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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65화 (65/113)

< 생이유상 (1) >

나는 캠퍼스 부지에 서있는 커다란 텐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노점 팀이 준비한 텐트는 학교 축제 같은 곳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캐노피 형태의 천막이 아니라, 사방이 벽면으로 막혀 정말 가건물이란 느낌이 드는 구조물이었다.

방수천의 원단부터 신경을 쓴 건지 텐트는 상당히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안쪽에서 점쟁이들이 수정구나 타로카드를 매만지고 있을 법한 느낌이었다. 적어도 캠퍼스 안의 노점들 중에선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나는 텐트 안에 들어갔다.

“학생들끼리 만든 수준이 아닌데···.”

넓찍한 안쪽에서 천장을 올려다보자, 전혀 문외한인 내게도 설치하느라 고생한 게 뻔히 보일 만큼 복잡한 구조의 서까래가 보였다. 사실 나는 말뚝 박고 기초 뼈대를 세울 때에만 얼굴을 내밀었기에 완성된 노점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체력적인 면에서는 초인이나 마찬가지인 놈들만 모여있는 게 세한기전이니, 이런 몸 쓰는 일에 대해선 내 상식을 가볍게 뛰어넘는 편이 당연한 일 같기도 했다. 나는 바닥에 놓인 커다란 가스통을 주먹으로 퉁퉁 두드렸다.

“좌석에서 주방이 훤히 보이는구만.”

“능력을 써서 조리하는 과정도 퍼포먼스 비슷하게 보여주고 싶거든. 아마 입소문 엄청 탈걸. 일단 이거 입어.”

담민우가 내게 쇼핑백을 건넸다. 카운터를 맡은 담민우는 이미 집사 풍의 연미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박쥐 혼혈 특유의 창백한 인상과 새까만 양복이 상당히 잘 어울렸다.

나는 받은 의상을 확인했다. 멜빵이 달린 반바지와 나비넥타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부츠, 끝부분에 나뭇잎 한 장이 달려있는 얇고 기다란 원통형 나뭇가지. 나뭇가지는 얼굴에 붙일 소품인지 양쪽에 투명한 고무줄이 걸려있었다.

봉투의 내용물을 꺼내본 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 이게.”

“특수분장용 접착제를 준비하려 했는데 그건 너무 나가는 것 같아서. 학교 행사 분위기엔 그 정도가 딱 좋지 않겠어?”

“그게 아니라, 이걸 입으라고?”

내 시선을 받은 담민우가 연극조로 손을 올리고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게 된 목각인형. 저주로 잠든 아가씨가 일어나길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그녀가 좋아하던 팬케이크와 홍차를 계속 준비한다는 설정. 비극의 주인공이지.”

“언제 그런 스토리까지 만들었냐.”

담민우가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테이블 한쪽에 가득 쌓인 팜플렛 한 부를 집어들었다.

메뉴와 가격표가 적힌 팜플렛엔 가게의 컨셉과 스토리가 간략하게 쓰여있었다. 마음씨 고운 아가씨는 나쁜 마녀의 저주를 받아 영원한 잠에 빠지고 말았지만, 인형들은 멈추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의 시중을 계속 들고 있다···. 달콤한 케이크와 홍차를 만드는 건 사랑에 빠진 개구쟁이 목각인형.

나는 담민우에게 진지한 얼굴로 제안했다.

“설정을 바꾸자.”

“이제 와서 재인쇄 못해. 갈아입고 와.”

결국 한숨을 쉬고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풍선이라도 넣은 것처럼 부풀어오른 반바지와 멜빵, 우스꽝스러운 부츠에 코에 달려있는 나뭇가지까지. 상당히 굴욕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회의에서 정한 대로 따르겠다 말한 건 나였다.

다시 텐트로 돌아오자 수많은 인형들이 테이블 사이를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예행연습에선 문제가 없었다고 하지만, 당일 아침이니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은세연은 가게의 장식품처럼 한쪽 안락의자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무릎 위의 두꺼운 책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잠든 것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 탓에 누가 보면 정말 인형이라 착각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형 맞긴 한데.’

저렇게 앉아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가게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인형들을 제어하고 있는 게 바로 은세연이었다. 오히려 할 일이 너무 많아 은세연 혼자 잘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게 걱정이었다.

갈아입고 돌아온 나를 보고 현미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여도 같은 반 친구가 얼굴에다 피노키오 코 같은 걸 달고 나타나면 저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담민우는 나를 자리에 앉힌 뒤 정말 인형처럼 보이도록 얼굴에 분장을 해주었다.

“별 걸 다 할 줄 안다, 너.”

“뭐든 어중간하니 할 줄 아는 거라도 많아야지.”

담민우는 담백하게 대답했지만 이 녀석은 뭐든 어중간한 게 아니라 뭐든지 잘 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우수한 능력을 평소에는 요만큼도 발휘할 생각이 없다는 게 흠이었다.

“이 정도면 됐나? 손은 장갑으로 가려.”

이내 담민우가 거울을 보여주었다. 갈색과 검은색 선으로 붓질된 내 얼굴은 멀리서 봤을 땐 정말 나무로 되어있는 것 같았다. 입꼬리 쪽에선 새까만 선을 내려그어, 호두까기 인형처럼 턱이 얼굴과 분리되어있는 듯한 굴곡이 생겨났다.

분장을 끝낸 나는 주방에서 조리도구를 늘어놓았다.

팬케이크는 일단 외견에서 흥미를 끌기 위해 푹신하게 부풀어오른 수플레 팬케이크를 주력으로 정했다. 머랭은 치는 데에 수고가 들고 미리 반죽을 만들어놓을 수도 없었지만, 조리 과정을 볼거리로 제공할 거라면 상관없는 문제였다.

계란과 우유를 비롯한 재료들의 재고를 점검하고, 가스불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문제는 없었다. 나중에 합류하기로 한 녀석들을 위해 유설 선배의 조언을 받아 노점용으로 개량한 팬케이크의 레시피를 주방 한쪽에 붙여놓았다.

그리고 미리 구워서 가져온 쿠키들을 소분했다. 사실 반 정도는 유설 선배가 구운 것이었다. 쿠키의 경우 팬케이크와 달리 플레이팅만 해서 내가면 되기에 편리했다. 개시 시간이 임박하자 우리는 다같이 모여 파이팅 구호를 외쳤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누군가가 천막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리에 서있던 인형들이 첫 손님을 향해 끼리릭 고개를 돌렸다. 나는 후우 숨을 내쉬고 집중했다.

수많은 조리도구들이 내 주변에 둥실 떠올랐다.

* * *

개시 두 시간 후. 주방은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예고 없는 소나기 탓에 캠퍼스를 거닐던 사람들은 어디 앉아있을 만한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다 천막 안으로 찾아왔다. 개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테이블은 아까부터 만석이었다. 그나마 회전율이 낮다는 게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손님들은 테이블에 앉아 이쪽을 쳐다보며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 인형 분장을 한 내 주변에선 공중에 뜬 계란이 서로 부딪혀 깨지더니 흰자와 노른자가 분리되고, 여러 그릇에서 동시에 머랭을 만들며 뒤집개가 수플레 반죽을 굽고 있었다. 휙휙 날아다니는 키친타올이 기름을 닦았다.

완성된 팬케이크에는 슈가파우더를 뿌린 뒤 메이플시럽, 딸기, 생크림 중 하나를 위쪽에 끼얹어서 제공했다.

착착 플레이팅이 끝난 접시를 앞에 놓으면 기다리고 있던 인형이 받아서 테이블로 가져갔다. 당연하지만 인형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에, 카운터에 선 담민우가 포스 앱과 연동해 내 핸드폰에 주문사항을 전달했다. 염력이 쉴 틈이 없었다.

끼릭대며 걸어간 인형이 서빙을 끝내고 허리를 숙이면, 받은 손님은 신기해서 짝짝짝 박수를 쳤다. 인형이 모자를 벗으며 화답했다. 확실히 다른 데선 못 해볼 구경이기는 했다.

“인형아. 고마워.”

손님 중에는 아는 얼굴도 몇몇 보였다. 그냥 한가한 학생들을 비롯해 모든 노점들을 다 둘러보는 학장과 교수진들. 구석 테이블에선 유경명과 함께 발표회에 놀러온 나리가 서빙해준 인형에게 마주 인사했다. 내가 권유한 것이기에 대화하러 가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 눈으로만 인사했다.

‘이거 진짜 힘든데···.’

투시, 텔레파시, 염동력, 의식 제어와 병렬 사고, 조리 기구와의 동조, 심지어 초감각까지. 지금까지 단련해온 모든 능력을 골고루 다 써야 하는 극한의 훈련 메뉴였다. 무엇보다 기본 염력의 양이 크게 늘지 않았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의 피크타임이 지난 뒤, 꽉 차있던 손님들이 점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휴식 및 식사시간 확보를 위해 좀 전부터 더 이상 입장을 받지 않았다. 주문이 들어오지 않으니 주방 담당인 나는 자연스레 쉴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손님은 선이 가늘고 키가 큰 여성이었다. 한쪽 눈을 가린 기다란 청발을 허리 즈음에서 묶고 있다. 유심히 인형들을 바라보던 손님이 나에게 질문했다.

“쿠키는 수제인가. 아주 맛있군.”

“제가 만든 게 반이고 제과 선생님이 만든 게 반이예요.”

쿠키를 오독이며 씹은 손님이 내게 다시 물었다.

“혹시 포장도 되나?”

“그럼요.”

그리고 난 푸른 머리칼의 여자를 슬쩍 바라보았다. 눈동자 색도 하늘색. 확실하다. 이 사람이야말로 2학기가 끝나기 전까진 발표회에서 잠깐밖에 볼 수 없는 특별한 손님이었다.

간만에 외부 개방된 세한의 캠퍼스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돌아다니다 차대엽과 대화하지만, 결국에는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차대엽의 검무를 조금 지적해준 뒤 사라지는 인간.

‘청시아.’

나는 안쪽의 쿠키가 보이도록 반투명한 봉지에 정량을 담아 빵끈으로 묶었다. 앞에 놓자 인형이 가져가서 손님에게 건네주었다. 고맙다 인사한 손님은 의자에 앉아있는 은세연을 몇 초 동안 빤히 노려보더니 등을 돌리고 가게에서 나갔다.

나간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주하리에게 문자를 넣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손님도 빠져나가자 테이블 정리를 끝낸 담민우가 박수를 쳤다. 드디어 오전 타임이 끝났다.

“지금부터 한 시간 휴식. 밥 먹자, 밥.”

그 말에 인형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나와 현미나는 쭈욱 기지개를 폈다. 한쪽 의자에 죽은 것처럼 앉아있던 은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부르르 떨더니 다시 주저앉았다. 똑같은 자세로 몇 시간을 있다 보니 다리가 저려오는 듯 했다.

“너 진짜 대단하다. 난 도중에 쓰러질 줄 알았어.”

“생각한 것보다 바빴긴 했지.”

현미나가 나를 보고 감탄을 흘렸다. 솔직히 내 생각에도 도중에 요령을 잡지 않았으면 지금쯤 탈진해있었을 것 같았다. 현미나는 재료가 소진되는 페이스를 보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쏜살같이 장을 보러 달려갔다 와 보충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식사하러 나간 은세연을 따라갔다. 기본적으로 주하리가 없으면 무조건 혼자 먹는 게 은세연의 패턴이었다. 내가 따라붙는 걸 금방 눈치챈 은세연이 돌아보았다.

“···용무라도 있는 거야?”

“그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길가에 널려있는 노점에서 적당히 먹거리를 산 은세연과 나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캠퍼스를 걸었다. 비가 왔다 그친 탓에 벤치는 축축했다. 도서관 뒤쪽 계단의 벽에 기대 선 나는 칼집을 낸 소세지 꼬치를 한 입 베어물고 말했다.

“별 건 아니고.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로 팀장에 지원한 거야? 교실에서 딱히 말하지도 않고, 이런 거 싫어하는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뭐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나?”

원래 은세연은 2학기의 막바지까지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거미 혼혈이고 주하리의 친구라는 것 정도의 인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노점 팀 팀장까지 자처하면서 적극적으로 교내 활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순수하게 궁금했다.

“···말하는 게 싫은 건 아니야.”

내 말에 살짝 눈을 내리깐 은세연이 대답했다.

“나는 감수성이나 사고방식이 보통 사람하고는 조금 다르니까.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도록 신경쓰고 있을 뿐. 가만히 있으면 다들 자기 입맛에 맞게 생각해주니 편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면 조금 자의식 과잉이네 싶을 만한 발언이었지만, 은세연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보통 사람과는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달랐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인형 안에 들어있던 의사인격이 주인의 몸에 뒤섞인 것이니.

기본적으로 그녀는 사람을 대하는 데에 서투른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은세연이 조용한 성격인 건 맞지만 그건 소심하다기보단 냉소적인 거였다.

“사실은 친구랑 싸웠었어.”

친구가 누구인지는 굳이 말해줄 필요가 없었다. 발표회 준비 전까지만 해도 은세연은 학교에 주하리 말고 말 자체를 나누는 인간이 없었다. 은세연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싸웠다기보단 조금 서먹해진 걸까. 나한테는 태어났을 때부터 고민거리가 하나 있는데, 그 애는 둘이서 방법을 찾아내기보다 도와줄 친구를 더 찾아보는 게 어떻냐고 했거든.”

고민거리라면 은세연의 원래 인격에게 몸을 돌려줄 방법에 대한 것일 터였다. 굳이 세한기전 안이라는 조건을 달지 않아도 그 고민을 공유하고 있는 건 주하리 하나 뿐이었다.

“나한테는 그 말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어. 나한테만 매달리지 말고 자기 부담을 덜어줄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상대한테 선이 그어지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그 애한테 막말을 해버렸어.”

은세연이 내려다보던 손바닥을 꽉 주먹 쥐었다.

“그래서 그 잘난 친구들은 네가 매일 괴로워하느라 잠들지도 못한다는 걸 한 명이라도 눈치챘냐고···. 결국 아는 건 룸메이트인 나뿐이지 않냐고.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그런 말을 듣고 주하리가 무슨 얼굴을 했을지는 안 봐도 짐작이 갔다. 탓하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그냥 슬픈 표정을 지었겠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은 은세연이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답지도 않게 화가 난 거야.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애가 모두들 얘기를 할 때마다, 나는 그 ‘모두들’과 다르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어. 의지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어딘가에선 특별 취급을 받고 싶었어.”

“잘 알겠는데 팀장 한 거랑 뭔 상관이야.”

“그 애는 요즘 잘 자게 됐어.”

은세연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온몸이 이글거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어. 그 애한테는 진작에 익숙해진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편하게 눈을 감고 자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 하지만 요즘은 언제든지 잘 자. 무슨 일이 있었냐 물었더니 친구가 도와줬다고 했어. 그러니까 너도 좀 더 친구를 만들어보라고.”

그렇게 웃으며 말해줘 서먹서먹하던 사이도 회복됐다. 애초에 은세연이 혼자서 주하리를 피하던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해 조금쯤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주하리에게 한 말을 사과하기 위해서라도.

1등을 하고 싶다는 것도 그러면 주하리가 기뻐할 것 같아서겠지.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했는데 진짜 주하리 발작 고쳐준 걸로 여기까지 눈덩이가 구른 거였다. 내가 턱을 매만지고 있자니 은세연이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리가 앓던 걸 고쳐준 거, 너지.”

“알고 있는데 그렇게 돌려 말한 거였냐.”

굳이 숨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가볍게 수긍하자 살짝 눈동자가 흔들린 은세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넌··· 하리의 친구야?”

“되게 친한 건 아니고 그냥 반 친구.”

“나도 일단은 같은 반인데.”

“같은 노점 팀이기도 하지.”

내 대답에 은세연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

“그러면 혹시. 내 고민을 말하면 도와줄 수 있어? 전혀 믿기지 않을 테고. 무슨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하리를 고쳐준 너니까, 만에 하나 도와줄 수 있다면···.”

“무슨 고민. 네 정체가 주인 몸에 깃든 인형인 거?”

내 말에 동그랗게 뜬 은세연의 눈동자가 강하게 떨렸다. 어떻게 알았냐,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 등 수많은 의문이 얼굴에 떠올라있었지만 결국 은세연의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잠깐 고개를 푹 숙였던 은세연이 다시 얼굴을 들었다.

“응. 도와줘.”

“좋아.”

어차피 은세연이 상관하지 말라 발광을 해도 내 사정 때문에 해결해야 했을 문제였다. 나는 협력 관계가 되었다는 의미로 은세연에게 악수를 내밀었다. 잠깐 무슨 의미인지 고찰하는 듯 내 손을 바라보던 은세연이 강하게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쿠키를 오독이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랬군.”

한 순간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서 물에 씻기듯이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푸른 머리카락에 하늘색 눈동자를 하고 있는 조용한 분위기의 여자.

“어···?”

그리고 나와 악수한 은세연이 멍하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고드름 비슷한 꼬챙이가 등 뒤쪽에서 앞까지 꿰뚫어 튀어나와있었다. 은세연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저만한 수의 인형들 전부에게 일일이 동조해 관리하다니. 아무리 거미 혼혈이라도 보통 인간의 사고회로로는 불가능한 일이지. 애초부터 인형에 가까운 정신이 아니라면.”

얼음검을 든 여자의 목소리는 지극히 냉정했다. 아까와는 달리 그 양쪽 뺨에는 짙은 푸른색의 비늘이 덮여있었다.

“은가를 괴멸시킨 유해 무기 주검각시. 주인을 해치고 껍질을 뒤집어쓴 인형이 학교 생활을 즐기고 있다니 혐오스럽기 짝이 없군. 청룡의 권한으로, 지금 여기서 배제하겠다.”

누구에게 물어도 혈통시대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혈통이자, 이 세상에 단 넷밖에 존재하지 않는 최강의 혼혈.

용족 혼혈, 청시아가 은세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 생이유상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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