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파경 (6) >
“방금 그건···.”
한 순간 나타났다 환상처럼 사라져버렸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이 환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착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마력의 여파와 존재감이었다.
대요괴로서 우리 전원을 일격에 쓸어버릴 뻔한 두억시니는 이미 조역으로 격하당해 빛이 바래있었다. 방금 이곳에 나타난 그녀는 그럴 만한 존재였다. 자타공인 세계 최강의 기사이자, 혈왕궁이 비장의 한 수로 숨기고 있는 최종병기.
‘정점에 가깝다’거나, ‘톱클래스’라거나 ‘초일류’라느니 하는 애매한 수식어를 달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말 그대로 정점이자 온리 원. 요정기사나 모자장수처럼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괴물들의 모임인 오봉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존재.
“···용사님이시랜다.”
“설마 용사랑도 아는 사이인 건가?”
“몰라. 방금 처음 봤어.”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사 지망생인데 용사라는 이름을 모르는 얼간이는 없을 테니까. 차대엽은 눈썹을 찌푸렸다.
“용사가 싸우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다니. 이런 귀중한 경험은 다시 없을 텐데도 무엇 하나 얻어가지 못했어. 저건 대체 뭐야.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참고가 안 돼.”
진소란이 진심으로 공감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잠깐 동안 보여준 능력이 몇 개인 건지. 위장색, 신검발현, 조혈술, 풍계전이, 사안, 마안, 또 뭐가 있었지···.”
“신검 위에 호신강기도 두르고 있었지.”
“대단하군···.”
대단하단 것은 단순히 그렇게나 많은 혈통능력을 타고난 용사의 이질적인 태생에 향한 찬사가 아니었다. 그 모든 능력 하나하나를 정점에서도 통용되도록 갈고 닦은 노력과, 그만큼의 능력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한 감탄이었다.
실제로 웬만큼 재능 있는 기사에게 용사의 능력을 전부 몰아준다 해도 대부분의 경우 그 힘의 1할도 발휘하지 못하고 끝나버릴 것이다. 신검의 운용과 호신강기의 갈무리를 같이 하는 것만 해도 쏟아야 할 신경이 두 배로 늘어나니까.
전투 시에 기본적으로 대여섯 개의 혈통능력을 사용하는 용사의 능력은, 단순 계산으로는 대여섯 배라고는 해도 혈통능력을 다루는 역량에 있어서 평범한 기사와는 일반인과 기사의 차이보다도 더욱 아득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용사님 대단하다 시간은 이쯤 하고. 마을 사람들부터 다 되돌려야지. 저 양반들 저대로 그냥 놔둘 거야?”
“그, 그렇지. 빨리 해야지.”
진소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우리 세 사람은 조용해진 마을에서 마물들을 적당히 못 움직이게 제압하고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계속 하다 보니 나나 진소란이나 요령이 붙어 처음보다 훨씬 시간이 단축되었다.
인간으로 되돌린 이들은 전부 진소란의 오두막에 대충 던져서 눕혀두었다. 나중엔 오두막 안의 자리가 부족해져 그냥 그 앞의 땅바닥에 눕혔다. 나는 마을의 상공에 붕 떠서 투시로 아직 남아있는 마물이 없나 면밀히 확인해보았다.
“끝났군.”
나는 드디어 끝났다며 쭈욱 기지개를 폈다.
이제 신경쓸 것도 없으니 마음 놓고 용무를 보러 갈 수 있었다. 전원 처치가 끝났다고 진소란에게 전한 나는 누워있는 사람들을 좀 봐주고 있으라 말한 뒤 다시 마을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내가 내려선 곳은 백로회의 건물이었다.
나는 지붕에 정좌하고 앉아 염력을 끌어내며, 지금 내게 가능한 최대 한도까지 의식 감지의 범위를 넓혔다.
요호 때에도 말한 바 있는 이야기지만, 대요괴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싸움을 거듭할수록 강해져서 나타난다. 1차전에서 완전히 끝장내지 못하면 2차전에서는 반드시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두억시니의 짜증나는 점이었다.
요호의 경우에는 마무리를 짓지 못할 경우 대놓고 이쪽을 놀리며 도망치기에 일이 꼬였다는 걸 알 수라도 있지만, 두억시니는 분명히 죽인 줄 알았는데 한참 나중에 본체를 죽이지 못했었다는 게 밝혀져 사람을 대단히 화나게 했다.
그리고 가장 성가신 경우가 바로 정세나와 동화해 어둑시니와 두억시니 두 대요괴의 권능을 사용하는 이른바 더블시니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게 적으로 나타나면 그냥 그 세이브는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맞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할 때 한 번이나 걸리는 속임수였다. 두억시니는 자기 멋대로 온갖 생명을 반죽해 만들어낸 대요괴의 분신과, 강력한 특수능력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본체로 나뉘어있었다. 혈공주의 파편과 융합해 불사신이 된 것은 전자였다. 눈을 감고 집중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 수로구만.”
이 섬에 있어서 수도는 대단히 중요한 시설이었다. 승인이 없으면 결코 들어갈 수 없고, 내 힘으로 두꺼운 철문을 부숴버리는 것도 무리였다. 두억시니는 약간의 틈만 있으면 빠져나갈 수 있는 유선형의 몸체라 침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순간이동으로 수로의 문을 통과했다.
수로를 터벅터벅 걸어가니 커다란 문 앞을 지키는 괴물이 있었다. 수많은 눈알 무더기가 모여 붙어있는 덩어리 양 옆에 여덟 쌍의 황금색 날개가 달려있는 화려한 생김새였다.
당연히 중요한 본체엔 파수꾼이 붙어있는 게 당연했다. 저것이야말로 두억시니가 능력으로 만들어낸 그의 오른팔, 하나하나의 안구에 보기만 해도 상대를 죽이거나 돌로 만들거나 세뇌하는 끔찍한 능력들이 담겨있는 마안의 천사였다.
특히 저 천사의 마안은 눈을 마주치는 게 아니라 천사가 일방적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효과가 발동되는 불합리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결국 천사의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몸을 투명화한 뒤 느긋하게 문 앞에 서서 순간이동했다.
순식간에 문 건너편으로 이동한 나는,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는 붉은 색 액체 괴물을 향해 안녕 하고 손을 흔들었다.
“저 친구도 너처럼 ‘보기만 해도 죽인다’는 말도 안 되는 특수능력이 있지만, 몸뚱이 자체의 공격력은 거의 전무하지. 그야 눈알들이 뭉친 덩어리니까 당연한 거긴 해.”
즉 침입자가 문 너머에서 본체와 대면하고 있는데도 철문을 부술 수가 없어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응시할 수만 있다면 차대운마저 전투불능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괴물이지만, 시야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문 건너편에서 파닥파닥 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차피 저래봐야 몇 년이 걸려도 자력으로 문을 열지는 못할 테니 나는 그냥 신경을 껐다. 그리고 슬라임이 진동했다.
<혼자서 온 건가.>
“어떻게 알고 왔냐고는 안 하네.”
<그럴 필요는 없다. 이제 너는 내 수족이 되어 살아갈 테니. 내게 전투능력이 없다는 걸 알고 얕보았나 보군.>
그리고 부르르 떨던 두억시니가 크게 확산하며 말했다.
<그 피를 폭주시켜주지. 괴물이 되어 울부짖어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억시니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듯 멈춰있다가, 다시 몸을 쫘악 펼치며 나를 향해 능력을 발동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어째서.>
두억시니의 본체는 분신과 달리 전혀 전투능력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꽉 쥐어 부수는 것만으로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다 해도 두억시니의 무서운 점은 바로 그 특수능력이었다. 혼혈인 이상 무방비한 본체를 대면할 수 있었다 해도 그 순간 폭주당해 두억시니의 수하가 된다.
예외라고 하면 생명으로서 완벽하게 안정되어있는 혈왕들이나, 이미 한계를 넘어있는 탈선자들. 그리고 바로 나였다.
그야 내게는 폭주할 만한 혼혈로서의 혈통 자체가 없었다. 폭주할 건덕지조차 없어 능력이 발동되지 않다니 참으로 슬픈 현실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두억시니는 액체화해 유동형으로 변했다.
붙잡기 힘든 형태가 되어 얇은 문틈이나 하수구를 이용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숨을 쉬며 투명한 막 안에서 출렁대는 두억시니의 본체를 바라보았다.
“거긴 얇은 틈이고 뭐고 없어.”
그야 염동력으로 만든 것이니 당연했다. 여기까지 와서 두억시니 자식을 놓칠 리가 없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혈공주였다.
영상통화로 전환한 난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브이사인을 보낸 뒤 화면을 돌려 두억시니의 본체를 보여주었다.
“내기는 내가 이긴 걸로.”
그리고 주먹을 천천히 꽉 쥐어, 염동력으로 감싼 그대로 두억시니의 본체를 중심이 되는 핵과 함께 터뜨렸다. 얼마 안 있어 띠링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대상 : 두억시니 (1/1)>
문앞에서 파닥이던 눈알 괴물 천사는 형체를 잃고 무너져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지하 수로를 올라갔다.
* * *
오두막에서는 이제 꽤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차대엽은 사람들과 딱히 대화하고 싶지 않은 듯 저편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야 자기가 쥐어패 피멍이 든 사람들과 대화하긴 좀 그렇겠지.
그리고 진소란의 경우, 쓰러져서 누워있던 백익 혼혈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원을 만들어 무릎 꿇고 있었다. 기도하는 그들은 역시 흑익 님이야말로 우리들의 수호신이었다며 눈물까지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마을 안에 당신이 호화롭게 살아갈 거처를 만들 테니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고도 했다.
아마 폭주해서 마물로 변이당해 혼탁한 급류 아래에 의식이 가라앉아있었을 때, 손을 내밀어 이쪽으로 당겨준 진소란의 이미지가 마치 여신처럼 그들에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소란이 그렇게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던 흑익의 역할 그 자체가 되었음에도, 기도의 중심에 서있는 그녀는 기쁘긴커녕 곤란하다는 듯한 씁쓸한 웃음만을 짓고 있었다.
분위기가 소강된 뒤, 흑익님을 위한 축제를 벌이겠다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 하고 진소란은 숲속을 걷고 있었다. 뒷짐을 진 채 공중에 두둥실 떠 날아가던 내가 입을 열었다.
“뭔가 미안하네.”
“뭐가?”
“알게 해버려서.”
나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말했다.
마을의 백익들을 마물에서 돌려놓으면서, 진소란은 나를 매개로 마을 사람들의 의식과 몇 번이고 접촉했다. 그렇게 반복하면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특히 자신의 조부를 구해내려 했을 때.
“···사실 알고는 있었어. 그렇게 생각하면 슬프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지.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 전엔 알 수 없으니까, 그 전까진 이쪽 멋대로 생각할 수 있지.”
힘없는 표정에 나는 콧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은 진짜로 너에게 기대하는 것 같던데.”
“···하지만 이제 그 기대에 응할 생각은 없어.”
“그러면, 이제 착한 아이는 그만두고 한 번 내 맘대로 살아봐야겠다? 좋은 생각이긴 하네. 진짜 좋은 생각이야.”
“그만두지 않아.”
내 말에 진소란이 단호하게 말했다. 고개를 치켜든 진소란의 눈빛은, 이전보다도 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이상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었다. 진소란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기대한다는 말이 전부 거짓말이었건, 흑익의 전승이 지어낸 이야기였건 상관없어. 올바른 일이란 건 언젠가 인정받고 칭찬받을 테니 열심히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리고 꽉 쥔 주먹을 가슴에 가져다댔다.
“올바른 일은 올바르다. 그걸로 충분해. 나는 이야기 속의 흑익을 들었을 때 그렇게 되고 싶다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 내가 나한테 기대하는 내 꿈이야.”
“그게 네 맘대로 사는 거지 뭐.”
오두막에 돌아오자, 바닥에 앉아있는 차대엽이 한 아이와 공기놀이를 하며 놀아주고 있었다. 아이의 목에는 검은 깃털을 세공한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진소란은 살짝 놀라 입을 벌렸고, 고개를 돌린 아이가 서운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떠나는 거야?”
당연히 차대엽도 마물일 때 흠씬 얻어맞아 자기 얼굴만 보면 무서워하는 백익들 사이에서 축제를 즐길 마음은 없었고, 오늘 몰래 섬을 떠나기로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아마 끈질기게 추궁당한 끝에 차대엽이 아이에게 말해준 듯 싶었다.
잠깐 입을 벌리고 있던 진소란이 단호히 대답했다.
“···그래.”
“왜? 어른들도 안 떠나도 된다고 하는데. 이제는 흑익님이 있는 곳에 매일매일 찾아가도 괜찮다고 했는데.”
“제대로 된 ‘흑익’이 되려면, 이곳에 묶여있어선 안 돼.”
진소란의 말에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진소란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응. 이번엔 우리를 지켜줬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지켜줘.”
그리고 진소란의 손에 무언가를 꼭 쥐여주며 넘겨주었다. 진소란이 손바닥을 펴서 확인하자, 그것은 하얀색 깃털을 가공한 목걸이였다. 아이가 수줍은 미소로 진소란에게 말했다.
“내 깃털로 만들었어! 흑익님의 수호천사가 될 수 있게! 흑익님 목걸이랑 다르게 하얀 깃털은 많지만···.”
그 말에 목걸이를 내려다보던 진소란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이가 만들어준 하얀 깃털의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건 진소란은, 처음 보는 듯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하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천천히 오두막에서 멀어지는 우리 세 사람의 등을, 아이는 계속 오두막 앞에서 손을 흔들며 지켜보고 있었다.
< 효파경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