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79화 (79/113)

< 혈왕궁 (3) >

“그렇다면, 대요괴 두억시니의 위치도 알고 있나?”

혈공주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두억시니는 생명의 형태를 변이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으로 자신에게 박아넣은 혈공주의 파편을 조작해, 혈공주가 가진 불사성의 축복을 자신 또한 덤으로 받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대요괴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성가시기에, 세상의 뒷면에서 숨어지내는 그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이상 방치해두는 것이 암묵적인 합의이자 균형이었다. 하지만 두억시니는 혈왕궁에 싸움을 걸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별개다.

무엇보다 인류에게 있어 두억시니는 불구대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였다. 예를 들어 요호는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사랑하기에 오히려 다른 대요괴들과 종종 마찰을 빚는 일까지 있었지만, 두억시니의 목적은 인간의 형태를 갖춘 모든 생명의 멸종이었다. 여기에 타협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다른 대요괴들과는 상당히 다른 위치에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적. 혈왕이라는 입장을 고려하면 커다란 수고를 들여서라도 토벌해두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몸 일부가 그런 괴물의 몸 안에 있는 건 불쾌할 테고.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몰라.”

혈공주가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진짜 몰랐다. 물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조사해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혈공주가 자신이 깔고 앉아있는 임금님 혈왕 쪽을 휙 돌아보았다. 내 기색을 살펴본 그는 거짓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솔 군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네. 다른 중요한 사실을 일부러 입에 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말한 것이 거짓이 아님은 분명해. 그러한 상태를 보이고 있어.”

임금님의 말에 나는 움찔하는 걸 숨길 수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생명관찰의 능력은, 상대방의 생명반응을 내장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다. 그 결과 얄팍한 거짓말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몸째로 간파해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사실 또한 말하지 않고 있다, 따위의 세세한 뉘앙스까지 판별할 수 있을 만큼 민감한 능력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능력이 민감한 게 아니야.’

당장 내가 생명관찰을 얻어봐야 심장이 빠르게 뛰는구나, 근육이 조금 수축했구나 따위의 무기질적인 정보밖에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능력으로 얻은 정보를 목적에 맞게 가공한 뒤 해석하는 사용자 본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이다.

적재적소라고 했나. 모든 혈왕들을 대표해 옥좌에 앉아있는 임금님의 역할을 맡은 개체라면, 우수하며 만능이라는 것은 거론할 가치도 없는 전제라는 거겠지. 생명관찰을 전투에 활용하며 싸우는 실력 또한 일류 기사 수준일 것이다.

“흐응.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

그 말에 혈공주가 나를 내려다봤다. 타오르는 듯한 주황색 눈동자는 그걸 딱히 문제라 여기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게 확실하다면, 그걸 불게 하는 건 적당한 수단을 적절히 사용하면 될 뿐이라 확신하는 인간의 눈이었다.

사실 임금님이 지적한 대로, 내가 두억시니의 위치를 모른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물론 난 지금 두억시니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어느 시점 어딘가에 반드시 등장하게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순순히 불고 싶진 않았다. 나는 양갈래로 묶은 적발을 손가락으로 꼬고 있는 혈공주에게 말했다.

“위치는 정말 몰라. 하지만 단서 정도는 가지고 있지.”

“그런가. 그러면 그걸 내놔라.”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세 개나 있단 말이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 세 개를 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혈공주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임금님은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자며 계속 말하라는 듯 나를 향해 눈짓을 주었다.

“첫 번째 이유, 위험이 너무 커.”

“위험하다? 그건 무슨 의미지. 한솔 군, 설마 우리 혈왕궁의 두억시니 따위에게 열세에 몰릴 거라 생각하는 건가.”

흘려들을 수 없는 발언이라는 듯 임금님이 대답했다. 대요괴 중 하나인 두억시니를 ‘따위’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신선한 느낌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그건 자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용사 혼자서도 대요괴의 토벌이 가능하다.

내가 요호를 사냥했을 때처럼 온갖 꼼수를 쓰고 무대를 준비한 뒤 손도 발도 묶어버린 채로 싸워야 힘들게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심플하게 쳐들어가서 정면승부로 공격하면 이긴다. 겉멋으로 만인지상의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부분이 위험했다. 딱히 다른 기사단들을 움직이지 않더라도, 혈왕궁의 전력은 그 자체로 너무 강하다. 혈왕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대요괴고 뭐고 자신의 죽음이란 결론에 쉽게 도달한다. 궁지에 몰렸다는 걸 인지해버린다.

그리고 혈왕궁 정도 되는 규모의 세력이 바깥에 전혀 들키지 않고 대요괴 사냥을 시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깥에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커다랗기에, 다른 세력의 눈들이 여기저기에 붙어 아주 사소한 행동까지 주시하고 있다.

“지금의 두억시니는 혈공주와 능력적으로 이어져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자기가 외통수에 몰렸다는 걸 알아버리면, 그 연결을 이용해 자해행위를 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최악의 경우 모든 혈왕이 불사능력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지.”

내 말에 혈공주가 볼에 살짝 공기를 머금었다. 불만은 많지만 부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요괴의 이능이라는 것은 인간의 상식 건너편에 존재했다. 애초에 두억시니가 혈공주의 불사성을 재현한 것부터가 예측불능의 사태였다.

나는 손가락 하나를 접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수단이지. 당신들한테는 두억시니를 확실히 제거할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죽여서 약화시키면 된다. 구속해버리면 그뿐이다. 말이야 간단해도, 장기전이 되어버리면 다시 강력한 능력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확실한 각이 안 나오는 승부는 긁어 부스럼일 뿐이야.”

첫 번째 이유는 사실상 겁주기에 가까웠지만 이건 비교적 진심이었다. 혈왕궁의 전력은 압도적이다. 두억시니와 맞붙기만 한다면 거의 일방적으로 박살낼 수 있겠지. 하지만 두억시니의 불사를 무시하고 죽일 방법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혈통시대에 있어 모든 대요괴를 잡는 데에 공통되는 사항이 한 가지 있었다. 준비를 철저히 하고 1차전에서 확실하게 잡는 게 제일 편하다는 것이었다. 2차전, 3차전을 거듭해갈수록 대요괴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훨씬 더 강해졌다.

단순히 비장의 패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든, 스스로의 결점을 인지해 대응책을 만들어낸 것이든, 강력한 혈통능력에 노출된 결과 적응해 진화한 것이든. 모든 대요괴는 한 번 사냥에 실패할 때마다 그것에 패널티를 부과하듯 강해져갔다.

그리고 내 말에 콧숨을 쉰 혈공주가 대답했다.

“의견 잘 들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부분도 없지는 않군.”

그리고, 강한 격노를 담아 옥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허나! 양쪽 다 그 끔찍한 걸 방치할 이유는 못 돼. 왕궁에 침입한 도적 놈을 위험이 겁나 처벌하지 않는다니. 그 따위 소인배는 혈왕을 자칭할 자격도 없지! 이건 내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우리 전원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일 거다.”

“리스크는 최대한 피하는 편이 좋다 생각하네만.”

“가만히 있어!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돌아본 혈공주가 다시 임금님의 입을 잠궈버렸다. 기껏 왕이 되었는데 저런 폭군이 위에 앉아있다니 저 아저씨도 수난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한 손가락을 세우고 말했다.

“세 번째.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나는 나를 내려다보는 혈공주와 눈을 마주쳤다.

“단서를 넘겨줘봤자 헛수고야. 아무리 열심히 조사해봤자 두억시니는 내가 먼저 잡을 테니까. 어차피 질 게 뻔한 승부에 귀중한 혈왕님의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지.”

내 말에 혈공주는 잠깐 동안 입을 멍하니 벌리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듯 아하하 웃기 시작했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가 위로 치솟아오르며 강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그리고 뚝 웃음을 멈춘 혈공주가 입꼬리를 올린 채로 나를 노려보았다.

“싸움을 거는 건가? 우리 혈왕궁에게.”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을 뿐.”

혈왕궁이 총력을 기울여 움직여봤자 두억시니는 내가 먼저 잡는다. 이건 확정사항이었다. 헛수고에 괜한 시간을 쓰지 말라고 충고하는 건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선의를 베푸는 것이었다. 알려줘서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해주었으면 한다.

“그렇군, 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우리 혈왕들 전부와 너 하나, 능력을 비교해보면 숨어있는 두억시니를 먼저 찾아내 죽일 수 있는 건 단연코 네 쪽이라고.”

나는 가만히 혈공주를 바라보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아핫, 웃음을 터뜨렸다.

“좋다! 너의 승리다. 두억시니의 단서는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허나,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책임을 져줘야겠군.”

혈공주가 유쾌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여흥에 어울려라. 어느 쪽이 놈을 먼저 찾아내 먼저 사냥할지. 적당히 해서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도록. 나는 놀이에 진심이니까. 보상은 적당한 걸 수배해두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웬만한 물건은 준비할 수 있으니까.”

아무렇게나 지르고 보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혈왕들의 지도자다. 일월오봉의 정점에 서있는 존재. 작정하고 구한다면 손에 넣지 못하는 물건 따위 거의 없을 것이다.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진상품 창고만 열어봐도 별 게 다 있겠지.

“그리고, 만약 큰소리친 네 쪽이 꼴사납게 져버린다면. 이번에야말로 네 행적을 하나부터 열까지 탈탈 털어주지.”

백지수표나 마찬가지인 보상을 걸어놓고, 자신이 요구하는 건 이전 내기의 번복일 뿐이었다. 하지만 혈공주는 전혀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나와 혈공주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면, 여기 계속 있는 것도 촌스러운 일인데.”

일단 승부가 성립되었다면 그 뒤는 경쟁상대일 뿐. 전력을 다해서 어떻게 이길지만을 생각하는 것이 적에 대한 예의였다. 여기에서 더 수다를 떨고 있을 의미는 없다. 그러자 옥좌에 앉아있는 임금닝이 나를 보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게이트 수속에 30분 정도 기다려야 할 거네. 호출칙명은 말 그대로 불러올 뿐 되돌려보내는 기능은 없으니···.”

그리고 혈공주가 그의 무릎 위에서 깡총 뛰어내렸다. 시종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가 얼굴을 싹 바꾸며 생긋 웃었다.

“시종으로서 대기실까지 모셔다드리죠.”

대단히 공손해진 태도에 코웃음을 치며, 나는 세한기전의 게이트로 연결되는 혈왕궁의 게이트에 들어섰다.

* * *

혈왕을 알현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종례시간이었다.

교실에서는 슬슬 여름방학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기숙사에 갇혀있던 대부분은 드디어 본가에 돌아갈 수 있다고 기뻐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개인용 사물함의 짐을 정리하고 있는 담민우가 말했다.

“우린 마왕성으로 돌아갈 거야. 왕자 놈은 후계자 수업이니 뭐니 해서 일정이 가득가득 차있거든. 나도 마왕님이 심어둔 눈으로서 이것저것 보고해야 할 것들이 많고.”

“첩자였냐?”

“딱히 숨기고 있지는 않은데···. 꽤 신뢰받고 있거든. 나중에 막막해지면 연락해. 흑기사단은 과거 같은 거 따지지 않으니까. 마왕님도 네 이름을 들으면 바로 오케이 해주실걸.”

“그것 참 든든하네.”

자리로 돌아오니 금예린이 내 앞에 서서 말했다.

“···정말로 괜찮은 건가요?”

무엇이 괜찮냐는 것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요호의 유해를 금가가 전부 알아서 수습해도 된다고 한 것에 대해 껄끄러움을 품고 찾아온 거겠지. 요호 토벌전에서 금가가 기여한 부분에 비해 가져가는 게 지나치게 크단 이야기였다.

하지만 적풍회와 유경명의 경우 순수하게 요호의 척살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움직인 것이고, 정세나는 요호가 이끌고 있던 백귀야행을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요호가 죽은 현장을 수습할 권리 정돈 금가한테 넘겨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요호의 유해를 가공해 만들 유해 무기는 금예린이 가져가줘야 한다. 금예린은 언젠가 요호가 자신의 몸으로 쓰기 위해 여우누이의 의식으로 만들어낸, 최고의 주술 적성과 결계를 갖춘 몸이다. 금예린이 사용해야만 요호가 남긴 유해 무기의 잠재능력을 백 퍼센트 끌어낼 수 있다.

“그래. 내가 이것저것 뺏었으니 그냥 쌤쌤이로 쳐.”

지금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정세나와 유경명 같은 요괴 사이드 시나리오의 등장인물에 비해 세한기전 1학년들의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은세연과 주하리 같은 예외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사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직 1학년 1학기일 뿐이고, 커다란 시나리오가 진행된 것도 아니었으니 오히려 혈통시대 본래의 흐름과 비교하면 더 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내가 억지로 가속시킨 진행 속도에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 반 녀석들은 반쯤 억지로라도 빠르게 강해져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올해가 끝나기 전까지 원래 혈통시대의 1학년 보스였던 은세연 수준까지는 강함을 끌어올려두는 것이 목표였다. 금예린은 요호의 유해 무기를 얻었으니 일단 오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옆에 앉아있는 짝꿍을 쳐다보았다.

“너는 방학에 어디 가냐?”

“집에 돌아가 단련할 생각인데. 형에게 지도도 받고.”

세한기전은 둥지에서의 생존법이나 주문에의 대처법 등 기사로서 익혀야 할 여러 가지 기술들을 체계적으로 박아넣어줬지만, 순수하게 검을 단련하는 데에 있어서는 검성의 가문인 차대엽의 본가 만한 수련 장소가 있을 리 없었다.

방학 동안은 과제나 시간표 따위를 신경쓰지 않고 죽어라 검술에만 매진해볼 셈인 것이다. 차대엽의 말에 나는 한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차대엽의 본가에 방문한다면 당연히 마주할 수밖에 없는, 느긋한 얼굴의 탈선자.

“···남의 집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는 것도 뭐하지.”

콧숨을 내쉰 나는 차대엽에게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을 휙 던졌다. 초대 검성의 신검을 받아든 차대엽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했다. 자신을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검귀, 자그마치 주인공 손에 들리는 것이니 검 또한 불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 명 더 데리고 가도 되냐?”

그리고 난 앞쪽에 앉은 진소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혈왕궁 (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