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동 (4) >
“적룡이 쓰러뜨린 게 아니라고?”
우리들을 자기 아지트에 초대한 흑룡은 척 보기에도 비싸보이는 화려한 유리병 안의 술을 벌컥벌컥 퍼마시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저런 식으로 마시면서도 얼굴이 조금도 붉어지지 않는 걸 보면 상당한 술고래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의아해하는 흑룡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내 옆에 두 사람은 단순히 동행으로 왔을 뿐이야. 내가 당신네 오른팔을 쓰러뜨린 일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
“그러면 적룡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지?”
“같은 반 친구다. 우리 반 반장이거든.”
흑룡은 그거야말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흑룡이 알고 있는 주하리라고 하면 주검각시가 폭주해서 날뛰는 참사가 일어나기 전, 철저하게 합리적인 전투 기계로서 재앙들을 배제해온 적룡기사 주하리였다.
그런 평범한 일상과는 세상에서 제일 거리가 먼 것 같은 녀석이 학교에 다니는 데다 반장까지 하고 있다고 말하면 상식적으로 자신을 놀리고 있다 생각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흑룡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웃었다.
“좋네, 학교. 용기사니 뭐니 뻘짓하고 있는 것보다야 뭐가 안 좋은 일이겠냐만. 잘도 백룡한테 허락을 받았군.”
“허락 안 맡았어요···.”
“응? 그럼.”
“이 애랑 만났을 때 손 잡고 도망쳤어요.”
주하리가 옆에 앉아있는 은세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은세연은 본인의 인격으로 돌아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테이블에 놓인 안주를 이것저것 집어먹고 있었다. 주하리의 고백에 눈을 잠깐 껌뻑이던 흑룡이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웃었다.
“뭐? 푸흐··· 푸하하하하핫!!”
“저기 아저씨. 뭐가 웃기다고 웃어.”
“아니, 하아. 미안하군. 이건 걸작이구만. 나에 이어 적룡까지 그랬으니 백룡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어.”
그리고 흑룡이 다시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주하리는 상당히 의외라는 듯 흑룡을 바라보았다. 대요괴가 된 용족이라면 좀 더 대화가 불가능할 만큼 난폭하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재해에 휩쓸린다는 이미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조금 경박한 분위기의 사내일 뿐이었다.
그야 탈선자니까, 태생적인 괴물인 다른 대요괴들과 비교하면 인간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흑룡이란 사내의 섬뜩함은 바로 그런 부분에 있었다. 주하리가 자그마한 기대를 담고 있는 얼굴로 흑룡을 바라보았다.
“저기···.”
“응? 할 말 있으면 편하게 말해.”
“굳이 용기사끼리 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흑룡 씨도 의무를 져버렸다고 하지만 서로 죽일 만큼 악한 같단 생각도 들지 않고···. 백룡 씨한테 잘 말해서 제가 말려볼게요.”
용기사가 된 상태라면 모를까, 남과 다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지금의 주하리로선 당연한 제안이었다. 방치하면 큰일이 날 재앙들은 어쩔 수 없이 처단해야 한다고 해도, 이렇게 같이 떠들 수 있는 상대와는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니아니, 무슨 소리야.”
그리고 흑룡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백룡을 왜 말려?”
“네? 그야 서로 죽이려고 싸우는 건 좋지 않으니···.”
“그런 뜻이 아니라. 말릴 대상이 틀렸잖아.”
그리고 흑룡은 엄지로 자신의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싸움을 그만두게 하고 싶다면, 나를 말려야지. 용기사를 전부 죽이려는 건 나고, 백룡은 나를 멈추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 정말 설득하려고 하지는 마, 헛수고니까. 너희는 때가 되면 반드시 전부 몰살시킨다. 이건 이미 확정사항이야.”
주하리가 멍하니 지금도 친근하게 웃고 있는 흑룡을 바라보았다. 흑룡은 주하리를 적잖이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고, 그건 딱히 기만적인 태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마음에 들든 말든 자기 사정상 죽여야 되겠으니 죽이겠다는 것이다.
“자, 잠시만요. 어째서 그런.”
“모르는 건가? 나는 용왕을 죽일 거니까.”
확실히 다른 용기사들과는 부딪힐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용기사란 용왕의 의지와 하나가 되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들. 흑룡이 용왕을 죽이고 용기사라는 것 자체를 없애버릴 재앙이 돠려 한다면 당연히 적대할 수밖에 없다.
흑룡은 간단한 논리가 아니냐며 눈썹을 으쓱였지만, 주하리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했다. 그야 그녀에게 있어서 용왕이란 태초에 용기사들에게 힘을 나눠주었다던 대단한 누군가일 뿐, 죽이고 말고를 논할 만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용왕은 살아있어.”
술병을 쿵 테이블에 내려놓은 흑룡이 단언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살아있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그 양반이야말로 혈통시대 1회차 시나리오의 최종 보스였다. 그거를 어떻게든 때려잡아봐야 그 직후에 세상이 멸망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리고 흑룡이 자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내려다봤다.
“그거랑 반쯤 동화하고 있는 너희랑 달리, 탈선한 내겐 훨씬 확실하게 느껴져. 자기 자신을 인식하려고 하는 건 어렵지만, 타인을 느끼는 건 훨씬 손쉬운 것과 마찬가지지.”
“하지만··· 그렇다고 왜···.”
주하리의 질문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용기사들을 만들어낸 시초의 존재. 용왕이라는 엄청나게 대단한 분께서 지금 살아계시든 말든, 왜 굳이 죽여야만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응하는 흑룡의 대답 또한 당연했다.
“반 년이다.”
흑룡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강제로 용기사니 뭐니 하는 힘을 계승받아버리고 반 년. 반 년 동안이나 나는 나랑 상관없는 인간들의 뒤치다꺼리나 해주면서 상쾌한 기분까지 느끼는 얼간이가 되어버렸지.”
흑룡이 아직 용기사로서 활동하던 시절.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담하다는 듯 흑룡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모든 용족은 용의 힘을 계승받는 순간 세상의 조화를 유지하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게 되는데, 이 남자는 자기 말고 남 뒤치다꺼리 하기 싫다는 유아독존적 성향을 용왕의 주박으로도 다 억누를 수 없어 정신에 부하가 걸린 끝에 탈선했다.
“얼마나 더러운 기분이었는지 너는 모르겠지. 분명 더러운 기분이어야 하는데 기분이 좋았단 말이야.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이 자연스레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어. 탈선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세뇌당해있는 채였겠지.”
“···바보 놈. 그건 세뇌가 아니라 갱생이라 하는 거다.”
의외의 목소리에 모두가 휙 고개를 돌아보았다.
울린 목소리의 방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내 뭉게뭉게 피어오른 연기들이 한 자리에 모이더니, 곰방대를 들고 있는 백룡이 자리에 나타났다. 흑룡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어차피 있을 줄 알았다며 피식 웃고 술병을 기울였다.
“그야 인생에서 한 번쯤 세뇌를 당해보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경험이라 여길 수 있지. 게다가 백룡 당신과 만나게 됐으니 사실 그렇게까지 나쁘기만 한 기억은 아니었어.”
“그렇다면.”
“하지만 룰은 룰이지.”
흑룡이 한 손가락을 치켜들고 말했다.
“그야 살면서 한 번쯤 누구한테 피 터지게 맞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거야. 하지만 그건 그 뒤에 그 놈을 완전히 박살내버리는 게 전제지. 내 의지를 억지로 굽히게 한 녀석들은 반드시 죽인다. 용왕이고 뭐고 규칙에 예외는 없어.”
\그건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흑룡 스스로의 정체성과 관련된 하나의 맹세였다. 애초에 남의 뜻에 따르기 싫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용기사의 주박을 풀어내 기어이 탈선한 이 대요괴에게 말로 하는 어쭙잖은 설득 따위가 먹힐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유는 그것만이 아냐. 나는 사장이고 이건 비즈니스다. 협력해주는 놈들도 메리트를 보고 따라오고 있어.”
이전부터 흑룡이 벌이고 있는 모든 사업의 진정한 목적은, 용왕이 거처하는 장소를 찾아내 그곳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용왕을 제압하고 그 존재의 권능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용왕은 전혀 다른 혼혈을 용족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존재다. 어쭙잖은 세뇌 따위와 달리, 본능과 성향 그 자체까지도 간섭할 수 있어. 탈선자들의 충동도 변이한 몸도, 용왕의 힘이 있다면 정상적으로 되돌릴 수가 있겠지.”
그것이야말로 흑룡이 원하는 ‘탈선자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였다. 이게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이 탈선자가 겉쪽에서 살아갈 권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힘으로 찍어누르는 전쟁을 일으켜야 하겠지만.
“······.”
주하리는 미처 이야기를 다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대요괴로서 흑룡 이무기가 지니고 있는 비원. 적어도 휘하의 탈선자들에게 흑룡은 대의도 실행력도 충분한 이상적인 우두머리였다. 그렇기에 인류에게는 치명적인 적이었지만.
“역시 너는 죽여두지 않으면 안 되겠군.”
이야기를 들은 백룡이 담담히 담뱃대를 물었다.
“흠. 이야기가 너무 사족으로 빠졌나? 적룡이 학교 반장을 하고 있다고 한데서 여기까지 와버린 건가. 사담은 이 정도까지만 해두지. 너희는 중요한 용무를 보러 온 거잖아?”
“처음엔 장난전화 취급한 주제에.”
내가 그의 말을 비꼬자, 흑룡이 이상한 놈이라는 듯 피식 웃으며 내 얼굴을 삿대질했다. 그가 나를 보고 말했다.
“똘똘해보이는데 이제 보니 머리가 나쁘군?”
“뭐라고?”
“그 번호에서 걸려온 전화에 다른 놈 목소리가 들리는데 장난 전화라고 생각할 리가 있겠냐. 내 오른팔은 기업 비밀이 잔뜩 담긴 핸드폰을 어디 바닥에 흘리고 다닐 만큼 맹한 놈이 아냐. 그러면 당연히 무슨 일이 일어났단 거지.”
“그러면 왜 그렇게···.”
머리를 긁적이던 흑룡이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단순한 시간 벌기야. 그래도 사장인데 요구 같은 걸 듣기 전에 어떤 식으로 대응할 건지 대충 정리를 해놔야 할 것 아니냐. 이런 것도 다 오른팔 놈이 조언해준 거긴 한데.”
하지만 흑룡은 그 이후, 내가 흑룡동에 들어온 뒤에도 시치미를 떼며 우리들을 쫓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내 얼굴을 바라본 흑룡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다음 건···나 대신 작업 좀 시킨 거지. 원래는 좀 더 동네를 돌게 하면서 쓰레기들을 청소시킬 생각이었는데. 싸우다 탈선한 놈까지 나오니 여기까지만 하자 싶었지. 그 거미 자식이 이겼으면 나 진짜 우울해서 잠도 못 잤어.”
탈선자는 무조건 다 케어해주는 방침이라서. 흑룡은 이겨줘서 고맙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다시 말해 외부인을 잡아먹으려 이빨을 드러낸 놈들을 역으로 처리하려고 우리란 건수를 활용했던 거였나.
그리고 내 옆에 놓인 상자를 본 흑룡이 말했다.
“그래서 그건 뭐야, 맛있는 술인가?”
“검마의 팔이야.”
내 말에 흑룡이 잘 이해 못했다는 듯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태연히 앉아 그의 반응을 기다렸고, 흑룡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붉은 밧줄로 묶인 나무 상자를 바라보았다.
“팔?”
“잘랐다고 했잖아. 잠깐, 잠깐, 열어보려 하지 마. 맞는 방법으로 안 열면 불타니까. 몇 년 동안 외팔이 돼.”
“아, 그래.”
상자를 향해 손을 뻗던 흑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흑룡이라 해도 자신을 대신해 일해줄 오른팔의 한쪽 팔은 상당히 소중한 것 같았다. 이내 팔짱을 낀 흑룡이 말했다.
“하긴 그 녀석은 몸이 좀 약하니까. 그래도 머리가 좋으니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심한 놈이라는 듯 혀를 끌끌 차며 흑룡이 술병을 집어들었다. 차대운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수준이 아니라 상대 자체를 가능한 인간을 만나기가 힘든 수준의 강자였지만, 그런 차대운조차 이 자의 기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술병 하나를 또 비운 흑룡이 병을 쿵 내려놓았다.
“그래서, 뭔가 바라는 게 있으니까 내 오른팔을 두들겨 팼다는 괘씸한 소리를 내 앞에서 지껄인 거겠지? 뭔지 말부터 해봐. 솔직히 웬만한 건 들어줄 용의가 있으니까.”
“당신이 쓰러뜨려 가둬놓은 청룡을 풀어줘.”
“뭐?”
내 말에 흑룡은 살짝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용기사 한 명이 흑룡에게 잡혀있다면 이후 국면의 균형은 급격하게 흑룡 쪽에 기울겠지. 청룡이 저지른 말도 안 되는 실책을 복구하게 놔둬 줄 리가 없다.
역시 일이 그렇게까지 쉽게 풀리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흑룡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런 걸로 충분하다는 건가?”
“충분한데.”
“하아, 내 오른팔도 참 밖에선 온갖 수난을 겪고 있구나. 제 몸의 가치가 저런 거랑 교환할 만큼밖에 평가되지 못하다니. 돌아오면 위로주라도 한 잔 쭉 들이키게 해야겠어.”
흑룡은 정말 유감이라는 듯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 봬도 흑룡은 상당히 차대운을 고평가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면 난 최대한 빠르게 차대운을 해방하고, 그쪽도 그와 동시에 청룡의 구속을 풀고 놓아주는 걸로. 괜찮겠지?”
내 말에 큰 불만 없이 흑룡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서로 쥐고 있는 인질을 일 대 일로 교환하는 것뿐이니 별다른 협상 또한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상자에 손을 올렸다.
“그러면 다음.”
“다음?”
“방금 결정한 건 검마랑 청룡을 맞바꾸자는 약속이고. 여기 잘려나간 이 팔에도 따로 가격을 매겨주셔야지.”
청룡은 구하자는 목표는 달성했고, 이제부터가 내 용무였다. 나는 웃으며 상자의 겉면을 손등으로 퉁퉁 두드렸다.
< 흑룡동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