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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96화 (96/113)

< 효파경 (2) >

혈통시대의 진소란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지금보다 훨씬 허당끼가 줄어든 똑 부러진 진소란이라 할 수 있었다.

말이 좋아 똑 부러진 거지 그냥 성격이 차가울 뿐인 것이긴 했다. 금예린과 티격태격 싸우는 일도 없이, 선도부에 들어가 온갖 사건들을 해결하며 상대가 혈통능력을 발동하기도 전에 그 팔다리를 검으로 꿰어 틀어막는 철혈의 선도부장.

아무리 강해져도 계속해서 초조해하며 온갖 기술들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검은 날개. 학년이 올라가 재능을 개화하기 시작한 진소란은 맨 먼저 기존의 선도부를 괴멸시켰다.

바깥에는 선도부의 내전이라고 알려졌지만, 싸운 것은 사실상 진소란 혼자였다. 중재에 나선 경비원을 포함해 혼자 힘만으로 선도부 전체를 무력화시킨 그녀는, 한 번 선도부를 해체하고 한시혁을 고문으로 둔 신생 선도부를 만들었다.

학장의 묵인 하에 선도부의 전권을 쥐게 된 진소란은, 문제 행동을 일으킨 이들을 과잉 진압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하게 박살내기 시작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을 것이다.

걸어다니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인 마녀 유매나, 폭주한 끝에 본인을 포함해 십수 명을 죽게 한 은세연. 마물의 씨앗이 학생의 몸을 양분으로 삼아 개화해 날뛴 일. 이미 도저히 온건한 대처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상황이 개판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모두가 진소란 같은 선도부장을 필요로 하기에 그 역할에 떠밀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유리를 비롯한 기존의 선도부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진소란의 짐을 덜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유감이지만 잘라낼 것은 잘라내야 합니다.”

심증으로 쳐들어가 수색한 뒤 물증을 잡아낸다. 비난이 있을지언정 진소란은 묵묵히 모든 문제를 칼 하나로 찍어눌렀고, 웬만한 문제아들은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물론 웬만한 수준이 아닌, 틀어막을수록 더 격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들은 항상 있었다. 매일같이 현장의 실전을 겪으며 단련된 진소란은, 마물 상대가 아니라 같은 인간을 제압하는 것에 대해서라면 세한의 정점에 서있는 괴물같은 녀석들조차 한 수 접어줄 만큼 날카로운 기술을 갖게 되었다.

그런 모습에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소란 혼자서 거의 모든 사건을 떠맡고 있는 선도부의 구조를 고려하면, 그녀는 세한기전의 캠퍼스에서 떠날 수 없었다. 그녀가 없는 순간 선도부 전체의 공백이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진소란에겐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선도부 일이 아니라도 캠퍼스 바깥에는 딱히 용무가 없었으니까. 원래 방학 때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단련실에 틀어박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진소란은 자리를 비우게 됐다.

그녀의 고향 마을이 마물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단순히 섬에 마물 몇 마리가 나타나 피해를 받은 해프닝이 아니라, 완전히 마물의 둥지로 침식당해버렸다는 것이었다. 마을의 벽 바깥에는 셀 수 없는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고, 내부는 어떻게 되어있을지 확인조차 불가능하다고.

그 배후에는 금가를 꿀꺽 삼켜 일가 전원을 강시로 만들어버린 요호와 같이, 그 시점에선 정체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대요괴 두억시니가 있었다. 진소란이 날개 달린 섬에 돌아오도록 정보를 흘린 것 또한 두억시니가 개입한 것이었다.

편지를 받은 진소란은 당장 마을로 돌아갔다. 위험을 신중히 가늠해본 뒤 다른 기사들과 함께 돌입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다. 사실 선도부장으로서 반쯤 완성된 그녀는 이미 웬만한 기사들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고향에 도착했을 때 진소란을 맞이해준 건 정말 마물의 둥지라도 되는 듯 돌아다니고 있는 기괴한 형태의 수십 마리 마물들이었다. 구슬 같이 동그란 모양의 살덩이에 커다란 눈을 뜨고 있는 마물, 기다란 등에 팔이 여덟 개나 솟아나있는 마물. 피로 물든 날개를 입으로 씹고 있는 마물.

언제나 깨끗하고 새하얗게 정비되어있던 마을의 문은, 마물들의 체액과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진소란의 등 뒤에 새까만 날개가 펼쳐지고, 도약한 발이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너희들은 살아있으면 안 돼.”

다음 순간 진소란의 앞에 있던 마물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양단당했다. 적을 찌르는 속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예측하고서 미리 대응하고 있지 않는 이상 반응 자체를 할 수 없게 된다. 상대가 아주 잠깐이라도 무방비함을 보이는 순간, 행동에 나서는 동시에 이미 유효타가 결정되는 것이다.

확정선공권. 일순간 생물의 반응속도의 경계를 뛰어넘어 공격을 꽂아넣을 수 있는 최속의 기사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 이 영역에 있는 기사들에게 반응과 본능만으로 싸우는 마물은 자신이 원할 때 때릴 수 있는 샌드백일 뿐이었다.

폭풍과 같이 깃털을 휘날리며, 진소란은 자신이 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마물을 베어버렸다. 단순히 깔끔하게 베어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움직임을 멈춘 마물을 몇 번이고 내려쳐 토막내며 정성스레 확인사살했다. 언제나 의를 논하며 싸우는 진소란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증오에 사로잡혀있었다.

“조각을 내주지. 만에 하나라도 살아나지 못하게.”

진소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현장에서 도망치는 인간을 놓치지 않도록 날카롭게 벼려진 선도부장의 감각은, 숨어있거나 자리에서 이탈하는 마물들을 빠짐없이 잡아냈다.

“한 마리라도 살아남게 할 것 같나.”

시야에 진소란이 비친 순간 그 마물의 몸은 토막났다. 진소란은 이 마을 안의 마물 단 한 마리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한 마물을 본 진소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건물 구석에서 기어나온 작은 덩치의 마물. 그 마물의 가슴팍에 튀어나와있는 뼈인지 거대한 엄니인지 모를 날카로운 기관에 걸려있는 건, 진소란이 본 적 있는 목걸이였다.

‘그렇게 긴 머리면 수련할 때 불편하지 않아요? 제가 묶어줄게요. 머리끈 쓰는 법을 알려드릴 테니 이렇게···.’

어릴 적 몰래 마을 바깥의 숲에 빠져나와, 혼자 있던 진소란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아이. 결국 부모님에게 잡혀 흑익 님과 이야기하는 건 금기라고 집에 끌려가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그때 해준 말들은 아직도 진소란의 마음에 남아있었다.

‘짜잔, 흑익 님 깃털로 만든 목걸이예요! 이런 건 세상에서 나밖에 없을걸. 언제나 수호천사처럼 목에 걸고 있을게요!’

엉덩이를 맞고 끌려가면서도 이쪽을 향해 소리쳐준 말.

‘사람들을 꼭 지켜주세요!’

얄팍하디 얄팍한 관계였다. 이야기한 건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입을 다문 진소란 앞에서 그 아이 혼자 떠든 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말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금 붙잡으며 힘낼 수 있게 해준, 진소란의 원점이었다.

자신을 지켜달라는 기원을 담은 그 아이의 목걸이. 아마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검은 깃털을 가공해 만든 목걸이가, 피가 튄 채로 마물의 날카로운 뼈끝에 걸려있었다.

지키지 못했다. 그런 실감에 호흡이 가쁘게 차오르는데도, 진소란은 길길이 날뛰거나 소리지르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두 눈으로 자신의 적을 응시했다. 분노라는 것은 한계를 넘어선 순간 오히려 조용하게 가라앉는다는 것을 알았다.

진소란의 감정에 동조한 마력이 끔찍하게 일렁였다. 인간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잡아먹어야 할 마물은, 진소란과 눈을 마주친 순간 공격하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에 진소란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래. 마물이라도 겁은 먹나보군.”

진소란의 검이 휙 휘둘러지고, 그와 동시에 마물의 앞발이 잘려나가 벽에 철퍼덕 들러붙었다. 마물보다도 더 마물같은 흉흉한 귀기. 완전히 그 자리를 장악하고 있는 진소란 앞에서, 마물은 이미 저항을 포기하고 엎드려 있었다.

“이 정도로··· 이 정도로 끝낼 수는 없어. 더 저항해봐.”

하지만 마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진소란이 팔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마물의 한쪽 다리가 날아갔다. 몸을 받쳐주던 발을 절단당해, 마물은 평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벌레처럼 땅바닥을 기었다. 진소란이 차가운 눈으로 마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진소란의 등 뒤에서, 저편의 건물에서 진소란을 지켜보던 다른 마물들이 동시에 날아와 거대한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각조각난 육편이 되어 땅바닥에 떨어졌다. 장도를 쥔 진소란이 돌아보지조차 않고 말했다.

“방해하지 마.”

그리고 진소란의 검이 앞에 엎드린 마물에게 계속해서 휘둘러졌다. 이빨을 도려냈다. 안구를 내리찍었다. 팔다리를 전부 잘라낸 뒤 힘줄을 절단했다. 누구도 해칠 수 없을 만큼, 그저 벌레처럼 땅바닥을 기어가다 죽어가게끔 망가뜨렸다.

“넌 그렇게 공포에 떨다가 죽어.”

아직 가까스로 숨이 붙어있는 마물을 보며, 진소란은 냉혹한 눈동자로 선언했다. 그리고 완전히 행동불능이 된 마물을 천천히 죽어가도록 내버려둔 채 마을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마물의 둥지에서 핵을 찾아가는 방법은 세한기전에서 질리도록 배우는 것이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마물들의 소굴이 된 이 마을에 일렁이는 마력의 중심이 되는 지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육안으로만 봐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날개 달린 섬 가장 꼭대기에 있는 최고 결정기관이자 백익 혼혈 중에서도 가장 권위있는 원로들의 의회, 백로회. 그 건물 주위에서는 풍선처럼 부푼 커다란 고깃덩이의 막이 심장이 뛰는 것처럼 맥박치고 있었다. 역겨운 광경이었다.

검을 휘둘러 육벽을 베어내자, 끈적한 생살을 찢어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진소란이 불쾌함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서자, 백로회의 건물 내부 또한 적잖이 변형되어 생물의 신경계처럼 핏줄 비슷한 형태의 촉수들이 마구잡이로 얽혀있었다. 콘크리트 벽에 늘어져있는 덩굴 같은 모양새였다.

고향 마을이라곤 해도 문을 넘어서본 적이 거의 없는 진소란이 이 건물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복잡한 건물의 구조에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다. 적은 위쪽에 있다. 원흉은 숨길 생각조차 없이 마력을 풀풀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으로 최상층에 도달한 진소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마물들의 둥지가 되어버린 마을. 그 최심부에는 한 명의 백익 혼혈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조명이 나간 방 안에 서있었다.

진소란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알고 있다고 해야 할까, 혈연을 따지자면 자신의 조부 되는 사람이었다. 물론 할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은 한 번도 없고, 백익의 마을을 이끄는 최고 장로로서 자신의 처분을 결정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나는 네가 미웠다.”

기습처럼 쏘아져나온 말에 진소란의 몸이 굳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멈춰버렸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언제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무적인 어조로만 말하던 저 노인이, 처음으로 진소란에게 자신이라는 인간을 드러냈다.

“미워서 미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너처럼 추한 괴물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기 위해 그리 아름다웠던 내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이 손으로 목 졸라 죽이고 싶었지만, 재앙 덩어리인 너에게 닿는 것조차 꺼림칙했다. 그래서 거리를 두었다. 제발 혼자 목을 매달아 죽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진소란은 눈앞의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존재는 정말 끔찍할 만큼 자신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

어렸던 진소란에게 흑익으로서 우리들의 영웅이 되어 주시기를, 하면서 거리를 두는 말투로 이야기하던 노인의 말은 전부 새까만 혐오를 포장지에 감싸 내뱉은 것일 뿐이었다는 것.

그걸 어떤 의심도 없이 납득할 만큼 노인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감정이 담겨있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마치 흐물흐물 녹아내리듯이 음성이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가만히 서있던 노인이 갑자기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툭 고개를 떨어뜨렸다.

<라고 전해달라는군.>

그리고 정수리부터 노인의 몸체가 꽃이 피어나듯 몇 갈래로 갈라지더니, 바닥에 늘어진 살덩이 위에서 새빨간 촉수들이 흐물대며 일어났다. 쏟아져나오는 붉은 촉수에 딱히 정해진 모양이 없는 유선형의 몸체가 방 한쪽을 전부 채워갔다.

“네놈은···.”

전에 느껴보지 못한 끔찍한 존재감이 진소란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노인의 안에서 터져나온 새빨간 무언가에 진소란은 공포마저 느끼고 있었다. 가까스로 입밖에 흘려낼 수 있었던 질문에, 선명한 붉은색으로 흔들리는 존재가 대답했다.

<대요괴의 일각. 두억시니라고 하는 자다.>

흐르는 피처럼 새빨간 촉수가 진소란의 뺨을 문질렀다.

< 효파경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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