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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68화 (68/113)

< 생이유상 (4) >

땅바닥에서 자그마한 불꽃이 튀었다.

점점 커다랗게 된 불꽃은 이윽고 소용돌이를 이루더니, 그 안에서 주하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화염의 검을 휘두르자, 빈 공간이 얼음처럼 깨지며 나타난 것은 청룡이었다. 핸드폰을 꺼내보자 정확히 십 분이 지나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딱 맞춰서 10분이냐?”

“신뢰하니까.”

다시 나타난 주하리가 이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은세연의 얼굴을 보고 계획이 성공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청시아가 땅바닥에 손을 대자 푸른 얼음의 용이 입을 쩍 벌리며 터져나왔으나, 주하리가 이빨 한쪽을 잡아쥐자마자 빙룡은 통째로 증발하듯 녹아 사라져버렸다.

어두운 눈동자의 주하리가 청시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나랑 당신으론 승부가 안 나. 목숨을 걸고 덤벼든다면 또 모를까.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들켜버릴 테고, 여기서는 일단 빠지는 게 나을 텐데.”

주하리의 목소리는 위협이나 협상이라기보단 담담히 전황을 통보하고 있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로서도 이제 그만 청룡이 돌아가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청시아에게 주하리의 말은 오히려 기름에 불 붙인 꼴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군. 좋은 충고 고맙다.”

주먹을 꽉 쥔 청시아가 주하리를 노려보았다. 등 뒤에서 퍼져나간 푸른 마력이 용의 형상으로 화해 그녀를 감쌌다.

용연(龍淵).

용기사가 모든 능력을 개방해 싸우기 시작하면, 용의 형상으로 집속된 투기가 등 뒤에서 주인을 감싼다. 이 상태에 돌입하면 마력 회복량이 폭발적으로 늘 뿐만 아니라, 초대부터 이어져온 전투 경험치가 초직감적 판단을 가능케 한다.

청시아가 하늘색 눈동자를 번쩍이며 말했다.

“흑룡 때는 목숨을 걸지 못했지. 그런 것이 하나 더 나와버리면 나와 백룡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완전히 탈선하기 전에 여기서 끊어주마. 최소한 선배인 내 손으로 직접.”

“···탈선?”

청시아의 뒤에서 마력의 수류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폭포처럼 몰아쳤다. 뻗어나간 작은 물줄기들 하나하나는 이윽고 얼어붙어 온갖 형태의 무기가 되었다. 대기에 내린 무수한 서리는 자그마한 칼날이었다. 청시아가 하얀 숨결을 내뱉었다.

수천일벽(水天一碧).

청룡기사의 오의에 해당하는 기술. 정해진 형태가 없는 물은 무엇이든지 본뜰 수 있고, 단단히 얼어붙은 뒤에는 결코 깨지지 않는다. 온갖 능력을 지닌 무기들을 노 타임으로 만들어 꺼낼 수 있는 공방일체의 대규모 보조 능력이었다.

계속해서 전개하면 얼음의 궁전으로 완성되어, 세한기전 캠퍼스의 절반쯤을 덮어버린 뒤 얼음의 수호룡들까지 나타날 것이다. 여차하면 명경지수를 해제해 커다란 소란을 일으키더라도 여기서 주하리와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각오였다.

세한의 학장인 천년서생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모든 용기사를 극도로 싫어한다. 마음에 안 드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찢어 죽여버리고 싶어하는 수준이었다. 천년서생은 공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들이 하는 일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가까스로 참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 세한기전은 그런 천년서생의 본거지 같은 곳이고. 청룡이 이 지경까지 와서도 명경지수를 해제하지 않는 이유 또한 학장과의 마찰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청시아는 그런 것보다 주하리의 처리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청시아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그녀의 동료인 용기사 중 하나, 정확히는 전 용기사가 탈선해 최악의 적으로 돌변해버렸으니까. 주하리까지 그 남자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면 사태는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한 지경이 된다.

더욱 최악인 건 그 변절자와 주하리가 손을 잡는 것. 그렇게 될 경우 열세인 건 오히려 남은 용기사 둘 쪽이었다. 주하리는 입을 다물고 냉정히 대응할 기술을 고르고 있는 듯 했다. 그때 내 옆쪽에서 누군가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예쁘다!”

웃으며 청시아 쪽을 삿대질하는 건 은세연이었다. 투명한 얼음으로 만들어진 세공들을 보고 순수하게 예쁘다며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발짝 앞에 나선 은세연이 머리 위로 든 손을 흔들면서 전투 태세인 주하리를 불렀다.

“언니! 싸우지 말고 이리 와!”

어떤 적개심도 주저도 없는 목소리에 청시아마저 눈썹을 찌푸렸다. 충돌하기 전에 개입해야겠다 생각하던 나는 코웃음을 쳤다. 선수를 빼앗긴 것은 상당히 신선한 감각이었다.

은세연은 의식의 안쪽에서 자신의 몸을 대신 움직여주고 있는 인형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을 뿐, 그녀의 시간은 쭉 주검각시와 접촉했던 열 살 즈음에서 멈춰있는 채였다.

다시 말해 사실상 어린애였다. 그렇기에 청룡이 저만한 숫자의 무기를 꺼내 살의를 풀풀 풍기고 있음에도 얼음이 예쁘다, 신기하다 수준의 감상밖에 흘리지 않는 거겠지.

아니면 자기 눈으로 직접 세상을 보는 게 오랜만이라 청룡기사의 아름다운 기술에 순수하게 감탄할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진짜 은세연 성격이 원래 저런 거거나.

주하리는 망설임 없이 적에게서 등을 돌려 은세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주하리의 몸을 타며 흐르고 있던 불꽃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얼굴의 비늘이 사라지고, 사슴 뿔 또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은세연의 능력을 쓸 수 있도록 일부러 적룡기사로서의 모든 능력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청시아는 무엇을 하려는 건지 경계하며 주하리 쪽으로 다가오려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앞에 서서,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청시아를 막아섰다.

“···무슨 짓이지?”

“여기서부턴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서.”

청시아는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미숙한 학생이 자신을 막아섰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용기사들의 싸움에 평범한 인간이 끼어들다니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른다고.

실제로 청시아의 뒤에서 셀 수 없이 터져나오는 얼음검 중 단 한 자루만 날려도 나는 반응할 새도 없이 꼬치가 되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청시아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고, 불가피한 것이 아니면 민간인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입꼬리를 올리며 질문했다.

“사실 쿠키도 몇 개 서비스로 더 넣어줬는데. 길 좀 막아섰다고 불쌍한 소시민을 공격하려는 건 아니죠?”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그리고 청시아는 전혀 화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길을 막아섰다고? 그런 적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네가 무슨 수를 쓰든 날 한 걸음이라도 방해하는 건 불가능해.”

잘난 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서있는 게 내가 아니라 유매와 차대엽이라 하더라도 청시아를 아주 잠깐이라도 멈춰세우는 건 불가능했다. 용기사 중에서도 청룡은 다른 어떤 용들보다 더욱 방어에 치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육근청정을 발동하면 상대의 마력에 영향을 받지 않기에 주문의 폭격 속에서도 느긋하게 걸어다닐 수 있고, 저주 또한 아무렇지 않게 정화해버린다. 순수한 물리적 공격은 주변에 두른 얼음이 자동적으로 솟아올라 방패가 되어 막아낸다.

파고들 틈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절대 방어. 속도로 공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눈에 비치지도 않을 수준의 공격도 얼음은 반응해서 막아냈다. 차대운이라면 어떻게든 얼음째로 베어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 모든 방어를 뚫어내도 청룡은 마력을 사용해서 몸을 유체로 바꿀 수가 있다.

같은 용기사가 상대라도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한숨부터 나올 정도로 방어라는 영역에 있어서 청시아는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그건 무슨 수를 써서 저지하려 해도 청시아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

“그래도 뭐, 한 걸음 정도는 막을 것 같은데.”

“불가능하다. 절대로.”

그리고 나는 웃으며 청시아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5>

육근청정은 모든 마력적인 영향을 차단하고, 청시아 주변을 감싼 얼음은 어떤 공격이든 동작을 감지해 반응한다. 그렇다면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미리 동작을 읽어낼 수 없는 공격을 하면 청시아의 방어를 우회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꽈당! 걸어오던 청시아가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물론 청룡쯤 되는 존재가 넘어진다 해서 상처를 입을 리 없고, 전력을 다해 염동력으로 후려쳐도 유효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안구 같은 곳을 핀포인트로 노리면 또 모를까.

하지만 적어도 한 걸음 방해했다. 일어선 청시아는 한쪽 발을 무릎꿇은 채 이쪽을 노려보았다. 모든 방어가 우회당해 실제 타격이 들어왔다. 역대 용기사들의 전투 경험이 혼란해하며 방금 공격의 정체를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백 날 이전의 싸움을 되짚어봐야 염동력에 당해본 적은 없을 것이다.

“너, 방금 뭘···.”

“죄송한데 영업상 기밀이라서.”

내가 시치미를 떼자 청시아가 노려보았다. 그리고 청시아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사용한 수단이 무엇인지 판명되지 않은 이상 신중하게 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허세이자 시간 벌기일 뿐이었다. 나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그제야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진짜 은세연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주검각시의 인형 몸체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주검각시의 능력이 없으면 주하리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은세연의 머리 위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것은 머리를 덮는 진보라색의 면사였다. 주검각시의 인형이 쓰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하늘에서 하늘하늘 내려온 면사를 덮은 은세연은, 그대로 주하리의 머리에 살짝 손을 가져다댔다. 검은 색의 마력이 그녀의 손에서 일렁거렸다.

‘흑사(黑絲).’

그것은 칼날에 닿은 걸 부패시키는 무장인 주검(朱劍)과 함께, 저주의 인형인 주검각시가 가진 능력 중 하나였다.

효과는 간단했다. 마력사로 연결된 상대방의 안에 저주의 매듭을 묶어, 온갖 감정을 걷잡지 못하게 폭주시킨다. 원래의 용도는 주검각시와 마주한 적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공포, 절망 따위의 감정을 느끼게 해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선 반영구적으로 광인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기술이다. 가장 불길하고 위험한 인형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능력이었다. 그리고 지금 주하리에게 침투하는 저주의 매듭도 효과는 비슷했다. 수많은 감정을 강제로 폭주시키는 것.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크게 놀랐다.

검귀의 신검발현이 모든 면에서 포텐셜의 정점에 달했을 때 ‘신검합일’이라는 경지를 개척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혈통시대의 초일류 인형사들이 다다르는 하나의 경지가 있다.

자신의 인형과 완전히 동화해, 싸울 때마다 스스로의 마력으로 인형 자체나 그 일부분을 실체화시켜 언제 어느 때나 주인의 곁을 지키게 하는 경지. 인형사 스스로가 인형의 능력마저 사용할 수 있는, ‘동화구연’이라 불리는 영역이었다.

은세연이 정말로 벌써 그만한 역량에 다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인형과 주인이 몇 년 동안이나 한 몸에서 동거했다는 경험이 특수한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주검각시 하나에 한정하면 은세연은 이미 동화구연 사용자였다.

그리고 청시아는 감히 은세연의 앞에서 무릎 꿇은 채 무언가를 받고 있는 주하리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적룡인 그녀를 공격했다간 화경에 의한 폭발로 자동적인 반격을 당해버릴 것이다, 같은 전술적 계산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일련의 행위 모두가, 누군가를 해치려는 의도와는 동떨어져있다는 걸 강하게 느낀 것이다. 저것을 공격하는 건 청룡기사로서 자신이 믿고 있는 정의에 흠집을 내는 것이라는 거부감에 순간 동요했다.

그리고 무릎 꿇고 있던 주하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이전까지의 무기질하고 냉정하던 표정은 사라져있었다. 상냥하게 웃으며 은세연을 쓰다듬어준 건 평소의 반장이었다.

적룡인 상태라면 저주의 매듭 따위 마력이 한 번 회전하는 것만으로 녹아 사라져버리겠지만, 모든 힘을 억눌러둔 지금은 주검각시의 저주에 당해있었다. 온갖 감정들을 폭주시켜 미치게하는 흑사. 주하리의 경우에는 그 저주에 당해있는 채여야 비로소 지금처럼 울고 웃으며 상냥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은세연은 주하리가 제대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능력으로 보조해주고, 주하리는 은세연이 다시 폭주해 남을 해치게 될 것 같으면 책임지고 그 전에 폐기해준다. 그것이 참극이 있던 날, 적룡기사와 인형이 남몰래 나누었던 계약이었다.

그리고 등을 돌린 주하리가 청룡을 바라보았다.

“전 용으로 있기를 포기한 게 아니예요.”

용기사의 힘을 잇는 그 순간부터, 가장 중요한 행동원리로 사고방식의 근간에 자리하게 되는 용왕의 명령이 있다.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지켜라.

전자는 용기사가 되자마자 자연스럽게 감화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후자 쪽이었다. 하지만 주하리의 경우엔 어떻게 해도 전자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인격 따위는 말살당한 채로 길러진 탓에,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한 근본적인 감정이 치명적으로 결락되어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지킨다는 의무에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주하리는 역대 어떤 적룡기사보다 빠른 속도로 능력에 익숙해지고 성장해나가, 전투 병기 그 자체와 같이 셀 수 없는 재앙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가만 놔두었다간 세상이 흔들릴 만한 거대한 악 뿐만이 아니라, 용기사가 직접 나설 필요까지도 없는 비교한 사소한 사건들 또한 도맡아 처리했다. 딱히 의욕적이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다른 용기사들과 달리 진심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니, 부족분을 보충한단 생각으로 임한 것일 뿐.

그리고 미친 채 웃으며 서로를 죽인 일가족 사이에서, 어서 빨리 자길 죽여달라 울고 있는 여자아이와 만났다. 그녀는 저들을 저렇게 웃게 만든 건 인형인 자신이라고 했다. 어이없게도, 적룡기사는 인형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러면 자신도 웃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하고.

“선배랑은 싸우고 싶지 않아요.”

주하리는 이미 완전히 적룡의 힘을 억눌렀다. 지금이라면 자그마한 고드름 단검 하나만 날려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상태였다. 청시아 또한 그것에 대해 눈치챈 듯 했다.

하지만 쓴웃음을 짓는 주하리의 얼굴에, 청시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어린 나이에 용이 되고서도 압도적인 실적을 내며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재앙도 아무렇지 않게 참살해온 전투의 천재. 그것이 그녀가 알고 있던 적룡기사 주하리였다.

나는 회상 에피소드에서 보았던 청룡을 떠올렸다.

‘분명 전에는 지금처럼 냉정하지 않고 한심했었지.’

어린 주하리와 같이 세상의 재앙이 될 존재들을 사냥하고 다녔을 때, 한참 어린 후배에게 일방적으로 도움받고 구해진 건 청시아 쪽이었다. 지금은 완성된 한 명의 용기사지만, 흑룡이 변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상당히 폐품이었다.

선배인데도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줬기에 한심하게 생각할 거라 부끄러워했고, 청룡의 힘에 휘둘리는 자신과 달리 제대로 용기사로서 싸우는 모습에 내심 동경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으며 쉬지 않고 기계적으로 일해 조금 걱정도 했다.

그렇기에 청시아는 내내 무표정하게 살육을 계속하는 주하리에게 지키는 일 만큼 사랑하는 일도 중요하다 말했었다.

나름 선배로서 한 마디 하고 싶다는 심정으로 꺼냈던 말이다. 그 말에도 주하리는 웃지 않았다. 애초에 그 시절의 주하리는 억지로 근육을 움직이는 게 아니면 웃는 얼굴 정도가 아니라 표정 자체가 크게 변하는 일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랬던 주하리가 언제나 헤헤 웃는 반장이 되어있으니, 그녀로서는 하늘이 뒤집힌 것 같은 충격일 것이다. 혈통시대에서는 이미 은세연을 죽이고 적룡기사로 돌아온 주하리를 데리러 온 거였으니, 애초에 이런 모습을 볼 일이 없었을 테고.

“이게 제가 택한 용기사로서 살아가는 방식이예요.”

조용히 웃은 주하리가 청시아에게 말했다.

“지금은 진심으로 세상을 좋아할 수 있게 됐으니까. 선배가 그때 지키는 일만큼, 사랑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지금의 저니까 지킬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거예요.”

청시아가 그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미숙했던 시절에 되는 대로 내뱉은 말이었고, 주하리 또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설마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청시아는 당장에라도 바보 자식, 하고 소리치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런 얼빠진 사고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지킬 수가 없다. 정의 쪽에 압도적인 힘이 없으면, 그 새까만 용처럼 자기 멋대로 세상을 뒤흔드는 자들에게 대응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실없는 말을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후배가 각고의 노력 끝에 저런 식으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그딴 것은 전부 쓸모없는 짓이라고, 당장 전투 병기인 너로 돌아와 협력하라고 일갈하기는 힘든 것이다. 청시아의 등 뒤에서 솟아오르던 얼음이 천천히 무너져 사라져갔다.

“그 아이. 상태가 바뀌었군.”

냉정해진 청룡이 은세연 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의 변화를 느낀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둠의 은세연 대신 빛의 은세연이 나와있는 거죠.”

지금도 은세연 안에 있을 인형 은세연이 들으면 화낼지도 모르겠다. 내 영문 모를 말에도 청시아는 곧바로 은세연 본인이 자신의 몸을 되찾았다는 것을 이해한 것 같았다.

“무슨 방법을 쓴 거지?”

“죄송한데 영업상 기밀이라서.”

“숨기는 게 많은 녀석이군. 그렇지만, 동화구연이 가능할 정도로 인형을 제어하고 있다면 처분은 필요없겠지.”

내 말에 청시아가 짜증난다는 듯 쯧 혀를 찼다. 그리고 명경지수가 해제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 있는 것인가 우리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사실상 싸움을 계속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청시아가 이쪽에 등을 돌렸다.

“변절하려는 게 아니라면 나도 너와 싸울 이유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해두지. 우리 둘이 맞부딪친 이상 반드시 백룡도 알아챘을 거다. 그 인간이 나처럼 순순히 널 하고 싶은 대로 놓아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백룡. 현재 용기사들의 수장 격인 인물이자, 혈통시대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성격 파탄자였다. 청룡의 말을 들은 주하리 또한 골치 아프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뭐,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다.”

그렇게 말한 청시아는 처음으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내 떠나려는 청시아에게 주하리가 종종걸음으로 달라붙었다.

“잠깐···.”

“용무가 더 있나?”

“시간이 있으시면··· 학교 구경이라도 시켜드릴까요?”

콧숨을 내쉰 청시아가 멋대로 하라는 듯 길을 걸어갔다. 이전 직장 선배와 후배끼리 참 화목한 풍경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박수를 쳐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로 죽일 듯 칼싸움하던 인간들이 맞나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계속 진동이 울리고 있는 걸 눈치챘다.

[담민우 : 야]

[담민우 : 어딨어]

[담민우 : 어디]

[담민우 : ㅇ ㅏ.]

“아.”

점심시간은 이미 20분이나 더 지나있었다.

< 생이유상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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