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동 (5) >
인질 교환 협상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상자 안에 고이 보관해둔 차대운의 팔을 돌려주는 것은 별도의 문제였다. 가격을 매겨야겠다는 내 말에 흑룡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보니 너 좀 양심이 없구나?”
“그런 말 많이 듣기는 해.”
나도 흑룡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언뜻 보기에 차대운의 팔을 회수하는 것은 선택사항일 뿐이었지만, 사실 그에게 이 거래에 응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기껏 일 시키려 돌려받은 차대운을 몇 년간 썩히는 건 수지가 안 맞으니까.
‘사실 그 인간은 팔 한짝 없어도 충분할 텐데.’
실제로 이번에도 비장의 수를 숨겨두지 않았으면 외팔이가 된 차대운 한 명한테 전멸당할 뻔했다. 하지만 만전 상태인 차대운조차 약골 취급하는 이 남자에겐 팔 한짝이 없는 차대운 따위 수저는 제대로 들 수 있을까 걱정될 수준이겠지.
이내 생각에 잠겨있던 흑룡이 머리를 긁적였다.
“너 말이야, 너무 욕심을 내면 내가 그냥 에라 모르겠다 판을 엎고 그 상자를 뺏어갈 거란 생각은 안 해봤냐?”
흑룡의 목소리에는 은근하지만 확실한 위협이 담겨있었다. 옆에 용기사가 둘이나 있는데도 그런 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듯이.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의 전원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스스로 원해서 땅에 떨어진 용. 그 요호가 얼마나 많은 함정을 준비했다 해도 결코 정면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아 피하던 존재. 눈앞에 있는 적을 때려부순다는 단순한 강함에 있어서는 이무기야말로 모든 대요괴들의 필두에 서있었다.
“널 죽이면 상자를 열 방법을 알아내지 못할 거란 허세는 부리지 마라. 이런 봉인은 해주를 전문으로 하는 놈들한테 갖다주면 어떻게든 비틀어 열 수 있어. 시간이 걸린대봐야 몇 주 정도지. 몇 년이면 몰라도 그 정돈 기다려줄 만하지.”
흑룡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해주술사. 기본적으로 그늘에 발을 걸친 업종인 주술사들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살아가는 부류였다. 안에 어떤 재앙이 들어있든 대가만 준비한다면 기꺼이 봉인을 풀어주고, 손님의 몸에 걸려있는 저주를 상관없는 누군가의 몸에 옮겨버리는 외도 중의 외도.
세상에 저주가 횡행해야 비로소 수요가 생기는 직군이기에,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부작용을 교묘히 감춘 저주법을 손쉽게 따라할 수 있는 형태로 퍼뜨리는 일도 허다했다. 당연히 이를 갈고 있는 피해자들은 셀 수도 없었다.
그러니 거래할 때조차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술식으로 움직이는 인형만을 보낸다. 손님을 받는 것도 그들 쪽에서 저주에 고통받고 있는 이들 앞에 홀연히 나타나 장사를 시작할 뿐, 공방의 위치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그런 그들을 필요하다고 불러내 대면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그야말로 뒷세계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고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 턱을 괴고 앉아있는 대요괴, 흑룡 이무기였다.
하지만 나는 양손을 깍지낀 채 조용히 미소지었다. \
“그 인간들 실력을 꽤 신뢰하는 모양인데.”
“신뢰하는 건 아니고, 그냥 아는 거야. 그야 실력 말고는 전부 쓰레기통에 쳐넣은 놈들인데 실력만큼은 좋아야지.”
흑룡동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인간들은 대부분이 바깥에선 살아가지 못할 사정이 있는 외도다. 호랑이굴이나 적풍회같은 뒷세계의 ‘제대로 된’ 조직과는 또 다른, 무법지대인 이곳이 아니면 성립할 수조차 없는 위험한 사업을 벌이는 자들.
그런 자들이기에 오히려 특정 부분에서는 주술의 정점인 금가마저 뛰어넘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흑룡 또한 그들을 필요할 때 여러 번 이용해보았고, 그 과정이 적잖이 혐오스러울지언정 결과만큼은 깔끔하다는 평가를 내렸겠지.
“그런데 어쩌지. 이거 요호의 기술이거든.”
내 말에 흑룡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누구보다 저주의 해석에 뛰어난 해주술사들이 시간을 들여 풀지 못할 주술적 봉인 따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온전히 기존 주술사들의 술식 체계 위에 성립하고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 상자를 묶고 있는 봉인은 특제품이다.
예외적인 존재. 이 세상에 단 한 명, 대요괴인 요호와 대등한 위치에서 기술 교환을 하고 여우누이의 의식이라는 전례 없는 금기를 성공시킨 남자. 1장로 금양호의 주술은 이미 다른 주술사들과는 전혀 다른 기반 위에어 성립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걸 억지로 해주하고 싶다면 단순한 저주의 해석이 아니라 금양호의 술식에 대한 근본적 원리부터 다시 더듬어갈 필요가 있었다. 아니면 금예린처럼 그런 걸 전부 무시하고 간섭해버릴 수 있는 주술을 지배하는 재능이 있거나.
“···너, 그 여우의 하수인이었나?”
“정확히 반대야. 요호를 죽인 범인이 나지.”
나는 테이블의 안주를 집어먹으며 답했다. 딱히 네가 걔를 어떻게 죽이냐고 부정하는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이미 용기사 둘을 대동하고 있는 시점에 그런 말을 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내 말에 흑룡은 많은 정황들을 납득한 듯 했다.
“너였나?”
그리고 나한테서 해제하는 방법을 듣지 않는 이상 결코 이 상자를 열 수 없으리란 것도 이해했을 것이다. 흑룡은 이미 요호의 저주에 몇 번 당해본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해주술사들이 내놓은 대답은 우리들의 힘으론 무리란 것이었으니.
“그렇구만. 흔적이 코빼기도 안 보이길래 죽었나 싶었는데 진짜로 죽은 거였어. 잘 해줬잖냐, 짜증나는 녀석이었는데.”
흑룡이 그것 참 기쁜 소식이라는 듯 새 술병을 따서 마셨다. 그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맞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다니기만 하며 사사건건 방해를 걸어대는 요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마음대로 흑룡동을 출입할 수 있었으니 보안의 문제에서도 큰 위험 요소였다.
“뭐 좋아. 그런 기특한 짓을 해줬다니 이번 건은 특별히 축하 선물이라는 걸로 지불해주지. 그래서 꼬맹이, 그 상자를 열어주는 대가로 나한테 대체 뭘 뜯어내고 싶은 거냐?”
“두억시니의 정보.”
내 말에 흑룡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야 보통이라면 금품이나 이권, 조금 세게 나올 경우 흑룡 스스로의 무력을 잠깐 빌려달라는 요구를 예상했겠지. 이내 흑룡이 살짝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그 뭐시기, 약점이나 그런 거 알려달라는 거냐?”
“그건 이미 알아. 내가 원하는 건 위치야.”
약점이니 능력이니 하는 단순한 사실정보는 이미 논문을 쓸 수 있을 만큼 알고 있었다. 내 말에 흑룡이 양손바닥을 펴서 내보이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기가 걔 스토커도 아니고 지금 그 놈 위치를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시치미 떼지 마.”
“뭐?”
“나도 할 일 많으니까 빨리빨리 끝내자고. 탈선자 중에 탐지계 있잖아? 두억시니 쪽도 계속 체크하고 있었을 텐데.”
내 말에 흑룡의 음성이 조금쯤 진지해졌다.
“···뭐야 너. 이쪽을 전부 조사한 거냐?”
“조사도 안 하고 여기 앉아있을 리가 없잖아.”
내 말에 흑룡은 그것도 그렇다는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리고 뭔가 꺼림칙하다는 목소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알려줄 수는 없겠는데.”
“검마의 팔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아무리 고급 정보라고는 하지만 이쪽이 제시한 건 차대운의 팔이다. 이걸로 부족하다는 건 아무리 그래도 바가지였다. 애초에 두억시니 또한 흑룡에게 있어 눈엣가시인 건 마찬가지인 존재였기에 정보 공유로 손해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흑룡은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군. 이래 봬도 협박은 해도 사기는 치지 않는 게 장사 모토거든. 그 상자를 사기엔 우리 쪽 정보가 부족해.”
“무슨 뜻이야?”
“탐지 능력을 지닌 놈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추적하던 두억시니의 위치를 추적할 수 없게 됐다. 어디 단절된 곳에 틀어박혀있는 것 같다 하던데. 요정향인지 뭔지 하는 곳에라도 도망친 거 아냐? 아무튼 이쪽을 건네줄 만한 정보가 없어,”
흑룡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 말에 나는 옆에 놓여있던 나무 상자를 염동력으로 들어올려 던졌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상자를 받아낸 흑룡은, 요령 좋게 균형을 맞추며 손 끝의 상자를 팽이처럼 돌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로 충분해. 청룡은 백룡한테 인도해줘.”
흑룡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방금 들은 정보엔 정말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추적 능력 자체는 발동중인데도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경우. 이건 기본적으로 대상이 외부와 격리된 특수한 장소에 들어가있단 뜻이었다.
요정향 같은 비경에 두억시니가 침입했다는 건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최대한 가능성이 높은 곳부터 해당 장소들을 차례대로 탐색하기만 되는 일이었다. 좋은 거래였다 생각하며 돌아갈 준비를 갖추자, 흑룡이 급하게 나를 멈춰세웠다.
“잠깐 기다려봐. 이거 어떻게 열라고?”
흑룡의 말에 나는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던져주었다. 내기의 증거로 지니고 있었던 차대운의 반지였다. 궤짝의 문고리에 저 반지를 가져다대면 천천히 술식이 와해될 것이다. 등을 돌린 난 앉아있는 주하리와 은세연에게 말했다.
“학교에서 봐.”
두둥실 떠오른 나는 순간이동으로 자리를 떠났다.
* * *
차대엽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이었다.
진소란은 차대엽에게 차대운이 거기 있던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려 했다느니, 칼을 휘둘러 난장판이 벌어졌다느니 하며 소란을 피운 모양이지만 차대엽은 별로 혼란해하거나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마중을 나와있던 차대엽이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부른단 건 보통 함정일 테니까. 종친회 사람들은 검성이 되기 전부터 형을 마음에 안 들어했고.”
“···너는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어.”
진소란의 질문에 차대엽이 수긍했다. 진소란은 그런 생각을 했는데 왜 형을 순순히 보내준 거냐는 얼굴로 차대엽을 쳐다봤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차대엽이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라면 차대운이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뻔한 수작에 차대운이 요만큼이라도 위기에 처할 리 없었다. 그렇게 빈틈이 있는 인간이었다면 나도 전혀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대엽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형은 도망쳐 검만 휘두르는 나하곤 달라. 방해되는 정적을 제거하거나, 파벌 싸움에 힘을 쓰거나. 차기 가주로서 필요한 일을 할 수밖에 없어. 아마 그런 모습은 나나 어머니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겠지. 그러니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아.”
차대엽은 자신과 달리 가주 자리를 잇게 될 차대운에겐 여러 가지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 짐작한 듯 했다. 우스운 건 차대운이 방해물을 청소하며 온갖 귀찮은 사전작업을 하는 이유는 차대엽을 가주에 앉히기 위해서라는 점이었다.
차대엽의 말에 진소란은 그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남자의 방식은 잘못됐다고 뭐라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일단 친구의 가족이기에 본인도 없는 곳에서 굳이 말싸움을 일으키려 들지 않는 것이다.
‘장하다 장해.’
설마 상대가 누구든 할 말을 안 하고서는 못 배기는 저 진소란이 이러한 배려를 할 수 있게 성장할 줄은 몰랐다. 이내 고개를 돌린 진소란이 나를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한솔, 그 뒤엔 어떻게 됐지?”
진소란 입장에선 차대운을 나에게 맡기고 도망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대엽에게 그 녀석과 형은 괜찮을 테니 그냥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고는 해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진소란에게 대답했다.
“항복하고 얌전하게 반성하고 있어.”
“그런가···.”
진소란은 수긍했지만 역시 약간의 떨떠름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차대운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위험한지 코앞에서 체감했다면, 그야 그런 말에 쉬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보았다.
“그건 그렇고, 그 힘 쪽은 어때?”
사실 이쪽도 중요한 질문이었다. 진소란 또한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곧장 알아들은 것 같았다. 인간인 채로 한 순간만 탈선하는 한정 탈선. 오로지 돌연변이인 진소란만이 부릴 수 있는 묘기였다. 진소란이 등에서 검은 날개를 펼쳤다.
이내 그녀가 도움닫기로 달려나가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진소란의 몸은 그 몇 발짝 앞에 도달해있었다. 차대엽이 대단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진소란을 바라보았다. 진소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든 감은 잡았지만. 나는 내 능력인데도 이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조금만 출력을 올리면 제대로 제어할 수조차 없지. 이것도 내가 흑익이기에 주어진 힘인 건가.”
그리고 고개를 돌린 진소란이 날개를 접어 넣었다.
“그래서, 한 번 마을로 돌아가보려 한다. 우리 마을에 전해지는 흑익의 전승에 이 힘의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진소란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홀연히 떠나는 것보단 마을로 가보겠다는 말은 직접 전해야 할 것 같아 내가 돌아오는 걸 기다렸던 거겠지. 의리가 깊은 녀석이었다. 그리고 나는 염력을 이용해 공중에 둥실 떠오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나는 진소란에게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특유의 깔끔 떠는 성격 탓에 웬만해서는 절대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 백익 혼혈들의 본거지는, ‘날개 달린 섬’이라고 불리며 하늘을 부유하는 거대한 마을이었다. 온갖 탐색 능력을 차단하는 바람의 장막에 보호받고 있는 하늘의 비경.
두억시니가 숨어있을 걸로 예상되는 장소 첫 번째였다.
< 흑룡동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