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81화 (81/113)

< 유곡가인 (2) >

“그렇게 된 고로, 며칠간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와 진소란은 식탁 맞은편에 앉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차대엽의 어머니는 어두운 푸른색의 머리칼을 한 여성으로, 조금쯤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차대엽이 그 과묵한 성격을 누구한테서 물려받은 건지 알 수 있었다.

차대엽의 어머니는 조용히 찻잔을 자리에 내려놓았다. 상류층의 화려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인상인데도 그녀가 내보이는 행동 하나하나에 어떠한 기품이 느껴졌다.

“고생하지는 않았나요. 오는 길이 험했을 텐데.”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의상 물어보는 말이 아니었다. 차대엽의 본가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안개 낀 골짜기 깊은 곳에 있었다. 어디 봉우리 위에서 신선 둘이 마주앉아 바둑이라도 두고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배달을 시키면 물건을 받는 것보다 배달부가 못 해먹겠다 일을 때려치는 쪽이 확실히 빠를 것이다. 무엇보다 골짜기 곳곳에 안개가 껴있어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차대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본가에 얼굴을 비추고 오는 게 일상인데, 그럴 때마다 이 험한 산길을 올랐다 내려갔다 하는 걸 반복했다 생각하니 새삼 괴물 같은 체력이다 싶었다. 그리고 정갈한 자세로 앉아있는 진소란이 입을 열었다.

“올라오는 동안 경치도 즐겼고, 준비 운동으로 딱 좋았습니다. 놀러온 게 아니라 훈련을 하러 온 거니까요.”

진소란은 어서 빨리 대련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듯 했다. 그야 가뜩이나 강해지고 싶다는 갈증을 느끼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보다 강한 검사와 몇 번이고 대련하며 검토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건 도저히 떨쳐낼 수 있는 유혹이 아니었을 것이다. 찻잔을 홀짝인 차대엽의 어머니가 말했다.

“훈련···. 그렇다 해도 대엽이가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건 처음이군요.. 자기 집처럼 편히 있다 가도록 하세요.”

이윽고 분가의 시종이라는 사람이 과일을 내왔다. 검성의 가문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차대엽의 집은 저택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커다랬다. 지금 있는 본채 뿐만 아니라 별채도 몇 건물이나 있었다. 소탈한 성격 탓에 잘 느껴지지 않지만, 차대엽 또한 대단한 명가의 도련님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명가를 현재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남자가 장지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왔다. 한 순간 나를 향해온 날카로운 눈빛에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이내 풀어진 표정으로 친근한 미소를 지은 차대운이 외투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뭐야. 벌써 와있었어? 난 또 저녁에야 오는 줄 알고.”

옆에 앉은 차대엽이 형에게 식기를 넘겨주었다. 다시 차려진 요리들을 보며 맛있겠다 입맛을 다시는 차대운의 모습은 어떤 뒷면도 없는 친구네 형 그 자체였다. 시답잖은 연기 같은 것이 아니라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TPO를 잘 가린다고 해야 하나.’

내 시선에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 차대운이 웃었다.

“오랜만이네, 한솔이. 그리고 이쪽 아가씨 분은···.”

“세한기전 1학년 진소란입니다. 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그래, 후배님이시네. 나야말로 잘 부탁해.”

차대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그를 보며 진소란은 적잖은 당황을 느끼고 있었다.

그야 자그마치 검성이라는 이름을 손에 쥐고 있는 남자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호인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언가 좀 더 엄격하고 대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겠지. 예를 들어 전대의 검성 아저씨처럼.

식탁에서는 차대엽과 차대엽의 어머니는 별로 입을 열지 않고, 차대운이 묻는 말에 나와 진소란이 대답하는 형태로 시답잖은 수다들이 이어졌다. 결국 도장에 들어선 건 해가 다 진 무렵이었다. 우리는 다같이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이 도장 기능이랑 연결돼있어서. 입는 게 좋아.”

검성의 가문이라는 이름답게, 차대엽네 본가의 도장은 세한기전의 시설보다 더욱 전문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연습 도중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어 결계부터 시작해 허수아비, 가상 환영, 공격 궤도의 잔상 효과까지.

진소란은 도장의 모습에 대단히 감탄하고 있는 듯 했지만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야 나는 검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습용 목검을 쥐고 있는 차대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우선 3대 1로 싸워볼까?”

“네?”

“흠.”

차대운의 말에 차대엽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소란의 경우엔 그렇지 않았다. 그야 차대운쯤 되는 사람이 우리 셋 정도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만, 그는 지금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목검 하나만 달랑 들고 있는 것이다.

분명 일단 이쪽끼리 싸우게 시키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며 지도해주기 위한 목검이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저건 그런 게 아니었다. 차대엽이 담담하게 자신의 역사를 말했다.

“나는 형 손에서 저걸 떨어뜨려본 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어. 신검을 발현시키고 전력을 다해 싸웠을 때도.”

그 말에 진소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검을 발현시킨 차대엽이 얼마나 끔찍하게 강한지는 순위전을 거쳐온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규격외의 화력을 지닌 유매를 일방적으로 압도했다. 그런데 그런 차대엽조차 1승을 따내지 못했다니. 활짝 웃은 차대운이 얇은 목검을 붕붕 휘둘렀다.

“대충 하는 것 같아서 불만인 걸까? 딱히 너희들을 얕봐서 이러는 게 아니야. 내 신검은 여기서 쓰긴 너무 위험하거든.”

잘난 척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차대운의 신검인 베기 특화 우도(愚刀)는 말 그대로 어리석은 칼이었다. 일단 신검을 발현시키면, 주인이 베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걸 구분하지 못하고 닿는 물건 전부를 깔끔하게 베어버린다.

아무리 방어 결계가 돌아가고 있다고는 해도 그런 물건을 대련에 썼다가 상대방의 몸이 언제 싹둑 잘려버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내 차대운이 되도 않는 걱정은 하지도 말라는 듯 망설이는 진소란을 향해 연습용 목검의 끝을 겨누었다.

“아니면 부러질 것 같아서? 이런 목검이라도 표면에 적당히 마력을 두르면 훌륭한 병기가 되니까 걱정 말라구.”

사실 그래봐야 목검은 목검. 제대로 된 무기에 마력을 불어넣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차대운 정도 되는 인간이라면 막말로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도 웬만한 검사들을 가지고 놀 수 있었다. 맞으면 대단히 아플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도장 구석의 매트에 털썩 주저앉아 손을 들었다.

“전 관전이요. 3대 1은 좀 그러네.”

차대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진소란이 침을 꿀꺽 삼켰다. 검성과의 대련 같은 건 인생에 그다지 쉽게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다. 얻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얻어가야 했다. 옆에 선 차대엽 또한 싸울 준비를 끝냈다.

“미안. 상대가 다칠 걱정 없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건 해봐야 형 정도 뿐이니까. 이번에도 힘조절 없이 가겠어.”

손을 내뻗은 차대엽의 손바닥 위에 그의 신검이 발현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초대 검성의 신검 또한 꺼내, 두 자루의 검을 양손에 들었다.

“이도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연구중이야.”

사실 차대엽의 신검인 백류(百流)는 그다지 공격에 강하다 말할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오히려 방어에 특화되어있는 검이라 말해도 좋았다. 자신을 향해오는 공격을 흡수해 받아넘기고, 상대방의 주문을 역이용해 상황을 돌파하는 대응성.

그건 다시 말해 어떻게 해도 상대방의 행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운터의 능력의 숙명이었다. 차대엽 또한 그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기술들을 고안했지만, 근본적으로 수동적인 능력이라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결점은 공격 전용의 검 하나를 따로 쥐는 것으로 해결된다. 사용자의 이미지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바뀔 수 있는 초대 검성의 신검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싸움의 구도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동성과 잠재력이 있었다.

저 두 자루 신검의 이도류야말로, 차대엽을 혈통시대의 주인공이자 세계관 최강의 깡패로 만들어준 근본이었다.

‘아직 신검합일도 못했으니 깡패가 되긴 멀었지만.’

하지만 일단 신검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 차대엽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눈덩이 굴리기의 화신이 된다.

차대엽은 자신의 신검을 역수로 쥐었다. 가해진 충격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특성을 이용해 방어 및 견제 수단으로 사용하겠단 심산이었다. 차대운이 흥미롭다는 듯 동생의 자세를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던 차대엽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검이야. 쥐고 있으면 뭔가가 전해져 와.”

그리고 오른손에 든 초대 검성의 신검을 바라보았다.

“···마치 칼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시인이 다 됐네.”

차대엽의 말에 차대운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그것은, 실제로 신검이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나처럼 정신 능력을 이용해 신검의 정령과 대뜸 강제로 대화할 수는 없을 테니 아직은 희미하게 존재가 느껴지는 정도일 뿐이겠지만, 점점 무기와의 유대가 강해질수록 목소리는 또렷해져 신검과 진정한 의미로 연결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신호라 할 것도 없이 차대엽이 달려나갔다.

상대방의 공격은 백류로 흡수 뒤 반격. 오른쪽의 신검은 자세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형태의 도검을 즉각적으로 판단해 변화시킨다. 적이 가장 꺼려하는 공격거리와 방식을 찾아낸 뒤, 그 틈을 집요하게 찌르며 계속 주도권을 잡는다.

차대엽답게 결점이랄 것이 없는 전술이었다. 문제는 상대방인 차대운에게 딱히 싫어하는 공격 방식이나 거리 따위 없다는 것이었다. 차대운의 눈동자에 보랏빛의 도깨비불이 일렁였다. 모든 힘들의 흐름을 포착하는 검귀의 귀안이었다.

“귀안의 약점은, 같은 귀안을 상대하면 변수 없이 무조건 고수가 이긴다는 점이지. 아무튼 수읽기 싸움이 돼버리니.”

두 검귀의 빛나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힘의 방향을 읽어내면 다음 검격의 궤도가 보인다. 궤도와 궤도 사이의 전투논리를 끊임없이 계산하며 자신의 최선수를 휘두른다. 그리고 목검 하나로 차대엽을 패대기친 차대운이 말했다.

“교정 사항은. 나보다 고수가 되시오.”

그리고 그 한 순간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진소란이 날아오듯 부딪혔다. 반사적으로 목검을 올려 그녀의 쇄도를 막아낸 차대운이 곧바로 다시 거리를 벌린 진소란을 바라보았다.

“재밌네.”

순간속도에 의존하는 싸움은 차대운의 주특기였다. 그의 신검은 절삭에 특화되어있어, 일단 휘둘러 직격을 맞추기만 하면 방어 따위 몇 겹이든 무시하고 반드시 치명타를 낼 수 있었으니까. 차대운이 따라붙지 않고 양팔을 활짝 벌렸다.

속도의 승부를 해보자는 도발이었다. 그 제스처에 진소란의 자존심이 자극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미 완전히 전투에 몰입해있었다. 새까만 날개를 등 뒤로 곧게 펴고, 차대운의 호흡을 읽으며 꿰뚫을 타이밍을 신중히 재고 있다.

갈무리된 마력과 동요하지 않는 판단력은 금예린한테 농락당하던 학기초의 진소란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폼으로 선도부원들을 전부 박살낸 게 아닌 것이다. 눈을 잠깐 깜빡인 순간, 자리에서 진소란이 사라져 폭풍과 함께 앞으로 돌진했다.

차대운이 목검을 휘두르는 것과 함께 진소란이 튕겨나갔다. 하지만 예상한 것처럼 진소란은 곧바로 바닥에 착지했다.

“더 빠르게 할 수 있을 텐데?”

진소란과 눈을 마주친 차대운이 말했다. 경멸하는 것처럼 들릴 만큼 냉소적인 목소리였다. 그런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진소란은 다음 공격의 박자를 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 직선은 정말로 더 빨라졌다. 세 번째 충돌. 차대운은 반응해 요격했고, 다시 튕겨져 날아간 진소란이 도장 벽에 발을 딛고 재빨리 착지했다. 차대운이 한숨을 쉬었다.

“기껏 정면승부를 해주고 있잖아. 왜 낙법을 취할 수 있는 거지? 여력을 남기지 마. 네 몸 같은 걸 걱정하지 마.”

“왜 숨을 쉬고 있지? 더 빠르게.”

“더 빠르게!”

차대운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진소란에게 소리쳤다. 더 자신을 즐겁게 해달라는 듯이. 몰아붙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인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입을 다물고 있는 진소란은 계속해서 조금씩 빨라졌다. 충돌 시에 생기는 여파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진소란의 날개가 순간적으로 접혔다.

그리고 차대운을 향해 터져나간 진소란이, 아마도 오늘 중에서 가장 빨랐을 일격을 내리쳤다. 차대운이 들고 있는 목검이 부러져 날아갔다. 그리고 진소란은 자리에 쓰러져 당장 죽을 사람처럼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자기 목검을 빤히 바라보던 차대운이 피식 웃었다.

“한계를 넘어보니 어때. 재미있지?”

진소란을 내려다보는 차대운의 얼굴에 아까까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평소처럼 느긋한 웃음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진소란은 완전히 지쳐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앞으로 며칠을 근육통으로 고생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건 마지막 날에 하지···.”

차대엽의 말에 난 전적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을 먹은 뒤, 나는 저택 바깥을 거닐며 경치를 구경했다. 확실히 안개 낀 산골짜기에 집이 있으니 주변만 걸어도 절경이 펼쳐졌다. 나는 절벽의 낭떠러지에 걸터앉아 까마득한 발밑의 숲을 구경했다. 까딱 떨어지면 비명횡사할 판이었지만 나는 공중에 뜰 수 있으니 딱히 위험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등 뒤로 걸어왔다. 의식을 감지해볼 것도 없이 뒤따라올 만한 인물은 차대운밖에 없었다.

“바람 쐬는 것 치고는 꽤 멀리 오네.”

“···집 가까이선 마음 편하게 얘기도 못 할 테니. 혹시 배려가 싫으셨나? 괜찮으면 돌아가서 얘기해도 되는데.”

“아니. 고마워 죽을 지경인걸.”

차대운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를 긁적인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로 차대운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혈통시대에는 피의 폭주라 불리는 증상이 있다.

피를 강하게 이어받았지만 그릇이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몸에 부담을 주는 능력을 한계 이상으로 사용한 결과, 이성을 잃은 광인이 되어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몸에 있는 혼혈로서의 기관이 비대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폭주한 혼혈은 인간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주변의 모든 걸 덮치고 잡아먹는 짐승으로 영락해버린다. 기사단의 토벌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치료 방법이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로 연구가 진행중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극도로 희귀한 경우인 탓에 사례 자체의 수집이 어려웠다.

그리고 탈선자는 그들보다 더욱 희귀한 존재였다. 애초에 탈선자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칭하는 말일 뿐. 따로 정식 명칭 같은 게 있을 정도로 알려져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괴인이라, 다른 누군가는 마인이라 불렀다.

기본적으로는 폭주한 혼혈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그들은 멀쩡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고, 세심한 제어를 필요로 하는 혈통능력도 사용할 수 있으며, 힘을 억누르는 요령을 터득해 자신의 본모습을 능숙히 숨길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결코 인간으로 돌아오지는 못한다. 탈선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던 윤리관이나 사고방식 또한 변화한다. 단적으로 말해 혈통시대에서 탈선자는 요괴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탈선자들은 식욕과도 닮아있는 인간 살해 욕구를 가져, 끊임없이 생명을 빼앗지 않으면 갈증에 시달리다 나중에 가선 몸이 천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제대로 만들어져 있던 틀을 부수고 생물로서 불안정해진 상태이기 때문이라 했다.

한때는 같은 인간이었으면서, 지속적으로 인간을 죽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들. 도저히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라의 법이나 윤리 따위 존재하지 않는 이면, 폭력의 세계에 모여 살아간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의 몸으로 요괴가 된 이들이다. 요괴와 같이 인간을 넘어선 힘을 지니고서, 기사와 같이 점점 기술을 갈고닦아 성장해나간다는 게 무서운 점이었다.

혈통시대 안에서 유명한 탈선자라고 하면 일단 둘 있었다. 용기사의 계율 따위 엿이나 먹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탈선해버린 전대미문의 존재와, 그를 따르고 있는 주인공의 형.

이야기를 들은 차대운이 질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진짜 놀랐네.”

자신이 인간의 한계를 한꺼풀 벗어던져 각성한 괴물이란 사실을 폭로당했는데도, 차대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문제될 것은 없다는 눈치였다. 그는 여전히 차대엽의 형이었고, 어머니에게 있어 착한 아들이었다.

분명히 이런 점이었다.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탈선자가 되는 데에 있어 필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의 크기 따위가 아니었다. 미치지 않은 채로 미칠 수 있는 소질. 낭떠러지 너머로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이상성. 처음부터 인간으로서 한 부분이 어긋나있어야 탈선할 수 있다.

대단히 암울한 환경에서 절망하며 자란 정세나가 탈선자가 되지 않은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정세나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제대로 된 인간이었으니까. 차대운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고 있는 믹서기 안에 자기 의지로 손가락을 집어넣는 감각과 비슷해.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만, 못 하는 인간은 어떻게 해도 할 수가 없지.”

“그리고 진소란은.”

“저 애는 아마, 할 수 있는 쪽이야.”

말은 아마라고 했지만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대로면 몇 년 안에 반드시 선을 넘겠지.”

탈선이라는 건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게 니었다.

이미 그 사고방식이 반쯤 인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감정적으로 극도로 격해졌을 때 마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며 완전히 저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차대운 또한 아버지의 일이 아니었다면 완전히 탈선하는 건 한참 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대운은 단언했다. 진소란의 인간성이나 사고방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눈을 마주보고 검을 부딪치는 것만으로. 저렇게까지 확실하게 탈선자가 될 것이라 생각되는 녀석은 달리 본 적이 없다는 듯이.

“뭐, 굳이 나랑 얼굴을 마주하게 한 건 만약 저 애가 탈선했을 때 사정을 봐달라는 건가? 아무래도 죽일 사람을 고르는 문제도 있고. 혼자서는 제대로 해나갈 수 없을 테니까.”

참 사람 좋은 녀석이라는 듯 차대운이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마. 부탁받지 않아도 탈선자는 전부 데려와 보호하는 게 이쪽의 방침이야. 몇 없는 소중한 동류기도 하고.”

차대운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소란이 탈선자가 되기 딱 좋은 인간이라는 것은 나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진소란은 말 그대로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한 탈선자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타고난 성격도, 성장 환경과 사고방식도, 당장 강해지고 싶어하는 동기도.

그저 시간의 문제일 뿐 진소란이 선을 넘게 되는 것은 확정사항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난 같은 반 친구를 사람 죽이는 괴물로 각성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돌연변이로서 진소란의 진가가 나타나는 것은 그곳이었다.

인간을 벗어난 존재로 있어달라는 기대에 응하려 하면서도, 자신 또한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싶어하는 모순. 단적으로 말해 진소란은 자신의 날개인 흑익만을 일시적으로 탈선시켰다 되돌릴 수 있었다. 선으로 줄넘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정 탈선을 자기 의지로 다룰 수 있게 된 진소란의 검은, 나중에 가면 대요괴의 목까지 닿는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진소란에게는 차대운이 싸우는 모습을 한 번 관찰시키고 싶었다. 평범한 검귀가 아닌 탈선자로서 싸우는 모습을.

‘어떻게 변이체로 못 만드려나···.’

나는 어떻게 해야 차대운이 진소란 앞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턱을 매만졌다.

* * *

하늘이 주신 기회란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했다.

혈왕궁의 갑작스러운 움직임과 요호의 완전 소실. 주변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고,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탈선자들은 이변을 조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이번 재앙의 토벌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그의 오른팔, 검마(劍魔) 또한 당분간 이쪽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백룡은 적어도 둘, 가능하다면 셋이 모였을 때 싸워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 호기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은 상성상 그 남자에게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일 대 일이라면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청시아는 원적인 흑룡의 토벌에 도전했다.

“거 봐, 이렇다니까. 가끔씩 착각하는 놈들이 있는데, 이무기라는 건 딱히 용보다 약하다는 뜻이 아니거든.”

그리고 청시아는 지금 피투성이로 남자의 발밑에 쓰러져있었다. 싸우기 전 세운 계산에 착오는 없었다. 청룡의 능력은 압도적인 상성으로 흑룡의 능력을 대부분 틀어막았고, 그는 손발이 묶인 채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었다.

오판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흑룡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전제. 그는 그저 손발이 묶인 채인 그대로 만전 상태의 청룡을 박살내버린 것뿐이다.

“애초에 너희 용기사라는 녀석들은 한심한 놈들밖에 없단 말이지. 자기 자신의 힘보다 다른 놈한테 건네받은 능력 쪽이 강하다니. 쪽팔리지도 않냐? 스스로가 강해져야지, 스스로가. 그나마 적룡이라는 그 꼬맹이가 좀 가망이 있었는데.”

검은 자켓의 남자가 운동 정돈 됐다는 듯 기지개를 폈다.

그가 대요괴의 일각으로서 지닌 이무기라는 이름의 의미는, 결국 용으로서 완성되지 못한 실패작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의미였다. 남자는 용의 힘을 세상을 위해 써야 한다는 강박에 요만큼도 영향받지 않았다.

용기사의 일 따위 엿이나 먹으라는 흑룡의 이무기.

그가 용으로 완성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던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을 사랑하고 지키라 명령하는 용왕의 주박보다, 남의 말을 듣기 싫다는 그의 의지가 강했을 뿐이다. 그렇게 탈선했다. 유일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유아독존의 용.

그리고 탈선자들의 왕이었다.

남자는 바닥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청룡을 보며 하품을 내뱉었다. 이미 볼 장 다 봤으니 흥미 없다는 얼굴이었다.

“뭐. 대충 뭉개놓으면 백룡이 오겠지?”

남자는 기대된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쓰러진 청룡 앞까지 걸어간 그가, 신고 있는 워커를 위로 쳐들었다.

< 유곡가인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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