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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99화 (99/113)

< 효파경 (5)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차대엽이 영문을 몰라하며 땅바닥에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차대엽 입장에서는 옆에 서서 마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꿀렁꿀렁 몸이 움직이더니 인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놀라서 기절할 수준의 일이었다.

“사람을 마물로 바꿔버리는 슈퍼 마물이 있다는 거지. 여기는 공중에 떠다니니까 본거지로 삼기 좋은가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솔직히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했는데 보란 듯이 성공해버리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느껴지는 의식의 상태를 보아하건대 쓰러져있는 남자는 적어도 몇 시간 뒤엔 정신을 차릴 것이다.

“한솔이 너 설마, 용무가 있었다는 게···.”

“그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었는데 진짜 있네.”

진소란의 질문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 이 녀석들한테 두억시니의 존재 자체를 숨기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며 일을 진행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차대엽도 진소란도 호들갑을 떨면서 놀라진 않았다.

“평소에도 위험한 곳에 고개를 들이밀고 다니는 거 같다곤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수준의 사안인 줄은 몰랐네.”

눈앞에서 마물이 인간으로 돌아오는 꼴을 보면 패닉에 빠지거나 최소한 조금 더 추궁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묘하게 침착했다. 솔직히 예상 외였지만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을 안 상황을 살피는 건 살피는 거고. 일단 여기서 몇 분만 기다리자. 이 사람 상태도 좀 지켜보고 싶고, 나도 능력을 너무 써서 지쳐버렸어. 딱 5분 정도면 되겠네.”

핸드폰을 확인한 나는 현기증이 일어난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물론 그냥 해본 동작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의식 접촉으로 내 염력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남자의 상태를 지켜보자는 것도 타당한 말이었기에 두 사람 다 수긍했다.

이내 몇 분이 지나고, 우리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진소란의 오두막에 옮겼다. 옆에 있는 의식을 확인한 나는 마을의 정문을 넘어갔다. 아무리 계율이 어쩌니 저쩌니 해도 설마 이런 상황에 마을 침입했다고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예상대로 마을 안에 사람은 없었다. 기괴하게 생긴 짐승으로 변해 땅을 기거나 있는 하늘을 날고 있는 괴물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신검을 든 차대엽은 조용히 고개를 올렸다.

“다같이 덤벼들면 섬세하게는 힘들겠어. 괴물이 된 걸 구해주는데, 뼈 몇 군데 부러졌다고 불평하진 않겠지.”

흉포하게 포효하며 달려오는 마물들을 상대로, 달려나간 차대엽이 건물의 외벽을 타고 달리며 한 마리씩 제압을 시작했다. 차대엽에게 비행하는 능력은 없다곤 하지만, 이렇게 발판이 많은 곳에선 사실상 날아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칼등으로 마물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내 사납게 울부짖는 마물들 몇 마리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마물들 몇 마리가 되었다. 아까처럼 한 마리만 신검으로 붙잡아놓을 수 없기에 조금 난폭하게 다리를 부러뜨려놓았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냉정하고 무서운 녀석이었다.

그리고 나와 진소란이 마물들을 하나씩 원래대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되돌린 백익 혼혈들을 그대로 놔뒀다간 다른 마물이 건드릴 수 있으니 전부 진소란의 오두막으로 옮겨놓았다. 나는 다른 마물을 찾기 위해 마을 위로 날아올랐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두억시니에 대해서였다.

‘슬슬 놀라서 달려올 때가 됐는데.’

사실 우리가 온갖 눈에 띄는 짓을 다 하며 마물을 엄청 죽여대도 두억시니는 결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냥 평범한 마물의 둥지인 척 하고 싶을 테니까. 그래야 다음에 수많은 기사들과 함께 돌아와 두억시니의 장기말을 보충해주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별개였다.

두억시니가 마물로 변하게 한 인간들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있다. 이건 결코 두억시니로서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권능을 파훼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니까. 반드시 당사자를 붙잡아 어떤 능력을 쓴 것인지 해명하려 들 것이다.

“그래, 바로 이렇게 말이야.”

나는 등 뒤에 서있는 누군가의 의식을 느끼고 피식 웃었다.

내 뒤에서 붉은 촉수를 일렁이며 서있는 것은 다름 아닌 대요괴 두억시니였다. 이걸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불가살이를 제외한 모든 대요괴와 직접 대면해보게 된 셈이었다.

<···양손을 올리고 천천히 돌아봐라.>

귓속을 파고드는 듯한 기분나쁜 음성에 나는 순순히 손을 올리고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빨간색 촉수 다발이 사람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항복 자세로 들고 있는 양손을 좌우로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너는 뭐냐. 무슨 짓을 했지. 어째서 여기 온 거냐.>

추궁하는 듯한 질문은 대답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두억시니는 그저 질문을 던지기만 해도 생명의 반응을 읽어내 상대방의 생각을 상당한 정확도로 간파할 수 있으니까.

구체적인 질문에 그 대답이 파문처럼 떠오르는 건 반사작용 같은 것이라 딴 생각을 한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 같은 정신 능력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의식을 제어해 아무 것도 건져낼 수 없는 완벽한 평정을 유지했다.

“알려주기 싫은데. 맞춰보든가.”

두억시니는 나를 보고 당황해 끊임없이 형태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원래 두억시니는 마주한 상대방의 호오를 순식간에 읽어내 가장 치명적인 형태를 취하지만, 나에게선 무엇도 읽어내지 못해 이도 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웃겨서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미리 혈왕에게 비슷한 능력을 당하지 않았으면 조금 위험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히 대응할 수 있었고, 두억시니는 극도로 초조해하며 자신의 몸을 꿈틀댔다. 그러다 결국 이빨을 드러낸 붉은 악마의 모습을 취했다.

수많은 이빨이 톱날처럼 움직였다. 위협이 목적이기에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무서워하는 이미지를 재현한 듯 했다. 그리고 차대엽과 진소란이 다른 마물을 탐색하러 공중에 올라갔다 돌아오지 않는 날 찾기 위해 고개를 올려다봤다.

“뭐···!”

그리고 새빨간 악마와 함께 있는 나를 보고 차대엽과 진소란이 놀라서 이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는 대요괴 두억시니였다. 아무리 차대엽과 진소란이 적지 않게 실력을 쌓았다 해도 정면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읽은 건지 두억시니가 자신의 몸체 옆에 거대하고 붉은 악마의 팔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두억시니를 향해 충고해주었다.

“공격하지 않는 게 좋을걸.”

<전형적인 허세군. 통하지 않는다.>

“그래···. 하긴 공격 안 해도 똑같긴 해.”

흉포한 형태로 분출된 생명이 휘둘러졌다. 주변의 건물을 쓸어버리듯 찢어발기며 쇄도하는 악마의 팔에 차대엽과 진소란조차 제때 반응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미리 알고 있었다 해도 피하기 힘든 수준의 압도적 속도와 공격 범위였다.

진소란과 차대엽은 순간적으로 일격으로 싸움이 끝나버릴지도 모르겠다 생각했고, 눈을 감았다 뜨자 모든 걸 찢어발길 기세로 휘둘러진 팔은 통째로 잘려나가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두억시니가 천천히 자신의 옆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의 몸집에 맞지 않는 대검을 들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색 머리를 휘날리는 여자는, 혈왕궁의 문장이 새겨진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용사···.>

이혈 중의 이혈. 수많은 혈통이 마구잡이로 섞여있으면서도, 그 모두가 서로 상쇄되긴커녕 상승작용을 이끌어내 최강의 기사라는 이름에 걸맞은 능력을 가지게 된 괴물. 오봉의 필두이자, 혈왕궁의 집행자. 나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두억시니의 위치를 특정했다고 혈공주에게 문자를 보낸지 5분. 단 5분만에 용사는 자신이 있던 장소에서 날개 달린 섬에 도착했다. 부유하는 이 섬은 계속해서 위치를 바꾸가에 백익 혼혈이 아니면 찾아내기 힘들다거나, 길을 잃게 하는 결계가 쳐져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것처럼.

마을 정문을 넘어선 시점에서 이미 용사는 위장을 끝마치고 우리들 옆을 걷고 있었다. 용사가 지닌 셀 수 없이 많은 혈통능력 중 하나, 카멜레온처럼 주위에 완전히 녹아들어 아무런 누구도 자신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보호색이었다.

‘의식을 감지하지 못했으면 나도 몰랐겠지.’

온갖 혈통이 섞여있는 용사는 보통 일류 기사라도 많아봐야 두세 개 갖고 있는 게 전부인 혈통능력을 십수 개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나하나가 특급의 능력인 말도 안 되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오봉 중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거겠지만.

“신검···?”

갑자기 나타난 용사를 바라본 차대엽이 말했다. 그 말대로 용사가 들고 있는 거대한 대검은 검귀 혼혈의 혈통능력인 신검 발현이었다. 순수한 검귀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신검합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저 대검은 그런 게 없어도 규격외였다.

“너무 도망쳐다니지 마. 짜증나니까.”

용사가 하늘을 향해 대검을 휙 휘둘렀다. 그러자 마력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광선이 날아가, 잘라낸 두억시니의 팔에 작렬하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하늘을 향해 쏜 게 아니었다면 아마 이 일대 전부가 초토화됐을 것이다. 그리고 용사가 대검의 칼끝을 앞에 있는 두억시니의 본체를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서 붉은 액체가 모이며 새빨간 장창이 수십 자루 형성되더니, 그대로 두억시니의 몸체를 꼬챙이처럼 꿰뚫기 시작했다. 단순한 물리적 공격 따위 두억시니는 가볍게 흘려보내버리지만, 새빨간 피의 창은 찌른 부분을 부글부글 끓게 하며 재생할 수 없게 괴사시키기 시작했다.

피로써 무기를 만드는 박쥐 혼혈의 혈통능력이었다. 그렇게 두억시니가 몸을 변화시키기 어렵게 만든 용사의 오른쪽 눈에 빛이 깃들었다. 이내 그 눈동자의 빛을 쬔 두억시니의 몸 주변에 몇 겹의 술식이 펼쳐지더니 그 몸을 구속했다.

‘혼자 능력 몇 개를 쓰는 거야 대체.’

자그마치 대요괴인 두억시니가 말 그대로 샌드백으로 전락해있었다. 동료의 보조가 필요 없는 만능. 옆에서 보기만 해도 사기치지 말라고 멱살을 잡고 싶어지는 존재였다.

이게 혈왕궁의 최종병기이자 기사의 정점. 대요괴를 단신으로 박살낼 수 있는 세계 최강의 일각 중 한 명이었다.

이내 손을 뻗어 구속된 두억시니를 압축하고 압축해 손바닥 안에 들어갈 크기로 만든 용사는, 말없이 그걸 회수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불사신인 두억시니는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가 없으니 저렇게 봉인해 가져가려는 듯 했다.

싸움은 한 순간에 끝나 정적만이 남았다. 발현시킨 신검을 없앤 용사는 공중에 뜬 채 조용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협력 고맙다. 네 활약은 제대로 전하지.”

그리고 고개를 꾸벅여 인사한 용사는 폭풍과 같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진고요와 같은 전이 계열 능력이었다. 용사가 사라진 뒤 나는 공중에 뜬 채로 머리를 긁적였다.

“활약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혈공주나 용사는 두억시니의 위치를 찾아내 특정해준 것만 해도 충분한 활약이라며 격려해주겠지만, 내가 말하는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방금 용사가 가져간 것은 두억시니의 모든 생명력이 담긴 그릇과도 같은 것.

용사가 그릇을 통째로 봉인해서 가져가준 덕분에 저항할 수단이 없어진 본체는 지금도 날개 달린 섬 안에 남아있을 터였다. 미끼만이 붙잡힌 채 끝난 것에 적잖이 안도하면서.

“뭐, 내기는 내가 이겼군.”

활약은 바로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효파경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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