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배 (5)
학교 전체를 감시하는 수백 개의 모니터가 걸려있다거나, 실습용으로 사육하는 마물들이 우리에 갇힌 채 으르렁대고 있다거나. 온갖 괴소문이 나도는 세한의 학생회실이지만, 실제로 들어가보면 의외로 맥이 빠질 만큼 평범한 구조였다.
“아이참, 이거 또 왜 이래?”
세워둔 화이트보드에 내용을 써내려가던 부회장이 글자가 흐릿해지자 인상을 쓰며 보드 마커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테이블에 앉아 설명을 듣는 건 유매였다. 부회장이 나눠준 수십 장 분량의 자료에는 놀랍게도 다른 팀 구성원들이 지닌 혈통능력의 목록이나 각 팀원과의 연계 같은 정보들이 그 팀 작전 회의를 직접 듣고 온 것처럼 상세하게 쓰여있었다.
“재주도 좋네. 이런 걸 다 알아내고.”
“학생들을 살피는 게 학생회 일이니까.”
비꼬는 듯한 음성에 부회장이 태연히 웃었다. 부회장의 정령들은 한 번 만들면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멀리서도 사용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그러한 특성은 전투에서도 유용했지만 무엇보다 정령들을 척후로서 활용할 때 빛을 발했다.
식당 구석이나 휴게실 창문, 눈에 띄지 않는 캠퍼스 곳곳에 반짝이며 떠다니는 작은 빛의 구슬들이 전부 부회장이 뿌려둔 정령들이었다. 그렇게 지난 1년간 학생회는 학교 안의 정보들을 남몰래 수집했고, 요주의 인물들을 주시해왔다.
무엇이든지 알고 있는 학생회. 학생회실 안엔 세한기전 전체를 감시하는 수백 개의 모니터가 걸려있다는 괴담도, 아무 근거 없이 무작정 퍼져나간 헛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정보를 수집할 모니터 수백 개의 역할을 단 한 명의 남자가 수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지난 일 년간 쌓인 데이터만으로도 대회 준비는 차고 넘쳤지만, 부회장은 그 정도론 안심할 수 없는지 다른 팀 전원에게 정령을 붙여두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인데?”
“당연하지. 이런 재미없는 방식.”
유매는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부회장의 자료엔 상대 팀에서 만든 암구호들의 의미까지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이래서야 답안지를 훔쳐보고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평소 성질대로 이딴 건 필요 없다 불태울 수도 없었다.
그녀 또한 절박한 것이다. 승리를 보장하는 패를 있는 대로 끌어모아도 불안해서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그만큼 유매에게 이번 대회는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이었다. 유매가 종이 끝을 살짝 구기자 부회장이 말했다.
“걱정 마. 본선은 충분히 재미있어질 테니까.”
본선 진출이 확정된 팀들은 확실히 말해 만만치 않았다. 선도부장인 민유리가 이끄는 팀을 비롯해, 2학년과 3학년 중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강적들이 팀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중 진정한 의미로 학생회의 위협이 될 만한 구성은 없었다.
그만큼 이쪽의 멤버는 너무할 정도로 강했다. 세한기전 최강이라는 칭호를 지닌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그 둘을 순식간에 무릎 꿇린 저 자그마한 폭군. 부회장이 생각하기엔 이미 대회를 진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전력 편중이었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정보를 수집한 건 불확정 요소 때문이었다. 특히 작년 한 해 동안 계속 분석해온 상급생들과 달리, 아직 조사를 끝내지 못한 1학년생들로 구성된 두 팀.
각각 수석인 차대엽, 차석인 송한솔이 이끄는 팀이었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가장 미숙할 터인 1학년생을 우선해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튼 유매를 비롯해 이번 1학년들은 어딘가 이상한 것이다. 실제로 한 여우 혼혈은 신입생인 주제에 본 적도 없는 수준의 초고위 결계를 펼치고 있었다.
‘수준만 높지 노련함은 아직 한참 멀었지만.’
결계의 완성도만 따지자면 3학년의 날고 기는 학생들도 명함을 못 내밀 수준이었지만, 능력자끼리의 물고 물리는 뒤통수 싸움에 경험이 부족했다.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완벽한 결계를 쳐놨다고 정작 기본적인 경계를 소홀히 하다니.
부회장의 손끝에서 자그마한 빛의 구슬이 피어났다. 초소형 정령인 반딧불. 결계를 펴기 훨씬 전부터 이것을 붙여두었기에, 그 뒤 방 안을 외부와 차단시켜봤자 의미가 없었다.
덕분에 그녀의 팀이 어떠한 방식으로 싸울 것인지. 공격수인 검귀가 개별 행동을 취할 거란 점이나, 본선 무대에서 사용할 결계의 특성 또한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한쪽은···. 쓴웃음을 짓고 있던 부회장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 녀석은 이상해.”
부회장의 손가락이 가리킨 건 수십 장의 자료들 중 유일하게 부실한 페이지였다. 있는 건 기본적인 인적사항뿐.
송한솔. 혈통능력 불명에, 자신의 마력을 완전히 감출 수 있는 수수께끼의 1학년생. 공격할 때마저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이야기 속 요정 혼혈이라도 되는 건가 싶지만, 부회장이 섬뜩함을 느낀 건 그러한 신비성 때문이 아니었다.
기술은 대단하지만 초보적인 실수를 범한 금예린과는 정반대다. 혈통능력을 이용한 싸움에 있어, 온갖 기상천외한 능력들에 허를 찔려 패배해보지 않는 이상 결코 몸에 두를 수 없는 노련함. 송한솔은 이쪽의 능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 이거 사생활 침해인 거 알아요?
송한솔은 기숙사 세면대에서 양치하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떠보는 거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그다음 말이 자그마한 의심에 쐐기를 박았다.
- 반딧불. 학생회가 이런 쪼잔한 짓을 한다고 하면 다들 실망할 텐데. 덜미 잡히기 싫으면 상대는 잘 고르셔야지.
소름이 돋았다. 회장을 제외하고선 누구에게도 말해준 적 없는 정령의 이름. 부회장은 그 즉시 붙여두었던 정령을 회수했다. 송한솔은 안녕히 가세요~ 하며 정중히 배웅까지 해주었다. 그건 1학년치고 빈틈이 없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송한솔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지만, 어떤 의미로는 가장 값진 정보를 얻어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송한솔이란 난적은 반드시 경계해야만 한다.
그리고 유매는 풋 웃으며 종이를 집어 들었다.
“걔는 원래 이상해.”
그것은 기묘한 반응이었다. 부회장의 실책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알아낸 사항에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를 보았다.
그리고 볼펜을 꺼내, 송한솔의 항목 아래에 ‘맨날 기분 나쁘게 실실 웃음’, ‘재수 없음’,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음’ 등의 폭언을 한줄 한줄 정성껏 써내려갔다. 이내 유매는 만족한 얼굴로 자신이 적어낸 내용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빨간 색연필을 치켜들었다.
“그러니 이상한 짓 못 하게 옆에서 감시해야지.”
송한솔의 이름에 중요 체크 별표가 몇 개나 그려졌다.
* * *
“이야, 역시 학생회가 학생회긴 하네.”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종이를 넘겨보았다. 옆에 앉은 현미나와 자세빈도 같은 자료의 내용들을 읽어보고 놀라서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지금 두 사람의 손에 들린 건 부회장이 열심히 작성한 데이터를 내가 슬쩍해 복사한 것이었다.
공통의 경쟁상대가 있다면 내가 뭔가를 하기보단 남이 다 해놓은 걸 중간에서 휙 채가는 편이 훨씬 고생이 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회장은 아주 훌륭하게 일해주었다. 일부러 학교 곳곳에 있는 정령들을 눈감아준 보람이 있었다.
“너, 이런 걸 어디서···.”
“이기게 해준다고 했잖아. 나도 필사적이거든.”
유매는 진심으로 학생회장이 되어 나를 온종일 부려먹을 생각이었다. 승부의 결과라는 명분만 생긴다면 힘으로 구속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지. 그랬다간 온갖 행동에 제동이 걸린다. 살짝 과장해 이건 세계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었다.
“사실 이런 건 대충 한번 읽어보고 그냥 그렇구나 하면 되고. 이제 진짜 중요한 것들 알려줄 테니까 전부 외워.”
나는 부회장의 보고서를 옆에 치워둔 채 품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작전회의를 엿들었다느니 하는 상식적인 수준의 반칙이 아니라, 아마 적혀있는 사람 본인도 모르고 있을 능력의 공략법들이 잔뜩 쓰여있는 진짜배기 컨닝 페이퍼를.
외우라는 말에 양쪽 귀를 접은 현미나가 말했다.
“있잖아···. 근데 이런 건 솔직히 좀 비겁한.”
“다 외웠나 테스트 볼 테니까 그리 알고.”
나는 앉은 채 염력으로 쾅 휴게실 방문을 닫았다.
* * *
학장의 변덕스런 승인으로 열린 세한의 전례 없는 싸움 축제는, ‘올스타전’이니 ‘전학년 통합전’이니 하는 이름으로 의견이 엇갈리다가 결국 본선 당일 즈음엔 쓸데없이 길고 복잡한 정식 명칭 대신 ‘학생회배’라는 통칭으로 정착되었다.
우승팀의 주장에겐 교내 활동에 관련된 일이라면 학장의 권한 내에서 뭐든 이루어주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이나,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의 호화로운 부상, 우승자 맞추기나 빙고 게임 등 관련 이벤트의 개최로 분위기는 크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대회 당일. 오늘은 하루 수업을 통째로 멈추고 전교생 앞에서 본선의 싸움이 속속들이 중계될 예정이었다. 게이트 앞에 서있는 한시혁이 인상 쓴 채로 한숨을 쉬었다.
“학장님은 교육자로서 존경하고 있지만, 이번 대회만큼은 불평을 안 할 수가 없군. 재밌을 것 같으니 진행시키라니.”
“또 혼자 분위기 초 친다. 애들 앞에서 왜 이래?”
한시혁의 어깨를 툭툭 친 건 같은 교수인 차우진이었다. 잔뜩 저기압인 한시혁과 달리 차우진은 오히려 들떠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게이트를 막아선 두 교수 앞엔 이번 학생회배의 본선 진출 팀을 이끄는 주장들 전원이 모여있었다.
“애들 앞이니까 말하는 거다. 너희들도 미리 알고 있는 게 좋겠지. 학장님은 어제 본선 경기 부지를 감싸고 있는 보호 결계의 작동 기준을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낮춰놓았다.”
그 말에 몇몇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세한기전의 모든 대련장에는 치명적인 공격에서 학생들을 보호해주는 안전용 결계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 앞엔 그런 게 사실상 없다는 소리였다. 부지를 전부 커버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일부러 치워버린 거다. 보다 실전에 가까워지도록.
“아마 피투성이가 된다 한들 목숨에 지장만 없으면 결계는 발동하지 않겠지. 후유증이 남는 부상을 입는다 해도 학장님의 성물로 치료하면 된다는 생각이겠지만···. 그런 걸 전교생들이 열광하도록 생중계로 보여준다는 건 도를 넘어.”
한시혁 또한 학생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굴리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수로서 수업 과정을 통제하기 위해 찍어누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건은 아예 전교생들에게 흥분해 날뛰라 부추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코 교육자가 기꺼워할 만한 행사가 아니다. 손을 들어 자신의 미간을 꽉 누르고 있던 한시혁이 눈을 감았다.
“그리 항의했더니 학장님은 이렇게 말하시더군. 아니꼬우면 네가 직접 시작하지 못하게 막으면 되지 않냐고.”
학생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끔뻑이자, 옆에서 차우진이 학장님도 참 성격이 심술궂어, 하고 킥킥댔다. 입을 다물고 있던 한시혁이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들었다.
“본선 시작 전 다시 한번 규칙을 설명하지. 주장이 기권하거나 행동불능이 된 시점에서 해당 팀은 패배. 마지막 한 팀이 남을 때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경기 부지 입장은 여기 팀 숫자만큼 준비되어있는 게이트를 이용하게 된다.”
한시혁의 말대로 두 교수 건너편엔 간이 게이트가 총 여덟 기 늘어서 있었다. 위쪽의 모니터엔 각 게이트로부터 이어지는 주변 지형의 모습이 비쳤다. 지금 본선 진출 팀의 주장들을 불러모은 건 각 팀의 시작 위치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입장할 수 있는 건 한 게이트당 한 팀. 각각 떨어져 있는 시작 지점에서 30분 뒤 본선이 개시될 때까지 준비 시간을 갖는다. 개시 신호 전엔 정해진 범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지만, 최대한 빨리 입장할수록 이것저것 준비할 수 있겠지.”
단순히 명목상의 절차가 아니었다. 전황은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능력이 주변 지형의 보정을 받거나, 금예린처럼 결계를 깔아둘 시간이 필요한 타입에게는 입장하는 순서에 따라 이후의 국면이 뒤바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차우진이 한시혁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순서를 정하는 법은 간단해. 선착순이지. 입장 시간 종료까지 30분 동안, 얘랑 나는 학생 상대로 허가된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너희가 게이트로 가지 못하게 막을 거야.”
한마디로 술래잡기. 어떻게든 교수들을 따돌려 게이트 앞까지 도망치기만 한다면 통과라는 이야기였다. 이기는 건 무리라도 도망치는 것 정도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런 낙관적인 분위기를 비웃듯이 한시혁이 눈을 감고 말했다.
“입장 시간이 끝날 때까지 어떤 게이트에도 들어가지 못한 팀은, 본선 참가 자격이 없는 걸로 보고 즉시 실격이다.”
차가운 정적. 차우진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학장님이 하셨다는 말. 이제 이해가 되지?”
이런 대회를 정말 진행할 생각이냐 묻자 학장이 한시혁에게 돌려준 대답. 싫으면 직접 시작하지 못하게 틀어막으면 된다. 상황을 눈치채기 시작한 학생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거대한 기세가 폭풍처럼 학생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직후 학생들은 몸 안에서 흐르고 있던 마력이 돌이 된 것처럼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숨을 쉬는 게 힘들 정도의 압박은 덤이었다. 한시혁의 눈동자가 공간을 지배했다.
절망적인 선언과 함께, 입장 시간이 시작되었다.
“단 한 명도 지나가지 못해. 오늘 대회는 여기서 끝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시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한시혁은 대회가 자기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앉아 기다리고 있는 본선 경기를 취소시킬 속셈이었다. 그것도 전원 실격 처리라는 어이없는 결말로. 적당히 겁만 주다가 끝내려는 의도라면 참 좋겠지만.
아무래도 진짜 한 명도 안 들여보낼 생각이다.
굳이 의식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눈만 봐도 진심이라는 게 팍팍 전해져왔다. 분위기를 못 읽는다는 정도가 아니다. 나는 같은 교수로서 말려주지 않는 건가 싶어 옆에 선 차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우리 한시혁이처럼 교수로서 할 말은 한다, 이런 고상한 건 아니고. 한 팀 떨어뜨릴 때마다 상여금이 나오거든. 너희들 전부 실격시켜야 지난 달 카드빚 갚을까 말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