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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87화 (87/113)

< 청탁병탄 (2) >

유경명은 한 순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검마의 형태로 변한 차대운이 유유히 몸을 돌려 우리 넷을 바라보았다. 차대운이 적에게 등을 보였다는 건 이미 확실하게 유경명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단 뜻이었다. 전황을 통찰하는 그의 귀안은 이미 싸움은 끝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리 있는 판단이었다. 나와 금양호는 상대방과 정면에서 싸우는 것과는 연이 없는 보조 타입이었고, 아무리 정세나가 강해졌다고 해도 차대운 급과 맞붙는 데엔 무리가 있었다. 금예린 또한 이제 막 호선도를 다루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나는 쓰러진 유경명에게 달려가 손을 꽈악 쥐어주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유경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대운은 동료 걱정이 각별하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이거 참, 솔직히 말해서 놀랐어. 설마 이 정도 전력을 끌어모아오다니. 적어도 학생한테 가능한 일은 아닌데.”

차대운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벌써 다 이겼다 생각해서 긴장을 푼 것일까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모든 상황에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주의를 끝내놓았기에 저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 학생이 아니라도 불가능하겠지. 대요괴의 권능을 사용하는 능력자가 둘. 결계 구축의 법칙 따위 무시하고 그 자리에서 사주결계(四柱結界)를 전개하는 주술사에, 앞에 나서서 싸우는 건 그 요호가 부리던 최강의 수족이라니.”

나는 차대운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금예린이 사용한 게 요호의 권능이라는 건 내가 말했으니 그렇다 쳐도, 정세나의 묵계가 대요괴의 권능이란 사실은 알 방도가 없을 텐데.

“잠깐. 어둑시니도 알고 있는 거야?”

“원래는 몰랐지. 그래도 내 일터에 무단 침입했다 난장판을 벌이고 도망친 게 어디 사는 누군지 알아볼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어? 다 월급 받고 하는 일인데. 나름대로 조사했어. 조사했다 해봐야 그냥 우리 사장님한테 가서 물어본 게 끝이긴 한데.”

그 말에 나는 곧바로 납득했다. 차대운의 상사라면 바로 그 흑룡 이무기였다. 정세나의 능력에 대해 대충 얘기만 해도 그게 어둑시니와 것과 동일한 성질이라 알아챌 수 있겠지.

“한때는 대단했던 괴물이라지? 어둠 그 자체라 칭송받던 최강의 요괴. 그게 활동하던 때는 요호고 뭐고 눈 마주칠 생각도 못 했다던데. 그 유해로 무기라도 만든 건가.”

“대답할 의무는 없어.”

“아니, 있겠지. 너희는 싸움을 걸고 졌으니까.”

그리고 차대운이 털어내듯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각기 다른 곳에 서있던 결계의 네 기둥이 동시에 잘려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주춧돌을 잃은 결계는 힘을 잃고 희미해져 사라졌다. 그의 신검합일인 우도할계와 같은 능력이었다.

신검합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우도할계의 능력을 쓸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신검과 동화하는 것으로 검귀가 가진 종래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신검합일이다. 제어할 수 있는 폭주. 혈통능력으로 열화된 탈선을 재현했다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순수한 탈선자는 신검합일 따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기술’을 통해 억지로 흉내낼 필요도 없이, 요괴가 입에서 불을 뿜어내듯 자연스레 힘을 쓸 수 있으니까.

신검합일은 정세나의 묵계로 틀어막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우도할계의 공략법이지 탈선의 공략법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검마가 된 차대운의 손발을 봉쇄할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차대운이 우리들에게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싸움을 걸어온 건 둘째 치고, 이건 도저히 못본 척 해줄 수가 없어. 요호의 권능을 쓰는 능력자에, 그 요호와 은밀한 거래를 나누었다는 금가. 요호의 수하였던 호환.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단서가 모이면 어린애라도 눈치채겠지.”

검마 차대운이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요호를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고, 혈왕궁을 부추겨 움직이게 만든 의문의 인물. 그게 바로 한솔이 너였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이렇게까지 손에 쥔 패를 까발려놓고 아니라 잡아떼봐야 의미가 없었다. 내 반응에 차대운은 아무리 자신이라도 놀랐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다.

“상상도 못했어. 아니, 마음속 어딘가에선 혹시 너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너무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라서 생각하자마자 지워버렸을 뿐. 그야 설마 이렇게 거대한 파문을 만들어낸 주모자가 내 동생의 학교 친구였다니.”

지금까지 차대운 앞에서 보여주었던 내 행적들도 일반적인 학생이라기에는 상당히 괴리가 있었지만, 대요괴 토벌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것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였다. 상식에서 벗어난 차대운의 상식에서 봐도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일이다.

한숨을 내쉰 차대운은 검게 물든 검을 이쪽을 향해 치켜들었다.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지만, 경계하는 대상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하지조차 않는 상대를 경계하고 있었다. 차대운이 나를 추궁했다.

“그래서, 요호를 사냥한 비밀병기는 어디 있지?”

“무슨 소리야 그게.”

“요호를 처리한 게 너희들이라는 건 자명해. 그렇다면 대요괴를 끝장낼 수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었을 텐데. 용사의 협력을 받았나? 아니면 청룡이나 백룡이라도 데려간 건가.”

“우리끼리 잡았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은 적풍회주인 진고요가 있긴 했지만, 그는 정세나를 픽업해온 택시 기사 같은 거지 실질적인 전력은 아니었다. 금예린 또한 같은 역할을 더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차대운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시치미를 떼다니. 그 여우는 우리 사장님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한 존재야. 그렇게 간단한 상대였으면 내가 진작에 토막내 죽였겠지. 과소평가할 생각은 없지만, 고작 너희들로 어떻게 요호를 잡을 수 있다는 거야.”

“내가 지휘를 잘해서.”

간단한 사실이라는 듯 대답한 내 말에 차대운이 인상을 썼다. 나는 곧이곧대로 솔직하게 알려주었을 뿐이지만, 각기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차대운 입장에서 내 말은 대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조롱처럼 들렸을 것이다.

“좋아. 이야기는 천천히 들어보도록 하지. 다행이야, 이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라면 널 죽일 수는 없게 됐으니.”

그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선 차대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악으로 물든 그 두 눈은 인간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앞에 두었을 때 보이는 그것이었다. 차대운이 천천히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유경명이 대검을 쥐고 일어나있었다.

“이상한걸···.”

차대운은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읊조렸다. 투기로 감싸여있는 산군 혼혈의 강인한 몸은, 아무리 우도의 참격이라도 쉽게 베어낼 수 없는 방어력을 자랑했다. 그렇기에 차대운은 자신의 영역 안에 발현시킨 참격을 수십 개씩 겹치고 또 겹쳐,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는 일격을 먹였을 것이다.

몸의 구조상 그렇게 당하면 자력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정신력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확실하게 전투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각도와 깊이로 철저한 계산에 따라 난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경명은 두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기로 몸을 감싸 강제로 움직이고 있는 건가?”

차대운이 흥미롭다는 듯 읊조렸다. 하지만 잘 보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유경명은 그런 섬세한 조작을 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닐뿐더러, 그의 몸을 받치고 있는 건 엄연한 두 다리였다. 유경명의 몸의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대검을 쥐고 있는 유경명의 맞은편 손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빛의 정체는 내가 아까 유경명의 손에 쥐여준 십자가였다. 적풍회의 미믹 경매에서 얻었던, 마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치유 효과를 내는 마도구. 신체를 활성시키는 그 능력은 받는 이의 기본 회복력이 뛰어날수록 큰 효과를 본다.

“다시 일어서는 투지는 대단하지만, 그걸로 상황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죽을 뿐인데.”

차대운은 콧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올렸다.

유경명과 차대운은 기본적으로 동격의 역량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혈통시대에서의 이야기였다. 요호의 아래에서 호환으로 있기를 계속해 결국 미쳐서 탈선해버렸거나, 정세나의 아래에서 그림자에 침식당해 괴물인 흑호가 되었다면 분명 모든 힘을 해방한 차대운과도 맞겨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인 채론 검마가 된 차대운을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유경명은 투기를 끌어올렸다. 한숨을 쉰 차대운이 활짝 편 손바닥을 쥐어짜듯 꽉 주먹쥐었다. 그와 함께 수많은 곳에서 동시에 발현한 압축된 참격이 유경명의 몸을 덮쳤다.

또다시 새빨간 피가 터져나가며 유경명의 몸 이곳저곳이 찢어졌다. 상처를 입은 유경명의 자세가 무너졌지만, 꿇은 것은 한쪽 무릎 뿐이었다. 이미 유경명의 몸은 빈사상태라 판단하고 필요 이상으로 과한 힘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봐준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차대운은 철저하게 이기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 ‘요호를 처리한 진짜 인물’을 계속 경계하며, 그와 싸울 때를 대비해 소모를 최대한으로 억제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인물 따위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든 전황을 정확하게 통찰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차대운이기에 그 가설을 세울 수 있었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허구의 상대에게 주의를 뺏기게 된다. 유경명이 말했다.

“···이게 끝이냐.”

유경명의 몸은 또다시 아물어가고 있었다. 차대운이 일어선 유경명을 노려보았다. 난도질해도 난도질해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산군의 몸은, 일격에 즉사시키지 않는 이상 오기로라도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차대운을 도발하고 있었다.

이내 잠깐 뭔가를 생각하던 차대운이 쯧 혀를 찼다.

“그런가. 애초에 날 이기려는 생각이 아니었어. 몇 번이고 일부러 공격을 먹어 내 힘을 빼놓으려는 수작이군.”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차대운의 보랏빛 귀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검을 들어 유경명을 가리키자, 주변에서 발현된 무형의 참격들은 몇 번이고 집속하고 압축되어 급기야 눈에 보이는 새까만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되었다.

“아무리 맷집으로 버티더라도 사지가 잘리면 더는 싸울 수 없겠지. 이 기술에 방어 같은 게 통할 거라 생각하지 마.”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것이야말로 요호의 멸옥과도 같이, 차대운을 상징하는 궁극의 기술. 우도할계의 보통 참격과는 달리 압축하는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눈에 보이기에 대응의 여지를 줘버리지만, 그 위력은 진정한 의미에서 방어불능. 직격당한다면 용이라고 해도 꼼짝없이 양단당했다.

“단월(斷月).”

검은 참격이 유경명을 향해 쇄도할 준비를 끝마쳤다. 신호를 줄 필요는 없었다. 한 순간 금예린의 등 뒤에 떠오른 것은 눈에 익은 푸른색 결계였다. 금예린의 제 1결계 장화.

우도할계를 공략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정세나의 묵계 같은 주박으로 애초에 발동하지 못하게 틀어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차대운의 능력은 신검의 결계를 펼쳐 결계의 영역 안에서 참격을 발현시키는 것.

그리고 금예린의 지니고 있는 첫 번째 결계인 장화의 능력은, 다른 결계에 접속해 기능에 간섭하는 것이었다.

“···정보 부족이라고 했었나?”

닿는 모든 것을 절단하는 새까만 참격이 궤도를 따라 날아갔다. 새빨간 피가 공중에 튀어오르고, 날아올라 철퍼덕 땅에 떨어지려는 무언가를 내가 염동력으로 붙잡았다. 새까만 검귀의 팔을 손에 든 채, 나는 차대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한테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금예린이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전해진 한쪽 어깨를 부여잡은 차대운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 청탁병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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