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곡가인 (6) >
진소란의 제지에 차대운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대운은 이 지경까지 와서 무슨 소리냐고 화를 내거나, 죽이려 한 건 저쪽이 먼저라는 논리를 내세우거나 하지 않았다. 돌아본 차대운은 그저 한 마디만을 입에 담았다.
“싫은걸.”
차대운에게 있어서 저 노인은 이미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위험요소였다. 살려둘 이유는 없는 반면 살려두면 안 될 이유는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이 많다. 그 대답에 진소란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하지만 차대운을 멈춰세우는 걸 포기하지 않고, 힘든 표정으로 쥐어짜내듯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직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저 사람은 이미 싸울 의사를 잃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다니 이상합니다. 이상해요. 그만 칼을 거두어주세요···!”
진소란은 어깨가 눈에 보일 만큼 덜덜 떨리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입에 담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옳지 않은 것 같다면 막는다. 상대방이 검성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도부원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에게는 희미한 기대감이 존재했다.
진소란은 차대운을 존경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여러 가지 기술이나 마음가짐을 가르쳐준 멘토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검성이라는 자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수많은 범죄를 억제해주는 질서의 수호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진소란이 느끼는 기대감은 그런 이유로 떠오른 게 아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진 았지만, 차대운이라는 남자는 자신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인간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분명 차대운 쪽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을 것이다.
진소란이 느끼는 소외감은 태생적인 것이었다.
마을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었을 때에도, 전국의 신동이 모인다는 세한기전에 입학했을 때에도, 금예린과 매일같이 대련하며 경쟁했을 때에도, 선도부장과 경비원에게 단련받을 때에도. 자신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차대운과 훈련할 때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보고 이 사람은 자신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진소란은 조금 기대했다.
자신이 호소한다면 검을 멈춰줄지도 모른다고.
진소란이 기도하자, 차대운은 정말로 검을 멈추었다. 활짝 웃는 진소란을 보며 차대운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그리고 다음 순간 차대운이 노인의 팔 한짝을 베어냈다. 새빨간 피가 튀어오르며 방 안에 검선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끄아아아아아악!”
“어···?”
멍하니 입을 벌린 진소란에게 차대운이 말했다.
“중요한 거니 집중해서 듣도록 해. 너와 나 같은 부류의 나사 빠진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검은 소용돌이가 강렬하게 몰아쳤다.
소용돌이의 중앙, 우도를 치켜든 차대운의 모습이 새까맣게 물들며 마귀와 같은 형상으로 변해갔다. 푸르게 빛나던 귀안은 보랏빛으로 바뀌었다. 탈선자로서 차대운의 본모습. 대요괴 이무기의 오른팔로서 온갖 적을 참수한 검마(劍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형태만이 불길한 것이 아니었다. 기사 지망이라면 지금 눈앞에 서있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 마물의 것에 가까운 기척을 띠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눈동자를 떠는 진소란에게 차대운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우선순위야.”
목소리마저 섬뜩하게 변해있었다. 진소란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했지만, 차대운으로부터 느껴지는 흉흉한 존재감은 이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것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맨 위에 있는 것 이외에는 모두 잘라내는 거야. 나한테 그건 가족과 보내는 평온한 생활이지. 너한테도 있겠지? 나머지 모두와 비교해도 빛바래지 않는 무언가가. 그렇다면 그걸 위해서 전부 포기해라.”
차대운과 눈이 마주친 진소란은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과 동류였다.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느낀 일이 있다면, 남의 말 따위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진소란도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눈앞에 참을 수 없는 악덕과 부조리가 펼쳐지고 있다면, 어떤 현실적인 사정을 댄다고 해도 진소란은 막으려고 할 것이다. 차대운은 스스로 지닌 원칙이 다를 뿐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자신이 타고난 본능의 목소리에 따른다는 점에서,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까웠다. 그 짐승에 한없이 다가선 결과가 저 괴물과 같은 모습이었다. 차대운을 노려보는 진소란은 부르르 떨며 깃털을 크게 부풀렸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신검을 치켜든 차대운이 담담히 말했다.
“그 아이도 죽일 거야.”
차대운이 진소란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진소란이 천천히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그곳엔 덜덜 떨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계단을 청소하다가, 검성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 말했던 아이였다.
“어째서···.”
“검선의 지배하에 있으니까. 아닌 척 뚝 시치미 떼는 건지 정말 자각이 없는 건진 몰라도, 가만히 놔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그러니까 거기서 비키도록 해.”
차대운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으며 사진 찍은 어린아이를, 단지 위험요소라는 이유로 제거하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진소란은 뭐라고 입을 열지 못했다. 대화 따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멍한 표정인 채 검을 들어 차대운에게 겨누었다.
“그게 정답이야.”
차대운이 후배의 성장을 기뻐하며 조용히 박수를 보냈다.
인간의 길을 벗어나면서까지 어디까지나 자신을 고집하는 탈선자들에게 설득이나 호소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에게 우선해야 할 것의 순위는 이미 자신 안에서 확고하게 정해져있고, 그것을 남이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러니 결국 차대운과 진소란 같은 부류는 자신을 끝까지 관철할 힘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상적인 자신을 향해 현실의 자신을 맞추려다 결국에는 찢어져버린다. 그렇게 탈선한다.
“일거양득이야. 네 앞에서 저 아이를 죽이면 거의 확실하게 탈선하겠지. 한동안은 상당히 미움받겠지만 어쩔 수 없어. 우리는 서로 양보라는 걸 못하는 성격 나쁜 족속이니.”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온 차대운이 휙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힘을 세심히 조절해 털어낸다는 듯한 느낌의 동작이었다. 그것만으로 진소란은 맞은편 벽까지 날아가 부딪혔다. 그리고 아이 앞에서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든 차대운이 말했다.
“자, 이쪽으로 와라.”
대부분의 경우 탈선의 방아쇠는 트라우마가 될 만한 강렬한 경험이다. 차대운이 어머니와 동생의 상처를 봤을 때처럼. 그가 신검을 휙 내리쳤을 때, 덜덜 떨고 있던 아이는 자리에서 사라져있었다. 차대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진소란의 한쪽 날개는 고흐의 그림처럼 나선을 그리며 일그러져있었다. 탈선하기 직전의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차대운이 놀란 것은 그 형태가 아니라, 방금 진소란이 각성해서 사용한 듯한 혈통능력이었다.
“멋진걸.”
얼마나 빠르게 이동한다고 해도 자신의 귀안이라면 어느 정도 전과 후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방금 것은 말 그대로 흐름이 중간에 끊겨있었다. 추측하자면 아마 예열과 같이 일정 이상의 가속을 발동 조건으로 하는 공간 도약.
“완전히 탈선하면 거기서 더 가버리는 건가?”
한계는 이미 찢어지기 시작했다. 몰아붙이면 몰아붙일수록 더욱 격렬하게 탈선하겠지. 차대운은 새로운 동지의 탄생에 솔직하게 기뻐했다. 그리고 공황에 빠져 경련하기 시작한 진소란의 어깨에, 옆에 서있던 송한솔이 손을 툭 올렸다.
“됐어. 거기까지.”
그러자 진소란의 날개가 천천히 원래 모양으로 돌아왔다.
* * *
진소란의 의식을 강제로 이쪽으로 잡아당기자, 그와 함께 변이하고 있던 날개 또한 원래대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쉽게 진정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진소란은 천성적으로 선을 넘었다 말았다 줄넘기할 수 있는 예외였다.
폭주하던 의식은 돌려놨지만 그렇다고 진소란이 평정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방금까지의 강렬한 경험에 진소란은 아직도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다. 나는 휙 손가락을 들어 염동력을 발현시켰다. 진소란의 몸이 내 옆의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부유하는 감각에 허둥지둥하며 손발을 젓던 진소란은, 염동력을 풀자마자 쿵 바닥에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놀란 진소란이 무슨 짓이냐는 듯 멍하니 이쪽을 올려다봤다.
“방금 거,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아?”
“바, 방금? 방금 뭘···.”
“날개 부글부글하며 달리다가 건너뛴 거. 아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가 아니라 그냥 해. 너는 할 수 있어.”
차대엽이 검술에, 유매가 마력 조작과 주문에, 금예린이 결계술에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의 재능이 있는 것처럼 진소란에게는 탈선에 대한 천재적인 센스가 있었다. 한 번 감각을 맛보았다면 다시 한 번 재현하는 건 손쉬울 것이다.
“내가 사람들 한 곳에 모을 테니 타이밍 맞춰서 빠져나가. 건너뛰기 쓰면 결계 무시하고 나갈 수 있으니까.”
“자, 잠깐만. 갑자기 무슨 소리를···.”
진소란 같은 타입에게는 이리저리 설명하는 것보다 일단 실전에 던져놓고 보는 게 빠르다. 그건 요 며칠간 차대운과 훈련을 빙자한 미친 짓을 하는 걸 보고 충분히 학습했다. 나는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검선에게 말했다.
“팔 한짝은 그냥 교육비라 생각해. 아무리 급한 기회 같아도 이런 양반이랑 싸울 땐 준비를 철저히 해야지.”
나는 방 안에 쓰러져있는 검귀들을 염동력으로 들어올려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진소란에게 달리라 소리쳤다.
뛰어가는 진소란이 도약의 준비를 시작하고, 콧숨을 내쉰 차대운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휙 손가락을 저었다. 저런 대놓고 하는 탈출 따위 살짝 진소란을 넘어뜨리기만 해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참격은 옆의 허공을 지나갔다.
“뭐?”
순간 차대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인드맵 개척 : 의식 동화 Lv.3>
공격의 타이밍에 은근슬쩍 내 의식을 섞어 궤도를 바꾼다. 몇 번이고 쓸 수는 없지만 불의의 기습 한 번은 반드시 통하는 기술이었다. 진소란은 성공적으로 벽을 뛰어넘어 방 안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천천히 차대운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잘도 해줬구나, 라고 말해야 하나?”
차대운은 나를 향해 손가락을 아주 살짝 까딱였고, 다음 순간 한없이 날카로운 참격이 내 뺨을 아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원래대로라면 한쪽 어깨가 찢어졌을 것이다.
“조준을 엇나가게 하는 건가. 재밌는 능력이네.”
의식 동화는 상대방의 정신에 작용하는 능력이기에, 직접 몸을 움직여 공격하는 게 아닌 우도할계를 통한 참격이라도 한두 번쯤은 엇나가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차대운은 혈통시대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힐 만큼 냉정한 인물이었다.
평정을 잃고 마구 날뛰던 정세나와는 경우가 달랐다. 그땐 의식을 유도하기가 간단했지만 차대운은 이미 위화감을 눈치채고 정신을 단단히 다잡고 있었다. 굳게 다진 의지에 끼어들어 억지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놓치면 곤란한 녀석들이었는데.”
“그렇진 않을걸. 저 할아버지는 더 이상 당신에게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당신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면서 방에 틀어박힐 거야. 꼬맹이는 알아서 해제될 거고.”
내 말에 차대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안다는 거지? 독심술이라도 쓸 줄 아는 게 아니면 사람의 속내는 아무도 모르는데.”
혈통시대를 해봤으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엄연한 사실을 말했다.
“난 독심술 쓸 줄 알아.”
내 말에 차대운은 농담도 잘 한다며 헛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정말 진지한 태도로 그랬던 건가, 하고 턱을 매만졌다.
여태까지 내가 차대운 앞에서 보여준 정보 수집 능력이나, 방금 쓴 의식 동화. 상식을 버리고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마 차대운이야말로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일 것이다.
솔직히 이걸 믿어줄지는 몰랐는데. 나는 설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판단하고 계속해서 판단재료를 건네주었다.
“뒤에 있던 검귀들도 노인의 명령에 복종할 테니 발설하지 말라고 지시하라 하면 돼. 그러면 오늘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전부 원만히 정리되는 게 서로서로 좋잖아?”
“그렇군. 일리가 있는걸.”
그리고 신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차대운이 말했다.
“하지만 안 돼. 다음 대의 검성을 자기 꼭두각시로 삼아 조종할 거라니. 그런 괘씸한 발언을 하는 녀석을 살려둘 리가 없잖아. 이건 정말로 실행하고 말고 이전의 문제야.”
검은 그늘 속 보랏빛 눈동자가 도깨비불처럼 불타고 있었다. 차대운은 진심이었다. 그들이 더 이상 차대운과 얽히고 싶지 않아한다는 내 말을 믿지 못해 그런 게 아니었다.
오늘 전까진 검선 쪽에서 일방적으로 차대운을 죽이고 싶어했을 뿐이었지만, 이제 차대운 또한 검선에게 확고한 살의를 가졌다. 위험요소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가족에게 적의를 드러낸 인간은 제거하는 게 차대운의 원칙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 나를 막아선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야 뭐···.”
나는 뺨의 피를 엄지로 닦으며 대답했다.
언젠가 검성의 성소에서 했던 내기. 내가 차대엽과 함께 차대운을 박살내주겠다는 호언장담에, 차대운이 재미있다며 응해준 것이었다. 개시 신호는 내가 차대운을 적대하는 그 순간. 그리고 지금 그 조건은 아슬아슬한 선에 걸쳐있었다.
그리고 검마 상태였던 차대운이 신검합일을 해제하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가 앞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좋아. 아이를 죽이겠단 건 솔직히 나도 너무 나간 거 인정해. 신검합일을 했을 때의 나쁜 버릇이지. 죽이지 않아도 될 방법이 분명히 있는데도 확실한 쪽을 선택하게 돼버려. 하지만 나머지는 아니야. 그것들은 청소해둘 필요가 있어.”
그리고 차대운이 천천히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옆으로 비키라는 듯 나를 내려다보는 차대운이 말했다.
“너랑은 상관도 없는 그 인간들 때문에, 날 막아서서 싸움을 시작할 건가? 그렇게 요령 없는 인간도 아닐 텐데.”
그는 가만히 서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막고 싶으면 막아 봐라. 옆으로 비킨다면 비키는 대로 좋다.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하라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이 상황에서 내가 차대운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상관도 없는 인간들 대신 죽고 싶지 않다면 가만히 있으라는 위협이었다.
머리를 긁적인 나는 핸드폰을 들고서 말했다.
“생각할 시간은.”
“30초 이상은 못 기다려.”
“충분해.”
사실 오늘 사건이 벌어진 것은 내가 차대운을 훨씬 빠르게 검성으로 만들어버린 탓이기도 했다. 그 탓에 초조해진 검성이 훨씬 허술하게 차대운의 손아귀 안에 걸어들어왔다.
하지만 딱히 그것에 책임감 같은 걸 느끼지는 않았다. 그야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으면 좀 찝찝하긴 했겠지만, 이렇게 차대운을 정면에서 막아서면서까지 나랑 상관도 없는 양반들을 지켜줄 만큼 나는 박애 넘치는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는 나와 차대운 둘만 남아있었고, 내가 차대운을 막아선 이유는 오로지 내 사정이었다. 내가 핸드폰으로 신호를 넣자, 방이 솟아오른 푸른빛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 방 주변에는 차대운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결계가 쳐졌다. 하지만 그것은 딱히 검선 노인과 그 패거리들이 준비해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준비한 것이다. 반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 그래도 저 혼자 이런 걸 받다니···.
금가의 어린 당주님은 토벌에 별 도움이 안 됐던 자신이 너무 큰 걸 받는 게 아니냐며, 빚을 지긴 싫으니 뭔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하라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금예린에게 도움받을 것들은 대단히 많았다.
여우누이의 의식을 통해 요호가 직접 조정해 만들어낸 천재 주술사인 금예린은, 온갖 결계에 접속할 수 있음은 물론 요호의 유해 무기 또한 아무 패널티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방의 이변에 차대운이 눈썹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뭐지? 갑자기 마력이···.”
“요호의 권능이야. 결계를 이용한 강제 전이.”
내 말에 차대운이 눈썹을 찌푸렸다.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버린 요호 때문에 여러 가지로 조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입에서 요호의 이름이 나오니 당황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와 차대운은 전혀 다른 공간에 서있었다.
엄폐물 따위 하나도 없는, 바위로 이루어진 커다란 언덕.
“30초 지났네.”
한쪽 옆에서는 금양호와 금예린이, 한쪽 옆에서는 정세나와 유경명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풍회주인 진고요를 제외하면 요호전의 주인공들이 다 모인 셈이었다. 팔짱을 낀 정세나의 경우엔 드디어 복수전을 할 수 있겠다며 가학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쩝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그럼, 싸울까?”
아무리 나라도 조금 찔릴 만큼 더럽고 비겁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흑룡이 있는 곳으로 가는 열쇠나, 차대운 제압 퀘스트 클리어나. 한 번 쓰러뜨려서 얻을 게 많았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차대운 제압 지시를 내렸다.
< 유곡가인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