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혈왕궁 (1) >
일월오봉(日月五峯)이라는 말이 있다.
오봉(五峯)이라는 것은 다섯 봉우리, 즉 그 시대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다섯 명의 능력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월(月)이라는 건 뒤쪽에서 그 오봉들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힘의 소유자. 다시 말해 무질서의 지휘자인 마왕이었다.
그리고 일(日), 태양이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모든 혼혈들의 군주이자 나라의 지도자인 혈왕이었다. 초인들의 집단인 기사단을 휘하에 두고 있다는 점을 제쳐두고서라도, 혈왕의 힘은 여타 다른 혼혈들과는 명백히 일선을 긋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혈왕궁 안에서라면 대요괴 넷이 다같이 손을 잡고 달려든다고 해도 혈왕을 시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절대적인 능력이 있기에, 괴물 투성이인 이 혈통시대의 세계에서 왕으로 군림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편지는 그 혈왕이 지닌 특수한 혈통능력이 깃들어있는 마법적인 물건이었다. 호출칙명. 스스로 당장 왕의 곁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절대로 왕의 곁으로 만큼은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강제로 혈왕궁 안에 소환한다.
혈왕의 각인이 찍혀있는 게 편지의 봉인이라서 다행이지, 이게 몸에 찍혀버린 인간은 절대로 혈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다. 혈왕이 마음 먹고 제대로 각인을 찍으면 살을 통째로 도려낸다해도 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뒤에는 왕이 얼굴 좀 보고 싶다고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왕궁으로 강제로 소환당하는 비참하고 불안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결코 혈왕이라는 존재를 만나기 싫었다. 어쩌다 일이 잘못돼서 혈왕에게 영구적인 각인을 찍혀버리면 스트레스로 정신이 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지를 받아버렸네.”
왕이 직접 각인을 찍어보낸 호출칙명의 편지. 확실하게 수취했다는 게 확인됐는데 왕의 호출을 고의적으로 무시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 나는 그 날로 범죄자 행이었다. 학장은 출석 인정 따위 얼마든지 시켜줄 테니 얼른 갔다 오라고 했다.
편지의 호출칙명을 발동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밀랍으로 봉해진 편지봉투의 각인에 손가락을 가져다댄 뒤, 꾹 누른 채 시간이 지나 임시 각인이 내 손가락 쪽으로 이동하면 왕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의식하면 될 뿐이었다.
봉투가 열리며 붉은 빛이 튀어나오고,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나는 이미 궁궐 안의 어딘가일 방 한복판에 있었다. 내가 나타남과 동시에 여자가 다가와 편지봉투를 확인했다.
“송한솔 님이시네요. 귀한 발걸음 감사합니다.”
혈왕궁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붉은 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궁궐은 척 보기에도 대단히 넓었지만, 안에서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지 않았다. 생긋생긋 웃는 여자의 발걸음을 따라가자 얼마 안 있어 알현의 방에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끼이익, 커다란 문을 열자 천장부터 시작해 외벽, 바닥까지 전부 분홍에 가까운 적색으로 채워져있는 방이 나타났다. 혈왕궁이라는 이름에 맞게 장식한 것이겠지만, 뭐라고 할까 생명체의 내부 같은 느낌이었다.
“자네가 한솔 군인가?”
호명받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인자해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장년의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리 언질도 없이 급하게 불러내서 미안하군. 어떻게 해서든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이쪽 사정을 밀어붙인 것이니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있지 않아도 되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주황색 눈동자는 이쪽의 반응을 떨림 하나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관찰하고 있었다.
표정이나 시선을 살피는 것 따위의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어떠한 기분이 들었을 때 필연적으로 보이는 몸의 작용, 생리현상. 그러한 것들을 저 먼 옥좌에서 남김없이 체크하며 이쪽의 내장까지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혈왕의 능력 중 하나인 생명통찰에는 평범한 방식의 위장이나 허례허식 따위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신체의 상태 그 자체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니까.
<마인드맵 개척 : 의식 제어 Lv.5>
하지만 몸의 반응 따위 속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내면을 통제할 수 있다면, 바깥쪽에 드러나는 반응 또한 내가 원하는대로 내보이며 속일 수 있다. 나는 나름대로 실력에는 자신이 있지만, 왕이 직접 불러준 것에 황송해하며 알현하게 된 것에 심장이 떨리는, 재능 넘치는 세한기전 학생의 역할에 몰입했다. 혈왕이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아마 전달자에게 들었을 거라 생각하네만, 자네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사냥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함이네.”
“치하해주셔서 몸둘 바 모르겠습니다.”
“요괴···라고 불리는 것들 말일세.”
혈왕이 손가락으로 옥좌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상당히 골칫거리야. 조용히 있는 벌집을 일부러 나뭇가지로 찌르는 건 현명하지 않은 일이기에, 일단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긴 하네만. 옆에 저렇게 커다란 벌집이 있어서야 영 무서워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잖은가.”
당연히 혈왕은 빙다리 핫바지가 아니었고, 아무리 그들이 은밀하게 움직인다 한들 대요괴와 백귀야행에 대해서는 꽤 촘촘한 정보망을 확보해두고 있었다. 나름대로의 전력을 기울이면 잡을 만도 하지만, 혼란 상황을 비롯해 이쪽이 받게 될 손해가 더 크기에 대요괴들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시점에서 내가 요호를 아무도 모르게 슥삭 처리해줬으니 혈왕의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손 안 대고 코 풀기인가 싶었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도록 하게.”
“어떻게 저인 걸 아셨습니까?”
혈통시대에는 말도 안 되는 탐색 능력을 지닌 이들이 극소수 존재한다. 예를 들어, 죽은 이와 죽인 이를 잇는 명부를 만들어내 누가 요호의 목숨을 끊었냐는 질문을 하면 그에 따른 답을 무조건적으로 찾을 수 있는 능력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전부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요호를 마지막 하나의 목숨까지 몇 번이나 죽인 것은 정세나의 흑요들이었고, 마무리를 한 것은 유경명이었다. 기상천외한 탐색 주문에 걸릴 걸 우려해, 나는 결코 요호를 해치는 데에 개입하지 않았다. 현장의 수습 또한 신경 써서 지시했다.
만약 나라는 게 들킨다 해도 그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어야 했다. 등교하자마자 칙명으로 불려가버리다니 당치도 않다. 내 질문에 혈왕은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건 말이야, 순서가 반대라서 그런 거네.”
“반대···라고요?”
“요호가 소실된 사건을 추적하다 자네를 찾아낸 게 아니야. 자네라는 인물의 행적을 쫓아가다가, 자네가 요호를 죽여버렸단 걸 알게 된 거지. 이 몸의 취미는 인간 관찰이거든.”
그 논리라면 요호를 처리한 게 나라고 알려진 것도 그럴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더욱 이상했다. 학장이 학생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 나라의 군주, 혈왕쯤 되는 자가 나에게 주목하고 있었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나에게 혈왕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눈에 띄는 게 싫다면, 용과 얽히지 말았어야 했네. 이 세상에 딱 넷밖에 없는 최강의 전투 생명체를, 걱정 많은 우리 혈왕궁에서 체크하고 있지 않을 리 없지 않나.”
혈왕의 말에 나는 납득하고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혈왕궁이 자랑하는 탐색 술식에 걸려있던 것은 주하리였던 것이다. 혈통시대에서는 1학년이 지나면 은세연을 죽이고 자퇴해버려 그러한 사실들이 드러날 기회조차 없었다.
“놀라지 않는군.”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는 깜짝 놀란 척 내 의식을 흔들어 심장을 두근두근 빠르게 뛰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혈왕은 속지 않는다는 듯이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나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정확히 놀라야 할 타이밍에만 모범적으로 놀라고 있어. 자연스러운 상태의 생명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네. 무엇보다 자네에게서는, 어떤 혈통이든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혼혈 특유의 냄새가 요만큼도 나지 않아.”
나는 의식 제어를 멈추었다. 역시나 혈왕이라고 할까, 혈통과 생명활동에 관한 영역에서는 제육감에 가까운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너무 쉽게 속이려고 한 게 잘못이었다. 내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오자 혈왕이 자신의 옥좌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가면을 벗어줬군, 한솔 군.”
그리고 뚜벅뚜벅 내려온 혈왕이 나에게 말했다.
“사실,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던 질문은 이것이네.”
그리고 걸어온 혈왕이 내 코앞까지 얼굴을 갖다댔다.
“···자네는 밖으로 나온 두 번째 요정인가?”
혈왕의 질문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갑자기 요정이 왜 나와?’
요정 혼혈은 혈통시대 안에서도 베일에 감싸여있는 이들이었다. 아름다운 나비의 날개를 등에 달고 있는 존재들. 그들은 모두가 요정향이라는 곳에 숨어지내며, 바깥 세상엔 그다지 개입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요정 혼혈에 대해 강한 인식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유일하게 요정향 바깥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요정의 존재 때문이었다. 혈통시대 오봉(五峯)의 하나이자, 이름이나 나이, 정체에 대해 극도의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존재.
조용히 자칭하기를 ‘요정기사’.
무언가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돌연히 나타나, 신기루와 같이 모든 목격자를 재우고 문제를 해결해준 뒤 떠나는 검사였다. 혈통시대에서 시나리오를 고의로 망치는 플레이를 하면 나타나서 주인공을 처형하려 드는데 끔찍하게 강했다. 사실살 강제 사망 이벤트나 다름 없는 사신 격의 존재였다.
나는 혈왕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답해주었다.
“전 나비 날개가 없잖아요.”
“요정이 아니라면 무엇이지? 자네처럼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 혼혈은, 내가 이 자리에서 지금껏 만나본 자들 중엔 요정기사 하나밖에 없었네. 점점 호기심이 더해지는군. 자네란 존재는 어디서 튀어나와 그 무시무시한 요호를 사냥했는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답이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휴게실에 박혀서 게임 하다가 게임 속 세상에 빨려들어와 버렸다고 해봤자 왕 앞에서 헛소리한다고 처형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혈왕이 크게 콧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내가 한솔 군에게 간단한 퀴즈를 하나 내겠네. 나의 정체에 대한 문제야. 이걸 맞춘다면 나는 깔끔히 한솔 군에 대한 조사를 포기하지. 혈왕의 이름으로 맹세해도 좋아. 그 대신 틀린다면, 한솔 군의 출신을 모조리 솔직하게 나한테 얘기해줘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하죠.”
나는 들어볼 것도 없이 수락했다. 무슨 질문을 할지는 이미 뻔히 견적이 나왔다. 혈왕이 손가락을 튕기자, 커다란 문을 열어주었던 두 사람과 날 안내해준 여자를 포함해 붉은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 열 명쯤이 혈왕 앞에 모였다.
그리고 혈왕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면, 이 안에서 누가 진짜 혈왕일까.”
아마 의식 제어를 쓰고 있었으면 여기서 깜짝 놀랐을 것이다. 마치 전하가 진짜 혈왕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고요! 하는 소리까지 쳐대며 식은땀을 흘렸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연기는 진작에 그만뒀기에, 나는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지금 이 방 안에 진짜 혈왕이 있는 건 확실하네. 하지만 누구일까. 사실은 당연히 내가 진짜 혈왕이고, 한솔 군에게 심리전을 거는 중일지도 모르지. 만에 하나 정확하게 맞춘다면, 자네에게 오직 혈왕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주도록 하겠네. 자네의 정체를 불문에 부치는 건 물론이야.”
그 말에 난 손가락으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정답. 전부 진짜다.”
혈왕이 가진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혈통능력.
하나의 생명이 가진 능력으로선 도착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마력의 분신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 살아있는 생명체다. 각각의 자아는 당연히 다르지만, 군체와 같이 하나의 큰 의지를 공유한다.
‘혈왕’이란 그러한 군체의 구성원 전체를 이르는 말이자, 좁은 의미로는 군체를 지휘하는 왕관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리고 초대받은 인간 이외에 혈왕궁 안에서 살거나 일하는 모든 자들은 전부 혈왕들이었다. 나는 알현의 방까지 나를 데리고 와주었던 작은 체구의 여자의 어깨에 손을 툭 올려놓았다. 이 문제의 두 번째 답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당신이, 혈왕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지.”
혈왕들의 왕.
내 지목에, 길을 안내해줬던 여자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 혈왕궁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