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파경 (3) >
수십 수백 번의 싸움을 헤쳐나와보았기에 알 수 있다. 진소란은 대면하는 것과 동시에 이것에는 이길 수 없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마력의 크기나 강함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무슨 수를 써도 자신이 자신인 이상 눈앞의 괴물에게는 이길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절망감이 확실하게 진소란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사실 대요괴와 대면한 시점에서 진소란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당연히 없었다.
요호도 이무기도 불가살이도, 단순히 격으로 따지면 세한기전의 학생이 아니라 교수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코웃음을 치며 몇 분도 걸리지 않고 도륙낼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인간 한 명이 폭풍이나 지진과 맞서싸우는 것과 같다. 집중해서 잘 싸운다든가, 행운이 일어난다든가 하는 오차로 메울 수 있는 격차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두억시니는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힘의 크기가 차원이 달라서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는 그것보다 조금 더 본질적인 문제였다.
혼혈은 혼혈인 이상 두억시니를 이기지 못한다. 이기지 못하기는커녕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다른 대요괴들과 싸워서 이길 확률이 기적이 수십 수백 번 일어나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천문학적으로 낮은 가능성이라 한다면, 두억시니를 쓰러뜨릴 수 있는 가능성은 단순하게 0퍼센트였다.
<아직 먹어치우기엔 아깝구나.>
촉수를 거둔 두억시니는 어느새 몇 갈래로 나뉘어져 있던 껍질을 다시 붙여 진소란의 조부의 모습으로 돌아와있었다. 노인의 흰자위는 검게 물들고 눈동자는 붉은 색으로 변해 이런저런 신체기관이 꿈틀대며 변이를 거듭하고 있었다.
“아, 아! 목은 이 정도면 충분한가.”
“······.”
“흑익. 너는 알고 있나? 보통 몸과 마음이라는 건 완전히 나뉘어있는 별개의 것처럼 취급되지만, 육체라는 것에서는 필연적으로 마음에 대한 작용이 일어나 영향을 끼치지.”
넓은 방의 절반을 채울 만큼 크고 많은 새빨간 촉수들을 노인의 자그마한 몸 안에 전부 집어넣어 숨긴 채, 두억시니는 뒷짐을 지고 방 한쪽에서 맥동하는 육벽으로 걸어갔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도중에도, 몸뚱이를 재현했기에 그 안의 작용 또한 그대로 일어나고 있어. 너와 대면하는 건 처음인데도 너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끓어오른다, 흑익. 이래서 가죽을 쓰는 건 좋아하지 않아.”
진소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자신이 대단히 끔찍한 무언가와 대면하고 있다는 것은 생물로서의 본능이 소리치며 알려주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뭐가 일어날지 모른다. 그럼에도 진소란은 손에 쥔 칼을 휘두를 수 없었다.
휘두르는 순간 죽는다. 또는 죽는 것보다 조금 더 비참한 꼴을 당한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그러한 실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이 소용돌이처럼 비틀렸다.
“그런 작용만을 편리하게 지우고 다른 신진대사를 그대로 유지할 만큼 내 권능도 만능은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꾸몄다가는 금방 누군가가 눈치채지. 너희들은 온갖 기기묘묘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소용돌이가 비틀린 끝에 나타난 얼굴은 냉정해보이는 인상인 미남자의 얼굴이었다. 진소란은 그 얼굴이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고, 금세 그것이 노인이 젊었던 시절 어떻게 생겼을지를 그린 상상화와 일치한다는 걸 깨달았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진소란은 눈을 부릅뜬 채 그런 말을 했다. 눈앞의 이 괴물이 어떻게 그 많은 마물을 조종했는지, 어떻게 이 마을을 둥지처럼 변이시켰는지에 대해선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
마물조차 복속시키는 능력자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세한기전에서 경험해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괴물의 동기였다. 어째서 백익의 마을을 습격해 이 참상을 만들었는가. 진소란의 질문에 두억시니는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원래라면 그런 걸 말해줄 리가 없지, 라고 해야 하지만. 이 몸의 충동은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나를 계속 충동질하고 있군. 나는 쾌락주의자라서, 이 몸 덕에 이리 간단히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을 포기하고 싶진 않아.”
“요점만 간단히 말해라.”
“그래, 요점만 간단히 말해주지. 이곳을 침식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지. 첫 번째론 하늘에 둥둥 떠 외부와 단절되어있어 내 둥지로 만들어도 아무도 모른다는 점. 두 번째는 빌어먹을 용사 때문에 급히 숨을 곳이 필요했다는 점.”
그리고 젋어진 노인이 웃으며 진소란을 삿대질했다.
“세 번째는 네 정신을 망가뜨리기 위해서다.”
진소란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마물을 풀어 자신의 마을을 짓밟으면 울면서 정신이 나가버리기라도 할 거라 생각했나?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세한에 입학한 뒤 지금까지만 해도 몇 번의 참극을 넘어왔다. 지키고 싶었던 것이 얼마나 짓밟힌다 해도 분할지언정 자신을 망가뜨리지는 못한다. 꺾이지 않고 계속 싸워나가는 것이야말로 그 아이가 응원해준 흑익인 자신의 의무였다.
“내가 목적이었다 하면 이 모든 게 내 탓이라 자책하며 무너질 줄 알았나. 이제 와 새삼 이 정도로 무릎꿇지는 않는다.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너고, 모두를 죽인 것 또한 너다.”
진소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의 목소리는 진소란이 아니라, 앞에 있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읽기라도 한 듯한 남자의 무기질적인 음성에 진소란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남자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몸과 마음은 물론 별개의 것이지만, 서로 파문처럼 영향을 끼친다고 했지. 생명의 반응을 읽으면 이렇게 줄줄 새는 정보를 취할 수도 있는 거야. 이것도 숨기는 놈은 숨기지만, 흑익 너는 아직 거기까지 미쳐있진 않은 모양이군.”
말하는 도중에도 진소란의 모든 반응을 살피고 있는 두억시니의 시선에, 진소란은 전에 느껴보지 못한 공포와 혐오감을 느꼈다. 아무리 자신의 진의를 숨기려고 해도 숨기려고 한다는 그 생각조차 환하게 들여다보이고 있다는 감각.
“슬슬 이해를 한 모양이군. 흑익, 나는 네가 어떤 심지를 지녔는지 이미 대충 확인했고, 그런 내가 네 정신을 망가뜨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건 이미 확정사항이야. 너는 조금 뒤 스스로 자신의 정신을 무너뜨려 붕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기형적인 형태로 변형시킨 남자가, 분홍빛이 감도는 육벽을 손톱으로 베어갈랐다. 그 안에 있던 내용물에 진소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에 있는 건 이제 막 태어난 듯이 점액에 감싸여있는 마물이었다.
“마물···. 이게 어쨌다는 거지?”
“마물이라, 글쎄.”
그리고 두억시니가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친구처럼 살짝 들뜬 미소로 진소란을 쳐다보았다. 진소란은 눈썹을 찌푸리며 바닥에 철푸덕 떨어진 마물을 바라보았고, 이내 그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마물이 꿈틀거리며 조금씩 형태를 바꿔가고, 새하얗게 질린 진소란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되면 마물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
“그럴 리 없어.”
진소란의 두 눈동자가 양옆으로 흔들렸다. 결코 경계를 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오른손은 이미 칼자루를 놓은 채 공중에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진소란의 호흡이 가빠졌다.
육벽에서 튀어나와 점액에 감싸인 채 바닥에 철퍽 엎드린 마물은, 기괴하게 비틀린 끝에 새하얀 날개가 달린 알몸의 남성으로 변해있었다. 언젠가 스쳐지나가며 본 적이 있었던 듯한, 없었던 듯한 얼굴. 진소란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거짓말이야.”
“하하, 멋진 표정이야. 거짓말이라고 해주면 좋겠나? 네가 여기까지 오면서 웃으며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니까.”
“거짓말이야!!”
고함을 지른 진소란이 떨어진 칼을 집고 두억시니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도 진소란의 동작은 오늘 중 최속으로 두억시니의 목을 베어내려 했지만, 그 전에 솟아오른 육벽에 가로막혔다. 진소란은 숨을 헐떡이며 육벽을 베기 직전 칼을 멈췄다.
“왜 그러지. 이 고깃덩이도 뭘로 이루어진 건가 불안해서 공격하지 못하는 건가? 그대로 벴으면 이 몸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을 텐데. 멈출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두억시니가 손바닥을 땅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핏줄처럼 뻗어나간 생체 조직이 벽 바깥까지 뻗어나가더니, 펌프처럼 꿀렁대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다시 두억시니의 손에 돌아와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괴한 이형으로 비틀려있던 마을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건물의 벽에서 꿈틀대던 분홍빛 혈관도, 백로회의 건물을 감싸고 있던 고깃덩이도 말끔히 지워졌다. 마법에서 풀린 것처럼, 마을의 길가에 있던 마물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진소란이 베어낸 마물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사람의 육편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마을, 인간의 손가락과, 인간의 발과, 인간의 안구가 길거리에 장난감처럼 늘어져있었다.
날개 달린 섬 맨 꼭대기에 위치한 백로회의 회의실에서는 마을의 경치가 아주 잘 보였다. 탁 트여있는 창문을 통해 마을 전체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털썩 무릎 꿇은 진소란이 안에서 구토가 솟아오르는 듯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 조각을 내주지. 만에 하나라도 살아나지 못하게.
- 너희들은 살아있으면 안 돼.
- 한 마리라도, 살아남게 할 것 같나.
멍하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진소란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마을을 원래대로 되돌려준 두억시니는 흑익이란 사람이 그렇게 무릎 꿇고 있으면 안 된다며 진소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었다. 그가 진소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뭐라고 생각했었지?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너고, 모두를 죽인 것 또한 너다. 모두를 죽인 게 대체 누군데?”
“나는.”
아이한테 차근차근 설명하는 듯한 목소리는 명백히 신나하고 있었다. 진소란에게 남자가 인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걱정 마. 사실은 모두를 죽인 게 아니니.”
“어···?”
따뜻하게 격려해주는 듯한 목소리에 진소란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창가까지 진소란을 일으켜 끌고 온 남자가 마을의 저편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당히 먼 곳이었지만 기사의 시력이라면 충분히 사물을 판별할 수 있는 거리였다.
“아.”
“그래, 맞아!”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
일어서있던 진소란이 다시 무너져내렸다. 그곳에는 팔이 잘려나가고, 다리가 잘려나가고, 힘줄이 잘리고 눈을 찔린 채 그저 아무 것도 못하고 땅을 기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 넌 그렇게 공포에 떨다가 죽어.
유일하게 진소란을 공격하지 않았던 마물. 진소란이 일부러 숨을 끊지 않고 고통 속에서 벌레처럼 죽어가도록 방치해두었던 마물. 그 마물이 있던 자리, 진소란을 응원해주었던 아이의 가슴팍 위에는 검은 깃털의 목걸이가 놓여있었다.
가까이서 보자는 듯 깨진 창문을 넘어 진소란을 이끌고 날아간 남자는, 이건 그래도 너무했다는 듯 사지를 잃고 꿈틀대는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버린 탓에, 피를 잃은 몸은 당장에라도 죽을 듯 식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이미 어떤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고만 있는 진소란을 보았다. 그리고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발 부탁이니 이 애를 살려달란 거지. 너랑 나 사인데 그 정도 부탁이야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리고 남자가 사지가 잘린 몸뚱이를 쓰담아주자 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천천히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진소란이 난도질하며 상처입힌 그 몸은 겉으로 보기엔 잔상처 하나 없는 멀쩡한 상태로 돌아와있었다.
기적과도 같은 광경에 진소란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응원해주었던 그 아이에게 한 걸음 다가갔지만, 안구가 재생되어 다시 사물을 볼 수 있게 된 아이의 눈에 비친 건 모두를 죽이고 자신의 몸을 정성스레 고문한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박혀있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새된 비명이 울려퍼졌다.
“히에에에엑···! 오지 마, 오지 마!! 헤엑···! ”
그리고 뒷걸음질치던 그것은 핏물이 되어 펑 터져나갔다.
살조각과 핏물이 진소란의 하얀 얼굴에 튀어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 진소란이 삐걱이며 고개를 돌아보았고, 남자가 멋쩍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속으로 또 괴롭힘당하기 전에 빨리 누군가 죽여달라고 소리치더군. 네 소원만 들어주는 건 불공평하겠지.”
그리고, 진소란이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마음의 한쪽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무너졌다. 쓰러진 그 등에서, 거대한 검은 날개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효파경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