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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66화 (66/113)

< 생이유상 (2) >

용족 혼혈은 혈통시대에서도 예외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애초에 온 세상을 통틀어 단 넷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하나의 혼혈으로 쳐줘야 할지 말지조차 논의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태어나는 과정부터가 특별했지만,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그 압도적인 전투능력과 사명감에 있었다.

용들을 자신들을 세계의 수호자라고 불렀다.

그건 입만 번드르르한 소리나 잘난 척, 정치권력을 가져오기 위한 강자의 폭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용들은 실제로 이대로면 큰일이 나겠다 싶은 위기상황에 몇 번이나 세계를 구해냈다. 마음만 먹으면 한 나라와도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서, 오로지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만을 배제했다.

조금 과장해 세상의 조화를 지키는 데에 미친 변태들이었다. 기본적으로 ‘지키는 일’의 방식이나 취향엔 개체차가 있었지만, 절대적인 원칙 한 가지만은 존재했다. 세계를 뒤흔들 만한 재앙이 터지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배제하는 것.

요괴라는 족속들이 세상의 겉무대로 나오는 걸 극도로 꺼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용들은 하나하나가 대요괴가 이끄는 백귀야행도 섣불리 건드릸 수가 없는 괴물이었다.

물론 대요괴 및 그들이 이끄는 백귀야행을 일방적으로 학살할 수 있을 만큼 전능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세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적과 굳이 충돌하는 건 절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만큼 용족이란 존재는 강대했다.

“청룡인 청시아다. 죽어야 할 이유는 너도 알겠지.”

그리고 세상에 넷밖에 존재하지 않는 용 중의 하나가 은세연의 등 뒤에서 그녀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어···?”

“고통은 느껴지지 않을 거다. 통각 또한 네 주인의 몸을 빼앗아 얻은 것이지. 살인자 인형에게는 과분해. 지금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 너에게는 물어볼 것들이 많으니까.”

청시아가 차갑게 말했다. 도서관 계단 위쪽에서는 사람들 몇 명이 서성이고 있었지만, 이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캠퍼스 한복판에서 사람을 찌르고 있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큰 소리를 내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은세연 또한 청시아가 자신을 찌를 때까지 등 뒤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이 청룡이 지니고 있는 혈통능력 중 하나였다. 명경지수. 자신을 비롯해 지정한 대상이나 범위의 존재감을 완전히 지운다. 직접 접촉하지 않는 이상 원하는 상대에게만 자신의 모습이 보이고 들리게 할 수 있다.

지금은 아마 자신뿐만 아니라 나와 은세연까지 능력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을 것이다. 비명을 지르거나 고함을 쳐도 위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겠지. 직접 다가가 몸을 흔들면 느낄 수 있겠지만, 눈앞의 그녀는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은세연의 발밑에서 마법진이 그려졌다.

주인의 몸이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비활성화 상태로 은세연과 연결되어있던 꼭두각시가 강제로 눈을 떴다. 아직 인형의 몸체에 남아있는 최소한의 자기방어 기능이 깨우면 안 될 꼭두각시를 깨우고 말았다. 나는 자연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 인형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어두운 보랏빛 면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인형. 손에는 핏물처럼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붉은색 검을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불길함과 섬뜩함이 풀풀 전해져왔다.

“그 새빨간 검과 면사. 주검각시가 확실하군.”

청시아가 말했다. 인형이 나타나자마자 은세연의 가슴에 꽂혀있던 고드름 같은 검은 사라지고 상처가 수복되었다. 주인이 얼마나 다치든 간에 상관없이, 마력을 강제로 쥐어짜 상처를 수복시키며 적을 전부 죽이는 데에만 집중한다.

유해 무기 중에서도 특히나 치명적이고 위험하다고 평가받는,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가보로 전해내려오던 불길한 꼭두각시. 차대엽도 유매도 저 인형에는 손조차 댈 수 없었다.

면사포를 덮어쓰고 있는 인형은 자기방어를 작동시킨 적을 최우선적으로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주검각시는 흐느적흐느적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눈을 깜빡이면 전혀 다른 위치에 있을 정도로 순간적인 가속이 섬뜩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주검각시가 붉은 검을 위에서 내리쳤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검은 뭉툭한 형상이라 예리함에 무게를 뒀다기보다는 주술용 검 같았다. 하지만 절삭력은 필요 없었다. 저 검에 잠깐이라도 닿은 것은 뭐든지 부식당한다. 풀은 점점 시들고, 철은 녹슬어가며, 살갗은 썩어든다.

단 한 번만 공격을 허용해도 당한 부위를 통째로 잘라내지 않는 이상 환부는 계속해서 퍼져나간다. 차대엽처럼 근접해서 공격해야 하는 타입은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해도 검이 먼저 녹슬어버렸다. 능력은 심지어 웬만한 주문에도 적용되었다. 저 검에 닿기만 해도 불꽃은 그대로 시들어버린다.

유해 무기답다 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이었다. 무엇보다 부식은 항시적인 능력이기에 따로 발동에 마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저런 것이 주인의 마력을 완전히 뿌리뽑을 때까지 자신과 주인을 무한히 수복시키며 주변의 생물들을 도륙한다고 생각하면 악몽이라는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는 발표회 날의 캠퍼스에 주검각시가 행동을 시작했어도 청시아는 요만큼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포커페이스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평온한 상태였다. 차대엽도 유매도 당해내지 못한 유해 무기라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그 정도 수준의 이야기다.

아마 그녀에게 있어 지금 이것은 싸움이라고 인식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분명 칼날에 닿는 모든 것을 썩게 만드는 붉은 검은 웬만한 실력차도 무시하고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무장이었지만, 청룡인 그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청시아가 주검각시가 휘두른 검을 손으로 잡았다. 칼날에 닿는 것을 부식시키는 능력은 굳이 상대를 베어낼 필요가 없다. 이렇게 손으로 칼을 붙잡기만 해도 잡은 손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내 청시아의 몸에 푸른 빛이 감돌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맨손으로 칼날을 잡아도 전혀 손상이 없었다.

‘육근청정.’

바로 이 능력때문에, 공격 대부분을 부식에 의존하는 주검각시는 죽었다 깨어나도 청룡을 이길 수 없었다. 청룡이 가진 육근청정이라는 능력의 정체는, 상대방의 마력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 몸이 되는 것이다. 완전히 깨끗한 상태가 된다.

용이라는 놈들은 다들 이런 말도 안 되는 혈통능력을 한 가지도 아니고 몇 개씩이나 지니고 있는 괴물이었다.

청시아는 칼날을 잡은 그대로 인형의 팔을 꺾어버렸다. 능력 같은 걸 쓴 게 아니라 단순히 힘으로 비틀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인형사의 명령조차 따르지 않고, 마치 마물처럼 적을 죽이기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인형 본체 쪽은 제어 자체가 불가능하게 망가졌나.”

청시아는 그대로 면사포를 덮은 인형을 땅바닥에 처박은 뒤 발로 짓밟았다. 가볍게 밟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인형은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청룡의 발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한기전 1학년의 최종 보스나 마찬가지인 병기였는데도, 그녀는 제대로 된 공격 기술 하나 쓰지 않고 제압했다.

청시아가 발을 꽈악 누르자 인형의 어깨에 금이 갔다. 그리고 은세연이 숨을 헐떡였다. 손상이 생길 때마다 주검각시는 자신을 조종하는 주인으로부터 수복을 위한 마력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주인이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한 기능이지만, 지금의 주검각시는 제어가 먹히지 않았다.

청시아는 쾅, 쾅, 쾅! 계속해서 주검각시를 짓밟기 시작했다. 수복이 더 이상 되지 않을 때까지 은세연의 마력을 뽑아먹게 할 생각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말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게 바로 내 노림수였다.

마력을 포함한 기척과 존재감을 완전히 지우는 청룡의 명경지수라 해도 염력을 이용한 정신 감지로는 당연히 느낄 수 있었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청룡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건 진작에 눈치챘다. 그리고 일부러 청룡 앞에서 은세연의 비밀을 누설했다. 나는 은세연을 돌아보았다.

“일단 사과할 게 두 가지 있어.”

“뭐?”

“첫 번째로, 미안. 찔리게 해서.”

은세연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내 청룡이 땅바닥에 깔려있는 주검각시를 짓밟던 발길을 멈추었다. 더 이상 인형의 수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은세연의 마력이 소진된 것이다. 이제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주검각시는 날뛰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청룡의 역할은 끝났다.

나는 한 발짝 나서서 청룡의 앞을 막아섰다.

“당신한텐 고맙네. 솔직히 그쪽 아니면 위험요소 없이 저걸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없었거든. 유경명 아저씨쯤 되는 사람도 저거에 살짝이라도 닿았다간 팔 한 짝을 잘라야 할지도 모르니까. 중요한 싸움이 있는데 그런 도박은 못 하겠더라.”

내 말에 청룡도 은세연도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앞머리를 매만졌다. 인형을 반쯤 박살내 무력화시켜준 시점에서 청룡한테 볼일은 끝났으니 이제는 저 사람을 치워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은세연을 돌아보았다.

“두 번째로, 미안. 쟤까지 끌어들여서.”

헐떡이는 은세연은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 된단 얼굴이었다. 그리고 청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변에 결계 형태로 펼쳐둔 명경지수가 강제로 열리고 있는 걸 눈치챈 것이다.

청룡이 혹시 모를 가능성을 생각하고 세한기전의 발표회에 온 것은 은세연 때문이 아니었다. 굳이 은세연 정도의 존재를 찾아다닐 만큼 청룡이라는 자리는 한가하지 않았다.

지금 은세연을 제압하려 든 것은 경찰관이 다른 일로 지나가다가 무단횡단을 하고 있는 인간을 발견한 수준의 해프닝일 뿐이었다. 청룡이 캠퍼스를 기웃거리는 진짜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휴가를 낸 동료 찾기였다.

발표회에서 잠깐 얼굴만 비추었던 청룡이 다시금 혈통시대의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건, 2학기가 끝나는 날 누군가가 세한기전에서 자퇴할 때였다. 자신의 마력을 전부 해방시킨 그녀의 존재를 확실하게 느끼고, 자신의 동료를 데리러 온다.

“들어 와. 힘숨찐.”

나는 미리 문자를 넣어두었던 그 녀석을 불렀다.

안과 밖이 서로 차단되어있는 결계에, 터벅.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청시아는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주황빛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소녀는, 지금까지처럼 무해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명경지수. 이곳 안이라면···. 밖에 들키지 않겠지.”

그녀답지 않게 차가운 목소리를 흘리며, 천천히 걸어간 주하리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은세연을 부축해 일으켰다.

세한기전의 모두가 마력을 쓰지 않고 싸우면 이기는 것은 분명 주하리였다. 그렇다면, 그것과 반대로 세한기전의 모두가 자신의 마력을 전부 사용하며 싸웠을 때 이기는 것은.

그야 당연히 주하리지.

나는 생각할 것도 없는 질문에 피식 웃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자그마한 불꽃이 휘날렸다. 이제까지처럼 스스로를 좀먹는 화염이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마력은 드디어 자신들을 자유롭게 풀어준 주인의 귀환에 기뻐하고 있었다. 머리에 나있는 사슴 모양 뿔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당연하게도, 저것은 사슴의 뿔 같은 게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서있는 청룡을 상대하기에 절대 부족함이 없는 존재. 유일하게 후천적으로 이어받을 수가 있는 혈통이자, 언제나 세상에 단 넷밖에 존재하지 않는 용족 혼혈.

“오랜만이네.”

적룡 주하리가 자신의 적을 바라보았다.

< 생이유상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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