수를 줄이는 게 낫잖아?”

요호에게 겁먹어 굴복한 게 트라우마인 유경명이라면 지금 당장 쳐들어가야 한다고 격노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유경명은 내 생각과 달리 평정을 유지하며 팔짱을 꼈다.

“···8년을 참았다. 기다리는 건 익숙해. 네가 준비한 무대에서 네가 말하는 대로 싸운다. 그게 가장 확실하겠지.”

임전무퇴이지만 막무가내는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남자의 눈동자는 냉정했다. 상당히 이쪽을 신뢰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방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거실 쪽에서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쟤한테 주방 쓰게 해도 되는 거야?”

뭔가 요리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주방에는 식칼이나 가스불부터 시작해서 어린애한테 맡기기 위험한 물건들 천지였다. 그러자 코웃음을 친 유경명이 걱정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전부 안전 주문이 걸려있는 마도구로 구비했으니까. 입고 있는 앞치마에도 꽤 강력한 보호 기능이 있다.”

“돈 되게 많나봐.”

하긴 호걸의 활동 자금으로 쌓아뒀던 잔고를 하나도 안 쓰고 그대로 남겨뒀으니, 웬만한 마도구는 가볍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정세나 아래에 들어가 흑호가 됐을 때도 곧장 유경명의 돈으로 허름한 아지트 대신 제대로 된 거처를 구했다.

“잠깐.”

그러면서도 역시 걱정되는지 유경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의 상태를 보러갔다. 내가 거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자, 나리가 식사를 내왔다. 어디서 본 게 있는지 요리 위에 커다란 대접을 뚜껑처럼 덮어두었다. 유경명이 눈을 부라렸다.

‘박수 쳐.’

그렇게 위협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나리에게 활짝 웃으며 짝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나리가 대접을 열자 안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게덮밥.”

“게덮밥이라.”

나는 그릇 안의 내용물을 쳐다보았다. 겉으로 보아선 중화풍의 게덮밥을 따라한 거라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저런 작은 주방에서 제대로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숟가락으로 밥 안의 커다랗고 하얀 살을 쿡쿡 찍어 눌러보았다.

그리고 요리사 아가씨에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꼬마 친구가 잘 모르나본데, 게맛살에는 게가 안 들어가. 여기다 대고 게덮밥이라고 말하면 안 돼.”

마트에서 파는 이건 명태살과 계란 흰자와 연육을 적당히 섞어 만든 것이다. 그리 자신만만하게 게덮밥이라고 칭하는 것은 일종의 사기를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리가 서운해하자, 옆에 앉은 유경명이 이쪽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죽는다.’

거대한 압박감을 느낀 나는 곧장 숟가락을 쳐들었다.

“하지만! 가끔은 게맛살 덮밥도 나쁘지 않겠지.”

자리에 앉은 나와 유경명이 식사를 시작했다. 한 숟갈을 떠먹는다. 간장과 물엿으로 기본적인 맛을 낸 듯한 덮밥은 대단히 기묘한 풍미였다. 끈적한 상태를 만드는 데에는 물엿이 아니라 녹말을 쓰는 것이라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유경명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그릇을 싹 비우지 않으면 죽는다는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실제로 유경명은 아무런 지체 없이 숟가락을 옮겨, 맛있는 게덮밥 잘 먹었다고 나리에게 빈 그릇을 내밀었다.

한숨을 쉰 나는 달콤한 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넌 다음 주부터 나랑 어디 좀 가자.”

먹으면 먹을수록 농담 같던 걱정이 진지한 것이 되었다. 유경명이라는 핵심 전력에게 하루 세끼 이런 것을 먹였다간 정말로 작전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지금 이 아이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유설 선생님의 요리 수업 시간이었다.

선배에게 문자를 넣자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나는 저녁이 다 된 뒤에야 아이와 유경명에게 손을 흔들며 돌아갔다.

* * *

월요일 아침. 교탁에 선 한시혁이 말했다.

“1학기가 끝나기 전, 외부 초청 발표회를 한다.”

한시혁이 포인터를 누르자 화면에 영상이 재생되었다. 기사육성과 2학년들이 작년에 했던 발표회의 영상이었다.

영상 곳곳에는 아는 얼굴도 몇 명 보였다. 눈의 여왕 분장을 하고 주문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하는 유설이나, 카운터에 서서 지폐를 세고 있는 배은호. 반 애들이 홀린 듯이 영상을 바라보고, 안내하는 유인물을 나누어준 한시혁이 말했다.

“각 반에서 합동 무대 하나, 시설 하나, 노점 하나를 기획해, 학생 전원이 어느 한쪽에는 참가해야 한다. 개인 참가 또한 받는 중이니 관심 있으면 반장을 통해 물어보도록.”

그리고 칠판 앞에 나간 주하리가 무대, 시설, 노점이라는 세 글자를 썼다. 기사육성과라는 이름에 아깝지 않게, 매년 무대와 시설들은 주문들로 특수효과를 준 검무나 환술을 통한 담력시험 등, 학생들의 혈통능력을 이용한 개성 있는 것들을 올리고 있었다. 비교적 제일 수수한 것이 노점이었다.

“다음 주까지는 인원 변경이나 조율이 가능하니까, 먼저 희망하는 쪽을 가르쳐주면 좋겠어. 한쪽에 너무 몰리지 않게 조율해야 하거든.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도 손을···.”

반장의 말에 아이들이 웅성웅성 떠들었다. 이제 순위전이 끝난 데다 다른 평가 항목들도 대부분 막바지에 들어간 시점이었기에, 성적 관리 시즌이 끝났다는 해방감이 교실에 만연해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연신 손을 들며 의견을 냈다.

“···드디어 내가 나설 때가 됐나.”

자세빈이 조용히 자신의 마이크 검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옆자리에 앉은 차대엽은 이쪽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넌 어느 쪽으로 가려고?”

“난 노점이나 하련다.”

내가 책상에 반쯤 엎드린 채 대답했다. 학창생활을 즐기는 것도 좋은데, 솔직히 지금은 다른 일에 손 벌릴 여유가 없었다. 시설 쪽이든 무대 쪽이든 준비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노점도 서빙, 주방, 총무 전부 해야할 일이 산더미긴 했지만, 행사 당일에 일이 몰려있으니 다른 스케줄에 그리 영향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날 노점에서 일해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손님이 있었다. 차대엽이 의외라는 듯 대답했다.

“무대 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네가 나가서 검무나 춰. 어머니랑 형이랑 보러 오실 텐데. 너네 형이 뭐든지 절단하는 뭐시기로 1등 했었지?”

쇠창살이나 단단한 돌덩이 같은 것들을 비롯해, 관객들이 준비한 어떤 물건이든 그 자리에서 칼로 잘라버리는 묘기. 난타 공연처럼 진행하다 결국엔 마술쇼 비슷한 분위기가 됐지만, 그건 속임수도 뭣도 없이 그냥 차대운이 진짜로 자른 거였다. 그 인간 신검으로 못 자를 물건은 별로 없으니까.

의견을 받은 주하리가 칠판에 이름을 적어가자, 반 애들의 이름은 거의 전부 무대와 시설 팀에 몰려있었다. 노점은 힘들고 재미도 없고 발표회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도 못하니까. 고개를 돌려보자, 어느 한쪽에 학생들이 다들 몰려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노점 쪽으로···.”

유매는 사람이 많아 두통이 인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 있었다. 차갑게 쏘아붙이는 말에도 반 아이들은 끈질겼다.

“안 돼! 너는 우리 학년 얼굴이라구!”

“제발 부탁이다. 너처럼 온갖 주문 다 쓸 수 있는 애가 어디 있냐. 너 있으면 진짜 끝내주는 거 만들 수 있어.”

“시설 쪽은 미리 준비하면 되잖아! 무대는 그 자리에서 해야 한다고! 귀찮은 거 하나도 안 시킬 테니까···.”

그야 교수진들보다 더 마력 제어를 잘하는 유매는, 무대 팀이든 시설 팀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보하고 싶은 인재였다. 사실상 유매 하나만 있으면 주문을 통한 어떤 연출이든 마음대로 가능하니까. 선택지 자체가 몇 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반 애들이 유매에게 말을 거는 일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말 걸면 죽인단 표정을 하고 있을 테니. 지금도 까칠하긴 하지만 저런 상황에 화내지 않고 입을 다물 수 있을 만큼은 성격이 누그러졌다.

짝짝, 박수를 쳐서 아이들을 집중시킨 주하리가 말했다.

“으음···. 그러면 아무 데나 상관없는 사람들은 우선 노점 쪽에 이름을 적을게. 그리고 무대, 시설, 노점 각 팀에서 한 명씩 팀장을 정해야 하는데. 할 의향이 있는 사람? 일단 팀장이 되면 다른 팀으로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점 유의해줘.”

애들이 마구 손을 들고 지원했다. 그야 팀장이 되면 자신이 원하는 의견대로 올릴 무대나 시설을 결정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특히 자세빈이 당당하게 손을 들고 자신이야말로 무대의 왕에 어울린다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노점 쪽에서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야 노점 쪽에 지원한 건 대부분 시간을 뺏기기가 싫은 사람들이었다. 단련을 하든 다른 일을 하든, 굳이 노점 파트를 선택해놓고 사람들을 조율해야 하는 팀장 자리를 떠맡기는 싫다는 것이다.

“음, 무대랑 시설 팀은 이따 정하고, 노점 쪽은···.”

노점 쪽에선 정말 아무도 없는 건지 주하리가 곤란해하며 웃고 있을 때, 누군가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고개를 돌려 손을 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해본 나는 살짝 놀랐다.

자리에선 은세연이 가만히 칠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 군청일화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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