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묵지화 (3) >
대요괴를 잡은 보상은 말 그대로 대단한 것이었다.
<퀘스트 완료 : 요호를 토벌하였습니다.>
<보상 : 시스템 접근 권한 Lv.3을 획득합니다.>
<추가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퍼펙트 게임 : 30,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기적의 승리 : 30,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이이제이 : 25,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
접근 권한이 올라간 것은 그렇다 치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타이밍과 전력으로 잡은 탓에 추가 업적들이 펑펑 터져 크레딧 또한 무서운 수준으로 불어났다. 지금까지 주력으로 쓰고 있던 초능력들을 한계까지 강화해도 크레딧이 남았다.
<인증이 완료되었습니다. 시스템 접근 권한 레벨이 2→3, 개발자(Developer)에서 관리자(Admin)로 갱신됩니다.>
염능력 또한 이전과는 한 단계 결이 달라져있었다. 이 정도면 세한기전의 날고 기는 녀석들과도 정면에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나답지도 않은 생각을 해버릴 정도로.
‘아니. 그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
정면승부 따위는 정말 불가피할 때나 택하는 수단일 뿐. 가장 상책은 싸울 필요 없이 이기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이다. 요호 또한 정보의 우세를 이용해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된 싸움을 했기에 토벌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나는 대단한 영웅 따위 못 될 소시민이고, 이길 확신이 없으면 들어가지 않는 겁 많고 치사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정세나가 갑자기 나를 공격했을 때에도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요호와의 싸움 직후에도 나를 먹어치우려고 기회를 엿봤던 정세나다. 혼자서 만나러 오면 열 중 다섯 정도는 이런 결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정세나가 벌써 묵계의 공격 형태를 각성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변의 혈통능력을 발동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 형태의 묵계와 달리, 스스로 그림자를 둘러 온갖 요괴들의 능력과 신체 기관, 수많은 혈통능력을 뒤섞어 쓰는 경지.
‘나랑은 정반대군.’
단 하나의 혈통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쪽 입장에선, 정말 하나쯤 나누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 의자의 등받이 위에 앉아, 반쯤 기울어진 의자의 팔걸이에 신발을 올려놓았다. 아크로바틱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괜찮아? 그거 쓰면 다른 애들 못 꺼낼 텐데.”
“참 걱정이 많네, 오빠는.”
확실히 어둑시니가 어둠 속에 집어삼킨 수하들의 능력을 스스로 사용하는 도중에는, 그림자 밖으로 다른 수하들을 꺼낼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건 딱히 단점 같은 게 아니었다.
그림자 밖에 흑요들을 풀어두었을 때와 달리, 모든 힘이 어둑시니 하나에 집중된 상태로는 조무래기들을 죽여 전력을 깎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둑시니가 무적이라고 불렸던 이유. 본체를 쓰러뜨리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형의 그림자들을 두른 정세나가 말했다.
“그래도 상관없어. 오빠는 내 스스로 굴복시켜 흡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다치기 싫으면 반항하지 말고 이리 오는 게 어때? 난 이래봬도 부하들한텐 상냥하거든.”
한식구, 가족 같은 거니까 말이야. 하고 정세나가 말했다. 차대운한테서 도망치려고 자길 따르는 수많은 마물들한테 자폭 특공을 시킨 게 누군데 말은 잘해요. 나는 그림자에 뒤덮인 채 백귀야행을 두른 정세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한데 누구 밑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서.”
“그러면 부하 취급 안 할 테니 이리 와줄래?”
정세나가 날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혈통시대에서 흑호를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보면, 부하 취급 하지 않겠다는 저 말에 딱히 거짓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어둑시니의 그림자에 먹혀본다는 모험을 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림자에 먹혀서야 학교도 못 다닌다. 내가 고개를 젓자, 정세나는 알고 있었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오빠는 혼자서도 완벽하니까.”
그리고 웃고 있던 표정은 일그러져 어느새 짜증과 원망으로 가득차있는 이 악문 얼굴이 되었다. 정세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그림자가 그 형체를 잃어버릴 만큼 사납게 들끓었다. 보라색 머리칼이 흔들리고, 정세나가 나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던 나랑은 달라. 처음부터 모든 걸 가지고 있고, 무엇 하나 잃어버린 것 없겠지. 그런 거 치사하잖아!”
“뭐?”
“그러니까 내가 빼앗아줄게. 오빠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내 것이 되도록. 그걸로 처음으로 균형이 맞게 돼.”
말하는 방식이 지리멸렬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지금 정세나는 나를 전력으로서 평가해 어둑시니의 백귀야행으로 포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화가 났을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눈썹을 찌푸린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괜찮냐?”
“괜찮지 않아. 그래도 괜찮아, 이제 곧 괜찮아질 테니까.”
목소리는 작아졌지만 정세나는 대단히 흥분해있었다. 적어도 말로 진정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굳이 텔레파시를 발동하지 않아도, 주변의 격한 감정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감응능력이 더욱 발전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뭐라고 말하는 대신, 제대로 의자에 내려와 앉아 기지개를 폈다. 정세나가 이쪽을 공격할지도 모른단 건 상정 범위 안의 일이었고, 대처할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다.
“뭐, 스트레스 해소가 필요하면 놀아줄게. 나도 사실 새 능력들을 시험해볼 연습대를 찾고 있던 참이니까.”
원래 계획은 정세나가 묵계로 혈통능력을 봉인하려 하면 염능력으로 빠져나가는 거였지만, 이 정도로 흥분한 상태라면 오히려 딱 좋다. 내가 와보라고 손가락을 까닥이자, 값싼 도발에 눈을 동그랗게 뜬 정세나가 한쪽 팔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아무 것도 없던 공중에서 나선을 이루며 그림자들이 모여들더니, 뾰족한 흑색 송곳이 되어 내가 있는 자리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그걸 쳐다보며 염력을 발현시켰다.
콰앙! 송곳 하나하나가 사람 몸 따윈 우습게 찢어발길 위력으로 땅바닥에 박혔다. 거대한 송곳에 직격당한 테이블이 반파당해, 내 얼굴 바로 옆을 스치며 저 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는 나에게는 아무 상처도 없었다.
나는 테이블이 날아가기 전에 집어든 생수를 꼴깍꼴깍 마셨다. 멍하니 입을 벌린 정세나가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 나타난 촉수 같은 꼬리를 나를 향해 쏘아냈다. 몇 갈래로 나뉘어진 새까만 그림자의 꼬리는 나를 붙잡기 위해 포위하듯 내리쳐졌고, 다음 순간 콘크리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꼬리들은 내 주변의 땅에 박혔다.
생수를 다 마신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휙 페트병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병은 깔끔하게 재활용 쓰레기통 안에 들어갔다. 정세나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왜 안 맞는 거야?”
“네가 맞추기 싫나보지.”
“그럴 리 없어!”
그리고 정세나가 다른 쪽 팔을 치켜들었다.
이내 그림자가 모여들어 만들어진 거대한 짐승의 앞발이, 정세나의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지형째로 부숴버리기 위해 나타났다. 조준이 맞지 않는다면 조준 자체가 필요 없는 범위의 공격을 하면 된다. 대단히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였다.
“그거 맞으면 나 죽을걸? 죽으면 부하 못 시켜.”
“여기까지 와서 시치미 떼지 마, 오빠.”
진짠데. 나는 저렇게 대단한 공격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식칼로 배를 살짝 찌르기만 해도 죽는 평범한 인간이다. 하찮은 거짓말 따위 하지 않는다는 신조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언제부터 주변의 내 신뢰가 이렇게 떨어진 건지 모르겠다.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정세나가 움찔했고, 기세에서 눌리지 않으려는 듯 그대로 그림자의 거대한 앞발을 내리쳤다. 파괴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보도블럭이 마구잡이로 날아가고, 길거리에 거대한 마물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내가 앉아있는 옆쪽에 말이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꼬았다.
“이렇게 난리 피우면 사람이 오잖아.”
나는 완전히 박살이 난 길거리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편의점 점원은 기절한 채였지만, 아무리 인적 없는 폐공장 터 옆이라도 이만한 소동을 피우면 누군가 눈치챌지도 몰랐다. 숨을 헐떡이는 정세나는 이제 거의 공포에 질려있었다.
‘발동할 상황을 만드는 게 어렵긴 한데, 쓸만하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새로운 능력을 품평했다.
<마인드맵 개척 : 의식 동화 Lv.1>
공격 자체에는 쓸 수 없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기술이었다. 상대방이 무언가를 하려는 의식에 아주 잠깐동안 섞여, 은근슬쩍 방향을 바꾼다. 사소한 위화감에 신경쓸 수 없을 만큼 흥분하고 동요한 상태일수록 걸리기 쉬운 능력이었다.
우선은 맨 처음, 정세나의 발밑에서 짐승의 머리가 솟아올랐을 때. 이것은 내가 실제로 그냥 피한 것이었다. 무언가가 온다는 것을 초감각으로 미리 감지해 재빠르게 회피했다. 그렇게 기습이 무용으로 돌아간 정세나에게 인식이 박힌다.
자신의 공격이 맞질 않는다는 아주 희미한 인식.
그것으로 능력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인 준비는 끝났다. 흥분할대로 흥분해서 왜 맞지 않는 거냐고 강하게 의식하며 동요할수록, 공격하는 그 순간에 내 의지를 슬쩍 동화해 방향을 바꿔버리는 일은 손쉽게 된다. 결국 단순한 속임수였다.
만약 상대가 차대엽이었다면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동요 따위의 빈틈을 주지 않을뿐더러, 한 번 어떻게든 공격의 방향을 틀어보아도 집중을 풀어버리긴커녕 자신의 의지를 더 강하게 다져 간섭하지 못하게 굳혀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정세나는 어둑시니의 능력을 그저 물려받은 것일 뿐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 싸우는 자가 아니었기에,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내 페이스에 휘말리게 만드는 것은 비교적 손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정세나가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야···. 어째서···.”
하기는 전사로서 완성됐니 뭐니를 따지기 이전에 멘탈에 상당히 문제가 있어보이기는 했다. 가만히 앉아있는 내게 어떤 공격도 맞추지 못하고 압도당했다. 그런 자신이 분한 건지 답답한 건지 정세나는 전의를 잃고서 무릎을 꿇었다.
‘정신병인가.’
나는 울고 있는 정세나를 내려다보며 턱을 매만졌다.
평소에는 여유로운 태도로 수상한 척하며 웃고 있지만, 그것은 이를 테면 자기방어의 수단일 뿐. 사실 정세나는 대단히 암울한 성향의 인간이었다. 그것은 어둠 그 자체로 이루어진 요괴인 어둑시니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만 봐도 명확했다.
정세나는 혈통시대 전체를 통틀어서도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야 요괴 사이드의 주인공인 것이다.
어둑시니라는 요괴의 특수성 덕에 탄생한, 전례가 없는 반인 반요. 그 혼탁한 상태에서 자신의 자아를 인간 쪽에 둘지, 요괴 쪽에 둘지로 능력이 성장하는 방향이 결정된다.
그리고 지금의 정세나는 혈통시대에서보다 훨씬 불안정했다. 아마도 내가 개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라면 탈선해서 또 하나의 대요괴가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 능력자긴 해도 그런 걸 고쳐주는 데에 있어서는 그다지 소양이 없었다. 애초에 우울에 젖어드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엇고, 무엇보다 정세나는 나를 대단히 싫어하는 것 같았다. 이내 울던 정세나가 지쳐서 쓰러졌다.
이내 정세나를 툭 들쳐업은 나는 이 상황에 아주 적당한 인물을 떠올렸다. 요괴에 대해 알고, 정세나와 일단 안면이 있고, 온갖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구해내본 경험이 있으며, 자기 스스로도 암울함의 끝을 달려보았던 인간.
‘요호 같이 잡아줬는데 내치지는 않겠지.’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나는 정세나를 업은 채로, 유경명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 현묵지화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