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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67화 (67/113)

< 생이유상 (3) >

청룡의 명경지수는 그 자체로 전투에 관여하는 능력은 없지만, 바깥의 사람들에 대해 완전한 차단을 보장한다.

결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물리적인 밀폐가 아니었다.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나아가서는 결계가 쳐져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게 하는 고요한 은폐. 조금 응용하면 자신의 마력만을 숨겨 평범한 인간인 척 하는 것도 가능했다.

딱히 은신을 위한 기술은 아니었다. 명경지수의 능력 범위 안에서 얼마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든 표면에는 요만큼의 파문도 일지 않는다. ‘세계의 수호자’인 청룡으로서,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재앙을 처리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명경지수 안에 녹아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무슨 일이 터졌을 경우 협력해야 할 동료인 다른 용들 뿐이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친 적룡.

“역시 너였나.”

청룡이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몇 년이고 단서를 추적해왔던 대상. 그 얼굴엔 지금까지의 여유가 사라져있었다.

명경지수의 안쪽에서 두 용족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용족’이 아니라 ‘용기사’였다.

순수한 용족은 태초에 존재했다는 용왕 하나 뿐이다. 그 이후로 용족이라 불리는 자들은 용왕의 힘 일부를 이어받아 왕의 의지를 추종하며 봉사하는 기사일 뿐이었다. 왕의 명령은 오직 한 가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지키는 것.

마물과 싸우는 이들을 ‘기사’라고 부르는 것도, 태초에 마물들에게서 사람들을 지켜낸 네 명의 용기사들이 자신들을 기사라고 자칭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적룡기사.”

은세연을 지키듯 앞에 선 주하리는 평소와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사슴처럼 생긴 뿔은 더욱 날카롭게 변화하고, 양쪽 뺨에는 붉은 비늘이 발현했다. 몸에는 수많은 불꽃이 휘감기며 자신의 주인에게 복종하고 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대단히 차가운 표정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저것이 원래 주하리의 성격이었다.

잠재적인 적은 자신을 해치기 전에 죽여야 하고, 무슨 일을 당하면 반드시 되갚는다. 지옥도(地獄島)라는 섬에서 완벽한 살인병기로 길러져온 아이. 지금은 그곳의 마지막 생존자인 주하리는, 전대 적룡에게 용족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혀를 찬 청룡은 순식간에 쇄도해 얼음의 검을 휘둘렀다. 주하리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은세연을 향해서였다. 청룡의 맑은 마력에 전조 따위 없고 그 움직임을 미리 읽는 건 불가능하다. 주하리는 무표정한 그대로 붉은 단검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음검의 궤도 사이에 반쯤 강제로 화염의 단검을 얽어내, 자신 앞의 땅바닥에 내리쳐버리도록 유도했다. 그대로 발을 들어 얼음 세검을 밟아 누른 주하리가 말했다.

“청룡의 능력은 적룡에게 강하다. 몇 번이고 당신이 잘난 척하면서 말해준 거지만, 선배 본인이 너무 약해.”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청시아를 노려보았다. 청룡인 그녀에게 약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인간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주하리는 허세 따위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능력 자체의 강약과 그걸 다루는 인간의 역량은 별개의 문제였다. 어떤 무기든 완벽에 가깝게 다루는 주하리의 기술은, 용기사로서 이어받은 혈통능력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고문 수준의 훈련을 받으며 몸에 익힌 순수한 실력이었다.

능력에 의한 화력전이 아닌 무기를 휘두르는 백병전으로는 절대 주하리를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청룡이 전력을 다하기 위해선 일단 명경지수를 해제해야만 했다. 이곳에서 일대 소란이 일어나는 건 주하리도 청시아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은세연 앞에 선 주하리를 보고 청룡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군. 네가 갑자기 사라진 탓에 폭주한 유해 무기를 처리할 사람이 없어졌고, 그 결과 저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 거라 생각했다만, 그게 아니었어. 네가 감싸고 도망치게 해준 거다. 저 인형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고 있는데도!”

강한 질타에도 주하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은세연은 필요해. 죽이게는 못 놔둬.”

무표정한 얼굴의 주하리가 살짝 뒤쪽에 시선을 던졌다. 그것은 친구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어떤 기계장치의 부품 따위를 보고 있는 눈이었다. 원래 주하리의 성격이 어쩌고 하기 이전에 아예 다른 인격이라 보는 게 올바른 수준이었다.

차가운 어조와 섬뜩한 압박감. 자신이 알고 있던 적룡기사와 전혀 바뀌지 않은 모습에 청시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어. 그러니 돌아와서 네 할 일을 해라. 자리 하나가 망가져버린 지금 네 부재는 생각보다 훨씬 커. 아니면 자해해서 죽어라. 그것만으로 적룡의 자리는 다음 자격 있는 누군가에게 넘어가겠지.”

청시아의 어조는 기묘했다. 힘으로 말을 듣게 하겠다거나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할 것이라 단정하는 목소리였다. 그야 용기사라면 누구나 세상을 지키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하리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걸 보자마자 청시아의 눈동자 또한 짙은 남색으로 가라앉았다.

“···너, 적이냐.”

단순히 짜증을 내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압박감. 주하리를 제거 대상으로 판단한 청시아는, 완전히 전투 태세에 들어간 용기사의 마력을 여지 없이 발산시키고 있었다. 갑자기 덜덜 떠는 은세연을 보니까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청세아가 빙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주하리는 단검을 세워 막아내려 했지만, 갑자기 첨벙이며 물처럼 흩어진 빙검은 그대로 주하리의 검을 통과해 다시 하나로 이어졌다. 상대방의 방어 따위를 전부 무시하고 베어버릴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휘둘러진 얼음의 검이 주하리의 목에 부딪혔을 때, 어떤 예고도 없이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한 손을 든 주하리는 여파가 주변에 미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놀랍게도 폭발에 휩쓸린 것은 공격한 쪽인 청룡이었다.

‘화경(火鏡).’

적룡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혈통능력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적의를 담은 공격을 하면, 그 적의의 크기에 따라 상대방의 몸에 폭발이 일어난다. 의식하지 않아도 언제나, 심지어는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자동적으로 발동하는 능력이다.

주하리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봉인하고 있을 만도 했다. 학교에서 어떤 개구쟁이가 주하리 뒤통수 한 대라도 치는 순간 그 놈은 그 즉시 터져서 즉사니까.

화경의 무서운 점은 상대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일점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반격의 위력이 기하급수로 강해진다는 점이었다. 강자끼리의 싸움에 요구되는 건 잡생각을 모두 지우고 오로지 상대방을 베겠다는 일념만을 남겨내는 기술.

그리고 그렇게 응축되고 응축된 적의로 주하리를 공격하는 순간, 뼛조각까지 태워버릴 불꽃이 폭발해 상대방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청룡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첨벙거리는 몸이 물처럼 흩어졌다 돌아오고 있다.

“누가 변신해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지?”

청룡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방금의 공격은 아마도 정말로 화경이 발동하는지, 즉 자기 앞에 서있는 게 진짜 주하리가 맞는지 확인해보기 위한 공격이었던 것 같았다. 혈통시대의 세계에는 느껴지는 마력의 기척마저 똑같이 흉내내는 기술마저 있으니까. 하지만 주하리는 진짜다.

주하리가 이쪽을 바라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송한솔. 작업은 얼마나 걸리지?”

“십 분이면 끝날 거다, 아마.”

고개를 끄덕인 주하리가 한 순간에 불꽃을 휘감고 청시아의 앞까지 도약햇다. 그리고 그 목을 붙잡으며, 주변의 땅에서부터 홍염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회전하는 불꽃이 흩어졌을 때 청룡과 적룡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져있었다.

청룡이 지닌 명경지수와 같이, 적룡에게도 자신만의 고유한 결계가 있다. 청룡의 역할이 끝났으니 방해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격리한 것이다. 은세연 옆에 널브러져 있는 주검각시는 더 이상 날뛸 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게 무슨, 하리가 왜···.”

“고쳐달라며. 인형.”

나는 면포를 덮고 있는 주검각시의 몸체에 손을 가져다댔다. 은세연과 인형을 고쳐주기 위한 조건. 인형이 활성화되어있는 동시에,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날뛰지는 않을 것. 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추궁이 들어오지 않도록 소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 인형을 박살내는 게 아니라 제압만 할 것 등 부가적인 요소들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 이상적인 상황이 마련되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매끄럽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눈을 감고서 의식을 집중한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주검각시를 활성화시켰을 때 인형체를 통제하는 의사인격, 즉 지금의 은세연을 다시 인형 쪽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기술적으로도 마력적으로도 크게 성장한 지금의 은세연의 몸이라면, 주검각시와 다시 감응한다 해도 이전처럼 엉망진창으로 섞여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히 자신의 인형으로서 복종시킬 수 있다. 나는 은세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널 인형으로 돌려보낼 거야. 괜찮겠어?”

여기서 싫다, 라는 대답이 나오면 나는 그냥 알았다 하고 전부 그만둬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은세연은 내 말에 잠깐 눈동자를 떨더니,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결정이야. 존경한다.”

나는 염력을 끌어올려 의식을 제어했다. 주하리는 나에게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은세연이 조사한 자료들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읽고 이끌어낸 결론은, 은세연과 주검각시를 고쳐주는 일은 하나도 어려울 게 없다는 것이었다.

주검각시 쪽에는 아직 의사인격을 담아두기 위한 그릇 같은 것이 남아있었다. 안쪽이 텅 비어버렸기에 활성화할 때마다 발광하지만, 내가 매개가 되어 의식적인 연결통로를 놓아주기만 하면 은세연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의식을 제어해 통로를 만들자마자, 인형 쪽과 은세연 쪽 서로가 자석처럼 강하게 하나가 되려고 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있던 주검각시의 몸이 훅 하고 꺼졌다. 안에서 색을 잃고 빛바랜 구슬 하나가 또르르 떨어졌다.

‘망했다.’

의식을 이어주고 있던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주검각시는 마물의 유해와 산제물을 가공해 만든 저주의 인형이었다. 진보라색의 면사 안에는 사실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 닿은 걸 부패시키는 붉은 검 또한 실체가 아니다.

그저 어둠을 뭉쳐 만든 몸체이기에 주인의 마력이 허락하는 한 무한히 수복된다. 정말로 실체가 있는 건 핵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구슬 형태의 정수 하나 뿐. 그리고 지금 정수는 빛을 잃고, 덮여있던 면포는 흐느적거리며 땅에 떨어졌다.

은세연의 인형 부분이 원래 자신의 몸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인형의 모든 것이 은세연의 내면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방금 것으로 만약 주검각시의 능력이 소실되어버린 거라면 대단히 낭패였다. 주하리가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적룡기사인 주하리가 은세연을 눈감아주고 같이 도망친 것은, 서로 어떠한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평소의 반장이 감정이 풍부하며 언제나 남들을 도와주고 싶어하는 친절한 성격이 되는 건, 은세연이 주검각시의 또 다른 능력으로 주하리의 여러 부분을 마력사로 묶어 교정한 결과였다. 한 마디로 만들어낸 성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적룡 주하리는 오히려 반장일 때의 상태를 진짜 자신으로 여기고 있다. 은세연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존재할 수조차 없는, ‘친절하고 배려가 많은 성격의 자신’을.

나는 급하게 은세연의 의식 안쪽으로 진입했다. 남의 의식에 발을 들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상사태가 벌어진 이상 곧바로 대응해야 했다. 은세연의 무의식의 문을 연 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곧바로 확인했다.

“너였구나.”

그리고 난 눈썹을 찌푸리며 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만지지 말라고 날 멈춰세웠던 목소리.”

<미안해···. 미안해···.>

새까만 여인. 어두운 색의 면사를 뒤집어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무릎 꿇고 있었다. 그 앞에 서있는 건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은세연이었다. 면사의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어린아이처럼 자그마한 은세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야말로 괴로운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보랏빛의 폭풍이 일어났다. 의식 제어를 그만두고 눈을 뜨자, 내 앞에 조금쯤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은세연은 주검각시의 흔적인 면사를 손에 든 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그 천을 소중히 팔에 두르고, 땅에 떨어진 구슬을 주웠다. 은세연이 내 쪽을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안쪽에서 다 보고 있었어, 오빠!”

생기와 장난기로 넘치는 표정과 목소리. 내가 알고 있는 은세연이 아니었다. 양갈래로 묶은 은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활짝 웃는 얼굴로 악수하자 손을 내민 은세연이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해야 하나? 은세연이야!”

내가 모르는 등장인물. 한 번도 혈통시대에서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인간. 설정상으로만 존재했었던 누구인가.

내 앞에 서있는 것은 진짜 은세연이었다.

< 생이유상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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