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한삼우 (1) >
적풍회주, 진고요는 전화 맞은편의 소년에게 말했다.
“네가 보내준 데이터는 다 읽었다.”
사실 그것은 깔끔하게 정리된 데이터라기보단, 투박하게 휘갈겨쓴 메모들의 나열에 가까웠다. 부하가 이런 걸 참고 서류라고 올렸다면 당장 불러서 장난치는 거냐고 혼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쓰인 내용들은 전혀 장난 같은 게 아니었다.
숨겨진 지형부터 편성, 주의해야 할 트랩의 기믹까지. 사전 조사를 한 게 아니라 이미 실제로 한 번 싸워본 인간이 보고서를 올린 듯한 구체적인 정보였다. 현장 조사의 스페셜리스트인 그 유경명도 여기까지 내부를 꿰뚫어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그 요호의 술수를 하나도 남김없이 간파한 소년이다. 이제 와서 연구소 하나의 비밀 정도를 낱낱이 캐내봤자 전혀 놀랍지 않았다. 진고요가 놀란 것은 오히려 이 이혈 연구소가 숨기고 있던 전력 그 자체였다.
“마물도 인간도 아닌, 이혈의 능력으로 기반으로 한 본 적도 없는 생체병기들. 천문학적인 액수의 후원금을 기반으로 한 완벽한 방비 시스템. 일류 기사에게도 꿀리지 않는 뒷세계의 프로 용병들이 한가득. 그리고 배후에는 요괴들···.”
겉보기로는 멀쩡한 연구소인 데다 실제로 여러 성과들을 내고 있기는 했지만,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는 했다. 폭력 조직한테 대금을 지불하고 실험체로 쓸 아이들을 받아간다든가, 혹은 반대로 연구소의 허물을 떠넘긴다든가.
제대로 된 짓을 하는 놈들이 아니라는 건 뒷세계의 심층에 몸을 둔 자들이라면 전부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상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은 전력이었다. 막말로 이 정도면 기사단이 쳐들어오든 말든 역으로 쓸어버릴 수 있었다.
“이만한 전력을 가지고도 총수는 뭐에 겁 먹었는지 어딘가에 꽁꽁 숨어버렸지만, 솔직히 말해서 뒷세계를 평정하는 게 더 빠를 수준이군. 이런 걸 동네에서 힘 좀 세다 까불고 다니는 중소 규모 깜찍한 조직 하나만 데리고 정리하라니.”
<부족해?>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진고요는 고개를 돌려 송한솔이 토벌 전력 명목으로 보내준 호랑이굴의 조직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잔뜩 쫄아서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제부터 싸워야 할 적의 강대함에 위축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원인은 바로 조직원들의 옆에 서있는 남자였다.
웃는 얼굴로 조직원들에게 한쪽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는, 아무리 진고요라고 해도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검성 차대운. 저 또래의 젊은이들 세대에서는 최강이라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는 존재였다. 어쩌면 그 위까지 통틀어서도.
“인사 좀 받아달라니까. 그때 건물 좀 베었다고 아직도 삐진 거야? 그건 내가 미안했어. 그래도 애초에 너희가 한솔이를 납치한 게 잘못이니 쌤쌤이로 넘어갈 수 있는 거잖아?”
그리고 그 맞은편, 차대운과는 달리 대단히 과묵한 얼굴을 한 채 앉아있는 건 진고요의 친구이자 현역으로 복귀한 호걸 유경명이었다. 산군 혼혈들을 주류로 이루어진 조직인 호랑이굴에 더없이 어울리는 외관이었다. 진고요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호랑이굴의 전력 따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적풍회 간부 혼자서도 전원 박살낼 수 있는 수준이다. 할 수 있는 역할이라 해봐야 바깥에서 누가 들어오지 않게 입구를 막고 봉쇄하는 정도겠지. 진짜 전력은 바로 저 둘이었다.
유경명과 차대운. 단 두 사람의 전력.
그것은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신검합일을 한 차대운과 호신강기를 두른 유경명이 그저 걸어나간 것만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수십 명의 용병들과 대 기사용의 결계 방비 시스템이 무참하게 찢겨져나가 예리한 칼날에 절단당했다.
저 두 초인은 이미 수준 이하의 적이라면 열 명이 모여있든 백 명이 모여있든 전혀 의미가 없는 레벨에 도달해있는 것이다. 아마 웬만큼 노련한 중견 급의 기사라고 해도 그 ‘수준 이하의 적’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겠지.
최전선에서 싸우는 현역 기사를 상대로도 결코 자신이 밀릴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진고요였지만, 저 둘을 상대로라면 도망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호랑이굴의 조직원들까지 가면, 눈앞에서 벌어졌던 신화적인 파괴 행위에 자신들이 휩쓸릴까봐 덜덜 떨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유경명과 차대운은 자신의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지만, 코앞에 있던 기둥이 섬뜩하게 잘려나가는 경험을 한 조직원들 입장에선 두려워서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진고요조차 조금 긴장할 수준이었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저 앞에는 무섭다거나 긴장했다거나 유경명과 차대운 두 사람의 초월적인 무력에 놀랐다는 기색은 전혀 없이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고 있는 여자아이 한 명이 있었다.
새까만 빵모자를 눌러쓴 채 진보라색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는 여자아이. 조직원들이 보기만 해도 벌벌 떠는 저 차대운을 발로 차며 노예는 일이나 하라고 부려먹는 소녀였다.
“아, 이런 좋은 재료들이 한가득···. 따라오길 잘했어.”
송한솔이 뒷정리와 청소 역으로 쓸만할 거라고 보내준 소녀는, 싸움에는 조금도 끼지 않고 뒷짐을 진 채 구경만 하다 박살이 나버린 생체 병기들에 다가가 발밑에 그림자를 전개시켜 소화하듯 천천히 가라앉혔다. 이내 그곳에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떨어진 건물의 잔해만이 남았다.
요호 토벌전 때도 구경한 적이 있지만, 송한솔이 보내준 전력은 하나같이 여러 모로 자신의 상식을 뛰어넘어있었다. 진고요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 맞은편의 송한솔에게 말했다.
“연구소를 괴멸시키는 건 문제가 없을 거다. 저건 무슨 변수로 상황이 꼬일 만한 그런 수준이 아니야. 둘이서 산책하듯 걷기만 해도 막을 수 있는 인간이 없겠지. 하지만 괜찮은 거냐? 이렇게 휘저으면 아무리 그래도 총수가 돌아올 텐데.”
그것이 지금 진고요의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이 연구소의 배후에 있는 것은 그 요호와 같은 대요괴였다. 진고요는 진정으로 그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간이었다. 정말로 그 총수가 요호와 맞먹는 수준의 존재라면, 그가 돌아오는 것만으로 이 상황은 충분히 뒤집힌다.
<아, 그거라면 걱정할 거 없어.>
그리고 전화 맞은편의 송한솔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숨어있던 거 찾아서 내가 죽였거든.>
“···뭐?”
깜빡 안 꺼둔 가스불 돌아가서 제대로 끄고 왔다 하는 듯한 일상적인 목소리였다. 송한솔의 담백한 대답에 진고요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릴 뿐이었다.
* * *
짧았던 방학이 끝나고 세한기전의 수업도 2학기에 들어섰다. 나는 훈련장 스탠드에 앉아 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2학기 시작 치고는 다들 상당히 강해졌어.’
진소란은 한정 탈선을 익히기 시작했고, 금예린은 요호의 유해 무기 호선도를 손에 넣었다. 은세연은 인형인 주검각시를 완벽히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차대엽 또한 초대 검성의 신검과 교감하기 시작했다. 주하리는 뭐 그냥 용기사였다.
충분히 빠른 성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그것보다 더 빨라졌다. 1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대요괴 둘을 박살낸 것이다. 이건 상당히 훌륭한 성과였다. 무엇보다 제일 뒤가 구린 요호와 두억시니를 해치운 것이 유효했다.
두억시니는 사실 그냥 용사가 대신 잡아준 거라 할 수 있지만, 둘 다 조금만 더 방치했다면 참극을 일으켜 웬만한 방법으로는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남은 두 대요괴는 비교적 껄끄럽지 않았다. 불가살이는 은거중이고, 이무기는 음습하게 뒤에서 일을 꾸밀 만한 성격이 아니다.
‘강한 건 이쪽이 훨씬 세다는 게 문제지만···.’
이무기와 불가살이 둘 다 요호나 두억시니처럼 특수한 권능에 기반한 강함이 아니라 그냥 맨몸으로도 무지막지하게 센 놈들이기에, 이쪽도 대요괴와 그럭저럭 맞상대가 가능할 수준으로 강해지지 않으면 공략 자체를 시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만큼 교통정리를 해놨으면 바로 무언가 사건이 터지진 않을 테고, 다른 녀석들과 같이 강해질 만큼 강해진 뒤 정면에서 박살내면 그뿐이다. 저편의 훈련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진소란이 차대엽을 향해 도약해 검을 내리쳤다.
진소란이 검을 내리치는 순간, 검에 둘러진 깃털이 곤두서며 새까만 마력을 터뜨리며 뿜어냈다. 극단적으로 가벼움과 속도만을 추구한 진소란의 검에는, 필연적으로 유경명의 검격과 같은 무거움이 없다. 하지만 지금의 일격은 달랐다.
“흐읍···!”
흑익천추(黑翼天椎). 원래는 대상에게 중압을 가해 움직임을 봉하는 검은 깃털을 공격에 활용해, 휘두르는 검의 파괴력을 순간적으로 높이는 기술이었다. 한정 탈선을 통한 도약과 함께 사용하면 웬만해서는 대응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차대엽은 당연하게도 웬만치 않았다. 힘의 흐름을 한 박자 먼저 파악하는 귀안은 대응할 수 없어야 할 공격마저 예측할 수 있게 만든다. 차대엽은 공격을 흘려내며 반격을 시도했고, 진소란은 한 번 더 도약해 카운터에서 벗어났다.
두 사람의 순간적인 공방에 같은 반 녀석들은 물론 지도하는 교수마저 놀라고 있었다. 1학기 순위전에서도 괴물이냐고 사람들을 기겁하게 한 녀석이, 방학 사이에 한 단계 더 강해져서 온 것이다. 그런 차대엽과 정면에서 맞대결할 수 있는 진소란 또한 학생들의 화젯거리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수업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모두가 깨닫겠지. 세한기전 최상위의 괴물같은 녀석들은 실시간으로 게걸스럽게 강해지고 있다는 걸. 그리고 교실로 돌아가려 하던 나를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아보았다.
“송한솔.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건 처음인가?”
팔짱을 끼고 나를 불러세운 건, 오만하다 느껴질 만큼 입꼬리를 올린 채 날카롭게 눈을 치켜뜬 여자 선배와, 그 옆에서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남자 선배였다.
당신이 누구냐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교복의 넥타이와 리본의 색깔은 3학년. 두 사람이 상의 어깨 위에 걸치고 있는 케이프는, 세한기전의 학생회만이 덮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선도부장 민유리와 함께 세한기전 학생들의 정점에 서있는 자.
이 두 사람이야말로 순위전의 제패자, 세한의 학생회장과 부회장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시치미를 뗐다.
“저 아시나요?”
“그야 유망한 1학년이라면 누구든 체크하고 있는 우리가 네 이름을 모를 리가 없겠지. 입학하자마자 학교의 정보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던 네 행적을 볼 때 네가 우릴 모를 리도 없을 테고. 그렇지 않나, 몇 년만의 흑패 소유자 님?”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다름이 아니라···.”
옆에서 말을 꺼내려던 남자 선배를 학생회장이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이야기는 오로지 자신이 하겠다는 뜻이었다.
“널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다, 1학년. 2학기가 되면 다른 학년에의 도전권 또한 지급된다는 건 알고 있나?”
그야 알고 있었다. 혈통시대에서 유매는 그것을 이용해 친선전이 아닌 공식 순위전에서 유설을 박살내려고 했었고, 역으로 박살이 난 뒤 유설을 더더욱 증오하게 되었으니까.
“혈기왕성한 1학년이니 당연히 정점이란 이름을 손에 넣고 싶다는 야심쯤은 품고 있겠지. 나도 그런 1학년들의 청춘을 훼방놓으며 상대를 거절할 만큼 매정하지는 않아. 학생회장이 1학년 수십 명의 지명을 받는 건 세한의 연례행사다.”
그것은 하나의 이벤트였다. 보통 도전권을 받는다고 해서 그걸 바로 최강자에게 써버리는 간땡이가 부은 녀석들은 거의 없겠지만, 간이 부어있는 걸 넘어서 배 밖으로 튀어나온 상승욕구의 화신들만 모여있는 게 바로 이곳 세한이었다.
앞에 줄을 서있다 몇 초만에 나가떨어져 피떡이 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나라면 다르다는 근거 없는 자만심으로 경기장에 들어간 뒤 자신 또한 개박살이 나는 걸 당돌한 1학년들 전원에게 체험시켜준다. 모든 학생들이 목표할 수 있는 굳건한 벽으로서 존재할 것. 그것이 학생회장의 의무였다.
“단순히 새싹들의 자존심을 짓밟아주는 것만이 아니라, 다음 학생회의 1학년 멤버를 누구로 할지에 대한 심사도 겸하는 일이지. 대충 3분 정도 버티면 충분히 합격선이라고 해도 좋아. 나는 1학년 상대라고 해도 봐주는 게 없으니까.”
“그건 알겠는데 저는 왜 찾아오셨어요.”
“너, 도전권을 쓰지 않을 셈이지.”
학생회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왜 내가 사람 우글거리는 곳에 힘들게 줄 서서 이 여자한테 죽도록 맞은 뒤 쫓겨나는 바보같은 짓에 시간을 쏟겠는가. 놀이공원에서도 줄 서는 게 싫어 회전목마나 타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내 스타일이었다.
퀘스트로 보상을 내건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세한기전의 현 최강자였다. 상당히 성장한 지금의 차대엽과 진소란 또한 정면에서 이 두 사람을 꺾는 것은 힘들었다. 내 경우에는 당연히 말할 것도 없었다.
어깨를 으쓱인 것으로 대답이 되었는지 학생회장이 나를 쏘아보았다. 그렇게 도망쳐서는 곤란하다는 얼굴이었다.
“네가 쓰지 않으면, 내가 너한테 도전권을 쓰겠다.”
“무슨···.”
“그게 싫으면 순순히 도전하라는 거다.”
깡패의 위협이나 다름없는 말에 난 눈썹을 찌푸렸다.
이미 배울 거 다 배우고 기술적으로도 완성된 3학년이 아래 학년에 도전권을 써서 싸움을 건다는 것은 양민 학살이라는 네 글자로 설명이 끝나는 일이었다. 이겨도 나가 죽어라 야유만 듣고 졌다간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 승부다.
그런 짓을 사실상 세한기전 순위전의 최종 보스라고 할 수 있는 학생회장이 나한테 건다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폭거였다. 하기야 순위전의 진짜 최강자는 학생회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옆에 서있는 부회장 형이었지만.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내 표정에 학생회장이 크큭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 어깨에 손을 툭툭 두드렸다.
“양쪽 다 싫다면 방과후에 학생회실로 와라. 올해는 조금 다른 느낌의 행사를 기획하고 있거든. 아무래도 네 협력이 필요하다. 특별 게스트가 너 하나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도 싫다고 하면요.”
“들을 수밖에 없을 거야. 재미있는 걸 찍었으니까.”
복도 한쪽을 점거하고 있던 학생회의 두 사람은, 수업종이 침과 동시에 망토를 크게 펼치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학생회들에게만 허락된 케이프의 캠퍼스 내 전이기능이었다.
“저거 편해보이네···.”
나는 수업이 끝나고 터덜터덜 걸어가 학생회실의 문을 열었다. 뭔지는 몰라도 이야기나 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혈통시대에서의 행적을 생각하면 3인 1조로 팀을 이뤄 학생회를 상대해라, 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일 것이다.
‘3대 1이면 어떻게 이길 만 할 것 같은데.’
학생회장도, 사실은 학생회장 이상의 실력자인 부회장도 세한의 정점에 걸맞은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민유리가 손도 못 쓸 정도니까. 혈통시대에서 학생회장과의 싸움은 사실상 강제 패배 이벤트였다는 걸 생각하면, 4학년으로 도망치기 전에 한 번 제대로 꺾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어떤 조합으로 싸워야 이길 수 있을까 소소하게 생각하던 나는, 학생회실 안의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에는 싸움의 흔적 같은 건 전혀 없이 깔끔했다. 흐트러진 물건 하나 없는 평소대로의 학생회실이었다. 그럼에도 학생회장도 부회장도, 탈진한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쓰러져있다. 그리고 그 팔다리가 강한 마력으로 구속되어있었다.
“늦었네.”
그리고 학생회실의 책상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건, 마녀 모자를 커다랗게 변화시켜 눌러쓰고 있는 유매였다.
< 세한삼우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