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102화 (102/113)

< 세한삼우 (2) >

나는 학생회실에 쓰러져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벽에 기댄 채 신음을 흘리는 학생회장과 부회장은, 이미 완전히 뻗어 제대로 일어설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집무용 책상에 걸터앉아있는 유매와 눈을 마주쳤다.

“네가 한 거냐?”

내 말에 유매는 책상에서 살포시 내려와, 시답잖은 질문 하지 말라는 듯 콧숨을 내쉬었다. 그야 상황을 보면 유매 이외에 다른 범인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은 도저히 유매 혼자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야 대요괴니 뭐니 하는 걸어다니는 재해들과 비교하면 빛이 바래겠지만, 세한의 회장과 부회장은 엄연히 순위전 파트의 최종 보스이자 우리 학년이 뛰어넘어야 할 벽이었다.

이미 일류 기사에 한없이 가까운 역량. 폼으로 온갖 괴물들의 집합소인 세한기전에서 학생들을 이끌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확실히 말해 이번에 새로운 기술을 익히게 된 진소란이나 차대엽이라 해도 저 두 사람을 상대로는 크게 밀렸다.

‘주검각시 정도는 나와야 체급이 맞겠지.’

그럼에도 학생회실의 내부는 싸움 따위 처음부터 일어난 적도 없는 것처럼 깨끗했다. 주변이 난장판이 되기 전에 단숨에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상대방과 상당한 수준 차이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유매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력자는 어디 있어?”

“조력자?”

“저 선배들 꽤 세잖아. 혼자 처리하진 못했을 텐데.”

내 말에 유매는 기가 찬다는 듯 날 노려보았다.

“왜 싸운 거냐고 묻는 게 먼저 아니야?”

“뭘 새삼스레. 네가 안 싸우는 게 오히려 신기하지.”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보다 대체 누가 도와준 거야? 저 둘을 상처 하나 없이 이길 수 있을 만한 양반이 우리 학교에 있었다고?”

나는 유매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겉으로는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한에 이런 결과를 낼 수 있을 만한 학생은 없었다. 그것은 즉 이 학교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피식 웃은 유매가 손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뭐야?”

“조력자를 물어봤잖아. 그래서 가리킨 건데.”

그리고 유매가 쓰고 있던 커다란 고깔모자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삐뚤빼뚤 바느질되어 모자의 입처럼 보이고 있던 부분이 살아있는 생물과 같이 움직였다. 이내 유매의 머리 위에서 둥실 하늘에 떠오른 모자가 유령처럼 흐릿해졌다.

“모자령이···.”

그리고 정령과 같은 빛무리로 화한 모자는, 마력의 소용돌이와 함께 유매의 손끝에 걸려있는 펜던트에 빙의하듯 스며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는 명백했다.

“마녀공예.”

마녀 혼혈들이 행사하는 고유한 혈통능력 중의 하나.

그 능력은 모자령을 깃들게 한 물건 내부로부터 회로를 세공해, 평범한 물건을 마도구화시키는 것이었다. 모자령이 깃들 수 있는 건 강한 애착과 인연이 있는 물건 뿐이기에, 보통 한 마녀는 많아봐야 한두 개의 공예밖에 가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유설의 경우, 어릴 적부터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던 동화책을 마녀공예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누구도 다치거나 죽지 않는 상냥한 결말의 이야기책은, 혈통시대에서 극도로 희귀한 범위 치유의 능력을 유설에게 가져다준다.

‘유매와 싸울 때는 꺼내도 의미가 없었겠지만.’

한 순간도 주문을 발사하는 걸 멈출 수 없는 일 대 일의 화력전에선 회복 능력 따위 쓸모가 없었다. 어떻게 틈을 벌었다 해도 유매라면 마력독재로 간섭해 방해할 테고. 하지만 다수가 팀을 이뤄 싸울 때는 그만큼 든든한 능력도 없었다.

그리고 유매에겐 마녀공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 시점에서는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유매가 유설보다 마녀로서의 재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무언가에 의지하는 걸 꺼려하던 유매에겐 모자령을 깃들게 할 만한 인연의 물건이 없었던 것이다.

혈통시대의 유매가 처음으로 마녀공예를 만들어낸 건 유설이 자신을 감싸고 죽고 난 뒤. 어떤 주문이나 방어막이든 짓밟혀 진흙이 된 눈처럼 녹여버리는 ‘흑설의 지팡이’였다.

그리고 유매의 목걸이가, 유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꽂혀있는 펜던트가 모자령을 머금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력이 펑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천천히 회전하며 내려온 건, 눈꽃 결정 모양의 장식이 끝에 박혀있는 새하얀 지휘봉이었다.

그리고 유매의 옆에서 새빨간 불꽃이 휙 타올랐다. 아무런 동작도 없이 발현된 화염의 주문은, 유매가 하얀 지팡이의 끝을 그쪽에 향하자마자 눈꽃같은 빛의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몇 번이고 이 두 눈으로 본 적이 있는 능력이었다.

“마력중재···.”

스스로가 세공한 마력을 부딪쳐 적의 마력을 상쇄시키는 유설의 혈통능력이었다. 유매가 만들어낸 저 지팡이 마녀공예의 능력은 명약관화했다. 마력중재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물론 보통의 혼혈이라면 마력중재를 쓸 수 있어도 적의 공격이 날아오는 시간 안에 마력을 세공하진 못하겠지만,

‘마력 조작에 있어서 유매는 천재 그 이상이지.’

그리고 원래부터 마력독재를 지닌 유매가 언니의 혈통능력인 마력중재까지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건, 단순히 강력한 능력이 두 개로 늘어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구만. 학생회를 혼자 제압할 만도 해.”

간단한 이야기였다. 신기에 가까운 수준으로 단련된 유매의 마력독재는 상대방의 몸 안에서 흐르고 있는 마력에까지 간섭할 수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마력의 원래 주인과 고삐를 붙잡고 제어의 주도권을 쟁탈하는 것 정도로 끝나겠지만.

‘거기에 마력중재가 더해지면.’

상대방의 마력으로 상대방의 마력을 계속해서 상쇄시키는 말도 안 되는 짓이 가능하게 되어버린다. MP를 무작정 0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똑같았다. 아무리 강력한 기술을 지니고 있다 해도 몸에 마력이 남아있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도 너한텐 통하지 않는 모양이네.”

내 쪽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어본 유매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야 나한테는 마력이란 것 자체가 전혀 없으니 마력중재도 마력독재도 통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장점이라기보단 능력치 하나가 통째로 없는 결함에 가까운 사실이었지만.

그리고 유매가 학생회장의 책상에 놓여있던 서류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녀가 안을 뒤적거리다 꺼낸 건 한 장의 사진이었다. 거기에 찍힌 건 축제 전날 학교 밖에서 용병들과 싸우고 있던 나와 차대엽의 모습이었다. 사진을 본 유매가 말했다.

“이 사람들, 1학기부터 우릴 관찰했다나 본데. 학생회가 정식으로 문제 삼으면 징계감인 것들 투성이니, 눈감아주길 원하면 자기들이 기획한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길 바란다고. 약점 잡은 것처럼 우쭐한 말투로 떠들어대더라.”

유매가 같잖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회장이 나를 호출한 것 또한 같은 용무였을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은 유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선 쉽게 상상이 갔다. 유매가 손끝으로 집어들고 있던 사진이 한 순간 화르륵 불타 사라졌다.

“웃기지 말고 그거 이리 내놓으라 했더니, 없애고 싶으면 힘으로 가져가보든지 하라고. 그래서 원하는 대로 해줬지.”

그 결과가 저기 벽에 탈진해서 쓰러져있는 두 사람이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학생회장도 부회장도 자신들이 1학년 한 명한테 박살이 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봉투에서 종이를 하나씩 빼내며 불태우는 유매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 협력해달라던 행사란 건 뭐였는데?”

내 질문에 유매가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기분이 좋다는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얼굴을 본 나는 순간 등에 오한을 느꼈다. 유매가 저런 식으로 표정이 드러나게 웃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전달해야 할 사람들이 저 상태니 내가 말해야겠지.”

이내 유매는 둘둘 말린 채로 책상 옆에 세워져있던 포스터를 마력으로 공중에 띄워, 휘리릭 펼치면서 고정시켰다. 그리고 학생회 문장이 찍힌 포스터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첫째. 오늘부터 예선 기간이 끝날 때까지, 보유한 명찰이 3개 이하인 학생들은 정식 절차를 거쳐 요청받은 대련을 거부할 수 없다. 둘째. 도전자에게 항복하거나 패배할 시 예선 기간 내 해당 학생의 대련 참여권이 박탈되며, 박탈된 학생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명찰을 승자에게 양도한다.”

“뭐···.”

“셋째. 예선 기간이 종료된 뒤 보유 명찰이 가장 많은 상위 8인이 본선에 진출하며, 보유하고 있는 명찰에 한해서 원하는 학생을 2명까지 자신의 팀원으로 지명할 수 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유매의 옆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야 그거, 학년 구분도 없이 기사육성과 전원이 강제 참가라고? 학교를 뭐 전쟁터로라도 만들 생각이냐?”

상상한 것보다 훨씬 무지막지한 방식이었다. 이런 건 도저히 도저히 학생회의 권한만으로 주최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었다. 나는 유매가 말한 것의 뒷부분을 이어서 읽어보았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포스터에는 세한기전의 학장인 천년서생의 직인이 찍혀있었다. 학장이 개입한 이상 이건 이미 학생회가 주최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공식적인 학교 행사였다.

본선은 졸업시험 용의 인공섬 부지를 통째로 써서 진행하는 3인 1조의 모의전. 우승을 차지한 학생에게는 자신의 영향력 안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학교 생활에 바라는 부탁을 어떤 것이든 하나 들어주겠다는 학장의 장담이 쓰여있었다.

천년서생은 경쟁의 보상에 대해서는 굉장히 후한 사람이다. 도서관의 자리 일부를 유설에게 전용석으로 제공한 것처럼,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이든 현실적으로 가능만 하다면 정말 들어줄 것이다. 아마 졸업도 시켜줄지 모른다.

“근데 넌 이런 거 좋아하는 타입 아니지 않나? 누가 도전해오면 관심 없으니 귀찮게 굴지 말라 박살낼 것 같은데.”

“아니. 우승할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유매는 농담을 하고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학생회장과 부회장의 명찰이었다. 세한기전 최강이라 말할 수 있는 두 명을, 유매는 이미 굴복시킨 상태였다.

“이 학교의 학생회장은 대대로 학교에서 가장 강한 학생이 맡는 게 전통이라며? 전통은 존중해줘야지. 소중한 거니까.”

“너···.”

“내가 학생회장이 되면, 그 복도 구석의 도서실을 학생회실로 지정할 거야. 어차피 우리 말곤 아무도 쓰지 않는 곳이지만, 정식으로 우리 구역이라고 인정받고 싶으니까.”

“잠깐 기다려. 우리, 라니.”

세한기전의 학생회장은 취임했을 때 부회장을 지명할 수 있다. 보통 자신이 회장이 되도록 도와주었던 학생을 지명하고···. 생각하는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차기 부회장 님. 내가 우승하면 이제 바깥에서 이상한 짓 하고 다닐 틈도 없을 거야. 학생회장 명령으로 뺑뺑이를 돌릴 거니까. 보람찬 캠퍼스 생활을 마음껏 만끽해줘.”

“···엄청 제멋대로인 말을 하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어. 그러니까 싫다면 나를 이겨서 막아.”

유매가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내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의중을 밝힌 건 아마 유매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캠퍼스 밖으로 쏘다니지 않도록 옆에 단단히 매어놓겠다는 결의는 확고해보였다. 솔직히 곤란하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밤늦게까지 학생회 일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뭐라고 설득해보려 했지만, 이내 차대엽이 했던 말을 상기해내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유매도 머리 끝까지 화가 나있을 거라 했었나.

“···누가 이기든 결과에 승복하기. 뒤끝은 없는 거야.”

“좋아.”

유매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염력을 이용해 순간이동했다. 바깥 복도에 내려선 나는 1학년 건물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유매도 나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면, 결국엔 싸워서 굴복시킬 뿐이다. 벽보는 아마 오늘 중으로 붙을 테고,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드르륵 교실 문을 열었다.

우선은 팀원 찾기부터였다.

< 세한삼우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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