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종호 (1) >
“둘 다 연락도 안 받고 뭐하는 거야···!”
나와 은세연이 돌아오자 잠깐 구석으로 불러세운 담민우가 귓속말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원래 창백했던 안색이 더욱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그야 원래도 스태프가 몇 명 없는데 거기서 우리 둘이 빠지면 남은 사람이 바빠지는 게 아니라 아예 장사를 접어야 한다. 난 주방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주방에서 내 부재를 메워주고 있던 건 선도부 순찰이 끝나고서 온 진소란이었다. 나름대로 민첩함을 살려 팬케이크를 만들고 있지만, 그녀의 팔은 두 개인 탓에 한 번에 하나의 작업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 팔이 몇 개라도 레시피를 따라하는 데 벅차 다른 작업을 동시에 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멈춰서있는 인형들 사이에서 테이블을 오고가고 있는 건 자그맣게 빛나는 요정들이었다. 공연에 쓰려고 만들었다고 도서실에서 자랑하는 걸 본 기억이 있다. 고개를 돌리면 주방으로 걸어가는 길목에서 유매가 지휘봉을 들고 있었다.
분명 당일 리허설이 끝나면 시간이 좀 남을 것 같으니 들리겠다고 했었다. 담민우가 붙잡고 어떻게 좀 도와달라 한 거겠지. 주방에 들어서자 앉은 유매가 이쪽을 올려다봤다.
“너 빚진 거야.”
“그래. 고마워.”
원래부터 노점 팀의 일원인 진소란은 몰라도, 유매는 완전히 외부인인데 신세를 져버렸다. 손을 내밀어 짝, 하고 하이파이브를 하자 유매가 돌아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데 둘이서 뭘 하다 온 거야?”
“말하자면 길어.”
그리고 둘이 아니라 넷이었다. 나는 주방에서 혼란스러워하며 머랭을 치던 진소란을 홍차 쪽으로 보내주었다. 밀린 주문들을 확인한 뒤 손가락을 튕기자, 도구들이 내 주변에 둥실 떠올랐다. 재료들과 후라이팬을 익숙한 위치에 돌려놓는다. 손님은 오전 타임보다 오히려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염력 아끼겠다 끙끙댈 필요가 없어.’
청룡을 꾀어낸 뒤를 생각하느라 최대한 절약하며 썼던 염력을 이제는 걱정없이 쏟아부을 수 있다. 수많은 초능력들을 활성화한다. 순식간에 대여섯 개의 작업이 공중에 뜬 채 동시에 진행되자, 자리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탄성을 흘렸다.
한 가지 걱정은 은세연이 제대로 인형들을 제어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의자에 앉은 은세연에게 슬쩍 눈길을 보내자, 그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있었다. 나는 그걸로 모든 걱정을 거두었다. 지금 앉아있는 은세연은 인형 쪽이었다.
주검각시로서 자기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된 그녀는 이전과는 가능한 일의 범위 자체가 달랐다. 폭주 같은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그 압도적인 힘을 휘두를 수 있다.
‘2학기 순위전은 판세가 좀 바뀌겠는데.’
멈춰있던 인형들이 끼릭끼릭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발표회가 끝나고 며칠 뒤, 요 몇 주간 발표회 준비로 들떠있던 학교 안의 분위기도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은세연은 지금도 너무 좋은지 상장을 보며 헤벌레 웃고 있었다. 우리가 출점했던 인형 다과회가 세한기전 발표회의 모든 노점들 중 1등을 해서 받게 된 상장이었다. 학장이 발표하는 자리에 팀장인 은세연이 대표로 나가 받았다.
1등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만한 크기의 텐트에 저렇게까지 신경 써서 장식을 하고, 혈통능력으로 인형들이 서빙을 해준다는 건 1등 내놓으라고 총 들고 협박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짓거리였다. 상장을 편 은세연이 배시시 웃었다.
“아니, 네가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나는 은세연 앞에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노점을 여는 내내 인형들을 조종하며 뼈 빠지게 일한 것은 진짜 은세연이 아니라 그녀 안에 있는 인형의 인격 쪽이었다. 딱히 은세연이 뿌듯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자 은세연이 볼을 부풀렸다.
“다른 나도 나거든! 그리고 인형이 한 일은 주인의 성과거든! 솔인 인형 같은 거 다뤄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구나?”
처음 만났을 땐 오빠라고 불렀지만, 역시 같은 반 학생한테 그런 호칭을 쓰는 건 주변이 보기에 좀 그러니 그만두라고 했다. 그 뒤로 저런 웃기는 별명으로 날 부르고 있었다. 이래서 어린애는.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교실을 둘러보았다.
이전의 어둡고 조용하던 은세연과 지금의 이 헤실대는 은세연은 아예 사람이 바뀐 수준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바뀐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바뀌었지만. 반 애들은 원래 저런 성격이었는데 지금까지는 쑥스럼을 탔나보다 하는 훈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였으면 무조건 의심부터 했다.
그리고 어린애처럼 사람을 잘 따르고 친해지기 쉬운 성격이 된 은세연은, 자그마한 체구 때문인가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대단히 많았다. 그럴 때마다 주하리가 옆에서 너무 세연이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주의를 주었다.
거의 보디가드였다. 집에 데려가서 하루 종일 껴안고 싶다는 애한테 단칼에 안 된다고 거절할 땐 주하리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싶을 만큼 냉랭한 웃음을 보여줬다.
“그래서 교실은 좀 익숙해졌냐?”
애초에 진짜 은세연은 학교 생활 이전에 기본적인 일상 생활부터 배워가야 할 정도의 어린애였다. 어릴 때 주검각시를 만져버린 뒤로 쭉 정신의 안쪽에서 인형이 자신이 몸을 조종하는 것만을 바라봐왔으니까. 은세연이 배시시 웃었다.
“응! 다른 나도 옆에서 조언해주고, 모르는 거 있을 땐 이게 있으니까. 솔이도 알고 있어? 학교생활 도우미 씨!”
활짝 웃은 은세연이 이쪽에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에서는 인공지능 봇처럼 사무적인 말투를 하고 있는 상대가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도우미 씨는 엄청나게 똑똑하다며 막 칭찬을 늘어놓은 은세연이 말했다.
“여기다가 질문을 하면 뭐든지 대답해줘. 봐봐, 예를 들어 오늘 점심시간 식당 메뉴가 뭐냐고 물어보면···.”
질문을 넣자마자 주하리 쪽에서 우웅 하고 진동이 울렸다. 잠깐 볼일 좀, 하고 양해를 구한 주하리가 교실에서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은세연의 핸드폰에 오늘 학식 메뉴와 할인되는 품목에 대해서 쓰인 답장이 돌아왔다.
“대단하지! 24시간 언제나 물어보면 답장이 와.”
“진짜 대단하네.”
주하리가 대단하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아무튼, 인형인 은세연 쪽과 주하리 둘 다 저렇게 붙어서 돌봐주고 있으면 세한기전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걱정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재능을 여과없이 뽐내 우등생으로 치고 올라오는 걸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자세빈이랑 시비 붙는 거 아닐까 걱정되네.’
언제나 요주의 인물이 나타나면 한 번 가서 시비를 걸어보는 게 자세빈이라는 녀석의 버릇이었다. 걱정되는 것은 은세연이 아니라 자세빈 쪽이다. 은세연을 잘못 건드렸다간 또 하나의 은세연과 주하리한테 죽도록 밟힐지도 몰랐다.
알아서 잘 하겠지. 중재역을 할 담민우도 있고. 나는 눈앞에 알림창을 띄워 밀렸던 퀘스트들을 전부 완료했다.
<퀘스트 완료 : 외부 발표회에서 성과를 올렸습니다.>
<보상 : 10,000 Credit>
이제 당분간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만큼 세한기전 쪽의 트러블은 일단락됐다. 백룡이 언제 올지가 걸리지만, 청룡이 잘 무마해줬다면 적어도 한두 달의 시간은 걸릴 것이다. 무엇보다 백룡은 자신의 숙적을 견제하느라 대단히 바쁘니.
슬슬 여우 사냥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 * *
나는 카페에서 제일 싼 커피 한 잔을 주문해 앉았다. 설탕을 넣지 않아 씁쓸한 커피를 테이블에서 홀짝인다. 자리 맞은편에는 미라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시내의 커다란 카페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지만, 그런 인파 속에서도 특히나 눈에 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모델처럼 커다란 키를 하고 있는 여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명품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고, 얼굴엔 고급스러운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여자가 카운터에서 음료를 받았다.
주문한 음료는 휘핑크림이 산처럼 솟아올라있었다. 이 카페의 단골인지, 도장이 가득 찍혀있는 쿠폰을 내고 티라미수 또한 받아 돌아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자는 빨대로 휘핑크림을 살짝 떠먹으며 창문 바깥의 거리를 구경했다.
딱히 무언가 약속이나 용무가 있어서 카페에 앉아있는 것 아닌 듯 했다. 매일 시간마다 제일 좋아하는 음료를 시키고 어떨 때는 바깥을 바라보며, 어떨 때는 옆자리의 수다나 싸움을 엿들으면서 인간관찰을 하는 것이 그녀의 취미였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카페 안에서 뛰어다니던 어린아이가 넘어지며 여자의 무릎에 코코아를 엎질렀다. 다행히 차가운 음료라 화상 같은 건 입지 않았지만, 척 봐도 명품으로 보이는 옷에 얼룩이 다 져버렸다.
넘어진 아이가 키가 큰 여자를 올려다보며 떨고, 아이를 말리던 어머니가 찾아와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이 어머니는 곤란한 얼굴로 이걸 어떡해, 이걸 어떡해 하고 급히 티슈 몇 장을 뽑아오더니 아이에게 꿀밤을 때렸다.
“너도 사과해 빨리!”
“우으···.”
“죄송해요 정말. 세탁비는 드릴 테니 연락처를···.”
“아뇨, 받을 생각 없으니 괜한 염려 마세요.”
곤란해하는 어머니의 사과에 여자가 조용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깜짝 놀랄 수준의 미인이었다. 여자는 조금 쳐진 눈꼬리로 웃으며 더없이 상냥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죄, 죄송해요···. 화났어요? 누나.”
“아니, 괜찮아. 화를 내는 건 싫어하는 편이거든.”
그리고 여자는 웃으며 아무 말 없이 받은 티슈로 옷을 닦아내고 밖으로 나갔다. 화를 내진 않았지만 기분이 상한 것은 분명해보였기에, 어머니가 아이에게 다시는 카페에서 뛰지 말라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아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모자가 카페에서 나갔을 때, 나와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아이와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인 듯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인적 없는 골목길에 들어서자, 이변이 일어났다.
“어머. 얘가 어디 갔지?”
어머니가 갑자기 자식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주변을 걱정스레 둘러보았다. 그리 진지하게 걱정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또 어디 문방구에서 재밌는 거라도 보고 마음대로 들어갔나 보다, 하는 수준의 얼굴이었다.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카페에서의 대화를 다시 떠올린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세탁비를 받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방법으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상냥하게 웃으며 화를 내는 건 싫어한다고 말했다. 이미 보복할 조치를 취해놨으니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무릎꿇고 앉은 여자는 아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고, 요력으로 이루어진 두 장의 부적을 그 머리에 붙였다.
아이는 어머니 바로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전혀 아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인식저해의 주술에 노출된 결과였다. 세상에서 동떨어져버린 아이의 얼굴이 막연한 공포로 물들어갔다. 난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까이서 보니까 어때. 눈치챘어?”
“아뇨···. 전혀 판별하지 못했습니다.”
내 옆을 따라오던 남자가 얼굴의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 나온 얼굴은 금가의 1장로, 금양호였다. 그가 아이의 머리에 붙어있는 부적을 떼어내 없애주었다. 하나는 인식 저해의 주술이 걸려있는 부적, 또 하나는 시간 제한이 걸려있는 발화부였다. 갑자기 나타난 아이의 모습에 어머니가 크게 놀랐다.
“본체와 같은 압도적인 요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코앞에서 관찰해도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보일 뿐.”
금양호가 전율하며 어깨를 작게 떨었다. 사이한 것을 간파하는 것에 세상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는데, 결국 느낀 것은 아주 작은 위화감 뿐이었다. 내가 미리 정체를 귀띔해주었는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은 대요괴니까.
”저게 요호의 변용술입니까.”
방금 카페에서 나간 모델 같은 분위기의 여자야말로 요호가 위장한 모습이었다. 인간 사회를 너무나 좋아하는 그 요괴는, 인간들을 먹이 정도로밖에 보지 않는 다른 대요괴와는 사상이 전혀 다르다. 향락과 사치, 온갖 명품과 신상들. 이 훌륭한 인간 문명을 없애버리는 건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완전히 인간으로서 문화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요괴 중 만에 하나라도 일시 동맹이 가능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요호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녀는 인간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며 유지되기를 원하니까.
하지만 직접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요호야말로 대요괴들 중에서 가장 협력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지금 금양호가 부적을 떼어내주지 않았으면 아이는 아무에게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은 채로 혼자 불타며 어머니를 찾는 비명을 지르다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리엔 아무 것도 남지 않겠지.
잠깐동안 한 섬뜩한 체험에 아이는 엄마를 부르짖으며 어머니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커다란 울음이 자리를 메웠다.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옷에 코코아를 쏟아버렸기 때문에. 아이에게 당연한 보복으로 부적을 붙인 것이다. 이미 요호는 몇 분 전에 자신이 죽이려 한 이 아이의 얼굴도 잊어버렸겠지. 나는 그 사실에 진심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다행이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겨우 찝찝함이 사라졌다. 저 아홉 꼬리 달린 여우를 사냥하는 건 완벽하게 올바른 일이었다.
“아무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겠어.”
나는 활짝 웃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 풍종호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