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83화 (83/113)

< 유곡가인 (4) >

검귀들의 총본산이 있는 백검곡은 푸른 나무들 대신 날카로운 암석들이 여기저기 솟아올라, 적막하단 말이 어울리는 풍경을 하고 있었다. 검귀들만이 왕래할 수 있다는 성역에 발을 들여, 진소란은 두근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정말 제가 따라와도 됐던 걸까요?”

“일단은 우리 쪽 사유지니 마음대로 들어오면 안 되지만, 딱히 다른 혼혈들을 데려오면 안 된다는 규율도 없지. 검귀란 놈들은 하나같이 아웃사이더니까 다른 혼혈 친구가 없을 뿐이야. 재미없는 이야기만 하는데 데려올 이유도 없고.”

차대운이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딜 둘러봐도 골짜기엔 뾰족하게 솟아오른 하얀 암석만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을 뿐,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생각없이 걷다보면 여기저기서 뾰족한 돌들이 피부를 찔러대서 불편했다.

걸을 때에도 신경을 쓰며 걸어야 할 수준이니 싸울 땐 대단히 짜증나는 방해물이 될 것이다. 피부가 금속처럼 단단한 검귀들은 딱히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이런 지형적 이점 때문에 백검곡에 검귀의 총본산을 두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걷자 가는 길 앞에 거대한 바위를 깎아내서 만든 듯한 하얀 계단이 나타났다. 바위를 깎아냈다기보다는 산을 깎아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듯한 규모였다. 고개를 올려다보면 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설마 걸어서 올라가야 되나?”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올라갔다 내려오면 건강에도 좋으니까. 어린데 벌써부터 걸어다니기 싫어하면 못 쓴다 너.”

앞서 올라가는 차대운의 말에, 진소란은 참으로 옳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혼혈들은 이래서 문제였다. 이 바라보기만 해도 까마득한 산길에 대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쓰면 혈액순환이 잘 된다는 정도의 감각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온몸에 염동력을 둘렀다. 건강을 생각하고 뭐고, 이런 무지막지한 길이의 계단을 순전히 체력만 써서 오르는 미련한 짓은 사양이었다. 마음만 같아선 그냥 공중에 떠서 날아가고 싶었지만 다른 두 사람이 걷고 있으니 눈치가 보이고.

그리고 그런 생각은 십수 분쯤 지나자 산산이 박살났다.

계단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경사가 거칠어지고 계단 하나하나의 높이가 높아졌다. 어떻게 해야 오르는 사람을 더 효과적으로 지치게 할지만 생각한 듯한 구조였다. 다리로 몸을 끌어당기듯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내가 가진 가장 훌륭한 미덕 중 하나는 언제든 필요하다면 철면피를 깔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반쯤 누운 자세로 다리를 꼬고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이미 이 정도의 염동력 컨트롤은 코를 파면서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수준이었다.

“한솔! 치사하게 혼자 능력을!”

“쩝···. 있는 걸 안 쓰기도 그렇고.”

투닥이면서 계단을 올라가자 이윽고 한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기다란 수수비를 들고서 돌계단을 조용히 쓸고 있는 것은 한 명의 남자아이였다. 설마라고는 생각하지만 맨 아래부터 여기까지 전부 청소하며 올라온 것인가 싶었다. 그리고 이쪽을 돌아본 남자아이가 앗 하며 놀라는 목소리를 냈다.

“당신!”

아이가 삿대질로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공중에 떠있는 채 양손으로 뒷짐을 지고 있던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남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신성한 백계를 그런 식으로 모욕하다니! 이 계단은 자신의 발을 내딛으며 무(武)가 무엇인지, 또 검(劍)이란 무엇인지 한 번 더 고민하기 위한 장소라고요! 공중에 뜨는 혈통능력을 쓰고···. 그것도 그렇게 안락한 자세로 오르다니요!”

일단 내 염동력은 혈통능력이 아니었지만, 굳이 상관 없는 말꼬리를 잡을 필요는 없었다. 무가 무엇인지 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요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 또한 말해봤자 화만 더 낼 것이다.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떠있는 채 대답했다.

“편한 자세가 더 사색하기 쉽잖아.”

“궤변이예요!”

나는 쩝 입맛을 다셨다. 청소하는 입장에서도 나처럼 발로 밟지 않고 깨끗하게 이용하는 쪽이 마음에 들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 계단은 검귀들에게 있어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곳인 듯 싶었다. 그걸 차대운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은 이유는, 본인부터가 전통 따위에 요만큼도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정확히는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싫어한다.

“미안, 미안. 내 얼굴을 봐서라도 용서해줄래?”

중재에 나선 것은 우리 중 맨 앞에 서있는 차대운이었다. 감히 누가 이의를 표하는 것인지 고개를 휙 돌린 빗자루의 소년은, 차대운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쩍 벌리며 굳어버렸다. 마치 귀신이라도 목격한 것 같은 안색이었다.

“···님.”

“님?”

“검성님···. 진짜 검성님이다.”

빗자루를 든 남자아이는 차대운을 시인하자마자 방방 뛰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실제로 만났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프로 육상선수를 지망하는 아이가 육상 세계 챔피언과 독대했을 때 같다고 하면 조금 비유가 맞을까.

수수비를 툭 떨어뜨린 아이는 뭘 말하려다 고개를 젓고 양손을 이리저리 흔드는 걸 몇 초쯤 반복하더니, 이내 도복 안쪽에서 꺼낸 스마트폰을 양손으로 공손히 든 채 말했다.

“호, 혹시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평소 검성님을 존경하고 있었어서!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음, 너무 시간만 잡아먹지 않으면 괜찮아.”

차대운이 웃으며 흔쾌히 승낙하자, 진소란 또한 무언가를 흠칫 깨달은 표정을 하고 조심스레 한 손가락을 올렸다.

“저, 저도 한 장만···.”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차대운은 거절하지 않았고, 이곳에 핸드폰을 지지해둘 삼각대나 셀카봉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촬영해줄 역할이 누구인지 소거법적으로 결정되었다. 진소란의 핸드폰을 건네받은 나는 바닥에 반쯤 엎드렸다.

“뭐하는 거야?”

“이렇게 찍어야 다리가 길어 보여.”

땅바닥에 거의 닿을 듯이 엎드리면서도 몸이 땅에 닿지 않는 완벽한 염동력 컨트롤이었다. 가보로 삼을 사진이라면 이왕이면 훌륭하게 찍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는 섬세하게 핸드폰을 기울이며 렌즈의 각도를 조정했다. 빗자루를 양손으로 꼭 붙든 아이가 계단 한쪽 편에 가서 차대운 옆에 섰다.

“자~ 치즈. 한 번 더. 좋아. 한 번 더.”

찰칵이는 셔터음이 몇 번 나고, 이번에는 진소란이 차대운 옆에 서서 자신의 검을 들고 이런저런 자세를 취했다. 잔뜩 긴장한 건지 어색함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반면 차대운은 이런 것에 익숙한지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에게 사진을 찍은 핸드폰을 돌려주자 감사합니다, 하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왜 날아다니고 있냐며 화를 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인사성 바르고 착한 아이 같았다.

“백선각으로 가시는 거죠!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마치 오늘이 살아온 날들 중 제일 행복한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빗자루를 든 아이가 계단을 총총 올라갔다. 총본산에 처음 방문한 손님도 아니고, 이제 와서 차대운에게 길안내 따위 필요하지 않겠지만 차대운은 그저 웃으며 아이의 등을 따라갔다. 이내 끝없이 이어지던 계단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아이는 이쪽이라며 망설임 없이 한쪽 계단을 선택했고, 이내 골짜기 속에 멋들어지게 지어져있는 석조 건물이 나타났다. 아이가 나와 진소란을 조심스레 쳐다보면서 말했다.

“혹시 동행하신 분들은···.”

“같이 갈 거야. 얘네도 들어야 할 이야기거든.”

뭐라고 추궁할 만도 했지만 역시 검성이라는 것인지 아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명은 촛불밖에 존재하지 않아 어두웠다. 아이를 따라 복도를 걷자 커다란 문이 열리고 주변이 환하게 밝혀졌다.

“검성님이 오셨습니다, 어르신.”

열린 문 옆에 선 아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능숙한 동작을 보니 시종으로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듯 싶었다. 방 안쪽에는 여러 명의 검귀가 험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소란은 오히려 두근거린단 표정이었다.

진소란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중앙에 앉은 노인은 아마도 검선(劍仙)이라 불리는 신검합일의 도달자. 주변에 팔짱을 끼고 서있는 다른 검귀들 또한 하나같이 날고 기는 거물 검사들이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앉은 노인이 이쪽을 노려보았다.

“뭘 주렁주렁 달고 왔군. 호출한 건 너 뿐이다만.”

읊조리는 노인의 말에는 숨길 수 없는 적의가 담겨있었다. 그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차대운은 웃는 얼굴로 노인 맞은편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다리를 꼰 차대운이 말했다.

“원래부터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어째 평소보다 더 신경질적이네. 어린애 두 명쯤 데리고 오든 말든 상관없잖아? 여기서 제일 높은 건 나니까.”

검귀들의 종친회는 딱히 상명하복으로 돌아가는 수직적 구조가 아니고, 비교적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검귀와 많은 수라장을 거쳐온 연장자를 대우해주는 풍조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풍조를 정면에서 개무시할 수 있을 만큼 검귀 전체를 대표하는 발언권을 가진 자리가 바로 검성이었다.

다소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차대운의 냉소에, 자리에 모여있는 노인과 검귀들은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출구에 선 아이와 진소란은 분위기가 날카로워진 걸 느끼고 침을 꿀꺽 삼켰다. 차대운은 웃으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누굴 줄줄이 데려왔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우리 검선 어르신 쪽이 더 이상하지 않겠어? 호출을 봤고 달려왔더니 이게 뭐야. 할아범네 파벌이 얼추 다 모여있잖아. 뒤늦게 내가 검성이 된 거 축하 파티라도 해주려는 건가? 아하하.”

설마 저번 대에 이어서 이번 대까지 새파랗게 젊은 놈한테 자리를 뺏겼다고 혼자 찌질하게 끙끙댈 만큼 할아범이 속 좁은 인간일 리 없을 테고 말이야, 하하하. 그렇게 차대운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을 조롱하며 거의 대놓고 시비를 걸었다.

노인의 파벌에 속해있는 검귀들은 당장에라도 목을 칠까 하는 표정으로 차대운을 매섭게 노려봤지만, 정작 차대운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노인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나설 때가 아니라며 흥분한 젊은 검귀들을 추슬렀다.

“뭐, 시치미 떼는 건 여기까지로 하고.”

피식 웃은 차대운이 양손을 내보이며 고쳐앉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말 고를 필요 없어. 옆에 계속 애들 세워두기도 그렇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내가 왜 널 호출했는지 알고 있단 거냐?”

“그야, 평소부터 어른 공경은 엿이나 바꿔먹은 망할 꼬맹이가 검성이란 자리까지 떡하니 얻어버렸으니 내가 곱게 보일 리 없겠지. 뭔가 끌어내릴 만한 점이 없나 필사적으로 내 뒤를 캘 테고, 그러면 반드시 이렇게 될 거라고 알았어.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면 당연히 미리 대비를 해두겠지?”

그 말에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대비? 대비라. 뭘 어떻게 대비하겠다는 거지? 우리가 찾아낸 게 대체 무엇일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뭐, 아버지를 묻어버린 게 나라는 건 기본적으로 알아냈을 테고. 혼혈들 가지고 생체 실험 한 거나 성소를 더럽힌 것도 잘하면 알아냈겠지? 괴물이랑 내통하고 있다는 것도. 내가 그 괴물 자체였다는 것에 대해선···역시 아직 모르려나.”

차대운이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가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이와 진소란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 눈썹을 찌푸렸고, 서있는 검귀들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차대운을 바라보았다. 노인 또한 짚고 있는 지팡이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검귀들의 면면을 훑어본 차대운이 말했다.

“중립 파벌은 모으지 않은 거지? 여기서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데, 불러버렸다가 나한테 계획이 새나가거나 변수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역시 바보네. 어차피 명분은 확실하고, 우진이 형이라도 불러왔으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차대운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번뜩임이 스쳤다. 그 기색을 놓치지 않고, 노인 뒤에 서있던 검귀들이 일제히 손바닥을 뻗어 신검을 발현시켰다. 하지만 그보다 차대운이 빨랐다.

“먼저 뽑았군.”

우도(愚刀). 발현과 동시에 휘둘러진 차대운의 신검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노인 뒤에 선 검귀들의 손목을 베어냈다. 앉은 상태에서 발도한 것이라 말할 수 없을 속도였다.

한 박자 늦게 핏물이 터지고, 자리에 앉아있던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는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칼날에 묻은 피를 가볍게 휘둘러 튕겨낸 차대운이 말했다.

“대비책이란 건 간단해. 여기서 당신들 모두를 내가 죽인다. 그 뒤 나는 책임 지고 검성 따위 때려친다. 평생을 죄책감에 은둔하며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설정으로 사는 거야. 깔끔하지?”

순식간에 방 안은 전장이 되어, 온갖 포효와 함께 수많은 검귀들이 혈통능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황급히 방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차대운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결계가 새겨진 뒤였다. 아수라장 안에서 조금의 평온도 잃지 않고, 차대운이 돌아보지 않은 채 진소란에게 말했다.

“이번 지도는 견학이다. 거기서 잘 보고 있도록 해.”

그리고, 검을 치켜든 차대운이 조용히 읊조렸다.

검귀가 지닌 혈통능력의 극치. 검성의 성소에서 정세나의 전력을 몰살시킨 형태. 신검발현의 다음 단계에 있는 것.

“신검합일. 우도할계(愚刀割界).”

새하얀 빛이 터지고, 차대운의 모습이 변화했다.

< 유곡가인 (4)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