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90화 (90/113)

< 흑룡동 (1) >

금가의 두 사람이 본가에 돌아간 뒤, 남은 일행은 인질이 된 차대운과 함께 유경명의 집에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있는 차대운의 어깨에 나리가 케이프 같은 코트를 걸쳐주었다.

“고맙습니다, 꼬마 아가씨.”

“나리한테 말 걸지 마.”

차대운이 웃으며 고맙다 인사하자,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정세나가 눈을 부라렸다. 일단 겉옷을 덮어놓으니 한쪽 팔을 잃어버린 게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내 차대운이 당분간 집에 돌아가는 게 힘들 것 같다는 연락을 넣었다.

“뭔가 미안한데.”

“뭐, 장남이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면 어머니가 깜짝 놀라실 테니. 팔을 돌려받을 때까진 일이 바쁘다 둘러대야지.”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패배한 자신의 책임이니 어쩔 수 없단 얼굴이었다. 차대운은 흑룡이 전쟁을 벌이던 중에도 주말엔 꼬박꼬박 집에 들린 인간이다. 어쩌면 외팔이가 된 것보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걸 더 서운해할 수도 있었다.

“소중한 인질 님이니 너무 괴롭히지 말고···.”

“뭐야 오빠, 혹시 나 보고 하는 소리야?”

그럼 댁 말고 누가 있겠어요. 나는 정세나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신발장에 걸터앉았다. 작은 날개가 달린 캔버스화의 끈을 꽉 묶고, 바닥에 발끝을 툭툭 두드린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내게 팔짱을 끼고 서있던 유경명이 말을 건넸다.

“정말 내가 따라가지 않아도 되겠나.”

“대화하러 가는 것 뿐인데 뭐. 그리고 동행할 녀석들도 만만치 않아. 아저씨는 그동안 연구소 쪽을 조사해줘.”

나는 슬쩍 눈을 돌려 나리를 바라보았다. 저 애를 맡고 있던 조직에 실험체를 넘겨주고 있었던 연구소. 자세빈의 말에 따르면 비밀스럽게 후원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몸을 젊게 해준다거나 하는 수상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혈을 연구하는 기관으로서 당당히 권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연결되어있는 것은 대요괴 두억시니였다. 이 상황에서 파고들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는 셈이었다.

혈왕궁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두억시니를 수색하고 있는 이상, 얼마나 연구소와 그 관련 기관을 휘저어대도 두억시니 자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연구소에도 나름대로 진상을 숨기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해두었겠지만, 유경명은 그런 뒤가 구린 곳의 냄새를 맡고 조사하는 것의 프로였다.

‘고작 둘이서 요호의 정체를 캐냈을 정도니.’

그리고 유경명이 본격적으로 필드워크에 나선다면 적풍회 또한 자연스레 그를 도와줄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적풍회는 진고요가 유경명을 보조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니까. 대검의 칼자루를 주먹을 꽉 쥔 유경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얌전히 조사하기만 해도 괜찮은 건가?”

“조사 정도면 충분하지. 다만, 호걸의 방식으로.”

내 말에 유경명이 전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난폭하지 않은 방식 자체를 모르는 사내인 것이다.

“나도 도와줄게.”

검은색 빵모자를 눌러쓴 정세나가 말했다. 나는 솔직하게 놀라서 고개를 돌아보았다. 내 인상으로 정세나는 좀 더 겉돌고, 남의 사정에 휘둘리기 싫어하는 인상이었던 것이다. 눈을 마주친 정세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슨 반응이야 그건.”

“아니, 남 일엔 굳이 안 끼어드는 주의 아니었나.”

“나라도 상처받거든? 애초에 남이 아니잖아. 우리 귀여운 나리를 괴롭힌 녀석들은 전부 그림자에 처넣어주겠어.”

“세나 언니는 착해.”

“맞아!”

나리의 말에 정세나가 활짝 웃으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이내 그림자에서 뻗어나온 수많은 손들이 아이를 천장 가까이 치켜들어 비행기를 해주었지만 나리는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둘이 벌써 그렇게까지 친해진 줄은 몰랐다.

“아, 맞아. 이거.”

콧숨을 내쉰 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하자, 마지막으로 차대운이 나를 불러세웠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뭔가를 던졌다. 손바닥으로 툭 잡아보니 그건 키태그 형태의 열쇠였다.

“손님이고 뭐고 우리 사장님은 성격이 나빠서 아마 문을 열어주지 않을 테니까. 여차할 땐 그걸로 열고 들어가.”

이런 걸 저쪽에서 건네주다니 정말로 흑룡이 다칠 거란 생각은 요만큼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은 난 거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브이사인을 보내고 문을 열었다.

* * *

주하리와 약속한 장소는 세한기전의 캠퍼스 근처, 인적이 없는 뒷골목의 공터였다. 이전에 주하리가 불꽃의 발작에 힘들어할 때 도와주었던 곳이기도 했다. 나는 붉은 돌담 위에 걸터앉아 상태창을 띄워 진전된 내용들을 확인해보았다.

<퀘스트 완료 : 탈선자 차대운을 제압하였습니다.>

<보상 : 100,000 Credit, 마인드맵 개척 – 염사 Lv.1, 마인드맵 개척 - 의식 세공 Lv.1, 시스템 접근 권한 Lv.3>

“아니 잠깐만.”

나는 손가락으로 눈앞의 화면을 툭툭 건드렸다. 퀘스트가 완료된 건 좋은데 보상 중 하나인 접근 권한은 이미 요호를 빨리 땡겨잡아 올라간 뒤였다. 이제 와서 같은 보상을 줘봤자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다. 나는 불평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있는 보상은 뭐 다른 걸로 바꿔서 못 주나?”

그냥 한 번 꺼내본 말이었지만,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시스템에 쓰여 있던 문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시스템 접근 권한이라는 내용은 흩어지듯 사라지더니 5만 크레딧이 추가로 정산되어있었다. 나는 심각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다. 방금 눈앞에 있는 시스템창은 내가 말한 요구를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보상을 바꿔주었다. 하지만 이게 진짜 되네, 하고 기뻐할 마음은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나는 정색하고서 시스템창을 경계해 바라보았다.

사실 위화감은 이전부터 있었다. 시스템 창의 퀘스트는 혈통시대에 있던 시나리오를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내 행적에 따라 그에 맞춰 그때그때 형편 좋은 내용의 과제를 건네주었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이전까지는 염력을 개발하는 시스템창이니 내 정신과 연동이 되어있나 보다, 하고 그러려니 넘겼지만 방금 일어난 일은 전혀 달랐다. 내가 입으로 꺼낸 말에 협상하듯이 보상 내용을 바꿔주었다. 명백한 타인의 존재가 저 너머에 느껴졌다.

“누구야, 너.”

나는 상태창에 대고 말을 걸어봤지만 당연하게도 무기질적인 화면 너머에서 대답 따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겼다. 무슨 목적으로 이런 장난을 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정체에 대해서는 대강 짚이는 바가 있었다.

나를 이 세계에 떨어뜨린 녀석이다.

평소 나를 엿먹인 범인을 찾는다면 반드시 흠씬 두들겨 패주겠다 생각해왔지만, 드디어 단서를 잡았는데도 그다지 흥분되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염력을 운용하면서 내 스스로의 정신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혈통시대의 운영자 같은 거냐?”

나는 시스템창에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보았다.

“아니면 신이나 뭐 그런 건가? 게임 마스터? 뭔지는 몰라도 이제 와서 나만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달라고는 안 해. 세상이 멸망할 거 뻔히 아는데 다른 애들 두고 도망칠 만큼 매정한 놈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모습을 좀 드러내 봐.”

사실 할 수 있는 걸 다 했는데도 결국 답이 없다면 도망치려 들긴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앞에 떠올라있는 시스템창에 계속 말을 걸었다.

하지만 결국 한 번의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고, 화면에 쓰인 내용이 변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똥 씹은 표정으로 담담히 상태창에 중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대체 어떻게 해야 내 앞에 귀하의 비싼 낯짝을 드러내실 거냐 물어보았을 때, 비로소 눈앞에 알림창 하나가 띠링 소리를 내며 떠올랐다.

<시나리오 퀘스트 : 대요괴 구축>

<활동중인 모든 대요괴를 무력화시키시오.>

<대상 : 요호 (1/1), 두억시니 (0/1), 불가살이 (0/1), 이무기 (0/1)>

<보상 : 시스템 접근 권한 Lv.4>

“하···.”

그래. 결국에는 이렇단 말이지.

너랑 이야기할 생각은 없고 답을 얻고 싶으면 퀘스트나 깨라. 아주 상쾌할 정도로 심플한 태도였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나머지 한쪽 손의 중지도 상태창에 치켜들었다.

“솔이! 나쁜 짓!”

그리고 등 뒤에서 누군가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아보니 나를 삿대질하고 있는 건 기타 케이스를 연상시키는 관을 등에 매고 있는 은세연이었다. 옆에서는 주하리가 말리려고 했는데 억지로 따라왔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상태창에 대고 화풀이라니, 그거 참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못난 놈이구나. 자기 재능에 절망이라도 하고 있었나?”

그리고 두 사람의 뒤에서 뒷짐을 진 채 걸어온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여자였다. 수묵화처럼 멋들어진 형태의 작은 구름들을 주변에 두른 채, 양 뺨에는 백색의 비늘이 솟아나있다. 그녀야말로 현 용기사들의 수장 백룡이었다.

담장 위에 앉은 내 얼굴을 훑어본 백룡이 말했다.

“너같은 꼬맹이가 흑룡과 직접 협상하겠다니 기가 차는군. 청룡을 돌려받아주겠다고? 뭘 대가로 내밀겠다는 거냐.”

“이쪽 인질은 검마야. 교환조건으로는 충분하겠지.”

내 말에 백룡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검마는 흑룡 휘하의 탈선자들 중에서도 최강이자 용의 비늘조차 일검에 갈라낼 수 있는 흉악한 적이었으니까. 나는 염동력으로 둥실 떠올라 바닥에 착지했다.

“주하리랑 둘이 가서 싸워봤자 한참 불리한 건 알지? 여기선 일단 나한테 맡겨주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는데.”

“정말 검마를 잡았나. 너로는 불가능할 텐데.”

“혼자 못 이기면 같이 싸우면 되는 거지. 동료의 힘 몰라? 당신이라면 알 수 있잖아. 거짓말인지 아닌지 정도는.”

그 말에 백룡이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조금쯤은 이쪽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기 시작한 듯 했다.

“···흑룡동에 들어갈 수단은 있나?”

백룡이 나에게 질문했다. 질문이라고 하지만 반쯤은 정말 흑룡에 대해 조사가 되어있는 건지 떠보는 것에 가까웠다.

흑룡동(黑龍洞).

무법지대, 이면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곳. 흑룡 이무기가 대요괴로서 다스리고 있는 영역이었다. 바깥 세상과 반쯤 격리된 채, 그들만의 규칙으로 살아가고 있는 무법자들의 도시. 유일하게 탈선자들을 받아들이는 곳이기도 했다.

폭력이 지배하는 영역이란 이름답게, 본 적 없는 침입자가 흑룡동에 들어가면 즉시 배제당한다. 외부인이 마음대로 출입했다간 혼란이 일어난다 따위의 명분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비호해주는 세력이 없는 만만한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흑룡동 내부의 세력이 바깥과 교류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전이 결계인 ‘쥐구멍’의 정보는 귀중하다. 그곳을 이용해 출입하는 인간들을 공격하는 건 해당 세력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검마의 쥐구멍 루트를 알아.”

사실 딱히 차대운에게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건 말 그대로 흑룡동의 보안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월급 받고 일하는 차대운으로선 쉬이 알려줄 수 없는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흑룡동 따위 혈통시대에서 몇 번이고 들락날락한 장소였다.

그러자 백룡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는 다른 경로로 돌입하겠다. 대화로 풀리지 않는 경우도 생각해둬야겠지. 너희 쪽에 흑룡의 주의가 쏠린다면, 최악의 경우라도 내가 청룡을 데리고 탈출할 수 있어. 걱정 마라. 흑룡이 나서면 즉시 나타나 도와줄 테니.”

그렇게 말한 백룡이 곰방대에서 연기를 뿜어내자, 구름 같은 연기가 그녀의 몸을 덮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신기에 가까운 기술에 은세연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주하리는 이미 몇 번이나 구경해봤는지 당황하지 않았다.

“저기···. 미안해. 이번에도 폐를 끼치네.”

주하리가 목덜미를 만지며 사과했다. 청시아를 구하러 가야 하는 자신의 사정에 내가 억지로 휘말린 거라 생각하는 듯 했다. 사실 그보다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멋대로 쳐들어갔다 흑룡한테 박살나는 게 훨씬 더 민폐였다.

“아니. 그 사람이 당하면 나도 곤란해.”

대답한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착신음이 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나는 씨익 웃으며 전화기에 말을 걸었다.

“거기 차대운 씨네 사장님 맞나요?”

<뭐야, 누구지?>

“제가 그 사람 팔 한 짝을 잘라버렸는데.”

<하아···. 장난 전화군.>

그 말과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뚜- 뚜- 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망연자실하게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 흑룡동 (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