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탁병탄 (3) >
한쪽 팔을 잃은 차대운이 멍하니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봤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가늠하고 있는 듯 했다. 얼마 안 있어 생각을 끝낸 차대운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궤도를 바꾸는 네 능력···과는 다른 계통이군.”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그야 차대운은 전투 도중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충격에 빠질 만큼 얼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그마치 한쪽 팔이 날아간 것이다. 조금 정도는 냉정을 잃고 동요해줘도 괜찮은 것 아닌가.
되짚어보면 일어난 일은 명백했다. 유경명의 사지를 베어내기 위해 발현시킨 우도의 참격이, 멋대로 제어에서 벗어나 차대운의 왼팔을 도려냈다. 정확히 말하면 금예린이 다른 결계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으로 좌표만을 바꿔친 것이다.
검사로서 차대운은 초일류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역량을 지니고 있었지만, 주술사들의 결계전에 대해서는 초짜라 해도 좋을 만큼 무지했다. 알고 있다고 해봐야 어디까지나 검사로서 저주에 대한 대책 몇 가지를 숙지하고 있는 정도였다.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넘치지.’
차대운이 지닌 능력의 총체는 손에 든 신검이었고, 결계는 단지 좌표의 지정을 위해 펼치는 것일 뿐이었다. 딱히 결계 자체의 능력으로 뭔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주술사들처럼 결계를 조율하고 수복하는 데에 능통할 필요는 없었다.
주술사들의 싸움이란 누가 먼저 상대방의 결계를 망가뜨리냐의 싸움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형식만을 갖춘 간이 결계에 고장내고 말고를 논할 기능 따위 달려있지 않은 것이다.
금양호 정도 되는 주술사라면 억지로 남의 결계의 심부에 파고들어 깨뜨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짓을 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다른 주술사들의 결계가 복잡한 문양의 그림이라면 차대운의 것은 단순한 원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결계이기에 눈 깜짝할 사이 다시 그려내 전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결계를 매개체로 하고 있기 때문이야말로 우도할계라는 능력은 금예린의 완벽한 밥이었다.
제1결계 장화. 결계에 작용하는 결계. 같은 주술사끼리의 싸움에서 금예린이 무조건적인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이유였다. 학기 초의 둥지 수업 때 교수들만 이용할 수 있는 전이 결계를 마음대로 기동시켰던 것도 저 결계의 능력이었다.
보통의 주술사라면 전투 중에도 결계를 바쁘게 조작하고 있느라 제어권을 빼앗기고 있다는 걸 즉시 눈치챘겠지만, 신검의 이능으로 운용되는 우도할계의 가장 큰 장점은 전개의 유지에 자신이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한 장점이 역으로 독이 되어, 설마 누군가가 참격의 좌표 자체를 바꿔쳐버릴 거라고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전투에 있어서 검귀의 직감은 정말로 귀신이 들린 수준이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황을 읽어내서 느끼는 것이다. 예측할 수 있는 판단 근거를 하나도 내어주지 않았다면 확실하게 불의의 기습을 넣을 수 있었고, 실제로 성공했다.
즉 차대운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자신의 공격 궤도를 비틀었다면 당연히 내 짓이라 생각하는 게 맞았다. 일부러 싸우기 전에 차대운 앞에서 의식 동화를 과시하듯 보여준 건 그리 착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차대운은 오로지 작은 위화감만으로 방금 것이 전혀 별개의 능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미 직접 결계 안에 간섭한 마력의 흔적을 더듬어 검증까지 끝냈겠지. 내 능력이었다는 허세가 통했다면 여러 가지로 편해졌을 텐데.
나는 반쯤 따지고 싶은 기분으로 차대운에게 말했다.
“···팔이 잘렸는데 왜 그렇게 침착한 건데?”
“뭐, 탈선자는 팔 한 짝 정도 몇 년 회복에 전념하면 재생시킬 수 있으니. 그래도 이래서야 바깥에 나가지는 못하겠는걸. 잘린 팔이 다시 자라나면 다들 이상하게 볼 테니까.”
이내 차대운이 조용히 신검의 결계를 거두었다. 참격을 역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계속 전개하고 있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만큼 차대운의 공격력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도 위협적이었다.
“우도할계를 펼치지 못하도록 틀어막던 움직임 모두가, 우도할계만 펼치면 이길 수 있단 인식을 나에게 심어주려던 속셈이었나? 가장 결정적인 순간 공격을 왜곡시키기 위해.”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제일 좋은 건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 차대운이 순순히 항복해 물러나주는 거였고, 금예린의 장화는 만일 기어이 검마까지 되어 우도할계를 펼쳤을 때를 위한 대비책일 뿐이었다. 굳이 패를 소모할 이유는 없으니.
하지만 차대운은 언뜻 보면 담백한 성격 같으면서도 승부처에선 의외로 집착이 강했다. 탈선자답다 할 수 있었다. 그가 자기 어깨에 손을 갖다대자 절단면의 피가 뚝 멎었다. 이 정도 부상은 싸움을 그만둘 이유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대단한 도박수를 걸어주잖아. 내 능력을 정말로 조작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실전에서 직접 시도해보기 전엔 몰랐을 텐데, 그걸 건곤일척의 상황까지 참고서 아껴두다니. 하기야 그 나이면 목숨 한두 번 걸 배짱쯤은 있는 게 당연한가.”
차대운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목숨을 걸 배짱은 무슨. 금예린의 장화가 우도할계의 결계에도 통용된다는 사실은 이미 몇 번이고 검토를 마친 뒤였다. 방에 틀어박혀 게임할 때 말이다. 내 표정을 본 차대운이 입꼬리를 올렸다.
“반 정도는 놀아주는 기분이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몰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너희 또래가 벌써 이 정도 수준이라면 엽이가 맨 위에 설 수 있을지 조금 불안해지는걸.”
차대운이 우리 세대를 고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뒤에서 깐죽거릴 줄만 아는 나는 제쳐두고라도, 요호의 유해를 무기로 이어받은 금예린과, 어둑시니의 권능을 계승받은 정세나. 한정 탈선을 개화하기 시작한 진소란까지 보았으니.
‘실제로 무지막지하긴 하지.’
세한의 1학년은 아직 미숙하지만 잠재능력을 전부 드러내면 혈통시대의 균형을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는 괴물들 천지였다. 지금 여기 서있는 금예린을 포함해, 주하리나 은세연 같은 녀석들은 이미 학생 수준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차대엽이 뒤처지게 될 거라는 생각 따위는 요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야 그 녀석은 혈통시대의 주인공인 것이다. 단언하건대 순수한 재능으로 차대엽의 위에 설 수 있는 혼혈 따위 같은 세대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동생 걱정은 할 필요 없어. 결국 그 녀석은 당신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질 테니까. 내가 도와준다면 그게 조금 더 빨라질 테고, 도와주지 않아도 그렇게 되겠지. 알고 있잖아?”
“그래···. 그렇겠지.”
답지 않은 말을 했다는 듯 차대운이 목을 만졌다.
“아무튼 정말 놀랐어. 이렇게 되니 너희끼리 요호를 토벌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소리도 어쩌면 사실일지 모르겠는걸.”
“그러니까 진짜라니까.”
“하지만 유감이다. 방금 걸로 나를 죽이지 못해서.”
차대운이 정말로 아쉽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우도를 치켜들었다. 왼팔을 베인 건 당연히 커다란 손상이었지만, 차대운은 약화되었을지언정 얼마든지 계속 싸울 수 있었다. 반면 유경명에겐 이미 차대운을 쓰러뜨릴 만한 여력이 없었다.
아무리 마도구로 상처 부위를 치료했다 해도 생명력 그 자체가 복구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강제로 몸을 재생시킬 때마다 지쳐있는 몸을 채찍질하는 꼴이었다. 그런데도 몇 번이고 빈사상태에서 회복한 건 유경명의 끝없는 체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고, 유경명은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고 말고 이전에 한계에 가깝도록 지쳐있었다. 몸을 감싸듯이 불타고 있는 투기 또한 눈에 띄게 약해져있었다.
차대운이라면 우도만 들고서도 충분히 끝장낼 수 있다. 어린애 장난에 조금 데인 수준이라면 몰라도, 자기 목에까지 송곳니가 닿는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리 간단히 놓아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어둡게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죽이지 못했다니 무슨 헛소리야.”
섬뜩한 눈동자로 웃으며 말한 것은 정세나였다. 들끓는 그림자를 휘감고 있는 등 뒤에서, 짙은 어둠이 뭉친 거대한 손바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전대 어둑시니가 이끌던 백귀야행 중에서도 그의 오른팔이었던 요괴. 딸깍발이의 손이었다.
“일부러 안 끝낸 게 당연하지. 저번에 그런 치욕을 당했는데, 질질 짤 때까지 쥐어패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리잖아.”
요호 전에서 결국 꺼내지 않았던 정세나의 비장의 수. 이내 정세나가 상처투성이인 유경명 옆에 걸어가 팔꿈치로 그 옆구리를 툭툭 쳤다. 유경명이 아픈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 아저씨는 이래봬도 내 교사거든? 식객으로 신세까지 지고 있는데, 아저씨를 괴롭힌 복수는 해줘야겠지.”
“딱히 괴롭힘을 당하진 않았다.”
“괴롭힘 받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말하지.”
정세나가 다 안다는 듯 인자한 표정으로 유경명을 바라보았다. 이내 한숨을 쉬며 투기를 갈무리한 그가 금양호에게 눈짓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장로는 손바닥 위에서 주술을 전개했고, 다음 순간 그 손 위에 가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요호가 수족을 위해 만든 절품인 호환의 가면을 금양호가 고쳐 개량한 것이었다. 가면을 건네받은 유경명이 그것을 얼굴에 덮어쓴 순간, 그의 주변에서 맴도는 분위기가 일변했다. 자신보다 훨씬 강대한 상대라도 어떻게든 쓰러뜨려 그 목을 참수한 흉악한 사냥꾼, 호환의 위압 바로 그것이었다.
“···전력이란 건 늦게 내는 쪽이 이긴단 거지.”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와, 불꽃처럼 흩날리는 투기. 비로소 모든 패를 드러내 승부수를 던진 둘이 차대운 앞에 섰다.
정세나와 유경명 둘 다 각각은 탈선한 차대운을 이길 수 없었다. 차대운이 만전의 상태였다면 2대 1로 싸운다 해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요괴의 오른팔, 백귀야행의 2인자 급인 강자가 둘. 사지 하나를 잃은 반쪽짜리 검마를 상대하기엔 충분하고도 넘치는 전력이었다.
차대운의 눈동자가 순간 살짝 돌아갔다.
“흡···!”
콰앙! 땅을 박차고 터져나간 유경명의 대검이 차대운의 코앞에 내리쳐졌다. 요호가 남기고 간 주구. 얼굴을 덮은 가면은 그가 얼마나 상처입든 만전으로 싸울 수 있도록 해준다. 내리쳐진 검격의 위력은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욱 강렬했다.
우도를 치켜들어 유경명의 공격을 받아낸 차대운이 대검의 무게를 버텨내며 저편을 바라보았다. 뒤쪽에서는 팔짱을 낀 정세나가 공격에 나서지 않고 차대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신중히 상황을 살피는 냉정함이 아니라. 힘이 빠진 빈틈을 노려 철저하게 괴롭혀주겠다는 가학적인 태도였다.
“아직 이 애를 몸에 두르고 싸우는 건 익숙하지 않거든. 힘조절이 안 될 수도 있으니 시시하게 죽지는 말아줘?”
차대운은 순식간에 전황을 이해했다. 유경명의 검을 떨쳐내며 뒤로 뛰어 거리를 벌린 그는, 몸을 감싸고 있던 칠흑빛의 금속을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신검을 앞에 던져 떨어뜨린 차대운이 말했다.
“항복이야. 목숨만은 살려줘.”
“재미있는 말을 하네. 그런 헛소리를 들어줄···.”
정세나가 섬뜩하게 웃었다. 요 몇 달간 저걸 어떻게 갖고 놀아줄지만 생각해왔다는 듯한 미소였다. 들끓는 그림자가 공격하려는 순간, 나는 한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겨우 저쪽에서 포기해줬는데 굳이 벌집을 쑤실 필요는 없었다.
‘더 몰아붙이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무엇보다 상대는 그 차대운이었다. 나는 혈통시대의 적들 대부분의 능력과 전략을 미리 파악하고 있다. 준비만 갖춰진다면 이쪽이 승리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우위를 잡는 건 간단했지만, 정말로 두려운 건 오히려 그 다음의 일이었다.
사람은 보통 궁지에 빠지면 이상한 짓을 한다. 특히 검귀란 인종들은 하나같이 전투에 있어 이질적인 센스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상상도 못한 발악으로 상황을 기어이 뒤집어낼 가능성도 작게나마 있었다. 나는 정세나를 돌아보았다.
“싸울 때는 무조건 내 지시에 따른다. 대신 반드시 이겨준다. 그런 약속이었지? 난 약속을 지켰어. 네 차례야.”
“저거 아직 멀쩡하잖아! 우리 아저씨는 피떡이 됐다고!”
유경명을 삿대질한 정세나의 말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팔 한짝이 날아간 상대에게 멀쩡하다는 표현을 쓴다면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을 땐 대체 어떤 상태가 되는 건지 짐작도 안 갔다. 나는 염동력으로 금양호에게 차대운의 팔을 전달했다.
“중요한 거니까 잘 보관해줘.”
금양호의 처리는 신속했다. 그가 술식으로 차대운의 팔을 감싸자, 각인이 새겨져있는 붕대가 팔 전체를 둘러싸며 감더니, 나타난 부적 수십 장이 그 위에 달라붙어 봉인을 마무리했다. 지켜본 나는 날 바라보는 차대운과 눈을 마주쳤다.
“기습한 것 같은 모양새가 돼서 미안하지만, 이긴 건 이긴 거니까. 당신 신병은 당분간 이쪽에서 맡도록 하곘어.”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라 말할 상황이지만, 그게 끝인가? 뭔가 더 요구사항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내 말에 차대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납득이 가는 반응이었다. 차대운을 정면에서 제압한다는 말도 안 되게 수고가 들어가는 일을 이리 급하게 억지로 진행해놓고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물론 차대운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게 있었다. 앞으로 걸어간 나는 염동력으로 그의 안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핸드폰을 낚아챈 나는 화면을 바라보며 염력을 조작했다.
<마인드맵 확장 : 사이코메트리 Lv.5>
이제 와선 이런 기본적인 수준의 응용 능력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할 필요도 없었다. 접촉한 사물에 기록된 풍경이 내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나는 손가락으로 슥슥 화면의 잠금을 풀었다. 이내 가족이 찍힌 배경화면이 나타났다.
“응? 어떻게 패턴을···.”
“척 보면 척이지.”
나는 휘파람을 불며 전화부를 확인해보았다. 내가 원하는 정보는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누르자마자 눈에 띄었다.
[ 사장님 – 최근 통화 4건 ]
바야흐로 대요괴의 연락처를 얻게 된 순간이었다.
< 청탁병탄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