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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89화 (89/113)

< 청탁병탄 (4) >

전투가 끝난 뒤의 황야는 대단히 조용했다.

나는 붉은 밧줄로 꽁꽁 매인 나무 상자를 손등으로 퉁퉁 두드렸다. 상자 안엔 금양호가 정성 들여 봉인한 차대운의 한쪽 팔이 들어있었다. 주술적 구속이 되어있는 상자는 잘못된 방법으로 열려고 하면 내용물을 태워버리게 되어있었다.

“이건 담보야. 팔을 통째로 재생시키는 데에는 몇 년을 들여야 해도, 깔끔히 잘린 걸 접합시킬 뿐이라면 일주일도 안 걸리겠지. 잘 보관하고 있을 테니 소중한 팔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어줘. 가끔 심부름도 좀 해주고.”

내 말에 차대운은 불만 없다는 듯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멀리 떨어져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정세나는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단단히 팔짱을 낀 채였다. 금예린과 금양호는 결계를 펴고 귀환을 위한 술식의 조형을 시작했다.

이내 자기 팔이 든 상자를 힐끗 본 차대운이 말했다.

“담보 치곤 약한걸. 몇 년 정도는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는 건데. 반드시 네 말을 듣게 할 강제력이 그다지 없어.”

그 말에 나는 신경쓰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까? 나라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잘 텐데. 이제부터 있을 사건들에 팔 하나가 없어서 앞에 나서지 못한다면.”

그러자 차대운이 진지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차대엽 그 녀석은 싸울 때 눈치는 귀신 같아도 평소에 분위기를 읽는 능력은 좀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형인 차대운은 그 신들린 칼솜씨 만큼이나 머리 회전과 수완 또한 비상했다.

그런 그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전에 없었던 재능들이 같은 세대에 불가사의할 만큼 동시에 나타나고, 오랜 세월 멈춰있던 국면이 급격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격동의 시기가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이득과 손해를 잘 생각하라고. 당신은 합리적이잖아.”

내가 목조 상자에 툭 걸터앉자, 차대운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시선은 쭈욱 내가 앉은 상자에 고정되어있었다. 뭐 이게 부서지기라도 할까봐 걱정하는 건가? 아니면 잘못해서 안에 든 자기 팔이 불타버릴까봐? 전혀 걱정할 필요 없었다. 금양호의 봉인궤는 그렇게 허술하게 되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든 차대운이 날 바라보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뭐야?”

“너는 내 가장 큰 약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나를 쓰러뜨리고 싶었다면, 왜 가족을 인질로 삼지 않았지? 한솔이 넌 마력을 완벽하게 지울 수 있잖아. 기습해 인질을 잡으면 나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질문을 건넨 차대운의 눈동자는 진지했다. 비겁한 수단은 쓰기 싫어서, 따위의 같잖은 변명은 대지 말란 듯한 눈동자였다. 나는 결과적으로 양해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치사한 술수를 쓸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차대운도 알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이번엔 내가 인상을 씨푸렸다. 머리가 좋은 차대운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나는 아주 간결하고 명확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난 기습해도 차대엽 못 이겨.”

“그런 얘기가 아니야. 예를 들어 어머니를···.”

“그럼 차대엽이 날 박살내잖아.”

안전 제일주의자인 내게 그 선택지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적대하면 안 될 녀석과 적대해버리게 된다. 내 말에 차대운은 잠깐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이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과연 그렇다고 납득한 미소였다.

“그런가. 하기야 그렇겠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차대운이 옷의 먼지를 털었다.

“그렇다면 나도 이미 인질을 잡힌 셈이군. 내가 한솔이 널 처리한다고 해도 대엽이는 아마 비슷한 반응을 보일 테니. 알아버린 이상 너한테 손을 댈 수가 없게 돼버렸어.”

“걱정 붙들어 매셔. 나한테 손을 대든 안 대든 차대엽이 댁보다 강해지는 순간 아마 죽어라 맞게 될 테니까.”

전대 검성을 실종시킨 범인이 누군지 모른 체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에는 차대엽에게 알려줄 수밖에 없겠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적당한 타이밍을 모색해야겠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차대운의 핸드폰을 살펴보았다. 프라이버시를 엿볼 생각 따위 애초에 없었지만, 뒤쪽의 업무용으로 쓰는 전화이기에 대부분 일에 관련된 내용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사진첩을 훑어보며 차대운에게 말했다.

“당신을 인질로 흑룡이랑 협상을 좀 해야겠어. 같은 대요괴라면 당연히 두억시니의 정보도 파악하고 있겠지.”

“두억시니? 그 위험한 놈은 왜.”

“누가 먼저 찾을지 좀 높으신 분이랑 내기를 해서.”

허둥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혈왕궁은 두억시니를 수색하기 위해 온갖 곳을 뒤지며 움직이고 있을 것이고, 조금 뒤 2학기가 시작되면 나는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상당히 제한되어버린다. 차대운이 흥미롭다는 듯 질문했다.

“요호로는 모자라서 두억시니까지 사냥할 생각인가?”

“상관도 없는 요괴보단 흑룡 걱정을 하는 게 좋지 않나.”

옆에서 대검을 닦고 있던 유경명이 끼어들며 말했다. 확실히 나는 요호와 두억시니 뿐만 아니라 대요괴 전원을 위협이 되지 않도록 정리할 생각이었고, 그것은 흑룡 밑에서 일하고 있는 차대운의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은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차대운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인간은 딱히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굳건한 신뢰가 내비치는 얼굴이었다. 차대운은 그 작자 걱정을 하는 게 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일이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야말로 상관이 없는 문제야. 너희들이 사장님을 쓰러뜨리겠다고 무슨 짓을 꾸미든 나는 아무런 방해도 안 할 거야. 만에 하나라도 질 일 없으니까. 사장님에 비하면 나 같은 건 약골이라고. 일 시키기 편하니까 부려먹힐 뿐이지.”

담담한 어조로 내뱉어진 말은 너무 허무맹랑한 탓에 값싼 위협이나 허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차대운이 약골이라니 과장이 심하다 생각하겠지만, 그게 정말 과장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역대 최강의 용족으로서 탈선한 흑룡은 자연스럽게 역대 최강의 탈선자가 되었고, 자신을 제외한 적룡, 청룡, 백룡의 세 용기사와 3대 1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괴물이었다. 정면에서 싸운다면 그 요호를 일방적으로 짓이길 수 있었다.

“정말 그 정도라고?”

“불가능하단 표현은 웬만해서 쓰고 싶지 않은데. 지금 여기 인원으론 기적이 두 자릿수로 일어나도 못 이길걸.”

나는 솔직하게 내 의견을 털어놓았다. 문제는 흑룡 본인의 압도적인 강함뿐만이 아니었다. 차대운과 같이 흑룡 휘하에 있는 자들 또한 탈선자였고, 하나하나가 기사들처럼 자신만의 기술을 갈고 닦은 베테랑들이었다. 그저 강력하기만 할 뿐인 다른 백귀야행의 산하 요괴들과는 그 성질이 달랐다.

애초에 뒤쪽에서 나오려 들지 않는 다른 대요괴들과 달리 흑룡 이무기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전력을 꾸준히 강화시키고 있었다. 온갖 위험한 사업을 하는 것이나, 유해 무기의 유사품을 제작하려는 것 같은 시도들 또한 그 일환이었다.

차대운의 핸드폰엔 그런 업무 현황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었다. 자료들을 보면 볼수록 지금 싸워서는 안 되겠다는 확신만 강해져갔다. 그러다 나는 우뚝 손가락을 멈췄다. 그곳엔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청룡, 청시아의 사진이 찍혀있었다.

“뭐야 이거?”

나는 눈썹을 확 찌푸리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건 청룡이었다.

혈통시대의 원래 시나리오에선 이런 사건이 일어난 적 없었다, 따위의 멍청한 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1학년이 끝나기도 전에 요호를 퇴장시킨 시점에서 이미 국면은 달라질 대로 달라져있었고, 변해가는 상황에 맞추어 움직일 자신이 있기에 나는 빠르게 눈덩이를 굴리자고 결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대단히 당황스러웠다. 청시아는 기본적으로 백룡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고, 흑룡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존재인지 아는 백룡은 결코 섣불리 싸움을 걸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왜 청룡이 혼자 쳐들어가 쓰러져있는 것인가.

‘일 대 일이면 할 만하다고 생각한 건가?’

대대로 자리를 계승받는 용기사들은 역대 계승자들이 공유하는 지식 또한 이어받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다른 용들의 능력이 무엇인지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청룡의 능력 육근청정은 흑룡의 거의 모든 기술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

그런 지식에 기대 청룡이 단신으로 이무기 공략에 나선 거라면, 정말 안일했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한계를 넘어 탈선한 시점에서 평범한 용들과는 한 단계 떨어진 셈인데, 이번 대의 흑룡은 탈선하기 전부터 역대 최강이었다.

“상황이 바뀌었어.”

기껏 차대운을 제압했으니 이 포로를 이용해먹을 만큼 이용해먹다 풀어주려 했지만, 지금 당장 인질 교환을 해야 할 판이었다. 돌발 상황에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난 오히려 안도의 기분을 느꼈다. 지금 알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이 문제를 그냥 방치해뒀었다간 최악의 결과가 찾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내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누른 연락처는 같은 반 친구의 것이었다. 성실한 반장답게 주하리는 신호가 가자마자 곧장 받았다.

<여보세요? 아, 한솔아. 미안한데 지금 손님이···.>

“백룡이지?”

전화기 맞은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야 청룡이 흑룡에게 박살이 나 구금되는 사태를 알아챘다면, 엉덩이가 무거우신 백룡 님도 헐레벌떡 일어나 당장 동료에게 협력을 요구하겠지. 나는 당황한 주하리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잠깐만 그 양반 좀 바꿔줘.”

흑룡한테 가는 길에 좀 끼워달라 할 생각이었다.

* * *

학장은 깍지를 낀 채 맞은편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차 맛은 어떤가? 이번엔 조금 싱겁게 탔네만.”

세한기전의 응접실 안.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검은 갑주의 기사가 테이블 위의 찻잔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시원해보이는 투명한 액체는 찻잔 밑바닥의 무늬를 그대로 예쁘게 비추고 있었다. 검은 기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검은 기사와 눈을 마주쳐도 학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숙인 기사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건 물이군요.”

“그런 이름으로도 불리는 차지.”

“정확히는, 수돗물을 틀어 컵에 받았을 뿐이군요.”

“그런 방식으로도 마시는 차지.”

무뚝뚝하게 대답한 학장의 말에 갑주를 입은 기사는 테이블 위의 잔에 손을 가져가더니, 입에 대고 차가운 물을 꿀꺽꿀꺽 전부 마시기 시작했다. 비워진 잔을 다시 테이블에 돌려놓은 기사가 예의 바른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잘 마셨습니다. 그럼 이제 본제에 들어가도록 할까요.”

“그렇군. 본제, 할 이야기 없으니 돌아가게나.”

작은 체구의 학장 또한 인자한 미소를 짓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기사의 명성을 고려하면 아무리 천년서생이라도 이렇게 홀대할 만한 손님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기사는 마왕 직속 집행부대 흑기사단의 단장.

마왕이 손에 쥔 무기들 중 가장 날카로운 검이자, 기사로서 정점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학장은 관심 없다는 듯이 자신의 따뜻한 찻잔을 홀짝였다.

“애초에 부탁을 하고 싶다면 최소한 그 녀석이 스스로 오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지. 자네처럼 성실한 친구를 보내면 최소한 곰방대로 후드려패진 못할 거라 생각한 건가?”

“···마왕님은 최근 공사가 다망하셔서 시간을 내기 힘드실 뿐입니다. 최근 들어 큰 이변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기에. 결코 대선배이신 천년서생 님께 무례를 범하려고 한 건.”

“뭐, 그놈이 직접 와도 대답은 변함 없네. 안 돼.”

흑기사단장의 요구는 간단했다. 마왕성에 상담역으로 와달라는 것. 세한기전의 학장이 아니라, 까마득한 옛 시절 혹한으로 군림한 전대 마왕이자 마도의 극치에 달하였다 칭송받는 대마도사 천년서생에게 그 지혜를 빌려달란 것이었다.

애초에 마왕성은 이전에 그녀 또한 거주하던 건물이었고, 전대들에겐 원로로서 언제나 성을 드나들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에 지금 그녀가 돌아온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천년서생 님께서 현자의 눈으로 한 번 살펴봐주신다면, 마왕님의 어깨에 걸려있는 부담도 눈 녹듯이 사라질 겁니다. 며칠 만이라도 좋으니, 부디 이 혼란스러운 시국을 진정시키는 데에 조그마한 도움을 보태주신다 생각하고···.”

“흑기사단장.”

“예.”

“또 다시 오면 차가운 수돗물 정도론 안 끝날 거네.”

천년서생이 웃으며 작은 손바닥을 흔들고,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응접실 안에서 검은 기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세한기전을 지배하고 있는 마법에 의한 강제적인 퇴거였다. 지금쯤 기사는 캠퍼스 정문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있을 것이다.

이내 응접실 문을 닫고 나온 천년서생이 말했다.

“···부담을 느끼나? 자네 때문에 거절한 거라고.”

자그마치 마왕의 제안이었다. 천년서생의 물음에, 학장실 소파에 앉아있던 학생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말했다.

“흐름이 끊겨서 짜증날 뿐이예요.”

“하하! 그렇군. 확실히 그래.”

그리고 천년서생은 손끝에서 마력을 세공하며 다시금 제자의 지도를 시작했다. 앉아있는 학생 또한 그에 공명했다.

사실 이 지도는 학장 스스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 두 1학년생, 송한솔과 차대엽의 경쟁 상대를 만들기 위해 제안한 것이었다. 그들의 경쟁 상대를 강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그들 또한 그걸 넘어서 더욱 빛나게 개화할 테니까.

하지만 이제 와선 정반대였다. 세한기전의 학장이 아니라 한 명의 마법사 천년서생으로서 진심으로 덤비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학생이 마법을 흡수하는 속도는 이질적이었다. 자신도 쉽게 제어할 수 없는 비장의 마도조차 멋대로 익혔다.

“너무 초조해하지 말게. 왕관은 이미 자네의 손 위에 있어. 이 모든 기술들을 나 이상의 자질을 지닌 자네가 계승한다면···그 어떤 천재라 해도 자네의 적수가 되지 못할 걸세.”

미소지은 천년서생이 앉아있는 학생, 유매의 어깨를 잡고 속삭였다. 세공된 마력이 나비가 되어 펄럭이며 날아갔다.

< 청탁병탄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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