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곡가인 (5) >
신검합일, 우도할계(愚刀割界).
한 순간 마력의 빛이 번쩍이고, 차대운의 몸이 새하얀 갑주를 입은 것처럼 금속으로 감싸였다. 스스로가 자신의 신검과 동화해, 검에 깃든 능력을 한계 이상으로 이끌어내는 검귀의 최종 전투형태. 간단히 말하면 변신을 통한 강화였다.
귀신의 형상으로 몸을 덮은 금속은 하나의 방호로서 작용해 상대의 혈통능력의 영향하에 놓이는 걸 어느 정도 중화해주고, 그 견뢰한 강도는 평범한 주문이나 공격 따위 아무렇지 않게 튕겨낸다. 한 가지 더 특징적인 변화가 있다면 신검합일을 한 검귀의 사고는 완전히 전투에 최적화된다는 것.
검귀들은 그것을 몸이 검처럼 단단하게 변하는 것과 같이, 마음에도 날이 서게 되는 거라 표현했다. 일단 합일에 이른 검귀는 어떤 요소에도 방심하지 않고, 적대하는 존재라면 칼같은 계산으로 배제하는 완벽한 살육 기계로 거듭난다.
다른 능력 따위 없어도 신검합일을 한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괴물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이 신검합일이란 능력의 진가는 아니었다. 검귀의 본령은 몸의 단단함 따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검이었다.
신검합일에 도달한 검귀의 신검은, 종래의 한계를 뛰어넘어 검으로서 다음 단계의 능력에 각성하게 된다.
절삭력에 특화된 신검인 차대운의 우도는 그것만으로도 대처할 방법을 찾기 힘든 치명적인 무장이었지만, 신검합일을 이룬 순간 손도 발도 댈 수 없는 흉악한 능력의 검으로 변모했다. 차대운의 발아래에서 둥근 영역이 넓게 퍼져나갔다.
‘신검의 결계.’
그것이 차대운의 신검합일, 우도할계의 능력이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일정 반경의 영역 안 어느 곳에라도, 아무런 전조 없이 우도의 참격을 발현시킬 수 있다. 각기 다른 장소에 복수의 참격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 또한 가능했다.
발현에 집중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정세나가 모아온 마물의 군세를 자리에 선 채 하나도 빠짐없이 몰살시켰을 때와 같이, 결계를 펴고 있는 동안은 영역 안에 발을 들인 적 모두에게 자동적으로 참격을 쏟아붓는 것 또한 가능했다.
소모만 신경쓰지 않으면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을 지형째로 갈아버리며 뛰어다닐 수도 있는 능력이었다. 그에 대한 대처법이라 해봐야 차대운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 정도였다. 정면에서 정직하게 공략하라 만든 능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차대운의 합일에 맞추어 앞에 서있던 노인 또한 이형의 귀신으로 거듭났다. 칼날 형태의 뿔은 길게 뻗고, 온몸은 금속으로 덮여 겉으로 봐선 노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짚고 있던 지팡이는 그대로 기괴하게 비틀린 검이 되었다.
그리고 차대운은 품평하듯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게 이름 높은 검선님의 합일체인가? 전대 검성 자리를 놓고 아버지와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었다 들었는데···.”
“아부라도 떨고 싶은 거냐.”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볼품없어서. 하기야 그 아버지에게 밀렸을 정도니 수준은 알 만하지. 기대한 내 잘못이야.”
차대운이 조금쯤 낙담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실망이 묻어있었다. 그것이 값싼 도발로 들리지 않을 만큼, 차대운의 존재감은 지금 이 방 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조롱당한 노인이 살기를 머금고 대답했다.
“늙은이를 얕보는 건 젊은이의 특권이다만, 빠진 줄 알았던 이빨에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후회하면 늦을 텐데.”
“아무도 늙어서 약해진 것 같단 말은 안 했어. 이 정도면 어차피 전성기도 거기서 거기였을 거 아냐.”
“···얼간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군.”
노인이 기괴하게 비틀린 검을 차대운에게 겨누었다.
“단지 흐름을 잘 타서 검성의 자리에 오른 애송이 따위, 이 몸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감사하도록 해라, 네 목이 오늘까지 몸 위에 멀쩡히 달려있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이 노구의 변덕 덕분이었으니.”
그 말에 차대운이 새삼 웃기다는 듯 지적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부하들을 줄줄이 끌고 왔잖아? 얌전히 견학이나 시키려고 뒤에 세워놓은 건 아닐 테고. 다같이 린치해서 이긴 다음 내 실력이다 우길 생각인가?”
“당연하지. 이 녀석들 전부가 내 검이자 수족이니.”
노인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차대운이 눈썹을 찌푸렸다. 단순히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부하들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지금 뒤에 서있는 검귀들이 자신의 능력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혈통능력의 딜레마는 이름을 떨칠수록 그 능력의 상세 또한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십 년간 수많은 활약을 펼쳐온 검선의 신검은 이미 누구에게나 능력이 알려져있었다. 상처를 입힐 때마다 상대의 몸에 혼란을 일으키는 기묘한 검.
일단 공격을 허용하면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며 자세를 풀고, 또 다음 공격에 그대로 노출당해 결국엔 계속 우스꽝스럽게 춤추다 죽어버린다. 그런 적의 추태를 구름 위의 신선처럼 바라본다고 해서 붙은 이명이 바로 검선(劍仙)이었다.
노인이 기괴하게 비틀린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신검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검귀들은 능력을 최대한 은폐하지. 일부러 한쪽 면만을 보여주면서 자신에 대해 오해하도록 유도한다. 상처를 입힌 상대로부터 사지의 제어권을 잠깐 빼앗는 건 내 능력의 아주 일부분일 뿐.”
검이란 상대방에게 원하는 행동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 그런 심상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 터다. 그리고 잠깐 턱을 매만지던 차대운이 대충 감이 온다는 듯 추측을 입에 담았다.
“조건을 더 맞추면 일시적이 아니라 반영구적으로 남을 조종할 수 있는 건가? 속 검은 늙은이답게 음습한 능력이네. 여태껏 검성이 못 된 이유를 알겠어. 검사가 아니니까.”
자연스러운 감화인지, 세뇌와 같은 방식인지, 아니면 단순히 행동만을 강제하는 건지. 제한된 정보로 추측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차대운은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혈통능력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고, 신검합일의 방호를 두른 검귀끼리의 싸움에선 더더욱 그러했다. 적을 지배하에 놓기 위한 조건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전투 중에 쉽게 충족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검귀들 전부와 싸워 이기는 데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리고 그건 차대운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노인은 궁지에 몰린 차대운이 시간을 끌기 위해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대화 덕분에 연명하고 있는 것은 노인들 쪽이었다. 우도할계를 전개한 순간 싸움은 이미 끝나있었다. 차대운은 그냥 천성이 느긋하고 신사적인 성격이기에, 죽이기 전에 할 이야기는 전부 해두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한 것일 뿐이다.
이내 노인은 차대운의 기묘한 여유에 초조함을 느낀 듯, 더 이상 문답무용이라는 태도로 선전포고를 내뱉었다.
“마음대로 지껄여라. 여기 모아온 녀석들은 오로지 너 하나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한 포진. 너같이 위험한 놈을 내 손아래에 넣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우선 여기서 너를 묻고, 네 다음 대 검성을 나의 장기말로 삼도록 하지.”
그리고 그것이 역린이었다.
그 말에 차대운을 감싸고 있던 느긋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손에 든 우도가 노인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럼에도 노인의 목이 잘려나가 바닥에 구르는 일은 없었다. 우도를 막아낸 것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검귀였다.
제자리에 선 노인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난가(爛柯). 이 검 앞에선 어떤 공격도 강제로 예리함을 잃고 힘이 분산된다. 합일에 이르렀다 한들, 뭉툭한 몽둥이로 영락해버린 신검의 공격 따위 받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참격의 중화. 한없이 날카롭게 갈고 닦인 공격이라도 뭉툭한 형태의 미련한 타격으로 일그러뜨리는 능력이었다.
순수한 충격으로 적을 박살내는 유경명이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절삭력 하나에 극도로 특화된 차대운의 우도와는 완벽한 상성관계에 있었다. 노인도 철저한 준비를 하고 온 것이다. 그리고 차대운은 불쾌한 듯 입술을 이죽였다.
자신의 검이 막힌 게 불쾌하단 표정이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라고?”
그리고 다음 순간, 전방위에서 셀 수 없는 참격이 나타나 우도를 막아낸 검귀의 몸에 박혔다. 전신을 난자당한 검귀는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쿵 쓰러졌다. 애초에 닿아야 발동되는 능력 따위 막아낼 수 없는 속도로 베어내면 그뿐이다.
“어···?”
그리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를 보고, 진소란은 처음으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살육전이라고 이해한 듯 했다. 진소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진소란보다 더 당황하고 있는 것은 차대운 앞에 서있는 검선 노인이었다.
“말도 안 돼···. 너의 능력은 이전에 휘두른 참격을 공간에 고정해두었다 필요할 때 발현시키는 것일 텐데! 나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너는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았어!”
아무래도 차대운의 신검합일에 대해서도 조사해본 모양이었다. 불합리하다는 듯 길길이 날뛰는 노인에게, 차대운은 한심하단 시선을 보냈다. 이런 게 검귀의 최대 파벌 중 하나의 수장이라는 사실에 정말 유감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내 흔적을 따라가다 얻은 정보겠지? 말했을 텐데. 그쪽이 내 뒤를 캐려고 안달이 나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고.”
“뭐···?”
아연실색해하는 노인에게 차대운이 한숨을 쉬었다.
“신검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검귀들은 능력을 최대한 은폐하고, 일부러 한쪽 면만을 보여주면서 자신에 대해 오해하도록 유도한다. 당신이 방금 한 말이잖아.”
그제야 노인도 상황을 깨달은 듯 싶었다. 자신이 조사해서 얻어낸 차대운의 정보라는 것에는 차대운 스스로가 조작해 만들어둔 거짓이 섞여있었고, 우도할계의 능력에 미리 그 자리를 실제로 베어야 한다는 제한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한 순간이었다. 차대운이 가볍게 팔을 위로 치켜들자, 수십 개의 참격이 나타나며 뒤에 있던 모든 검귀를 베어버렸다. 신검합일을 한 노인은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의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지할 수 있었다.
힘으로 찍어누르겠다니 어불성설. 애초에 승산이 전혀 없는 승부였던 것이다. 차대운의 치부를 알아낸 시점에서 노인의 승리 조건은 오로지 차대운과 만나지 않는 것 하나였다.
“내가 교활한 덫에 걸려들었다는 건가···?”
털썩 주저앉은 노인에게 이미 전의는 남아있지 않았다. 상황을 정리한 차대운이 그의 어깨에 손을 툭 올렸다.
“반대야. 할아범은 첫걸음부터 잘못 디뎠어. 나를 뭔가 대단한 꿍꿍이가 있는 흑막이라도 된다 착각하고 있나 본데, 이래 봬도 겉과 속이 똑같은 걸 자랑으로 삼고 있단 말이지. 검성의 자리가 탐났던 거라면, 그냥 몰래 와서 넘겨달라 부탁했으면 가짜 대련이든 뭐든 해서 당신한테 양보해줬을 텐데.”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것이 차대운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그의 행동원리는 지극히 단순했다.
검성이라는 이름을 귀찮아하는 건 가족에게 신경써줄 수가 없으니까. 열심히 일하는 건 사장님이 돈도 휴가도 넉넉히 챙겨주는 좋은 사람이라. 사람을 죽이는 건 체질이 그렇게 변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는 딱히 피에 미친 일탈자나 착란한 인간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탈선자가 되고서도 차대운은 요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기에 그 모든 것을 버티고 탈선자가 된 것이다.
검선에 대한 일도 자꾸 시비를 걸어 짜증이 날지언정, 딱히 죽이고 싶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야 친척을 개인적으로 좀 싫어한다 해서 죽일 생각까지 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입에 담았다. 차대운이 우도를 치켜들었다.
“···그만!”
그 순간 진소란이 절실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 등 뒤에 펼쳐진 흑익이 비대해지고 있었다.
< 유곡가인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