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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103화 (103/113)

< 세한삼우 (3) >

세한기전의 분위기는 전에 없이 달아올라있었다.

커다란 이벤트가 열린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주목받은 것은 다크호스의 등장이었다. 세한에 입학하자마자 2학년 최강의 일각인 유설을 쓰러뜨리고, 이번에는 학생회장과 부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학생회 팀의 리더를 맡은 신입생.

다름이 아니라 유매의 이야기였다. 저 아이를 차기 학생회장으로 찍어둔 것이다, 후계자 멘토링이다, 인수인계를 위해 경험을 쌓아주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지만 그 어떤 소문도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간단했다.

‘강제로 쥐어패고 복속시킨 거지.’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유매가 마녀공예를 쓸 수 있게 된다면 분명 눈에 띄는 성장을 하게 될 거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세한의 정점인 학생회의 두 사람을 일방적으로 꺾어버릴 수 있는 괴물 같은 강함을 손에 넣을 줄은 몰랐다.

물론 아무리 유매라도 차대엽을 정면에서 박살낼 수 있는 그 학생회의 두 사람을 스펙으로 찍어누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매의 무서운 점은 그 상성의 강함에 있었다.

마력독재와 마력중재. 서로 간에 힘의 차이가 몇 단계가 나든 말든, 혈통능력이 마력에 의존하며 마력을 제어하는 실력이 유매와 견줄 수 있을 만큼 뛰어나지 않다면 유매와 대면한 시점에서 대부분의 힘을 잃고 무력화되는 것이다.

세한기전 학생들을 비롯해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사들 대부분이 마력을 사용하는 혈통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건 이미 상성의 차이라고 부르기도 뭐했다.

그 희생자에 예외가 있다면 몸의 마력을 펑펑 쓰지 않고도 피지컬만으로 승부를 낼 수 있는 유경명 같은 타입이나, 즉석에서 유매의 마력독재에 대비하기 하나만을 위한 신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차대엽같은 센스의 결정체 뿐일 것이다.

아마 학생회도 다시 싸우면 유매에게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 몸 안의 모든 마력을 소멸시켜버리는 유매의 신기술은 분명 처음 당하면 답이 없는 종류였으나 미리 알고 있다면 최소한의 대응책이나 전략을 짜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한 번 패배한 시점에서 그들도 깨달았겠지.

기본적인 그릇이 다르다. 아마도 유매가 2학년이 됐을 때 즈음에는 자신들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되어있으리라는 것을. 그렇기에 자신들의 의지로 학생회장을 목표로 한다는 유매를 지지하기 위해 아래에 들어간 것이다.

학생회장과 부회장 둘만 해도 대체 어떻게 쓰러뜨려야 하나 고민을 거듭해야 할 괴물들인데, 거기에 남의 마력을 모조리 증발시키는 마녀공예에 각성한 유매까지 있다. 저 세 명의 구성은 현재 세한기전 최강의 팀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특히나 유매의 마력독재가 악질적인 점은 자신의 마력을 요만큼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령 수십 명의 마력을 상쇄시켜 없애버려도 유매가 마력 부족으로 탈진할 일은 없다. 그 말도 안 되는 마녀 혼혈의 화력은 그대로 온존된다.

‘이건 상당히 문제야.’

본선에 진출하는 여덟 명중 학생회 팀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협력해서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안 서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차대엽 또한 싸움 중에 성장할 테고, 뒤에서 이 녀석 보조만 잘 해줘도 웬만한 난전은 돌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말했다.

“너랑은 안 짜.”

“뭐?”

차대엽의 말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야,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유매 저 녀석 팀이 좀 장난 아닌 건 맞는데, 나랑 짜면 어떻게든 이기게 해준다니까.”

“바로 그 점이 문제야.”

차대엽은 드르륵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푸른 빛이 도는 정관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문제라니, 너무 쉽게 이기면 날로 먹는 것 같아서 싫다는 건가? 그리고 차대엽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너한테는 뭔가를 받기만 했지.”

고개를 내린 차대엽이 눈길을 준 것은 자신의 오른손에 끼워져 있는 해골의 반지와, 칼자루를 잡고 있는 초대 검성의 신검이었다. 손을 가져다대자 신검이 살짝 진동하는 걸 보니 이미 평소에도 어느 정도 교감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학생회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누가 상대라도 너랑 짠다면 분명 우승할 수 있을 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1학기의 순위전 때도 그렇고, 난 결국 제대로 널 이겨본 적이 없어. 생각해보면 내가 잘하는 거라 해봐야 싸움 뿐인데.”

“너 서예도 잘 하고 차도 잘 끓여.”

“그러니까. 적어도 싸우는 것에 있어서만은 너보다 위에 있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네 옆을 따라갈 수 없다는 기분이 들어. 우승 상품에는 흥미 없지만, 한솔이 넌 이길 거다.”

차대엽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 또한 평소에는 딱히 자기주장 없이 남이 하잔대로 순순히 다 따라주지만, 이렇게 한 번씩 자기 생각을 말할 때는 이 세상에서 제일 고집불통이 됐다. 뭐라고 설득해봐야 움직이지 않는 거석이었다.

“그리고, 둘이서만 편을 먹으면 유매한테 미안하니까.”

“무슨 그런 걸 신경쓰고 있냐···.”

나는 질려서 이마에 손바닥을 짚었다. 무신경하고 덤덤한 얼굴을 하고선 이런 때에만 어이 없을 만큼 섬세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차대엽이 교복 안주머니에서 명찰을 꺼냈다. 차대엽의 손에 들려있는 명찰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아니, 설마···.”

“널 꺾어보고 싶지 않냐고 하니 흔쾌히 들어와주던데.”

차대엽이 고개를 돌려 뒤쪽에 있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검은색과 금색의 두 사람이었다. 부채를 입가에 가져다댄 채로 눈웃음을 치고 있는 금예린과, 조용히 팔짱을 낀 채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진소란.

“첫 수업 때부터 당신을 한 번만이라도 무릎 꿇리고 싶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죠. 은혜를 모르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봐주지 않을 거랍니다?”

금예린의 등 뒤에서 복잡한 문양의 결계가 떠올랐고,

“이번 대의 흑패 소유자인 널 쓰러뜨리면 흑패 발급에 대해 생각해봐주겠다고 하더군. 좋은 승부를 기대하겠다.”

진소란의 등 뒤에서 마력을 머금은 날개가 펼쳐졌다.

한정 탈선과 요호의 유해 무기. 차대엽 뿐만 아니라 녀석의 팀원인 금예린과 진소란 또한 이제는 웬만한 세한기전 3학년생은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세 명 모두가 방심할 수 없는 강적···. 정확히 말하면 내 팀으로 삼고 싶었던 녀석들이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유매가 이끄는 학생회 팀만이 아니었다. 이쪽에서도 괴물같은 팀 하나가 탄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너희 셋 중 하나만 나와주면 안 되냐?”

“그런 식으로 실없는 척하며 방심시키는 게 당신의 방식이죠. 하지만 이제 그런 타입이 가장 위험하단 걸 알고 있어요. 경계는 결코 풀지 않을 거예요. 그야 당신이 상대니까.”

“이하동문이야.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기겠어.”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있던 차대엽이 진소란과 금예린을 데리고 교실을 나가 사라졌다. 작전회의인지 대련인지, 아니면 본선 진출을 위해 다른 학생들을 사냥하러 가는 건지. 아무튼 그들 팀끼리 대회에 대비해 뭔가를 하려는 것이다.

유매 또한 나와는 얼굴을 맞대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서로 적인데 친한 척하며 헤벌쭉한 표정 짓고 다니지 말고, 자신을 어떻게 쓰러뜨릴지 생각이나 하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차대엽까지 떠나니 이제 같이 점심 먹을 녀석조차 없었다.

“그러면서 자기 도시락은 가져가고···.”

나는 뚱한 표정으로 가져온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대부분 식당에 가거나 대련장에서 다른 놈들이 치고박고 싸우는 걸 구경하고 있었기에, 한적한 교실에 남아있는 건 나 정도 뿐이었다. 수저를 들고 밥을 푸자니 누군가가 내 앞에 책상을 딱 붙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방해꾼을 보았다.

“뭐야? 왕자님.”

“이야기는 들었어. 너는 아직 팀을 짜지 않은 거겠지?”

뜬금없이 밥을 먹고 있는 내 앞에 앉은 것은 자세빈이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보라색 음표들이 하나의 막을 이뤄 주변을 둘러쳤다. 바깥에 이야기가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간이적인 방음 결계였다. 그리고 자세빈이 머리를 숙였다.

”부탁이다. 이번 대회, 나를 도와줘라.“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밥 먹는데 와서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불편하고 뭐고가 아니라, 순수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커다란 이벤트에서 자세빈은 누군가에게 머리 숙이며 협력을 요청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 손으로 짓밟아주겠다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야 할 터였다. 특히 저번 순위전에선 나에게 패배했기에 누가 칼을 들이대고 협박해도 결코 나랑은 팀을 짜지 않으려 하겠지. 그러면 나를 못 이기니까.

“네가 남한테 고개까지 숙이다니 무슨 일이래···. 애초에 너희 팀 멤버는 고정이잖아? 소꿉친구 할로윈 삼총사로.”

흡혈귀와 늑대와 악마. 마왕의 후계자인 자세빈과 그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담민우, 현미나는 세한에 입학했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계속 붙어다니는 녀석들이었다. 그렇기에 3인 1조라는 룰에서 자세빈이 다른 녀석을 끌어들일 리가 없다.

“민우는 안 와. 마왕성에서 바쁘게 굴려지고 있다.”

“뭐?”

“다른 사람의 희귀한 혈통능력을 그대로 복사해서 쓸 수 있으니까. 현장에서 그만큼 편리한 인재도 없겠지. 지금 마왕성은 일대 소란이다. 철통같은 보안이 뚫렸어. 아버지의 능력으로도 침입자가 도주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자세빈의 말에 상당히 놀랐다. 마왕이 거주하는 마왕성은 그 자체로 역대 마왕이 계승받아 사용하는 하나의 보물이자 거대한 마도구였다. 마왕성의 주인으로서 그것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 또한 마왕의 자질을 평가하는 한 요소였다.

그리고 단신의 무력은 제쳐두고서라도 마왕성과의 적합률에 있어서는 자세빈의 아버지인 당대 마왕이야말로 역대 최강이었다. 두억시니를 한 순간에 분쇄해버린 그 혈왕궁의 용사조차 마왕성 안에서는 마왕을 시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왕에게 있어 마왕성은 몸의 일부와도 같다. 대놓고 박살을 내버리지 않는 이상에야 몰래 침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뿐더러 그 몸 안에 삼켜진 침입자가 도주하는 것 따위 가당치도 않다. 나로서도 누가 그랬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학장이 가진 ‘현자의 눈’이라면 슬쩍 보기만 해도 원인을 알 수 있겠지. 천년서생의 간파안은 뭐든지 꿰뚫어본다고 하니. 하지만 마왕성의 위기에 흑기사단장이 직접 대면해서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거절했다고 하더군. 그 망할 할망구···.”

“그래서, 담민우가 빠진 자리에 내가 와달라?”

“그래. 우승한다면 선대 마왕인 주제에 마왕성에 코빼기도 신경을 안 쓰는 그 할망구한테 아버지에게 가달라고 할 거다. 솔직히 말해 너랑 내가 짠다면 차대엽이 상대라도 문제없겠지. 사례는 얼마든지 할 테니 힘을 빌려준다면 고맙겠다.”

그리고 자세빈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는 상당히 잘난 척하지만 그건 자신에게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있어서일 뿐, 필요한 때에는 자존심 따위 얼마든지 굽힐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나는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다 좋은데 어떻게 학장을 마왕성에 보내겠다는 거야? 우승 상품으로 학장이 들어주는 부탁은 학교 생활에 관련된 것 뿐이잖아. 다 이겨놓고 헛수고가 되는 거 아냐?”

내 말에 자세빈은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가정방문인지 학부모 면담인지를 해달라 하면 되잖아. 일단 마왕성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딴 할망구, 온몸을 꽁꽁 묶어서라도 조언해주기 전에는 돌려보내지 않을 거다.”

“너 머리가 좋구나···.”

자세빈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내게 자신과 현미나의 명찰을 건넸다. 그걸 잠깐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야 담민우에게는 축제 노점 때 신세진 것도 있으니, 또 과로로 탈진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뭐, 우승하면 나도 마왕성 견학 좀 시켜줘라.”

나는 씨익 웃으며 새로운 팀의 결성을 선언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 학장의 소원권이 걸려있는 대회, 유매는 우승상품을 이용해 자신이 세한의 학생회장이 된 뒤 날 부회장에 앉혀 학교에 감금하려 들고 있었다. 도와달라 할 차대엽은 나랑 싸워보고 싶다며 다른 녀석들과 팀을 짰다.

한마디로 망했다.

뭐 유경명 아저씨네서 뒹굴거리고 있을 정세나를 전학생으로 데려와서 다 쓸어버리라 할 수도 없고. 이제 어쩌지 싶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협력하자 손을 내밀어온 것이 자세빈이었다. 자신도 학장의 소원권이 어떻게 해서든 필요하다나.

그 자세빈은 팔짱을 낀 채 내 옆에서 쯧 혀를 찼다.

“그 할망구, 자기도 전대 마왕이었던 주제에 마왕성 문제에 뭘 그리 깐깐하게 구는 건지. 내가 마왕이 되는 날엔 제일 먼저 전당에서 그 인간 초상화부터 내리라고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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