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묵지화 (1) >
검은 짐승들이 요호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군세의 선두에 서있는 것은 유경명이었다. 요호의 앞잡이로서 흉행을 대신하던 호환이, 요호의 뒤를 따라 참극을 만들어내던 백귀야행이. 지금은 요호를 죽이기 위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눈동자를 굴리던 요호가 포효를 내질렀다.
대요괴 정도가 되면 단순히 요력을 실어 울부짖는 것만으로 하나의 저주가 된다. 몸이 조금쯤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런 건 오차일 뿐이었다. 나는 요호가 가진 모든 수단을 알고 있고, 그 중에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변수는 없었다.
그리고 요호의 발아래에서 빛나는 술진이 나타났을 때, 유경명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땅을 박차고 날아갔다.
“왼쪽 위, 4번.”
내가 가리킨 것과 동시에, 호신강기가 터져나오는 대검이 정확한 지점을 타격했다. 요호의 자세가 크게 흔들렸지만, 유경명은 추가타를 넣지 않았다. 정확히는 넣을 생각이 없었다. 곧바로 제자리에 돌아와 요호의 다음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제야 요호는 이쪽이 기세를 몰아 승부를 끝낼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 시간을 질질 끌어서라도 불확정 요소를 만들지 않고 마무리한다. 철저하리만큼 집요하게, 변수가 될 만한 기술의 발동만을 방해하며 말려죽인다.
유경명은 조용히 서서 투기를 갈무리했다. 그동안 요호의 몸을 물어뜯으며 공격하는 건 다른 요괴들의 일이었다.
<너희들···. 너희들이···!>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민 요호는 자신의 몸에 불꽃을 휘감았다. 정련되지 않은 요력을 온몸에 풀풀 뿜어내고 있을 뿐이기에, 발동하는 데에 진이나 부적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술식의 구조가 복잡하고 섬세할수록 훌륭한 것이라 여기는 요호의 미학과 정면으로 대비되는 원시적인 기술이었다.
그만큼 궁지에 몰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입을 쩍 벌린 요호가 내 쪽에 불꽃을 내뱉었다. 대놓고 쏜 공격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못 피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로 쏘아낸 것이다. 확실히 이제는 그런 요행수밖에 바랄 것이 없었다.
“그래도, 수준이 너무 떨어져.”
대요괴의 싸움이라곤 생각할 수도 없다. 내가 손을 내밀자, 바람을 휘감은 진고요가 내 앞에 달려와 날 붙잡고 도약했다. 내가 서있던 자리에 폭발과 함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요호의 몸이 흑요들에게 물어뜯겼다.
요호는 검은 짐승들의 공격에 꼬리와 발톱을 휘두르며 저항하려 했지만, 애초에 그녀는 육탄전이 특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정세나의 심복이 되어버린 그들 또한 요호가 모은 백귀야행으로서 어느 정도의 강함을 갖추고 있었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그래도 역시 근본적인 수준 차이라는 게 있는 건지, 요호는 달라붙는 요괴들을 어떻게든 떨쳐냈다. 몇 마리는 불꽃을 휘감은 꼬리로 꿰뚫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요괴들은 거대한 여우에게 더욱 달라붙어 그 살점을 갉아먹었다.
요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주술을 발동하려고 하면, 유경명이 절묘한 타이밍에 파고 들어 발동을 틀어막았다. 한 번. 딱 한 번만 발동하면 주변을 다 쓸어버리고 활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지 요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나는 결코 기술을 쓰게 해줄 생각이 없었다.
요호가 헛수고를 한 시간만큼 흑요들은 더욱 옥죄어들었다. 살아있는 채로 생살을 뜯어먹히면서도, 요호는 쉽게 죽지 않았다. 완전히 피투성이가 다 된 상태에서 몇 번이고 회복해 부활했다. 그리고 다시 조금씩 온몸을 먹히기 시작했다.
<어째서지···!>
증오에 가득찬 눈초리로 요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 같은 인간 따위 몰라! 눈을 보면 알아, 너는 나를 별로 증오하고 있지도 않아···!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왜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죽이려 드는 거냔 말이다!>
“네가 할 말이냐?”
난 요호에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 또한 상관없는 인간을 수백 명 죽여왔다. 하지만 아마 요호가 묻고 싶은 건 조금 다른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강자의 놀이였을 뿐, 너는 왜 이런 대단한 수고를 들여서까지 굳이 자신을 적대하는 거냐고.
“내 친구 몸 뺏으려고 했잖아.”
나는 안주머니에서 스윽 여우구슬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것이 어떤 물건인지 금가와 교류하던 요호라면 알 터였다. 그리고 자신이 금가를 집어삼키려 은밀히 움직이던 계획을 모조리 망쳐버린 누군가의 정체 또한 이제야 눈치챈 듯 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대요괴를 죽이겠다고···!>
“그럼 뭐 얼마나 대단한 이유가 있어야 되냐.”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것 같지만 재생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그 끔찍하게 지루한 과정 속에서 방심을 하는 얼간이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깎아냈는데도, 순수한 힘의 크기는 아직 요호 쪽이 우위였다. 참 더럽게 싸운다 욕을 먹을 만큼 치졸하게, 요호가 할 행동을 하나씩 틀어막았다.
<그만, 그만해···.>
그리고 핏물이 흘러 만들어진 진창의 한가운데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같은 애원이 새어나왔다. 강제로 몇 번이나 몸이 재생되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그런 고통 속에서 요호가 내뱉은 건 그만 편하게 죽여달라는 부탁이 아니었다.
<내가 졌어···. 항복이야. 이렇게 죽기는 싫어···!>
정확히 그 반대였다. 요호는 산 채로 뜯어먹혀야 하는 재생과 부활의 횟수가 아직도 반이나 남은 것이 아니라, 벌써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고통 따위 몇 년이고 참을 수 있었다.
<발을 핥으라고 하면 핥을게. 주술로 구속시켜 복종의 맹세를 시켜도 좋아. 죽이지 말아줘···! 우스꽝스러운 꼴로 만들어 애완동물 취급을 해도 상관없으니, 제발 목숨만은!>
자신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깨달은 순간, 요호는 곧바로 항복했다. 요호에게선 이미 어떠한 반항의 몸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히 굴종한 채 웅크린 자세를 취했고, 텔레파시로 읽은 표층 의식도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요호의 복종을 거절했다.
“안 돼. 죽어.”
단순히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싸움은 나만이 일방적으로 요호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기에 성립한, 단 한 번밖에 통하지 않는 급습이었다. 무엇보다 저 여우는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머리가 좋다. 요호와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싸우게 된다면 땅밑에 해골로 파묻히게 되는 건 내 쪽이었다.
<···그래, 다른 대요괴를 처리하고 싶다고 했지! 분명 내가 도움이 될 거야. 필요하다면 내가 먼저 전쟁을 일으켜 끌어내줄 수도 있어! 호환의 가면보다 더 대단한 주술 도구도 몇 개든 만들게! 그리고 나만 알고 있는 이 세계의 비밀들이···!>
“필요 없어. 다 알아.”
요호는 포기하지 않고 수십 가지의 호소와 협상을 제시했지만, 나는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몇 시간 동안 묵묵히 요호를 죽여가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요호의 몸은 더 이상 재생할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 목숨이었다.
<싫어! 죽이지 마! 나는 좀 더 하고 싶은 게···!>
“아저씨.”
유경명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는 마지막 일격을 내리치는 것만이 남았고, 여기서 가장 끝맺을 자격이 있는 것은 바로 그였다. 유경명은 원망의 말이나 복수의 심정 같은 걸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대검을 내리쳤다.
그렇게 넷 뿐인 대요괴 중 하나가 목숨을 다했다.
그 무시무시한 능력을 조금도 발휘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훨씬 약한 부하들에게 천천히 갉아먹혀 죽어갔다. 등불이 켜져있던 한밤중의 마을의 풍경이 신기루처럼 옅어졌다. 어느새 안에 있던 모두가 산골짜기의 공터로 돌아와있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
요호가 정말 죽었다는 걸 쉬이 믿을 수 없는지, 처참하게 훼손된 유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정세나가 말했다. 그녀가 근묵자흑으로 흡수해 이끌고 있는 요호 휘하의 백귀야행은, 지금도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였다.
정세나는 척 보기에도 이전보다 상당히 강해져있었다.
검성의 성소에서 차대운을 상대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꽁무니를 뺀 뒤에, 상당히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거겠지. 그림자엔 아직도 충분한 여력이 남아있었다. 전대 어둑시니의 오른팔이었던 비장의 요괴 또한 불러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인원으로 요호를 진짜 죽여버리다니,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잖아. 오빠가 얼마나 위헣한 인간인지 가늠이 안 돼. 여기서 확실히 먹어치워놓는 것도 한 방법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하며 정세나가 웃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흑요들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정세나는 딱히 내게 우호적인 동료 같은 게 아니었다. 유경명과 진고요가 내 앞에 섰다.
“둘이서 나를 막아보겠다고?”
“설마 둘이겠어.”
저편의 언덕에서 적풍회와 금가의 사람들이 얼굴을 내비추었다. 그들은 여우고개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요호의 환혹에 걸리지 않는 건 내가 직접 정신을 붙잡아주는 몇몇과, 이미 정세나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흑요들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장을 제압한 뒤에는 결계의 토대가 되는 위치에 다같이 대기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요호의 유해를 수습해야 하기도 하고, 전투가 끝나면 대충 이렇게 될 것 같았으니. 그나마 요호를 잡기 전에 뒤통수를 치진 않아 다행이었다.
‘그런 도박을 걸기엔 요호가 너무 무섭지.’
그리고 지금 이것은 배신도 뭣도 아니다. 나와 정세나는 원수 같은 게 아니지만, 딱히 아군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금가의 무사들과 적풍회의 간부들을 둘러본 정세나가 말했다.
“못 이길 거라 생각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딸깍발이를 꺼내면.”
내 말에 정세나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만일의 경우 의지하게 될 비장의 패를 아무렇지 않게 들켜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잠깐 나를 노려보던 정세나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더니, 꺼내놓았던 군세를 자신의 그림자에 회수했다.
“···그만둘게. 좋은 선물도 받았고, 오빠처럼 무서운 인간이랑 싸우면 이쪽도 그냥 끝나지는 않을 것 같으니.”
“그래. 그럼 내 쪽에서도 할 말이 있는데.”
“나는 더 이상 할 말 없어.”
정세나가 자신의 그림자 안에 손을 뻗어 새까만 빵모자를 꺼냈다. 머리에 모자를 툭 얹은 정세나가 휘파람을 불자, 그림자에서 거대한 마물이 나와 커다란 날개를 폈다. 능숙한 몸짓으로 마물의 손바닥에 걸터앉은 정세나가 말했다.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거든. 다음에 봐, 오빠.”
유경명이 대검을 치켜들었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정세나는 어두운 보라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리고 금양호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언덕 위에서 공터로 내려왔다. 금양호가 날아간 마물을 보며 말했다.
“저건 대체···. 아니, 그보다.”
눈앞에는 아홉 꼬리 달린 거대한 여우의 유해가 있었다. 대요괴의 일각이 무너져내렸다는 건 거대한 사건이었다.
“정말로 죽이신 겁니까.”
장로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이변은 어떤 형태로든 이후의 형국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충분했다. 나는 금양호의 어깨에 툭 손을 얹었다.
“수고했어. 역시 금가야.”
단순한 치하의 말이 아니었다. 요호의 토벌에 대한 공적이나 뒷수습은 전부 그쪽에 떠넘기겠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는지 금양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변 금가의 여우 혼혈들을 모아 어떠한 주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은폐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제 좀 대놓고 세한 애들 키워줄 수 있겠네.’
요호가 내 존재를 눈여겨보기 시작하면 수습이 불가능한 사태로 번질 수도 있었기에 최대한 숨죽이고 있었지만, 요호가 죽어버린 이상 이제 훨씬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다른 대요괴들은 그냥 끔찍하게 강하기만 할 뿐이니까.
나는 곧바로 차대엽에게 연락을 넣었다.
* * *
길거리를 걷고 있으면 벌써 새벽이었다.
건물들이 남색으로 물들었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주변에는 사람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 안에 들어가 마실 것을 하나 샀다. 가게 앞의 파라솔엔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나는 덜컹 의자를 빼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할 말 있다는데 왜 도망치냐?”
컵라면을 후루룩 먹고 있던 녀석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보았다는 표정이었다. 크게 놀랐는지 사레가 들려 기침하는 녀석에게, 나는 방금 산 생수를 건네었다. 생수를 마신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어떻게.”
“어떻게고 뭐고. 슬슬 한계지?”
나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정세나에게 말했다.
근묵자흑은 대요괴인 어둑시니가 사용하는 걸 전제로 하는 능력이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보유자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여러 가지 부작용을 떠안게 된다. 그중 하나가 그림자 속 흑요들의 본능과 동조해버린다는 것이다.
공격성이나 흉폭성이 거세지고, 사람을 잡아먹고 싶어진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흑요들의 충동을 그녀 또한 일정 부분 공유한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림자 속 마물들의 욕구는 거세지고, 정세나는 반쯤 미칠 지경이 된다.
심지어 그냥 본능에 따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인간의 몸이란 건 다른 인간을 산 채로 전부 씹어먹을 수 있게 되어있지 않다. 따르고 싶어도 요괴의 본능에 따를 수 없다.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건 그런 이유였다. 평소에도 수많은 마물들의 충동이 머릿속에서 울렸을 것이다. 인간이 많은 곳에선 당연히 더욱 거세지고. 이번에 내가 요호의 백귀야행을 싹 다 흡수시킨 탓에 이제 거의 한계 직전이겠지.
내 책임도 있으니 이 정도 애프터 케어는 해주는 게 맞았다. 무엇보다 정세나가 폭주해버렸다간 그 자리에서 새로운 대요괴의 탄생이었다. 기껏 공들여 요호를 치워놨는데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다. 나는 내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없애줄게. 머릿 속 소리.”
앉아있는 정세나가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았다.
< 현묵지화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