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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106화 (106/113)

학생회배 (6)

유감이라는 듯 미소지은 차우진이 양손바닥을 빛내며 신검을 발현시켰다. 검귀 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는 두 자루로 구성된 신검. 대련용 검을 쓰지 않고 굳이 신검을 꺼냈다는 건 차우진 또한 이 촌극에 꽤 진심이란 뜻이었다.

이내 그의 눈에서 푸른 도깨비불이 화륵 피어났다.

“충고하는데, 싸워서 이기겠단 생각은 마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사안이 지배하는 영역 안에서, 귀안의 견제를 따돌리고 건너편의 게이트까지 도착한다. 그것만으로도 그냥 어렵다는 한마디로 퉁쳐버리면 사기죄로 잡혀갈 수준의 난이도였다. 앞에 나선 민유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일찍 졸업시험을 보는 기분이군.”

선도부장인 그녀는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 어찌 됐든 세한의 올스타 집결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한시혁의 사안을 마주한 것만으로 전투불능에 빠지는 약골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너무 겁줬나? 걱정하지 마, 교수 체면이 있지 학생 상대로 신검합일 같은 건 안 할 테니까. 그렇게 불공평하게 찍어누르면 오늘을 위해 열심히 연습해온 너희가 뭐가 돼?”

“허가가 안 나와서 못 하는 것뿐이잖나.”

“어이쿠, 들켜버렸네.”

어이쿠 들켜버렸네 이러고 앉아있다. 차우진은 푸하하 웃었지만 분위기는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지금 두 교수가 당장 공격해오지 않는 것은 여유나 배려 따위가 아니라 단 한 사람도 놓치지 않기 위해 경계를 굳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애들 상대로 너무 진심이잖아.’

난 속으로 불평하며 신검을 든 차우진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마물을 사냥할 때 효율적인 건 범위가 크고 화력이 뛰어난, 이를테면 유매가 마구 쏘아내는 포격 주문 같은 수단이었다. 집채만 한 덩치를 지닌 마물들을 상대로 수수하게 칼질을 잘해봤자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물 토벌을 본업으로 하는 차우진의 두 신검엔 어떠한 공격 능력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한쪽은 어떤 날붙이의 공격도 분산시켜 받아내는 참격무효의 신검. 다른 한쪽은 어떤 마법의 투사체도 분단시켜 베어내는 주문무효의 신검.

어느 쪽이든 지성 없는 마물보단 기술을 갈고 닦은 달인을 상대할 때 효과적인 능력이었다. 그럼에도 차우진은 사람 피를 보는 게 별로라는 이유로 적성에 맞지도 않는 마물 사냥꾼이 되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정점의 자리에 올랐다.

인간을 상대할 때의 차우진은 ‘그 이상’이다. 능력의 상성 문제도 있지만, 서로 신검합일을 하지 않고 싸운다면 현 검성인 차대운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말해 지금 저기에 신검을 꺼낸 차대운이 서있다 생각해도 별 지장이 없단 뜻이었다. 상식적으로 사안의 영역 안에서 그런 것과 술래잡기를 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그 상식에 코웃음치듯 누군가 유유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구두를 또각이며 나온 건 유매였다.

유매의 동작은 한시혁의 사안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야 실제로 영향 따위 요만큼도 받고 있지 않을 것이다. 유매의 마력 제어는 넓게 퍼뜨려 한참 옅어진 사안 따위로 방해할 수 있는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모자령을 눌러쓴 유매에게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쌩쌩해보이는 게 대단하기야 한데. 그렇다고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준 다음 보내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차우진은 이미 완전히 전투 태세에 들어가있었다. 공격의 전조를 살짝이라도 감지하는 순간, 백전연마의 검귀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제압할 것이다. 주문으로 발을 묶으려 한들 차우진의 신검은 날아오는 마법을 그대로 양단한다.

그리고 유매가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휘저었다.

“싸우는 건 금지. 협력하는 건 가능이라 했나?”

직후 갑자기 몰아친 돌풍에 휘감겨 게이트를 향해 똑바로 날아간 것은, 뒤쪽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던 다른 두 팀의 리더였다. 유매에게 집중하던 차우진이 깜짝 놀라 뒤돌았다.

“이런 미···!”

“먼저 가게 도와줄게.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

차우진은 날아가는 인간 탄환 중 한쪽을 향해 전력으로 뛰쳐나갔다. 학생 전원을 사안으로 찍어누르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한시혁도 즉시 다른 한쪽을 향해 땅을 박찼다. 두 교수는 어떻게든 그 찰나에 두 사람을 공중에서 받아냈다.

그리고 한시혁과 차우진이 다시 학생들 쪽을 바라봤을 때, 유매는 이미 게이트 앞에 서있었다. 사안의 영향 따위 처음부터 전혀 받지 않았기에, 다른 두 학생을 날려보낸 시점에서 마력으로 도약을 끝낸 것이다. 유매가 담담히 말했다.

“잡혀버렸네, 아깝게. 또 기회가 있겠지.”

게이트에서 빛이 솟아오르며 유매의 모습이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첫 번째 입장 팀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 정도의 관문을 너무나 간단히 돌파한 모습에 학생들은 물론 두 교수까지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다.

차우진이 위화감을 눈치챈 것은 그 직후였다.

“···여섯?”

그 말대로 방금 게이트를 통과한 유매를 제외해도 총 일곱 명이 남아있어야 할 주장들은 지금 여섯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우진은 활활 타는 시선으로 재빨리 주변 전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지점을 바라보며 신검을 겨누었다.

“거기구만.”

학생들 중 한 명, 혼란한 틈을 타 모습을 숨긴 채 걸어가고 있던 괘씸한 녀석이 있었다. 바로 나였다. 마력 따위 느껴질 리가 없는데도, 힘의 흐름 그 자체를 포착하는 검귀의 눈은 완전히 투명해진 내 위치를 어떻게든 간파해냈다.

이래서 검귀들이 싫다니까. 게이트까진 앞으로 몇 발자국 밖에 안 남았지만, 들켜버린 이상 차우진이 내게 몇 발자국씩이나 더 걸어갈 시간을 줄 리가 없었다. 교수가 땅을 박찼고, 나는 은신을 포기한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나갔다.

“아, 저까지만 봐줘요!”

“너 같으면 봐주겠냐!”

거리가 좁혀진 건 말 그대로 한순간. 내 등 뒤에 번쩍 나타난 차우진이 어떻게 움직여도 피할 수 없는 절묘한 궤도로 검을 내리쳤다. 나는 휙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마인드맵 개척 : 의식 동화>

돌아가는 의식의 톱니바퀴에 작은 방해물을 하나 끼워넣는다. 직후 차우진의 검로는 순간적으로 비틀려, 내가 아닌 그 옆의 애꿎은 땅바닥을 내리찍었다. 게이트 위에 툭 손을 얹은 나는 숨을 헐떡이며 솟아오르는 빛줄기에 감싸였다.

“저도 갑니다···. 그럼 파이팅.”

가동과 함께 눈앞의 시야가 일렁이며 흔들렸다. 어버버대는 차우진에게 한시혁은 미치겠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 * *

두 1학년이 어이없을 만큼 간단히 술래잡기를 빠져나간 뒤, 남은 여섯 팀의 주장들은 인원이 줄어든 만큼 훨씬 힘든 국면을 맞이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두 자루 검을 교차해 늘어뜨린 차우진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다 보내줬네···.”

교수들의 표정은 시작할 때하고는 서로 반대였다. 유쾌하게 웃던 차우진은 침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고, 반대로 한시혁은 후련한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들 예상보다 학생들 실력이 훨씬 뛰어났어. 교수의 억지에 불평 한 마디 안 하고 성실히 응해준 녀석들이다. 이래놓고 계속 반대하면 이쪽만 죽일 놈 되는 셈이지.”

차우진이 한시혁을 째려봤다. 그는 검귀다. 실력이 뛰어났다느니 말은 잘하지만 중간부터 한시혁이 미묘하게 힘을 빼고 싸웠다는 것쯤은 진작에 눈치챘다. 학생들의 분투에 감명받은 건지 마음이 약해진 건지 결국 고집을 꺾은 것이다.

그럼 내 카드빚은 어쩔 셈이냐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 자신 또한 제대로 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기특해서 같은 훈훈한 이유가 아니었다. 이내 억울하다는 듯 차우진이 고개를 휙 돌렸다.

“너 때문이라고 자식아! 제일 센 놈이 거기 가만히 서서 살기만 잔뜩 보내고 있으니 신경 쓰여서 집중이 안 되잖아! 끼어들 틈을 보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

차우진이 돌아본 방향 끝엔 다른 일곱 팀이 모두 각각의 게이트를 타고 전이한 뒤, 마지막으로 남은 한 팀의 리더가 서있었다. 교수의 지적에 차대엽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방해? 뭔 소리야?”

그리고 그 순간, 여태까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던 차대엽의 몸에서 갈무리한 투기가 터져나왔다. 긴장을 풀고 있던 차우진이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할 수준의 순도였다. 차대엽의 두 눈에 푸른 불꽃이 깃들었다.

깡! 차대엽이 자신의 신검을 땅바닥에 내리쳤다.

그 몸이 총알처럼 튀어나간 건 동시였다. 마력의 잔상을 휘감은 차대엽이 차우진 바로 옆쪽에서 나타났다. 곧바로 다른 한쪽의 신검을 양단할 듯한 기세로 휘두른다. 급히 칼등으로 받아낸 차우진은 그 자리에서 몇 걸음쯤 밀려났다.

“하하, 잠깐만 있어봐. 너 설마.”

“제 힘으로 쓰러뜨릴 수 있을지 없을지 시험해보고 싶은데, 중간에 다른 애들이 끼어들면 이야기가 안 되니까요.”

도발과 같은 선언에 차우진이 분노에 차 웃었다. 아무리 귀안과 신검만으로 사용하는 능력을 제한했다지만, 설마 자신을 일 대 일로 꺾어보겠다고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렸을 줄이야. 교수를 바보 취급하는 데에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한시혁! 넌 절대 끼어들지 마.”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한시혁이 맘껏 하라는 듯 콘크리트 파편에 걸터앉았다.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다. 차우진이 고개를 까닥이고, 양손에 두 자루 검을 든 검귀가 서로 격돌했다. 차우진의 신검이 검격을 흩트리고, 차대엽의 신검이 충격을 먹어치웠다. 공방의 여파가 서로의 발밑에 균열을 일으키며 확산되었다.

“지도 대련을 해주는 건 처음인가? 난 대운이처럼 착하지가 않아서 말야, 멍 좀 드는 정도로 끝날 거란 생각은 말라고. 양류백로의 기본부터 철저히 몸에 때려박아주지!”

“양류백로의 기본이라.”

차우진의 말에 차대엽은 요 며칠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스승에 대해 생각했다. 친구가 분명 도움이 될 거라며 대뜸 선물해준 기물, 초대 검성의 신검에 깃들어있던 검령.

<그게 지금의 양류백로인가. 많이 바뀌었군.>

차대엽의 시연을 지켜본 검령은 그렇게 말했다.

‘열화되었다는 건가?’

<아니, 반대다. 오히려 잘도 이렇게까지 개량해냈다고 말해야겠지. 양류백로의 원전은 결함투성이의 검술이니.>

차대엽은 그게 무슨 뜻인지 의아했지만, 검령에게 원전의 틀과 구결을 전해듣자 무엇이 문제인지 손쉽게 이해했다. 검에 있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재능이 지닌 차대엽이기에 몇 번 동작을 취하는 것만으로 그 운용법을 알 수 있었다.

원본 양류백로는 일종의 천재만이 쓸 수 있는 검술이었다. 상황에 최고로 적절한 기술만을 내놓지 못하면 전체적인 구조 자체가 어그러지는. 지금의 양류백로는 그런 결점을 보완해 검귀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범용 검술이 되었다.

하지만 운용 난이도가 높다는 게 반드시 결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초대 검성이나 차대엽 같은 센스의 결정체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원본 양류백로의 문제점은 사용자를 가린다는 것 따위가 아닌, 더욱 근본적인 부분에 있었다.

<모든 마력 검술은 어떻게 해야 상대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다. 하지만 양류백로는 목적 자체가 다르지. 엄밀히 말하면 검술조차 아니야.>

그 말대로 원본 양류백로엔 위력적인 필살기는커녕 공격 기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모든 기술들은 상대에게서 단 한 번, 이쪽의 공격을 성사시킬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 위해 존재했다. 한 번만 공격해도 이길 수 있다는 것처럼.

<수지가 안 맞아. 전투의 논리가 파탄나 있다. 마치 사람이 칼질 한 번에 죽는 세상에서 만들어진 검술 같지.>

그리고 검령은 차대엽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결함을 메울 수 있을까.>

그 미소를 떠올린 것과 동시에, 차대엽의 귀안이 불타올랐다. 두 검귀의 눈이 수읽기에 수읽기를 거듭하고, 최적이라 할 수 있는 검로를 찾아내 정답을 겨루었다. 차우진과 차대엽은 춤을 추는 것처럼 서로 같은 형태의 기술을 이어갔다.

양류백로 백접(白蝶),

양류백로 황봉(黃蜂).

양류백로 영산홍(映山紅).

“절경이군.”

한시혁이 솔직하게 감탄했다. 다른 학생들이 다 같이 힘을 합쳐 꾀를 내며 가까스로 도망친 저 차우진을 상대로, 혼자 정면에서 치고받고 있다. 합을 맞춘 것처럼 계속되던 같은 기술끼리의 상쇄는 이윽고 한쪽이 밀려나며 멈추었다.

뒤로 구른 차대엽이 팔을 흔들었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전투 센스를 지닌 차대엽이라 해도, 차우진과는 쌓아온 경험의 자릿수가 다르다. 애초에 차우진 또한 그 압도적인 재능 하나로 셀 수 없는 기사들을 절망시켜온 천재인 것이다.

“이야, 잘도 버티네? 이렇게 된 거 대회는 그냥 실격당하고 하루 종일 교수님이랑 오순도순 검이나 휘두르자고!”

대단한 분투였지만 보내줄 생각은 없다는 듯, 달려온 차우진이 양손의 신검을 휘둘렀다. 차대엽은 숨을 내뱉었다. 같은 양류백로로 차우진을 꺾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신검이 양옆으로 쳐내졌다. 차우진은 놀란 눈으로 차대엽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뱀처럼 칼날을 타고 들어온 차대엽의 검은, 차우진의 신검을 움직이지 못하게 아래로 찍어눌렀다.

“진(眞) 양류백로.”

어느새 차대엽은 검을 잡는 방법이 바뀌어 있었다. 그걸로 됐다는 듯 차대엽의 등 뒤에 선 검령이 웃었다. 이 시대의 것이 아닌 기술을 상대로 경험의 차이 따윈 무의미하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서.”

차대엽은 담담한 목소리로 당신을 쓰러뜨리겠다 선언했다. 지금 차대엽이 보고 있는 상대는 교수가 아니었다. 저 게이트 너머, 줄곧 자신으로선 당해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친구. 차대엽의 눈을 본 차우진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윽고 두 검귀의 검이 불꽃과 함께 부딪혔다.

스르륵 신검을 빼낸 차우진이 온몸에서 마력을 분출했다. 정직하게 양류백로 대 양류백로로 싸워주는 것은 여기까지. 최전선에서 온갖 기사들의 검을 관찰하고 먹어치워온 차우진에게, 저 새파란 검귀는 어디까지 대응해낼 수 있을까.

“그럼 오기로라도 보내줄 수 없지.”

“네.”

“자기가 먼저 꼬셔놓고 차버리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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