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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63화 (63/113)

< 군청일화 (2) >

방과 후, 나는 노점 팀 멤버들이 모인 빈 강의실에 앉아있었다. 화이트보드 앞에선 은색 머리칼을 목덜미 부근에서 양갈래로 묶은 꼬맹이가 땅바닥에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은세연.

세한기전 1학년 시나리오의 최종 보스이자, 차대엽도 유매도 감당할 수 없는 유해 무기를 비장의 수로 숨기고 있는 녀석. 기본적으로 주하리 뒤만 졸졸 따라다니기에 제대로 말하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점 팀 팀장이라니.

‘뭔가가 바뀐 건가.’

원래대로라면 적어도 2학기 중간까지 은세연이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 내가 개입했기 때문인가. 하지만 내가 한 일이라고는 주하리가 발작에 괴로워하지 않도록 만들어준 것 정도였다. 나는 쩝 입맛을 다시고 은세연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녀는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혈통시대에 등장하는 은세연은 은세연 본인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가보인 인형에 닿은 것만으로 정신까지 동조한 천재 인형사는, 인형에 깃들어있던 의사 인격에게 그 몸을 빼앗겨버린다. 손을 대자마자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인형 내부에서 기능을 관제해줄 의사 인격이 빠져나간 탓에, 기동한 유해 무기는 제어를 잃고 폭주해 주인 외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렇게 거미 혼혈의 명가로서 이름을 떨치던 은세연의 본가는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었다.

도를 넘어선 재능이 일으킨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였다고 해도, 조금만 더 인형에 감응하는 능력이 떨어졌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겠지.

즉 지금 내 눈앞에 서있는 은세연은 은세연 본인이 아니라, 자신을 깨운 주인에게 몸을 돌려주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는 꼭두각시 인형의 의사 인격이었다. 그러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건 참극의 현장에 같이 있었던 주하리 한 명 뿐이다.

인형 인격인 은세연이 본래 자신의 몸이라 할 수 있는 유해 무기를 꺼내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사용하면 어떤 적이든 간단히 쳐부술 수 있겠지만,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인형을 꺼냈다간 그 뒤에 참극이 되풀이될 테니까.

은세연은 무슨 일이 있어서 인형이 다시 폭주했을 경우 주하리에게 주인째로 자신을 죽여서라도 멈추어달라 부탁했고, 결국 종업식을 앞두고 주하리는 그 약속을 지키게 된다.

그런 사정이 있기에 은세연은 지금 자신이 주인의 몸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죄의식에 빠져있다. 주인의 삶을 망치고 싶지 않기에, 꼬박꼬박 학교에 나와 거미 혼혈의 혈통능력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조용히 조사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생각하고 있으니, 빈 강의실에선 이미 은세연 앞에 학생들이 줄줄이 모여있었다. 발표회 당일 비는 시간대나 나와서 도와줄 수 있는 날을 알려달라는 말에, 다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친구들이랑 따로 무대를 준비하거든.”

“매일 레슨이 잡혀있어서···.”

“미안하다. 선도부 때문에. 당일에도 힘들 것 같군.”

뭐, 이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무대나 시설 쪽은 기간 안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간 대참사가 나지만, 노점의 경우엔 준비가 부진해도 적당히 메꿀 수가 있다. 진짜 최악의 경우 그냥 커다란 아이스박스 하나 가져다두고 아이스크림만 팔아도 구색은 갖춰지는 거니까.

여기 있는 녀석들도 그걸 아니까 노점 쪽에 지원했을 테고, 정말로 사정이 여의치 않은 녀석이건, 딱히 발표회 준비 따위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은 녀석이건 우린 힘드니 의욕 있는 놈들끼리 적당히 알아서 해달라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툰 은세연은 그냥 알았다 끄덕끄덕 하고 보내버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설득하며 조금 더 나와줄 수는 없냐고 설득할 수완을 가진 사람은 좀처럼 없을뿐더러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되도 않는 핑계만 대도 그냥 알았다 통과시켜주는 걸 보고 원래 그럴 생각이 없었던 녀석들도 별 이상한 이유를 갖다 붙여서 나오지 못한다 하고, 이제 와서 너희들은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은세연은 또 알았다고 끄덕이며 보내버린다.

“도와줄 수 있을 땐 와서 도와줄게. 진행상황 보내줘!”

“응···.”

은세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과후의 강의실에 남아있던 아이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떠나갔다. 완전한 악순환이었다. 눈치채보면 강의실에 남아있는 것은 나와 은세연 뿐이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한숨을 쉬며 은세연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다들 사정이 있다는데···.”

“거기다가 기각이라고 하는 게 팀장 일이겠지.”

하긴 아무도 안 나서서 팀장을 맡은 애한테 뭐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정말 문제였다. 다들 시간 날 때는 틈틈이 도와주겠다는 말을 했지만, 당연히 그런 걸 실제 전력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고 둘이서 준비부터 오픈까지 전부 해내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 번 뒤집어 엎어버려서 나간 놈들을 강제로 다시 끌고 온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절대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되진 않겠지. 대판 싸움이 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 사이에서 조율해야 할 주하리는 아주 죽어나갈 테고.

‘일단 제대로 노점을 내기는 해야 돼.’

발표회 때 만나야 할 인간이 있다. 손님을 아예 못 끌 수준 이하의 물건을 내면 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외부 인력이라도 빌려올까 고민하던 도중 강의실 문이 열렸다.

“역시. 제대로 안 돌아갈 거라 생각했어.”

나는 놀라서 문 쪽을 돌아보았다. 나와 은세연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것은 담민우였다. 옆에는 사은품으로 현미나까지 끌고 왔다. 졸린 눈을 한 담민우가 말했다.

“반장한테 말해서 바꾸고 왔어. 우리 왕자 놈은 혼자서도 잘 할 것 같으니까. 도와주러 간다니까 흔쾌히 놔주더라.”

그리고 담민우가 허리에 끼고 있던 커다란 종이를 책상에 펴놓았다. 종이의 내용은 세한기전 캠퍼스의 지도였다. 그리고 지도의 한 구석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다른 종이들을 몇 장이나 책상 위에 놓아둔 담민우가 말했다.

“우리 반에 배정된 부지가 여기야. 플라스틱 의자랑 테이블은 작년에 쓰던 비품이 남아있다고 하고, 텐트는 크기에 따라서 신청서를 넣어야 하는데···. 이건 일단 콘셉트랑 제공할 메뉴를 정해야 회전율이든 뭐든 따져볼 수 있겠지.”

나와 은세연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담민우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뭐든 자기 쪽에서 나서려는 생각을 안 해서 문제지, 이 녀석은 요령도 스펙도 우리 반에서 손꼽히게 좋은 녀석이었다. 그 깐깐한 자세빈의 오른팔이 될 만도 했다.

“네가 그냥 팀장 할래?”

혼자 실무 다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내 말에 은세연 또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현미나는 담민우 대단하지, 하고 자신이 조사한 일인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뭘 결정해야 하는 입장은 거북해서.”

저렇게나 우수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남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별종이었다. 그리고 담민우가 은세연 앞에 놓여있는, 애들이 적어놓고 간 사유서들을 훑어봤다. 휙휙 종이들을 넘겨보며 내용을 확인한 담민우가 콧숨을 내쉬었다.

“장난 아니네.”

“그래. 장난 아니야.”

인원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진행 자체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사유서들을 정리해 제자리에 놓은 담민우가 말했다.

“사람이 생각보다 적긴 한데, 의견만 많아봐야 배가 산으로 갈 뿐이니까, 우리 쪽은 우리 쪽대로 장점을 살리자.”

실제로 무대 팀과 시설 팀에선 이미 의견이 맞는 녀석들끼리 파벌이 생겨 전쟁 비슷한 게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두 사람 또한 사실 자세빈의 데스메탈 콘서트 따위를 진지하게 지지하고 싶지 않아서 슬쩍 도망친 거라는 뒷얘기를 들었다.

혈통시대에서는 발표회에서 준비하는 기획에 따라 보상의 종류나 동료들의 목록이 달라지기에, 원하는 기획을 밀어붙이려면 다른 패거리들과 대련해서 이겨야 했다. 무엇보다 각 분야에서 우승을 차지한 팀에겐 학장이 특별한 보상을 준다.

자료들을 취합한 담민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조리에 너무 시간이 걸리지 않으면서, 적은 인원으로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동시에 만드는 것도 용이한 메뉴. 기본적으로 반죽을 넣고 기다리면 되는 계란빵이나 타코야끼 같은 게 제일 무난하겠지. 사람도 그다지 많이 필요 없고”

확실히 그것이 최선 같기는 했다. 손님이 서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완성되면 그대로 받고서 떠나가는 방식. 애초에 우리는 인원이 인원이니, 좌석을 만들어 앉은 손님들이 취식하는 구조로는 서빙에 필요한 인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나쁘지는 않았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다는 점을 빼고선 말이다. 발표회 날에는 비가 온다. 예보에선 올 가능성이 없다고 했는데도 억수로 쏟아져내린다.

담민우의 말에 현미나가 손에 턱을 괴고 말했다.

“그걸로 노점 내면 우승은 물 건너 가겠네.”

“그렇겠지. 아무 특별할 게 없으니까.”

“아아~ 부상 받고 싶었는데.”

현미나가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움찔, 하고 어깨를 떨었다. 나는 놓치지 않고 휙 고개를 돌렸다. 화이트보드 앞에 서있는 은세연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은세연에게 말을 던졌다.

“팀장님 의견은 어때?”

놀란 은세연은 황급히 고개를 내려 바닥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가만히 기다리자, 은세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제 넘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보드마카를 꼭 쥐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최대한 우승을 목표로 힘내고 싶다고··· 생각해.”

고개를 든 얼굴엔 단호한 의지가 비쳤다. 뭐가 은세연을 저렇게 만들었는진 모르지만, 상당한 결심을 하고 팀장이 된 것 같았다. 팀장의 결의에, 내 옆쪽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시나리오 퀘스트 : 외부 발표회 (노점)>

<발표회 준비에 참가하여 상위 입상에 기여하시오.>

<보상 : 15,000 Credit>

담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합리적이라 생각되는 의견을 제시할 뿐, 판단하고 결정하는 건 팀장의 몫이라는 태도였다. 책상에 늘어져있는 현미나가 말했다.

“그래도 무리잖아. 고작 넷이서 제대로 된 노점을 열겠다는 건. 장보기쯤은 내가 몇 번이든 뛰어갔다 올 수 있지만, 서빙은 빠르게 뛰어다닌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그야 늑대 혼혈인 현미나라면 접시의 내용물을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고 총알처럼 뛰어다니며 십수 명의 요리를 서빙하는 묘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옆에서 느긋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담력 있는 손님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머리에 하나의 발상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 부분은 기사육성과답게 가보자고.”

그리고 내가 말한 언뜻 허무맹랑해보이는 아이디어에, 은세연은 가능할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며칠 뒤, 작업의 진척을 확인하러 온 주하리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대단해···!”

아직 발주를 넣은 텐트도 받지 못한 상황이지만, 일단 빈 강의실의 책상들을 몇 개씩 모아 테이블 비슷한 것을 만들어놓고 시험적인 운용을 하고 있었다. 강의실 안에서는 사람 키의 반 정도 될 듯한 고딕 풍의 인형들이 접시를 날랐다.

수많은 인형들에 따로따로 명령을 넣으며 움직이고 있는 건, 뒤편의 의자에 눈 감고 앉아있는 은세연이었다. 테이블까지 접시와 찻잔을 가지고 온 인형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주하리가 빙그레 웃으며 인형에게 손을 흔들었다.

“엄청 좋은 것 같은데! 이런 건 기사육성과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방식이고. 제공할 메뉴들도 다 정한 거야?”

주하리의 말에 옆에 앉아있는 내가 대답했다.

“홍차나 팬케이크 같은 것들로 좁혀지고 있어. 담민우가 이런 건 제대로 컨셉을 잡아서 개성을 보여줘야 손님을 확 끌어모을 수 있을 거라고 해서. 텐트 겉이랑 노점 안을 중세풍으로 어떻게 꾸며볼 수 없나 리서치 좀 하겠다나.”

구원투수로 와준 것치고 담민우는 대단히 열심히였다. 상당히 고급으로 보이는 홍차 잎도 준비해주었다. 일단은 매상을 올리려고 운영하는 노점에 이런 걸 가져오면 단가가 안 맞을 것 같은데. 찻잔을 보며 웃던 주하리가 내게 물었다.

“그러면 너는 뭐해?”

나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이내 바닥에 있던 가방에서 후라이팬과 뒤집개, 요리 도구가 휘리릭 튀어나와 공중에 떠올랐다. 손목의 염주가 녹색으로 빛났다. 필요한 레시피들은 숙지해둔지 오래다. 몇 인분이든 올 테면 와보시지.

“주방장 송한솔, 출격 완료.”

나는 주하리를 향해 승리의 브이사인을 내밀었다.

* * *

발표회 준비도 중반에 접어들었다.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제대로 잡히기 시작하자, 진소란을 비롯해 사정이 있어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인간들도 조금씩 시간을 내서 텐트 건설과 꾸미기를 도와주고 있었다.

몇 발짝 떨어져 상황을 잘 살필 줄 아는 은세연과, 무슨 일이든 앞에 나서서 맡는 현미나는 꽤 궁합이 좋았다. 두 사람의 지휘 아래 현장은 척척 진행되었다. 텐트의 디자인과 동선을 염두에 둔 테이블의 위치 등은 담민우가 전담했다.

중간에 들린 자세빈은 선심 썼다는 듯 절대 깨먹지 말라고 당부하며 고급 티세트 여러 개를 던져주고 갔다. 눈치를 보아하니 담민우가 은근슬쩍 부탁한 듯 했다. 정말 담민우가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 안 갔다. 나는 사정이 있다 말하고 오늘 오후의 작업에서는 잠깐 빠져나온 채였다.

“그래서 동화 컨셉으로 갈지 좀 무서운 고딕 컨셉으로 갈지 아직도 싸우고 있다니까. 마법의 커튼을 들추니 안에 동화 속 나라가 있다는 컨셉이면 무조건 통한다 그러고. 근데 은세연이 가져온 인형 컬렉션들이 좀 섬뜩하게 생겼거든.”

“···그렇군. 노점 쪽도 재미있었겠네.”

나와 같이 밤거리를 걷고 있는 건 차대엽이었다. 당연히 이런 수다나 떨려고 부른 것은 아니다. 세한기전의 발표회에 맞춰 또 개짓거리를 준비하고 있는 녀석들이 있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사설 용병업체다. 웃기지도 않은 자작극으로 발표회를 망친 뒤, 둥지에서 마물을 잡는 것밖에 모르는 코흘리개들을 키우는 학교엔 자신들같은 프로들의 경호가 필요하다고 강론하려는 것이다.

학생들이 열심히 준비한 발표회를 회사 홍보용 재료쯤으로 취급하는 만행에 학장은 대단히 분노하고, 천년서생이라는 마법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키게 된다. 그 날 빌딩 하나가 통째로 얼어붙었다.

나는 차대엽에게 어깨를 으쓱이고서 말했다.

“뭐, 저번에 내가 납치당한 것도 있고. 바깥에선 상당히 민감해져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일어날 낌새만 보여도 발표회가 중지될걸. 대응 문제로 뭐라 할 테니까.”

“네 책임이라 생각하고 있는 거야?”

“설마. 그래도 아는데 안 막을 순 없잖아.”

지금도 캠퍼스에서는 밤늦게까지 남아있는 녀석들이 모여서 텐트 뼈대를 세우고 표지판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걸 뻔히 아는데 발표회의 하이라이트에 똥을 묻히려는 놈들을 마음대로 하라고 놔둘 수는 없었다. 내가 차대엽에게 말했다.

“사건이 벌어질 뻔했다는 정황만으로 발표회는 취소야. 어디서 이렇게 다치고 왔냐고 추궁당할 상처를 입으면 안 돼. 우리가 싸웠다는 사실 자체를 들키면 아웃이니까.”

“난이도가 높은데.”

“자신 없으면 빠지고.”

“단련하는 데는 그 정도가 딱 좋아.”

차대엽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발표회 날 자작극을 벌이려는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작전 지역이 잘 보이는 뒷산 너머에 진을 친 인간들은 공사하다 만 커다란 건물의 부지를 임시 거처로 이용하고 있었다. 옆에는 헬기까지 한 대 수배해둔 상태였다.

“학생들 추억 망치겠다 작정을 하셨어.”

다 큰 아저씨들이 정말. 비난을 감수하고 회사의 이름을 알리려는 목적이었겠지만,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저치들도 어차피 비즈니스로 하는 짓이니 대화로 잘 타이르면 돌려보낼 수 있겠지만, 일단 대화의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 필요한 게 폭력이었다.

차대엽이 손바닥에서 신검을 발현시키고, 나도 가져온 물건을 꺼냈다. 차대엽이 놀라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건···.”

“드디어 써볼 기회가 왔다는 거지.”

신검 안의 정령이 내 말에 반응하듯 검신을 우우웅 떨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초대 검성의 신검은 순식간에 수많은 단검의 형상으로 변환되어 내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나와 차대엽이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 군청일화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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