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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91화 (91/113)

< 흑룡동 (2) >

“사실 굳이 너희까지 안 따라와도 되는데.”

“아니, 당연히 따라가야지.”

나는 나를 뒤따라오고 있는 주하리와 은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하리는 붙잡힌 청시아를 구하겠다는 자신의 문제에 친구만 달랑 보낼 수는 없다고 동행하고 있었고, 은세연은 단순히 주하리가 가는 곳에 같이 가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 대요괴의 영역이라는 사지에 향하고 있는데도, 방실방실 웃고 있는 은세연은 친구가 도서관 좀 들리겠다고 하는 데에 나도 같이 가겠다고 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걱정된다는 듯 은세연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주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한솔이 네가 도와주면 뭔가 원만히 끝날 듯한 기분이 들거든.”

“그건 기분이 아니라 실적에 따른 당연한 평가지.”

내가 말하긴 좀 뭣하지만 적룡의 발작 문제부터 시작해서 축제에 찾아왔던 청룡을 돌려보내고, 은세연과 주검각시의 문제까지. 가만히 놔뒀으면 참사가 일어났을지 모를 사건들을 전부 어떻게 잘 수습해 마무리했다. 주하리가 미소지었다.

“하하! 정말 그래.”

그리고 나는 두 사람을 대기시킨 뒤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쥐구멍이라고는 했지만 흑룡동에 들어가기 위한 출입구는 실제로 어느 특정한 위치에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자리에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전이문은 보안상의 문제도 있지만 비용적으로도 만만치 않았기에, 지정된 기간 동안만 소규모로 열었다가 닫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활성화된 출입구가 어디에 있는지 정보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사실 요호의 영역처럼 완전하게 외부와 격리된 이공간 같은 것은 아니기에 어떻게든 걸어서 들어간다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무단 침입자를 쫓는 전문 사냥꾼들과 외부인을 털어먹으려는 녀석들에게 한참을 시달려야 할 것이다.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간 나는 별표와 우물 정자, 5번 버튼을 꾹 누르고 기다렸다. 용의 발톱을 형상화했다던가 어쩐가 하는 웃기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차대운의 핸드폰을 꺼내 그 번호를 순서대로 눌렀다. 이내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 인증번호 : 5860 ]

삐이- 소리만 울리고 있는 노이즈 속에서 문자로 받은 인증번호를 입력하자, 이내 소음이 걷히며 배경음악이 흘렀다. 그리고 녹음된 여성의 맑은 목소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출퇴근 보조 서비스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내가 필요한 지역의 번호와 함께 우물 정자를 눌러주세요.>

안내 목소리를 잘 듣고 올바른 번호를 누르자, 가장 가까이 있는 쥐구멍이 어디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듣는 순간 암기할 수 있으니 굳이 메모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정신 능력자의 편리한 점이었다. 내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안내받은 장소는 시내 한복판에 서있는 허름한 원룸 오피스텔 안이었다. 알려준 대로 비밀번호를 눌러 1층 구석에 있는 방의 도어락을 열자, 바닥에 깔려있는 커다란 카페트 밑에서 전이 결계가 빛나고 있었다. 은세연이 감탄했다.

“비밀 조직 같아!”

“같은 게 아니라 비밀 조직 맞아.”

결계에서 솟아나온 빛의 기둥에 우리 세 사람이 몸을 맡기자, 눈 깜짝할 사이 주변의 풍경이 달라져있었다. 여기저기 금이 가있는 시멘트 벽과, 벌써 색이 다 바랜 지저분한 그래피티들. 생각해볼 것도 없이 흑룡동에 들어온 것이 맞았다.

“뭐야 너희들은···?”

방 한구석에 놓여있던 의자에 앉아 잠시 졸고 있던 사내가 우리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일단은 흑룡 쪽에서 운용하고 있는 게이트이기에 섣불리 사람을 모으거나 우릴 공격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학생처럼 보이는 꼬맹이 셋이 튀어나왔는데 그냥 추궁 없이 보내줄 만큼 만만한 곳 또한 아니었다.

나는 사내의 목에 걸려있는 호루라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비밀 통로에서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강하게 경계하고 있었고, 저걸 불었다간 사람들이 몰려와 일이 성가셔진다.

‘혈통시대에서는 불기 전에 기절시켜야 했지만.’

굳이 그런 폭력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엄연히 용무가 있어서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핸드폰을 흔들어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리고, 협상을 계속하기 위해 이곳 보스인 흑룡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차대운 씨 팔 자른 사람인데. 지금 흑룡동에 들어왔거든. 부하가 이쪽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데. 바꿔줄까?”

장난 전화니 뭐니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일관했던 흑룡도 이걸로 크게 놀랐을 것이다. 흑룡동의 쥐구멍이라는 것은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잠깐 침묵이 이어지다, 묵직한 목소리가 통화를 끊지 않은 채 이쪽에게 대답했다.

<그래. 바꿔줘 봐라.>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눈앞의 사내에게 내밀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아직까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멀뚱멀뚱 뜨며 내 얼굴과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내 남자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네···. 이무기 님이십니까? 네, 네···. 네.”

전화를 받으면서도 연신 허리를 굽히며 네 네 네를 반복하던 남자는, 이내 움직임을 멈춘 채 전화가 끊길 때까지 기다리더니 공손한 몸짓으로 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팔짱을 낀 내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남자를 향해 물었다.

“뭐라고 해요? 자기 앞까지 안내해서 데려오라고?”

“장난 전화한 놈들 전부 잡아 놓으라고···.”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고, 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주하리와 은세연 또한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사내가 힘차게 목에 걸려있던 호루라기를 불었다.

삐이이이이익──!!

그와 함께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신호를 따라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구석에 탈선자를 배치해둘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전부 매일매일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하는 데에 이골이 난 거친 자들이었다.

“도망쳐!!”

내가 소리치는 것과 함께 앞으로 달려나간 주하리가 남자의 손을 올려차 단도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물의 흐르는 듯한 동작이었다. 나는 은세연을 붙잡고 달리기 위해 뒤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저 멀리 주하리와 함께 앞서나가고 있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구만!”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5>

나는 온몸에 염력을 두른 채 쏜살같이 날아가 주하리와 은세연 옆에 붙었다. 도망칠 곳도 없이 포위될 만한 좁은 공간에선 벗어났지만, 이미 소란을 일으켜버린 이상 시간을 끌면 끌수록 여러 사람들이 우리의 뒤를 추적하게 될 것이다.

주하리는 뒷골목의 언덕의 얇은 담길을 전혀 휘청거리지 않으면서 달렸다. 판잣집 지붕이나 빨래줄 위까지 땅바닥 위처럼 안정적으로 뛰어가는 게 마치 묘기를 부리는 것 같았다. 군데군데 화분이 놓여있는 곳도 가볍게 뛰어넘어 갔다.

은세연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냥 어린애같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신의 마력으로 엮어낸 실을 여기저기에 걸면서 골목 위를 날아다니는 듯한 기동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미 쫓아오던 남자들의 모습은 저 멀리서 작게 보일 뿐이었다.

내가 염동력을 강렬하게 분사하듯이 비행해야 내는 속도를 이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따라오고 있었다. 솔직히 기동력만큼은 상당히 확보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녀석들이 진심으로 도망치는 걸 보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다.

날아가는 나는 화가 나서 다시 흑룡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 자식아!”

<시간 낭비는 싫어하거든. 네가 진짜 그 놈을 이겼다면 누가 덤벼오든 문제가 안 되겠지? 내 앞까지 알아서 도달해봐. 할 얘기가 있으면 그때 가서 듣든지 말든지 하지.>

그리고 전화는 또 마음대로 끊겼다. 흑룡이 안하무인과 유아독존이란 단어를 사람 형태로 빚어낸 듯한 성격이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상당히 달랐다. 올라간 입꼬리가 자연스레 경련했다.

“해보자는 말이지···.”

그 순간, 뒤통수에서 싸한 느낌이 스쳤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은세연 쪽에 고개를 돌렸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게 주변에 녹아든 색으로 날아오는 건 작은 송곳이었다.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5>

티잉! 내 손짓과 함께 염동력이 날아오던 송곳을 튕겨냈다. 송곳에는 독 같은 것이 묻어있어 확실하게 상대방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마력 따위 담겨있지 않은 투박한 공격이기에 기사 지망생은 오히려 반응하기 힘들었다.

나는 송곳이 날아온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러 집들이 얽혀있는 골목은 엄폐물 천지라 숨어있다 기습하기 대단히 용이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문제는 의미가 없었다.

<마인드맵 확장 : 투시 Lv.5>

“어디···.”

“이쪽이야!”

내가 상황을 확인하기도 전에, 주하리가 송곳이 날아온 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은세연이 공격당할 뻔한 것에 상당히 화가 난 듯 싶었다. 나는 혀를 차고 주하리를 따라갔다. 이내 기습한 놈이 도망친 곳 끝엔 넓은 공터가 나타나있었다.

공터의 뒤쪽은 큰 건물로 막혀있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따라잡힌 남자는 이걸로 좋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킥킥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처음엔 하나였다가, 다음엔 둘, 조금 지나니 대여섯이 되었다 결국에는 십수 명의 웃음소리로 불어났다.

“들어왔다.”

“여긴 우리의 사냥터.”

“이제는 여기서 도망칠 수 없어.”

“남의 방해도 받을 일 없지.”

벽에 있는 건물의 창문 하나하나에서 실실대는 얼굴들이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신체 부위 어딘가가 무언가 실험이라도 받은 것처럼 뒤틀린 자들이었다. 나는 혀를 찼다. 온갖 곳이 전투 구역인 흑룡동 안에서도 이곳은 상당히 악질이었다.

“인피면구 제작소···.”

사람을 마비시켜 독액을 이용해 안쪽을 천천히 다 녹여버린 뒤, 그 살가죽만 남은 시체를 가공한 상품을 만드는 끔찍한 자들이었다. 아무리 뒤쪽 세계의 장사라도 최소한의 선이란 건 존재했고, 그 선을 훌쩍 넘은 이 기괴한 일족들은 결국 이곳 무법지대에 터를 잡고 ‘소재’를 수급하게 된 것이다.

“우릴 아나?”

“남자부터 죽이자.”

“여자는 나중에.”

열린 창문에서 얼굴부터 삐져나온 인간들이 기형적인 형태로 뻗은 팔다리를 재빨리 움직이며 건물의 외벽을 타기 시작했다. 일족 전체가 인간의 도리를 한참 전부터 져버린 이 직인들은 인체공작이라는 자신들의 업종에 걸맞게, 탈선하지 않고서도 탈선자처럼 몸이 일그러진 형태로 변화해있었다.

그들이 건물의 외벽을 벌레 무리처럼 돌면서 달리자, 끈적한 실 같은 것이 점점 넓은 공터를 주변과 격리시켰다. 이제 점점 이곳에 그들의 독성 거미줄 쳐대며 움직임을 봉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소모시키면서 사냥한다.

외부와의 격리를 대강이나마 끝내자, 각 위치에 기어간 녀석들이 입을 가로로 쩍 벌리고 얇은 국수 면발 같은 섬유를 뱉어냈다. 강렬한 기세로 날아간 실은 맞은편 건물에 찰싹 달라붙어 땅바닥에 독액을 뚝뚝 흘렸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요괴가 별 거냐고, 이게 요괴지.’

바깥 세상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이런 미친 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으니 오히려 요괴들 전부 얌전히 석상이 되어있던 요호의 이계보다 질이 나빴다. 십수 명의 거미 인간들이 나를 포위하고 입 안에 독액 침투용 송곳을 장전했다.

내가 이마를 짚은 순간, 모든 각도에서 내 몸 안을 흐물흐물하게 녹여 거죽만을 남기기 위한 송곳들이 쏘아졌다.

“···불쾌해.”

그리고 한 순간, 나를 향해 날아오던 모든 송곳들이 공중에서 잠깐 멈춰 뭔가에 걸쳐지더니, 이윽고 반대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반응하고 뭐고 할 틈도 없었다. 자신들이 쏘아낸 송곳에 몸을 꿰뚫린 녀석들이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실이란 건 이렇게 다루는 것.”

뒤를 돌아보면, 지극히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는 은세연이 그 손가락 끝에 수백 갈래의 마력사를 풀어놓고 있었다.

“감히 주인님과, 그것도 모자라서 내 친구한테 그 더러운 걸 드러내다니. 주제를 분별하도록 해, 벌레들.”

주검각시, 인형 은세연이 그 몸에 나타나있었다.

< 흑룡동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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