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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78화 (78/113)

< 혈왕궁 (2) >

조용히 고개를 내린 채 왕에 대한 경배를 바치고 있던 시종은, 못된 장난을 들킨 어린애처럼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녀야말로 혈왕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이자, 혈통시대의 실질적인 군주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다른 혈왕들이 각 자리로 돌아가고, 그녀는 뚜벅뚜벅 계단을 올라가 옥좌에 앉아있는 진중한 혈왕의 무릎 위에 풀썩 앉았다.

나와 대화하고 있던 장년의 남자가 곤란하다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시종의 복장을 하고 있는 여자가, 옥좌에 앉아있는 왕의 무릎을 깔고 앉는다. 상식적으로 결코 허락되지 않는 불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혈왕들 위에 있는 존재였고, 이곳에 있는 건 나 이외에 전부 혈왕의 구성원들이었다.

“들켜버렸나. 그래, 뭐. 들켰다면 어쩔 수 없겠지.”

다리를 꼬아 앉은 그녀는, 혈왕의 가장 치명적인 비밀을 폭로당했음에도 긴장하는 것보다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기색이었다. 혈왕의 지도자가 계단 아래의 나를 내려다봤다.

“웬만한 기사단장들도 알지 못하는 극비 사항을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뇌를 해부해서라도 알아내고 싶은 심정이지만···. ‘추궁하지 않기’가 내기에 걸린 판돈이었으니 그럴 수도 없겠구나? 그러니 머릿속으로 열심히 추측해볼 수밖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주황색 눈동자는 무엇이든 간파해주겠다는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가정으로 어떤 추측을 한다고 해도 게임하다 버튼 누르니 게임 속 세상으로 떨어져버렸다는 웃기지도 않는 진상에 도달할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뭐, 혈왕이 군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그 지도자가 나라고 간파한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지. 나한테는 아무래도 아무리 숨기려고 해봤자 흘러나오는 풍채란 게 있는 모양이니. 설마 시종 역할을 하고 있어도 들켜버릴 줄은 몰랐다만!”

아하하, 하고 그녀가 호탕한 웃음을 내보였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옥좌에 앉아있던 ‘왕’을 비롯해 주변의 다른 혈왕들은 나를 그리 곱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베일에 감싸여있던 혈왕의 진상을 알고 있다는 건 최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위험인물이란 뜻이었으니.

그러한 시선들에 대해서 당연히 혈왕들의 지도자인 그녀 또한 느낀 듯했다. 혈왕들은 말 그대로 일심동체라는 말에 가장 잘 부합하는 관계였으니, 다른 혈왕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도야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당당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안 돼. 혈왕은 말장난을 하지 않는다. 저 녀석이 먼저 입을 나불대고 다니지 않는 이상, 따로 조치는 없어.”

진심이냐는 듯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있는 옥좌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조사할 필요가 있는 요주의 인물인 게 확정된 이상, 정체에 대해 추궁하지 않는다 했지 목줄 걸고 감금해두지 않겠다고는 안 했다, 하며 뒤통수를 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행적을 추궁하지 않겠다는 건, 그의 개인적인 생활을 보장해준다는 의미다. 혈왕의 이름을 걸고서 약속해버린 이상 도리에 반하는 걸 알고서도 억지를 부릴 수는 없지. 이의 있는 놈들은 손 들고 앞으로 나와라. 손수 설득해주지.”

그 말에 다른 혈왕들은 다들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저러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저러한 주관과 미학이 있기에야말로 혈왕들을 이끄는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순수한 경의를 담아 왕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멋지네, 마음에 들어. 사람이 이래야지. 요즘 것들은 다들 한 입으로 두 말 하면서 남 뒷통수만 치려 한다니까.”

“왕을 향해 반말을 하다니 배짱이 있구나.”

“왕 역할을 맡고 있는 건 거기 깔고 앉은 그 아저씨고. 엄밀히 말해 당신은 왕 위에 있는 거지 왕이 아니잖아?”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왕 앞에서 이렇게 멋대로 떠들어대는 것은 그것만으로 불경한 일이었다. 다른 신하들이 옆에 있었다면 분위기에 맞춰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엔 혈왕들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렇다면 지금 이곳은 가족끼리 오순도순 떠들고 있는 가정집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배짱 있는 발언이라는 듯 여자가 하하하 웃었다.

“확실히 네 말대로일지도 모르겠군. 이 녀석은 ‘옥좌에 앉아있는 역할’을 하는 분신이지.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생명체의 상태를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보고하러 온 녀석들의 거짓말 따윌 가려낼 때 아주 편리하거든.”

임금님 혈왕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하고 여자가 옥좌에 앉은 남자의 볼을 재미있지 않냐며 꼬집어서 늘려댔다.

“몇 번째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의사를 하고 싶다 했었네. 애초에 내 능력인 생명관찰은 그런 용도로···.”

여자는 뭐라 말하기 시작한 임금님 혈왕에게 손가락을 가져다댄 뒤, 입에 지퍼를 달 듯이 손끝을 슥 움직였다. 그러자 임금님은 정말로 입을 열 수 없게 되어 읍읍 소리를 냈다. 우스꽝스럽다며 큭큭대는 여자가 뒤를 흘겨보며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조잘조잘 시끄럽군. 당분간은 코로 숨쉬어라. 반성하는 것 같으면 다시 열어주지.”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침묵 주문 같은 걸 순간적으로 발동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음성이 전달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고, 저렇게 입을 여는 것 자체를 봉하는 효과는 없다. 지금 저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뒤에 앉아있는 임금님 혈왕을 ‘기능적으로 입을 열 수 없는 생물’로 뒤바꾼 것이다.

혈왕들에게는 각기 어떤 형태로든 생명 그 자체와 관련된 능력이 있고, 그렇기에 어떤 혼혈이라도 혈왕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야 체감이 들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단순히 권한만을 가진 높으신 분이 아니라, 대요괴 하나 정도는 죽여버리지 뭐, 하고 판단한 순간 죽일 수 있는 힘을 지닌 집단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아무튼 여러 가지 역할을 맡고 있는 혈왕들이 있다는 거다. 오로지 전투에만 특화된 혈왕도 있지. 사람들이 말하는 ‘위대하신 혈왕님’ 이라는 건, 우리들 모두가 나라는 통솔자를 따르며 이심전심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결과인 거다.”

전투에 특화된 혈왕이라는 것이 누구인진 알고 있었다.

혈왕궁이 다른 세력들의 견제를 힘으로 찍어누를 수가 있는 이유이자, 현 인류 최강이라 불리는 붉은 검사.

실적이나 역량에 있어 모든 기사들을 완벽하게 압도하는 존재만이 가질 수 있기에, 몇십 년 동안 공석으로 비어있었다는 ‘용사’의 칭호를 당당히 손에 넣은 기사들의 도달점.

오봉의 필두에 서있는 최강의 기사이자, 셀 수 없는 혈통들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잡혈임에도 그 모든 능력을 더욱 증폭된 상태로 가지고 있는, 신이 내린 조화라고 불리는 존재. 기사의 정점이기에 당연히 혈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지만.

‘신의 조화가 아니라, 만들어진 걸작이라는 거지.’

혈왕이 휘두르는 가장 강력한 칼인 용사 그 자신이 혈왕의 일부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싸울아비 혈왕 정도로 부르면 되겠군, 하고 그녀가 고개를 음음 끄덕였다.

물론 사회의 일원으로서 행동하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었으나, 그건 대외적으로 쓰는 것일 뿐 혈왕들은 그것을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 여기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혈왕의 일부’라는 자아를 갖고 있기에.

“그러면 당신은 뭐 총통 혈왕 그렇게 부르면 되나? 아니면 우두머리 혈왕? 대장님? 원하는 대로 맞춰줄 수 있는데.”

내 말에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음, 혈왕의 피를 잇고 있는 일족이자 가장 고귀한 존재. 굳이 구분해 부르고 싶다면 혈공주님이라 부르면 되겠군.”

“족장님.”

“혈공주님이라 불러라.”

예전부터 생각해온 호칭이기라도 한듯 그녀의 태도는 대단히 단호했다. 입이 막혀있는 임금님이 원래 이렇다는 듯 몰래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혈공주가 말했다.

“그러면 이야기를 이어서 해볼까. 어떻게 말하면 이 나 또한 ‘분신들을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 혈왕의 분신들 중 하나일 뿐이지.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자식들을 이끄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까. 이것도 한 번 맞춰볼 수 있겠나?”

“이것도 뭐 내기가 걸린 건가?”

“아니,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다.”

간단한 질문이었다. 혈왕들의 역할이 적재적소라고 한다면, 하필이면 그녀가 군체의 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있을 터. 나는 괜히 시치미 떼지 않고 혈공주에게 말했다.

“모든 혈왕은 혈왕궁 안에서 죽지 않는다.”

그 말에 다른 혈왕들이 다시 민감하게 반응했다. 애초에 전원이 똑같은 머리색과 눈동자를 하고 있다. 혈왕궁 안에 있는 모두가 어떤 종류의 연결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설을 세우는 건 그리 드물지도 않은 발상이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직접 혈왕궁 안에 쳐들어와 혈왕을 죽여버리려 시도해보았던 대요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사항이었다. 알현실 안에 차가운 경계의 기색이 흘렀다.

대단히 가치 있는 정보이기도 했다. 왕을 시해하고자 하는 어떤 존재가 이 정보를 알고 있다면, 우선 임금님을 혈왕궁 바깥으로 끌어내는 작전을 짤 것이다. 다른 혈왕들은 나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고, 혈공주는 역시나라는 듯 웃었다.

“내가 왜 혈왕이라는 군체의 머리를 차지하고 있을까란 질문에 그 말을 꺼낸 걸 보면, 내 체질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방금 내기의 판돈이 불공정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쪽이 너무 손해 보는 장사야.”

“원래 정보가 부족한 쪽이 손해를 보는 거지.”

“아하하! 나라의 모든 소식들이 모이는 혈왕궁의 실질적 지배자인 나한테 정보가 부족하다고 한 치 망설임 없이 말한다라. 너는 과연 재미있구나. 왜 이제야 나타난 거냐 멱살 잡고 따지고 싶을 정도다. 이리 와보거라, 잡아줄 테니.”

물론 나는 혈공주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리고 콧숨을 내쉰 혈공주는 씁쓸한 기색으로 자신의 체질을 말했다.

“그래. 혈왕궁 안에서만 불사가 되는 다른 혈왕들과 달리, 나는 혈왕궁 바깥에서도 죽지 않는다.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그게 본질이지. 혈왕의 급소가 되기에 알맞아.”

혈공주가 자신의 손바닥을 앞으로 내뻗으며 말했다.

“머리가 터지고 몸이 두 갈래로 찢어져도 그 자리에서 되살아난다. 뇌가 통째로 재생성됐는데 그걸 부활이라고 불러야 할지 기억을 이어받은 새 분신이 만들어진 건지에 대해선 신중하게 논의할 필요성이 있다만, 아무튼 죽지를 않아.”

단순히 수명의 한계를 극복한 천년서생과는 달랐다. 학장은 천 년을 넘게 살아온 마법사였지만, 진정한 의미의 불사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일단 누군가가 죽인다면 죽어버리는 것이다. 천년서생은 아주 강하기에 그러기가 힘든 것뿐.

하지만 혈공주는 정말로 죽지 않는다. 그 가슴을 갈라내 심장을 터뜨려버려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난다. 물론 수백 번 죽이면 부활을 거듭한 정신 쪽이 너덜너덜해져 폐인이 되어버리겠지만, 어찌 됐든 생명활동은 강제로 계속된다.

“사실 그게 딱히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왕궁에 쳐들어왔던 대요괴가, 내 몸의 일부를 먹고서 도망쳐버렸다는 사실이지.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발칙한 요괴 또한 나와 비슷한 불사의 능력을 손에 넣어버렸어.”

요괴 주제에 왕궁에 침입해 깽판을 놓는다는 미친 짓을 하고도,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를 결코 가만 두지 않는 용기사들의 손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단 게 가장 큰 증거였다. 그건 정말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부족한 일이었으니까.

“이렇게나 급히 호출한 본론은 그거다. 대요괴의 거처를 알아내고, 은거한 적룡의 정체를 간파하고, 우리들 혈왕의 비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정체불명의 현자여. 모든 혈왕들을 대표해서, 요호의 사냥에 성공한 것을 축하한다.”

그리고 웃고 있던 혈공주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그렇다면.”

분위기가 일변했다. 순간 알현실의 창문에 주황색 역광이 비치며 혈공주의 얼굴이 그늘로 덮였다. 그 사이에서 오직 주황색 두 눈동자만이 이글이글 빛나며 타오르고 있었다.

”대요괴 두억시니의 위치도 알고 있나?”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불쾌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혈공주는 자신의 옥체를 훔쳐 도망친 도적놈의 이름을 말했다.

< 혈왕궁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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