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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76화 (76/113)

< 현묵지화 (4) >

정세나가 눈을 뜬 것은 정오가 다 되어서의 일이었다.

식은땀에 젖은 정세나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색은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창백해져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가 주변의 낯선 풍경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적어도 이곳이 자신의 은신처가 아니라는 건 곧바로 깨달았을 것이다. 정세나의 아지트에는 애초에 제대로 된 침대와 이불 같은 것이 구비되어있지 않았으니까. 침대 앞의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손에 든 종이를 펄럭펄럭 넘기면서 말했다.

“그래도 낮에 깼네. 저녁은 돼야 일어날 줄 알았더니.”

보고 있던 것은 요호의 유해 수습과, 금가가 얻은 이권의 배분 등에 관하여 금양호가 작성해서 보내준 보고서였다. 나를 배려한 것인지 보고서는 사무용의 서식이 아니라 직접 내용을 풀어서 써준 형식이었다. 정세나가 날 빤히 바라봤다.

“무슨 꿍꿍이속이야, 오빠?”

“뭐가.”

“이런 데까지 끌고 와서는. 쓰러져 있는 걸 데려다 돌봐줬다고 생색이라도 낼 셈이야? 은혜를 안다면 더 이상 노리지 말라고? 의외네~ 정에 호소하는 성격은 아닌 줄 알았는데.”

정세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정말 커다란 착각이라는 듯이. 정세나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라도 새벽에 있었던 일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쳐준 뒤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뭐야. 도망치는 거야?”

“여기서 그런 짓 하면 화낸다.”

“흐응. 오빠가 화내는 모습도 조금은 보고 싶은걸.”

“아니···. 나 말고 집주인이.”

거실로 나온 나는 종이를 흐느적대며 주문을 넣었다.

“점심 세 명 아니고 네 명이래요.”

정세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주방으로 들어가는 쪽의 통로에선 한 손에 캠코더를 들고 있는 유경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한창 뭔가를 촬영하고 있었다. 이내 작게 한숨을 쉰 유경명은 캠코더를 멈추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떠드는 소리 때문에 영상이 엉망이 됐군.”

담담히 질책하는 목소리에 나는 전부 얘 탓이라며 정세나를 가리켰다. 주방 쪽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나리가 컵으로 퍼낸 쌀을 밥솥에 붓고 있었다. 정세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캠코더를 내려놓은 유경명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놀랐나? 저 나이에 이미 밥을 지을 줄 안다는 게.”

진정한 재능의 원석을 보면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는 듯, 유경명은 엄숙하면서도 의기양양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조금쯤 씁쓸하게 캠코더를 보았다. 영상을 그대로 올리면 조작으로 의심받을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편집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고뇌를 하고 있었다.

“···재능이란 건 때때로 잔혹하군.”

이제 와서 안 사실이지만 이 아저씨는 가끔씩 대단히 바보였다. 비장한 얼굴로 캠코더를 바라보는 유경명을 보고, 정세나는 상당히 기분 나쁜 것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 폐품 아저씨는.”

“너무하네. 이제부터 네 스승이 될 사람인데.”

내 말에 정세나는 세상에서 제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인간의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한참 동안을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서있던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적할 것이 너무 많아서였다. 이내 정세나가 빙그레 웃으며 날 쳐다봤다.

“오빠, 농담도 잘 하는 줄은 몰랐네.”

“농담 같은 거 아냐. 나를 네 그림자 안에 잡아넣고 싶다고 했던가? 그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멋대로 해봐.”

나는 응원한다 박수를 보냈다. 사실 정말로 상관없는 문제였다. 지금처럼 갈피를 못 잡고 혼란해하는 상태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안정이 되면 적대할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을 테니까.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툭 정세나의 이마를 밀었다.

“근데 이대로면 넌 영원히 날 못 잡아. 왠 줄 알아? 너는 능력은 엄청 대단한데 자기가 싸울 줄을 모르거든.”

결국 정세나는 어둑시니에게 능력과 지식을 떠넘겨받았을 뿐, 본질적으로는 방 안에 갇혀있던 여자애일 뿐인 것이다.

사실 싸우는 법에 대해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적당히 지껄이는 말은 혈통시대에서 정세나의 심복이 된 흑호가 해준 간언을 그대로 읊어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저 아저씨는 내가 아는 한 싸우는 법에 대해 제일 빠삭한 인간이야. 걸어다니는 노하우 사전 같은 존재지.”

막말로 유경명이 어떤 식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어떤 식으로 만일을 대비하는지만 관찰해도 싸우는 자로서 수많은 값진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전선 앞에서 위험에 노출된 채 싸울 생각이 없기에 참고가 안 됐지만.

아무리 능력 자체가 월등히 강하다고 해도, 아직 전사로서 빈틈이 많은 정세나가 어디서 실수로 픽 죽어버리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나가다 차대운과 만나기라도 하면 무슨 짓을 하든 정세나는 죽는다.

그리고 내 말에 정세나가 악의 섞인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농담은 재미 없는데.”

“농담 아니라니까.”

“농담 마. 가르쳐준다는 건 강한 쪽이 하는 거야.”

그리고 캠코더를 들고 있는 유경명을 노려보았다.

“벌써 잊어버린 거야? 요호를 장사지낼 수 있었던 게 누구의 힘 덕분이었는지. 옆에서 계속 구경이나 하다 마지막에 끼어든 약골 아저씨가 나한테 싸움을 가르쳐주겠다고?”

나는 정세나가 내놓은 신선한 해석에 턱을 매만졌다. 그만큼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저 미친 아저씨를 약골이라 표현하는 게 가능한 일이었구나. 하긴 이해가 안 되지는 않았다.

요호 토벌에 있어 유경명은 전혀 자신의 폭력을 해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동작에 최대한 힘을 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중요한 것은 술식을 흐뜨러뜨리는 호신강기의 특성이지, 유경명이 지닌 완력이나 파괴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세나는 유경명을 보고서 약하단 평가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녀 안에서 유경명의 평가는 자잘하게 남의 기술을 방해하는 보조 위주의 능력자일 것이다. 그러한 착각부터가 정세나가 아직 한참 미숙하단 증거였다.

정말로 농담이 아니었다. 유경명의 전투력은 차대운과 동급. 비장의 수 하나를 제외한다면, 저 무지막지한 산군은 정세나의 모든 군세를 대검 하나로 쓸어버릴 수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싸워 보면 알아.”

나는 일부러 도발하는 웃음을 지었고, 정세나는 내 그런 얼굴을 어떻게든 구겨버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를 숨기려 들지조차 않았다. 그렇게 이곳에서 전 대요괴의 오른팔과, 전 대요괴의 후계자의 싸움이라는 빅매치가 성사되었다.

“밥 다 될 때까진 끝내야 돼.”

“또 게살 대신 게맛살 넣고 그러진 않을 거지?”

“응. 다른 건 안 넣었어.”

나랑 나리는 벤치에 앉아 공터에 선 두 사람을 구경했다.

하찮다는 듯 콧숨을 내쉰 정세나의 몸을 그림자가 감쌌다. 이전의 정세나였다면 수많은 흑요들을 풀어놓는다 해도 호신강기에 모조리 쓸려나가 전력에 큰 타격을 입었겠지만, 지금은 스스로 그들의 특성만을 그림자에 투영해낼 수 있었다.

“그렇군. 그런 식으로 발동되는 건가.”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정세나의 힘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대요괴에게서 물려받은 어둠은 유경명과 정면으로 승부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힘에 압도적인 격차가 없다면, 정세나와 유경명 중 싸워서 이기는 게 누구일진 명약관화했다.

그야 서로 능력의 출력이 비슷하다면, 백전연마의 유경명과 정세나가 맞붙는 것인 장기 입문자와 입신의 기사가 같은 숫자의 장기말을 놓고 대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승부가 갈린 것은 시작하자마자의 한 순간이었다.

“어···?”

정세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땅바닥에 눌려 제압당해있었다. 유경명은 호신강기는커녕 자신의 대검조차 쓰지 않았다. 차대운이나 유경명 수준의 강자에겐, 단지 ‘능력이 그들만큼 강한 여자아이’ 따윈 싸움 상대조차 아닌 것이다.

나와 싸울 때는 제 실력을 내지 못한다는 답답함에 사로잡혀 있었겠지만, 유경명은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을 만큼 정면에서 전부 맞서서 박살냈다. 순수한 실력 차이를 절감했기에 정세나는 다시 하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진 능력의 크기는 비슷해보여도 두 사람 사이의 격차는 아득했다. 상성 따위의 하찮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 서로의 몸과 능력을 바꿔서 싸운다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유경명 쪽이 더욱 압도적으로 승리를 굳혀버리겠지.

“너무 풀 죽진 말고. 자그마치 호환이었던 남자니까.”

내 말에 정세나가 흠칫 눈을 떨었다. 인간의 몸으로 어떤 강대한 요괴라도 찢어발겨 사냥한다는 요호의 호위. 대요괴 어둑시니의 후계인 이상 그녀도 당연히 들어봤을 것이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충격을 받았던 정세나의 얼굴에 다시 투지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아저씨를 상대로 패배한 거라면 상당히 좌절할 만한 일이었겠지만, 호환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의 자신이 요호의 호신용 칼이었던 남자를 상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정세나 주변의 그림자가 회오리쳤다.

과거 대요괴의 오른팔이라는 위치에 있던 요괴로서, 호환과 같은 격에 위치하는 존재. 정세나의 히든카드인 딸깍발이를 꺼낼 생각이었다. 그녀가 어둑시니의 후계로 인정받을 만한 역량을 키우기 전까지는 제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꺼내지 않았지만, 호환이 앞에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유경명이 뭔가를 느끼고 신중히 대검을 손에 들었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 흐름은 좋지 않았다. 이곳에서 둘이 충돌해버리면 적어도 공터의 지형 자체가 바뀌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커다란 호루라기 소리가 끼어들었다.

삐이이이이익-!

호루라기를 분 것은 나리였다. 핸드폰에서는 밥이 다 되는 시간에 맞춰 해둔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이내 완전히 전투 태세를 거둔 유경명이 성큼성큼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손짓하자 가만히 서있던 정세나도 쫄래쫄래 따라왔다.

유경명의 집에 돌아와 식탁에 모여앉자, 정세나는 이런 자리가 불편한 건지 팔짱을 낀 채 자꾸 여기저기를 쳐다봤다. 자신이 왜 여기 앉아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앞치마를 두른 나리가 오늘의 요리를 내왔다.

나는 정갈하게 앉은 채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추장 비빔밥인가···.”

그리고 그릇에 담긴 그것을 바라보았다. 나리가 만든 고추장 비빔밥은, 말 그대로 고추장을 비빈 밥이었다. 흔히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처사였다. 적어도 계란 후라이 하나 정도는 얹어줬으면 했다.

“나리야. 집에 들기름 있어?”

“없어.”

“그래···.”

나는 비빔밥이라는 단어를 우습게 보는 건지 아니면 신앙하는 건지 모를 이 원시적인 요리에 잠깐 압도되어 있느라 숟가락을 들지 못했지만, 유경명과 정세나는 아무 불만도 말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씹는 밥알 하나하나를 의식하며 식감을 음미하던 유경명이 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밥솥의 사용법은 완벽히 숙달했나. 하지만 더 정진해야 해. 무슨 일이든 만족해버리면 거기서 끝이니까.”

“맛있어.”

정세나는 그저 조용히 숟가락을 들고 그릇과 자신의 입 사이를 왕복해갔다. 그러면서 입가에 고추장을 다 묻혔다. 이내 앞치마를 두른 나리가 정세나의 옆에 가서 티슈로 입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 묻히고 먹으면 어떡해.”

정세나가 휴우, 하고 한숨을 쉬는 나리를 내려다봤다.

식사가 끝나고, 뚱한 얼굴로 턱에 손을 괸 정세나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 유경명과 나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어봐도 정세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얼이 빠져있는 것 같은 상태였다. 내가 정세나에게 물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어?”

들리고는 있었는지, 대답은 몇 초 뒤에 돌아왔다.

“···별 거 아니야. 잠깐 상상해봤어. 이런 화목한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하고.”

“그렇다는데. 답은?”

나는 접시를 씻는 유경명에게 물었다. 이쪽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는 것쯤은 표면 의식에 접할 필요도 없이 알고 있었다. 재미없는 이야기라는 듯 콧숨을 내쉰 유경명이 말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노동력으로 축사에 갇혀 지냈다. 배고픈 건 몰라도 겨울의 추위가 견디기 힘들었지. 가만히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열쇠를 가진 놈의 뒤통수를 내리찍고 도망쳤다. 그 뒤는 뒷골목에서 적당히 생존법을 익히고 살았지.”

그리고 옆에서 접시의 물기를 닦는 나리가 말했다.

“나도. 철창 안에 앉아서 여러 가지 주사를 맞았어. 아프긴 했지만, 꾹 참으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 말에 정세나가 살짝 입을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과거사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난 그냥 방구석에서 게임 했어.”

“그래···. ”

입술을 깨물고 있는 정세나는 내 말은 듣지도 않았다. 난 유경명에게 능력 개발의 지도와 함께, 가능하다면 정세나의 신변을 남는 방에서 잠깐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유경명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야 요호를 죽이는 데에 있어서 꼭 필요한 역할을 해주었던 정세나는 유경명에게 있어서 은인이었다.

“그러면.”

유경명의 빌라는 단숨에 요괴 사이드의 주연들이 모인 무서운 곳이 되어버렸다. 그 모든 사건들을 뒤로 하고, 나는 세한기전의 기숙사로 향했다. 내일부터는 또 수업이었다. 이제부터는 세한기전의 녀석들이 성장해줘야 할 시기였다.

* * *

교실 책상은 엎드릴 때마다 회복이 되는 기분이었다.

옆자리에서 차대엽이 뭐 하며 지냈냐고 묻자, 갑자기 내 쪽을 돌아본 금예린이 나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요호와 관련해서 비밀은 반드시 지킬 테니 걱정 말란 신호를 보낸 것 같은데, 진지하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와 교탁에 선 한시혁이 말했다.

“조례를 시작하기 전에···. 송한솔, 학장님으로부터 호출이다. 학장실에 가보도록. 꽤 급한 일인가 보더군.”

나는 마음만 같아선 놀라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그리고 금예린 양은 정말로 나 대신 놀라서 벌떡 일어나셨다.

“금예린. 뭐지?”

“아, 아니예요···.”

“앉아라.”

“네에···.”

드르륵. 나는 교실 문을 열고 나가 복도를 걸어가며 생각했다. 등교하자마자 학장이 굳이 학장실까지 나를 부를 이유는, 요호 토벌에 관련된 사안 말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흔적을 지우는 데에 꽤 신경을 썼고, 캠퍼스에 박혀있는 천년서생이 내 행적을 알 방법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학장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은 천년서생 또한 상당히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자네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리자, 학장이 한 장의 봉투를 건넸다. 주술적 각인이 찍힌 붉은 밀랍으로 봉해져, 겉면에 금박이 새겨져있는 대단히 호화로운 편지봉투였다. 나는 그 각인의 모양을 어디서 본 적이 있나 생각해보았다.

“···혈왕님에게서 온 편지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혈왕. 한 마디로 말해 이 나라의 왕이자 현 혼혈 사회를 이끌고 있는 군주였다. 두통이 이는지 이마를 살짝 손으로 짚은 천년서생이 말했다.

“용건은, ‘사냥 축하’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라 하더군.”

학장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건 정말로 골치 아프게 된 상황이었다.

< 현묵지화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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