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종호 (4) >
결계 안의 마을에 등불이 차례대로 켜져, 잔치 도중인 것처럼 주황색 조명이 거리를 채웠다. 하지만 마을 안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로지 영역의 주인인 거대한 여우만이, 빛나는 거리의 대로 한복판에 불타는 형상으로 내려앉았다.
요호는 요괴답지 않게 풍류와 향락을 좋아했다. 인간들이 쌓아올린 수많은 문화 뿐만 아니라, 원초적인 감정이 자아내는 극적인 상황 또한 음미하길 즐겼다. 다만 그녀의 취향은 대단히 악취미였기에, 인간들끼리 서로 이간질하고 오해한 끝에 파국에 치닫는 걸 구경하는 것이 최대의 낙이었다.
그러한 요호의 성향이 발현된 게 바로 이 결계였다.
그녀가 꼬리를 한 번 흔들면, 여우고개의 하늘은 무너지고 달밤의 잔치가 열린다. 등불이 환하게 켜진 마을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메워주는 것이 바로 인간이었다. 요호를 비롯한 수많은 요괴들에게 둘러싸여 벌벌 떨고 절망하다, 결국 미쳐서 서로 죽여버릴 어리석은 인간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은 특별한 이들을 결계 안에 초대하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연인이나, 단단한 인연으로 묶여있는 동료들.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강하고 유능한 병사들. 잡아먹히며 한계에 달한 인간들은 결국 밤하늘에 떠있는 요월에 홀려 서로를 죽이는 짐승이 된다.
꺼림칙한 발상이지만 단순히 흥미 본위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런 지옥도를 구현하는 것으로, 요호의 힘의 원천인 나쁜 감정들과 사념들을 충분할 만큼 회수할 수 있다. 그렇게 모인 사념들은 밤하늘에 떠있는 보름달에 저장된다.
일종의 보급고이자 비상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여우고개 공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 먼저 하늘에 걸려있는 가짜 달을 원거리 공격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조각난 달 아래에서 여우가 주술을 발동시켰다. 구른 앞발의 땅 밑에서 돌아가기 시작한 자그마한 문양은, 이윽고 마을 전체를 덮어씌울 만한 거대한 크기의 술진이 되었다.
<우선은, 술래잡기 놀이를 해볼까.>
역시나 대요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영토 안이라고 해도 순식간에 이만한 규모의 대주술을 발동하는 것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유경명에게 대응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손짓했다. 술진들의 모양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
<움직일 시간이란다, 추하고 미련한 것들아.>
개막의 술.
인간을 희롱하는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기술이자, 석상으로 만들어 봉인해놓았던 요호의 백귀야행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풀어주는 술법이었다. 연회의 막이 열리면, 아무 것도 없던 으스스한 마을은 한밤중의 지옥으로 변한다.
하지만 어떤 요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요호가 이변을 느끼고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곳곳에 놓여있던 석상들을 전부 진고요가 결계 밖으로 전이시켰다. 평범하게 찾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있던 비장의 석상들 또한 전부 위치를 알려준 뒤 퇴거를 완료했다.
입구의 두 장승이 제대로 기능했다면, 침입자와 싸우다 어느 정도 타격을 입는 순간 요호에게 바로 연락이 갔을 테니 그만한 시간은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숨에 무력화시킨 덕분에 요호가 돌아올 시간을 늦출 수 있었다.
반응이 없자 요호는 몇 번 더 개막의 술을 사용했다.
백귀야행의 모든 요괴들을 돌 안에 가둬놓을 수 있는 강력한 봉인이라면, 그것을 해주하는 데에 필요한 술법 또한 당연히 그에 못지 않게 강력해야만 했다. 그런 것을 마을 전체를 뒤덮는 범위로 발동하기 위한 요력의 소모는 엄청나다.
아마 금예린이 온갖 가보들의 보조를 받아 비장의 수까지 전부 써봐야 딱 한 번 발동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요호는 개막의 술을 여우고개 전체에 반복해서 발동시켰다. 정말로 뭐가 잘못됐나 시험 삼아 몇 번 더 해본다는 듯이.
대요괴 정도가 되면 아예 강함의 자릿수가 다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도전해도 되는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반쯤 억지로 이길 계산이 섰다. 역시나 반응이 없자 거대한 여우는 저편을 바라보며 불쾌한 기미의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지?>
“부하들을 너무 막 다뤄서 다 도망쳤나 보지.”
내 말에 요호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이전과는 달리 나를 의식하고 경계하는 시선이었다. 그야 내가 비꼬며 내뱉은 말은 방금 요호가 발동한 것이 ‘부하들을 불러오기 위한 기술’이란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제 직접 나서실 건가?”
<···누구 앞에서 여유로운 표정일까. 마음에 안 들어.>
요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요력을 머금은 요호의 꼬리가 허공에 붓질을 하자, 그 자리에서 커다란 부적이 만들어졌다. 요호가 지니고 있던 첫 번째 장기말인 호환은 내 쪽으로 돌아섰다. 두 번째 장기말인 백귀야행의 요괴들은 결계 안에서 퇴거당했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주술로 만들어낸 시체 강시들이 남아있었다.
요호가 사연 있는 인간들만을 살아있는 채로 손수 세공해가며 죽여 만든 컬렉션. 주술로 강화된 살인병기. 그 강시들의 몸에 붙어있는 수많은 부적들 중 하나는, 요호가 불렀을 때 당장 주인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드는 귀환부였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웬만한 기사에 필적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고, 무엇보다 혈통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전장에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만들어내기는 충분했다.
그리고 한창 각 포인트에서 요괴와 강시들과 교전 중일 금가의 병력이나 적풍회의 정예들이라도, 이 짧은 시간에 그들 모두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몸에서 부적 하나를 떼내는 것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설령 귀환부가 남아있는 강시가 있어도 난전 도중 부름에 응할 수는 없겠지. 무엇보다 금술이란 영역에선 독보적인 권위자인 금양호가 바깥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요호의 부름에 응답해 결계로 전이해온 부하는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한 명이 안 오냐. 진짜 부하가 있는 건 맞아? 사실 없는데 괜히 부르는 척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내 조롱에 휙 고개를 돌린 요호가 으르렁댔다.
<···네 수작이구나.>
“그럼 누구 수작이겠어. 멍청아.”
<나를 바라보려무나, 자그마한 아이야.>
새빨갛게 물든 요호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무언가가 의식에 간섭하려 한다. 아마 절찬리에 환술을 거는 중인 모양이었다. 그야 아무리 대단한 책략을 짜왔다고 해도, 이쪽의 속셈을 스스로 토해내게 하면 전부 무의미해진다.
적풍회가 아무리 대단한 작전으로 요호의 뒤통수를 기습하려 했던들 전부 무의미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요호는 뭔가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상대방을 붙잡아 무슨 속셈인지 캐낼 수 있으니.
<자, 너의 본심을 터놓아보렴.>
하지만 안 통한다. 불꽃 그 자체를 다루는 적룡에게 화염 계통의 주문은 아무리 쏴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정신을 현혹하는 기술 따위 정신 능력자의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나는 일부러 눈의 초점을 흐리게하며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곳의 위치를 알아낸 방법과, 무슨 자신감으로 날 죽이겠다는 건지. 무엇보다 대체 너는 누구길래 이렇게까지 준비를 한 건지. 네가 그린 청사진을 하나하나 설명해.>
“그건···.”
내가 우물쭈물하자 요호는 꼬리를 크게 쳐들었다. 현혹하는 환술에 더욱 강대한 요력을 쏟아부어, 나를 폐인으로 망가뜨리는 한이 있어도 일의 진상을 들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던 나는 천천히 한쪽 손을 들었다.
“그건 바로··· 이겁니다.”
그리고 요호를 향해 중지를 올렸다. 움직임을 멈춘 요호는 내가 내민 손가락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당당히 올라가있는 가운데손가락에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인지 고찰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당연히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뭘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어. 바보 아냐?”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제야 요호는 처음부터 환술 따위 통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듯 싶었다. 그리고 요호의 분위기에 처음으로 긴장과 적대의 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현혹시켜 가지고 놀 수 있는 이상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수를 준비해왔다 해도 적수가 아니라 장난감일 뿐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진정한 싸움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근본적으로 환혹이 통하지 않는, 같은 대요괴의 격을 지닌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싸움이 아닌 소꿉장난일 뿐.
하지만 그녀의 환술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인간을 만난 지금, 요호에게는 아주 약간이나마 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나는 아홉 꼬리를 바짝 세운 괴물 여우를 향해 피식 웃었다.
“너무 억울해하진 마. 어차피 다른 대요괴도 전부 정리할 거였으니. 제일 먼저 너부터 처리하게 된 건 뭐···.”
나는 요호와 친절하게 눈을 마주친 뒤 어깨를 으쓱였다.
“제일 만만하니까?”
동시에 포효를 내지른 요호가 공격을 시작했다.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꼬리들을 호신강기를 갈고 닦고 있던 유경명이 달려나가 쳐냈다. 덩치만을 의존해 싸우는 순수한 육탄전이라면 아무리 요호라도 유경명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 없다.
애초에 요호는 완력 싸움 따위를 무기로 하는 요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꼬리를 휘두른 여파만으로 흙먼지가 시야를 뒤덮고 돌덩이가 날아온다. 이런 게 만만하다니 터무니없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만에 하나 내 정보나 능력들이 전부 알려졌을 경우, 대항책을 짜내 손도 발도 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가장 위험한 요괴가 바로 요호 매구였다. 그렇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손에 닿는 지금 처리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혈통시대처럼 이야기 전체에 영향을 끼치며 날뛰도록 두고 싶지 않다. 무대에 얼굴을 내밀기 전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로 지금 퇴장시킨다. 나는 날아오는 돌덩이들을 염동력으로 치워내며, 제자리에 서서 유경명에게 지시를 전달했다.
“구슬. 오른쪽 아래 7번.”
요호가 술진을 짜내려고 하자마자, 도약해 달려나간 유경명이 회전하고 있던 구슬 중 하나를 정확히 타격했다.
전혀 다른 능력을 사용하는 아홉 개의 구슬. 어떤 구슬에서 어떤 능력이 발동되는지는 죽어라 맞아보기 전에는 눈치챌 수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패턴을 완전히 외운 뒤에는, 충분한 공격속도만 확보되면 전부 사전에 틀어막을 수 있다.
오로지 유경명에게만 가능한 방식이었다.
엉뚱한 구슬을 쳤다면 대참사가 났겠지만, 유경명은 지극히 냉정하게 각 구슬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냉정한 채 있을 수 있도록 내가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호환···!>
원래대로라면 정확한 지점을 타격한다고 해서 준비중인 기술을 취소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호신강기는 산군의 포효와 같이, 구성되고 있는 술식을 흐트러뜨리는 효과를 낸다. 원래대로라면 비장의 수와 같이 한 번 온몸에서 발산시키고 끝이지만, 유경명은 검기를 쭉쭉 뽑아댈 수가 있다.
유경명은 요호가 주술을 발동하려 할 때마다 꼬리의 견제들 전부를 뚫고, 기술의 기점이 되는 구슬을 타격했다.
취소시키고, 취소시키고, 취소시킨다.
요호는 순간 순간 다른 동작을 섞는 것으로 이쪽을 속이려고 했지만, 내가 읽고 있는 것은 동작이 아니라 요호의 발밑에 나타나는 술진의 모양이었다. 요호는 당연히 생각하지도 못하겠지. 자신과 한 번도 대면해본 적 없는 인간이 어떻게 수십 수백 번은 상대해봐야 알 술진의 차이를 간파할까.
하지만 큰 주술을 사용하지 못하고 발이 묶인 요호는 초조해하거나 위기에 처했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준비했다는 전략이 고작 이 정도인가 하는 실망감까지 드러나있었다. 유경명의 대검을 받아낸 요호가 으르렁댔다.
<지리멸렬해. 좀 더 영리할 줄 알았는데.>
“8번.”
그 와중에도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콰앙! 총알처럼 날아간 유경명이 구슬에 대검을 때려박아 주술을 파훼했다. 그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저편에서 요호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할 생각이지? 호환은 내 목숨을 끊을 만큼 나를 몰아붙이지 못해. 내 요력을 소모시키려는 수작 같지만, 그것보다 훨씬 먼저 호환의 체력의 고갈될 거야. 결국 하찮은 시간 벌기밖에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유경명이 채찍처럼 휘둘러진 꼬리를 막아냈다. 내 공략대로 움직이고 있다고는 해도, 유경명은 정말 그 요호를 상대로 혼자서 발을 묶는 것에 성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요호의 말대로 유경명의 체력에 한계가 찾아오는 순간 이 교착상태는 끝나고 주술 한 방에 우리는 전멸이었다.
그리고 나는 싸움의 여파를 가끔씩 염동력으로 막아내며, 가만히 자리에 서서 계산을 확인하고 있었다. 개막의 술 세 번에, 강시 부르기 두 번. 현혹할 때 주술 폭주 한 번 썼고, 7번 주술 세 번에 8번 주술 두 번···. 내가 씨익 웃었다.
“이제 멸옥 못 쓰네.”
멸옥. 아홉 개의 구슬을 전부 한 데 모아, 모든 것을 섬멸하는 일격을 거대한 범위에 내리치는 요호 최강의 주술.
사용하는 순간 여우고개 자체가 소멸해버리는 자포자기 식의 필살기였다. 한 번 발동하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막아낼 수 없기에, 애초에 멸옥이 나올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했다. 아니면 여우구슬처럼 특수한 아이템을 써서 넘어가거나.
어떻게 하면 멸옥을 못 쓰게 하고, 여우구슬을 남긴 채로 요호 전을 넘어갈지 수십 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연구했다. 기본 상태에서 어떤 주술을 몇 번 써야 아슬아슬하게 멸옥을 못 쓰는 요력만 남게 되는지 계산하는 건 익숙했다.
<멸옥까지 알다니. 점점 네 정체가 궁금해지는데···. 하지만 이곳은 내 결계야. 요력이 부족하다면 공급받으면 될 뿐이지. 애초에 이 안에서 그런 위험한 걸 쓸 생각도 없지만.>
“아니. 쓰고 싶어도 못 써.”
나는 손가락을 들어 위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깨져버린 달이 있었다. 아까부터 쭈욱 깨져있었지만, 요호는 단 한 번도 그곳에 눈길을 주지 못했다. 일부러 되도 않는 도발까지 하면서, 알게 모르게 요호가 내게 집중하도록 하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본 요호의 눈동자가 떨렸다. 보름달이 깨져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들 이전에, 자신의 결계 안에서 저런 이변을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다니 터무니없다.
<마인드맵 개척 : 의식 제어 Lv.5>
마술사들이 하는 시선 끌기나 똑같았다. 아주 조금씩 요호가 이쪽만을 의식하게 유도했다. 그 결과, 하늘의 달이 한참 전부터 깨져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자체로 무언가 상황이 뒤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의 개입이 없는 이상 이대로 가면 유경명이 지치는 순간 게임 오버였다. 나는 요호의 주술 단 한 방도 절대 버티지 못한다. 아니, 한 번은 여우구슬로 어떻게든 버티나.
외부의 개입이 없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호랑이 차례는 끝.”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여우고개에 커다란 바람이 몰아쳤다. 안에 있던 요괴들의 석상들과 함께 결계 밖으로 나가있던 진고요는, 공중에서 나타나 땅으로 사뿐 떨어졌다. 그 팔 위에는 진고요와 함께 전이해온 한 명의 여자가 안겨있었다.
“우와, 오빠. 진짜 둘이서 싸우고 있었네.”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바닥으로 내려온 정세나가 나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외통수를 놓았다. 이제는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선물은 잘 받았어?”
“하나도 남김없이 꼭꼭 씹어먹었지.”
거의 모든 능력을 잃고 영락했더라도, 같은 대요괴의 격을 지닌 상대에게는 대요괴로서 가진 권능이 통하지 않는다. 정세나가 요호를 그림자 안에 집어넣어 수하로 삼지 못하듯, 요호 또한 2대째의 어둑시니인 정세나를 환혹할 수 없다.
그리고 정세나의 발밑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펼쳐졌다.
“동료였던 이들끼리 서로 죽이는 게 취미랬나.”
그 안에서 하나둘씩 나타난 것은 수많은 검은 요괴들. 석상이 되어 모든 힘이 봉인된 탓에 반항할 방법조차 없이 그림자에 먹혀, 이제는 근묵자흑에 침식당한 채 변이해 정세나의 수하로 지배당하게 되어버린 요호의 백귀야행이었다.
요괴들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대요괴인 요호가 자랑하는 멸옥이라면 이 모든 요괴들을 정세나와 함께 한 번에 섬멸시키고 상황을 뒤집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한 작업은 그것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 하나만을 바라보고 한 것이었다.
이내 요호의 수하였던 검은 요괴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여우를 포위했다. 유경명 또한, 다시 대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면 네 취향대로 죽어.”
나는 위대한 대요괴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 풍종호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