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삼우 (1)
개시 몇 분 전. 유매가 본선 부지를 내려다봤다.
웬만한 마을 하나 넓이의 전장에, 각각 멀리 떨어져 있는 시작 지점. 준비 시간 동안은 제한 범위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 시작하자마자 다른 팀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드는 건 무리다. 싸움이 시작되는 건 적어도 개시 십수 분 후.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실망할 거야.”
유매는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처럼 혼잣말했다.
학생회 팀은 부지 중앙에 솟은 산봉우리 정상에 서있었다. 높은 곳에서 지형 전체를 살필 수 있지만 그만큼 둘러싸이기도 쉬운 자리였다. 유매가 이쪽 게이트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포위당하든 말든 전부 날려보낼 자신이 있으니까.
그리고 유매의 뒤에선 학생회장이 칼자루를 쥔 채 정신통일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마음가짐을 다잡기 위한 명상이 아니다. 발도 직전의 자세. 회장이 쥔 검의 칼집에는 주변 땅이 흔들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양의 검광이 담겨있었다.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검광을 모을 수 있는 학생회장이 준비 시간을 통째로 사용한 결과였다. 말은 쉽지만 수십 분 동안 오로지 집중하며 똑같은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사투다. 검을 쥔 회장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줄줄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확실했다. 지금 회장이 비축한 검광의 파괴력은 유매의 최대 주문을 훌쩍 뛰어넘어있었다. 그야말로 한참 멀리 떨어진 팀마저 쏘아서 맞힐 수 있을 정도로.
“개막 축포치고는 너무 화려할 것 같은데.”
부회장이 휘말리기 싫다는 듯 먼발치에 서서 헛웃음을 지었다. 주변 지형이 통째로 쓸려나갈 수준의 일격. 무방비한 상태로 이런 것에 직격당했다간 어떤 팀이라도 전멸일 것이다. 굳이 약점을 찾자면 너무 강렬하다는 것이었다.
저만한 힘을 모으는 내내 대놓고 흩뿌리고 있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눈치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력한 기술도 온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다. 그리고 돌아본 유매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꼬며 말했다.
“주변에 흘러나간 마력은 적당히 분산시켜 놨어. 멀리선 아무리 감지해봤자 별 위화감을 못 느끼겠지.”
“베개 다 개놨다는 것처럼 쉽게 말하긴···.”
유매의 말에 부회장이 질렸다는 듯 말했다. 마력독재에 대해서는 미리 듣고 있었지만, 해봐야 주변 마력을 자신의 공격에 쓴다거나 남의 행동을 방해하는 정도의 능력이라 생각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자유자재로 활용이 가능할 줄이야.
‘마녀···.’
주문이라는 영역에 있어선 그 어떤 혼혈과도 궤를 달리한다는 이들. 부회장은 새삼 자신들을 굴복시킨 저 1학년이 얼마나 상식 밖의 존재인지 체감했다. 이내 그가 말했다.
”좋아. 개시 종이 울리면 바로 정찰용 정령들을 날려보낼게. 맨 처음 찾아낸 팀은 시작하자마자 전멸이겠군.“
“그럴 필요 없어.”
대답한 유매가 한쪽 손을 치켜들자 마력이 파문처럼 넓게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확산한 마력은 유매의 시야 저편까지 날아갔다 다시금 주인에게 되돌아왔다. 이내 범위 안 마력을 지닌 모든 생물들의 기척이 그대로 유매에게 전해졌다.
- 원래는 마왕의 눈이라고 하는 기술이지.
유매에게 이 기술의 작동 원리를 낱낱이 해부해 설명해준 학장은 웃으며 그리 말했었다. 자신이 만든 기술이라 자랑하며, 쓸모가 있을 테니 어떻게든 네 것으로 만들라고.
원래대로라면 스스로의 마력을 무형의 파동으로 바꿀 수 있는 기관을 지닌 몽마 혼혈만이 쓸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유매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수준의 마력 제어 능력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몽마의 비의를 재현했다.
- 그건 이제 마녀의 눈이라 불러야겠군.
마왕성의 정통 후계자인 자세빈조차 아직 사용하지 못하는 기술을 유매가 습득했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매의 성과를 본 학장은 진심으로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현기증에 살짝 휘청인 유매가 눈썹을 찌푸렸다.
“···머리 아파. 잠깐만 사용해도 이 지경인데, 마왕이란 작자들은 이걸 일상생활 내내 켜놓고 다닌단 말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은 유매는 방금 탐지에서 얻은 결과를 정리했다. 어느 쪽 진영이든 마력 반응은 총 세 개가 근처에 모여있었다. 그 와중 단 두 개의 반응만이 느껴진 곳이 하나 있었다. 유매가 입꼬리를 올렸다.
“찾았다.”
이번 대회 참가자들 중 단 한 명, 유매조차 마력을 전혀 읽어낼 수 없는 얄미운 인간 하나. 그 탐지할 수 없는 표적을 탐지하고 싶다면, 나머지 학생들 전원의 위치를 모조리 읽어낸 뒤 인원수가 하나 비는 곳을 특정하면 그만이었다.
유매는 송한솔이 있을 방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혹시 저쪽도 지금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리고 송한솔을 향한 경로에 똑바로, 주변의 마력을 제어해 증폭용 마법진을 몇 개 띄워 올렸다. 이것으로 축포의 준비는 대강 완료되었다.
“비장의 수는 처음부터 아낌없이 쓴다는 거군.”
“비장의 수는 무슨. 이런 건 그냥 인사야.”
감탄하는 부회장에게 유매가 대꾸했다. 이내 대회 개시의 신호가 전역에 울려퍼지고, 눈을 번쩍 뜬 학생회장이 칼집 안에 모아놨던 극강의 검광을 마법진을 향해 똑바로 휘둘렀다. 더욱 증폭된 그것은 이미 참격이 아닌 빛의 대포였다.
초장거리에서 쏘아내는 초고속의 초대형 검광. 저만한 크기는 부회장도 처음 보았다. 유성처럼 하늘을 찢어내며 궤적을 그리는 빛을 바라보며, 부회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거 반칙 아니냐고 욕 좀 먹겠군.”
아무튼, 이것으로 시작과 동시에 한 팀 탈락이었다.
* * *
“방금 뭔가가 지나갔다. 몽마의 파장이랑 비슷해.”
구석에 앉아있던 자세빈이 퍼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옆에선 보기엔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작은 위화감도 놓치지 않도록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현미나가 가볍게 땅바닥에 착지했다.
“기분 탓 아냐? 난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현미나는 세한의 학생들 중에서도 야생적인 감각과 본능이 가장 뛰어난 편이었다. 무언가 이변이 있었다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 확신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자세빈은 전혀 아랑곳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마가 아니면 느끼기 힘들 거다. 굳이 따지자면 탐색용 음파랑 비슷해. 나도 미리 주변에 파장을 펼쳐놓지 않았으면 놓쳤겠지. 하지만 누구지? 나 말고 몽마는 없을 텐데.”
“우리 위치는 들켰다 봐야겠구만.”
“그래.”
자세빈의 말을 들어보니 능력을 사용한 녀석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이건 아마 천년서생의 기술이다. 그리고 자세빈 이외에 그런 기술을 쓸 만한 녀석은 아무리 생각해도 한 명밖에 없었다. 나는 저 멀리 솟아오른 산을 바라보았다.
유매가 저곳을 시작 지점으로 선택한 것은 입장하던 때에 확실히 봐두었다. 나는 산의 정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공격은 저쪽에서 올 거야.”
“저쪽이란 말이지? 뭔가 두근거리네.”
현미나는 선물상자를 여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난 가슴이 두근대긴커녕 위장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아무리 대책을 세워놨다 해도 건물 몇 개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포격을 맨몸으로 기다리고 있는 건 정신건강에 좋지 않았다.
그리고 시합 개시의 신호와 함께, 저 멀리서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 그 빛은 엄청나게 커져갔다.
“온다.”
현미나의 동공이 날카롭고 길게 수축했다. 파공음과 함께 하늘 저편에서 쇄도해오는 건 학생회장의 검광이었다.
30분 내내 비축했을 힘을 한순간에 해방시킨 파괴 검광. 커다란 나무들이 방해물 역할조차 하지 못했다. 직선상의 모든 걸 갈라내며 날아온 빛은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들의 앞까지 덮쳐들었다. 그리고 현미나가 땅을 박차 도약했다.
유매가 전력으로 쏜 주문의 몇 배쯤 되는 위력이다. 현미나라도 정면으로 받아내는 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숲을 휩쓸며 날아오던 검광은 한순간 그 전진을 멈추었다. 파동을 부딪친 것은 뒤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빈이었다.
“확실히 봤어.”
눈을 치켜뜬 현미나가 말했다. 자세빈의 파동을 부딪친다 한들 저 거대한 광선을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지만, 그 잠깐의 흔들림으로 광선 끝부분 검광의 실체를 분명히 포착했다.
“저걸 쳐내면 된다는 거지!”
거대한 빛에 겁먹지 않고 똑바로 돌진한 현미나가 검을 크게 올려쳤다. 몇 번이고 호흡을 맞춰본 듯한 완벽한 타이밍의 연계. 이 주변을 초토화시키려던 학생회장의 발도광은 충돌 직전 튕겨나가 저 위의 하늘을 향해 그 궤도를 바꾸었다.
거대한 빛 덩어리가 굉음과 함께 구름을 흐트러뜨렸다. 이만큼 거창하게 쳐내버리면 쏜 쪽에서도 막혔다는 걸 육안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학생회 두 사람은 필살의 일격을 막았다는 것에 놀랄지도 모르지만, 유매는 신경도 안 쓰겠지.
“이렇게 날로 먹으려 들면 안 되지.”
나는 엄지를 아래로 향해 학생회를 야유했다. 세한의 올스타전인데 고작 이 정도 기술로 간단히 승리를 따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착지한 현미나는 곧장 내게 와 나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올렸다. 시비가 걸렸다면 응해주는 게 도리였다.
“한 대 맞았으니 갚아주러 가보자고!”
“안 맞았지만!”
출발~ 하고 나를 들어올린 현미나가 달려나갔다. 현미나의 달리기가 내 비행보다 빠르다. 뒤에서 따라오는 자세빈은 음파로 혹시 모를 추격자를 색적해 처리하는 담당이었다.
이대로 산 정상에 도착해 학생회 팀에게 싸움을 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회장과 부회장은 나 혼자서 묶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완전 무투파인 현미나라면 마력을 쓰지 않아도 강하기에 유매를 어느 정도 애먹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숲에서 벗어나기 직전. 나는 황급히 현미나의 소매를 잡아 멈추었다. 앞쪽 땅에서 빛나는 문양이 그려지고 있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문양의 생김새는 아주 낯익었다.
“잠깐만···. 이건 아니지.”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고 싶지 않아 헛웃음을 지었다. 공간 자체가 일렁이며 구성되는 결계.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신경 써서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혈통시대에서 저 이펙트를 구경한 게 대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무엇보다 게임 운운하기 이전에, 검마가 된 차대운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내가 직접 부탁했었던 기술이니까.
요호의 술식, 전이 결계. 문양이 완성됨과 함께 공간이 물결치며 녀석들이 나타났다. 왼쪽에는 새까만 날개를 펄럭이는 백익. 오른쪽엔 두 자루 신검을 쥐고 담담히 선 검귀. 마지막으로 이 정도는 기본이라는 듯 부채를 펼친 여우까지.
“어머. 어딜 그리 급히 달려가시는지?”
나도 놀랐는데 다른 두 사람은 오죽할까. 현미나와 자세빈은 지금 상황이 아예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금예린이 부채를 펼치자 뒤에서 두 검사, 차대엽과 진소란이 걸어나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차대엽이 살짝 손을 흔들었다. 눈에 불꽃을 켜고 인사해봤자 전혀 반갑지 않다.
“긴장하세요. 시작하자마자 보스전이랍니다.”
차대엽이 손바닥에 신검을 만들었다. 나는 포식자를 마주한 초식동물처럼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걸 느꼈다.
“나 튄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히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