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삼우 (2)
개시 직전까지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있던 다른 팀들과 달리, 차대엽네 팀은 준비 시간부터 상당히 시끄러웠다.
준비해야 할 일이 있는데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개시 3분 전 시점에 입장을 끝내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대엽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금예린은 화를 낸다기보단 오히려 울고 싶단 표정이었다.
“당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망했잖아요!”
차대엽은 양손을 올리고 항복 자세를 취했다.
“미안. 역시 놓치기 힘든 기회였어서.”
주술사에게 결계들을 미리 조정해둘 준비 시간은 황금과 같았다. 그런 시간이 통째로 날아갔는데 멱살이 잡혀있는 차대엽은 친구랑 밥 약속에 몇 분 정도 늦은 것 같은 담담한 사과나 뱉고 있으니 금예린은 속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당신도 좀 같이 화내보라고 옆에 있는 진소란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진소란 또한 준비 시간 같은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기다릴 필요 없으니 좋지 않나.”
“이래서 칼잡이들은···!”
“게다가 그런 구경을 시켜줬는데 불평할 순 없지.”
진소란이 만족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금예린도 그 말엔 부채 끝을 잘근 씹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완전히 정색해 매도했을 이런 실책에도 길길이 날뛰는 정도로 넘어간 것은, 그만큼 차대엽이 보여준 게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래요. 인상적이기는 했죠.”
인상적이라는 말은 너무나 절제된 표현일 것이다.
학생들이 두 교수들과 한 술래잡기는 대기실에 있던 팀원들 또한 모니터로 전부 지켜보았다. 다른 이들은 결국 자기 팀이 입장할 순서가 되어 도중에 방을 나섰지만, 진소란과 금예린 두 사람만은 마지막까지 남아 그 전말을 확인했다.
한바탕 시끄러운 소란이 끝난 뒤. 술래잡기니 뭐니 관심도 없다는 듯 정면에서 치고받으며 시작된 두 검귀의 격돌.
검들이 몇 번이고 대칭인 궤적을 그리고, 그때마다 똑같은 기술이 서로 얽혀 상쇄되었다. 그것은 검술에 문외한인 인간이라도 감탄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고, 경지에 이른 검사라도 온전히 다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춤이었다.
그리고 가장 골 때리는 점은 그 끝이 없을 듯한 검과 검의 맞대결에서 결국 승리한 게 교수가 아닌 학생 쪽이라는 점이었다. 금예린은 식은땀을 흘리며 차대엽을 쳐다보았다.
“···혹시 당신 차우진 교수보다 센 건가요?”
지난 학기 순위전 때부터 괴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학생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수준이 아니다. 지금의 차대엽은 웬만한 일류 기사들이 와도 감당이 안 될 정도의 전투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금예린은 한숨을 쉬었다. 지면 그대로 실격인데 교수한테 일 대 일을 걸다니 당신 미쳤냐고 쏘아붙이고 싶어도, 실제로 이기고 와버린 인간한테 대체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차대엽은 과대평가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설마. 장기로 치면 차랑 포를 떼고 둬준 거랑 마찬가지야. 그마저도 같은 조건으로 다시 싸우면 내가 지겠지.”
오로지 귀안과 신검만으로 부딪친 컴팩트한 승부. 신검합일은 사용을 금지당했고, 방호 결계가 깔려 있지 않기에 학생 상대로 치명적인 기술을 쓸 수도 없다. 두 손 두 발이 둘둘 묶여있는 상대를 간발의 차이로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차대엽의 표정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어떤 조건하에서 싸웠다고 해도, 차우진이라는 초일류의 기사를 검으로 꺾어냈다는 사실은 분명 자랑으로 삼을 만한 일이었다.
“상당히 겸손한 성격일 텐데 아무한테도 안 질 것 같다 단언하던 시점에서 이상한 걸 눈치챘어야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놓고 잘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시네요?”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떨고 있으면 안 되겠지. 우리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 훨씬 더 난이도가 높을 테니까.”
차대엽의 대답에 진소란도 금예린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세 사람이 여기 함께 모인 목적.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것, 즉 송한솔을 타도한다는 것은 어디서부터 접근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 난제였다.
이 팀의 모두가 그 점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한 것이다. 금예린은 요호와, 진소란은 두억시니와 엮였을 때. 멋대로 참견해온 송한솔이 얼마나 간단히 그 거대한 재앙들을 구제했는지.
대요괴 토벌.
단순히 강대한 마물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질적인 존재들은,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힘없이 허망하게 살해당했다. 협력자들이 있었다지만 그 모든 과정을 꾸미고 조정한 것은 단 한 명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자신들과 같은 학교, 같은 교실 안에 태연하게 앉아있다. 언제는 수업이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고, 언제는 매점에 새로 들어온 빵이 맛있다고 수다를 떨며.
그 친구는 이렇게 하면 더 강해질 거라며 자신들을 친절하게 이끌어주었다. 이쪽이 경쟁상대로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더욱 분한 건 그 도움으로 세 사람이 크게 성장했단 것이었다. 친구인데도 옆에서 걷지 않고 혼자 저 위에 있다.
그 언제나 여유롭게 실실 웃고 다니는 녀석의 얼굴 상판을, 한 번이라도 좋으니 찍소리도 못하게 눌러보고 싶다.
사실 이겨봤자 별로 얻을 것은 없을 것이다. 반드시 우승해야만 할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송한솔의 성격상 져버렸다고 해서 길길이 날뛰며 분해할 것 같지도 않다. 얻는 것이라곤 그저 이쪽의 가슴이 살짝 후련해지는 것뿐.
하지만 학교 대회에서 우승하겠다 잘 시간도 아껴가며 단련하기 위한 동기는 그 정도가 딱 적당한 것이다. 차대엽의 말에 입을 다물었던 금예린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랬죠. 우리 목표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당연한 거였어요. 이런 것에 하나하나 놀라고 있으면 끝이 없겠죠.”
금예린은 부채를 촤륵 펼쳤다. 다시 말해 이런 것이었다. 자신은 화를 내며 교수를 쓰러뜨리지 못했으면 어떡했을 거냐 추궁했지만, 그 정도는 애초에 전제로서 당연히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둔한 질문을 한 건 자신 쪽인 것이다.
금예린이 재미있다는 듯 부채 너머로 후후후 웃기 시작했다. 차대엽과 진소란은 그런 그녀를 담담히 쳐다보았다.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잘됐어요. 상대가 누가 됐든 간에 당신을 눈앞에 가져다가 부딪치기만 하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 이 사실을 먼저 깨달은 건 대단한 수확이니까.”
아무리 차대엽이 강하다고 한들 전투란 기본적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과 능력의 상성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고, 대진에 따라서는 차대엽 쪽이 패배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금예린이었지만, 차우진 교수를 꺾은 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차대엽은 이미 그런 것과 관계없는 영역에 서있었다. 가위바위보의 규칙 바깥에 존재하는, 내기만 하면 이기는 네 번째 패였다.
“주장이 몸소 이렇게까지 실력을 보여줬는데, 팀원이 거기 응해주지 않는 것도 웃긴 일이겠죠. 저도 여기서 꺼낼 각오를 하겠어요. 마지막까지 숨겨놓으려 했던 비장의 수를.”
그리고 금예린의 등 뒤에서 빛나는 문양들이 나타났다. 금색의 꼬리 형태로 응축되어있는 그것은 요호의 유해를 가공한 무기, 호선도였다. 금예린이 부채를 앞으로 내뻗었다.
“지금 당신 친구한테 이어진 결계를 열 거예요.”
“뭐?”
금예린의 말에 차대엽이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송한솔에게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이 결계. 그런 수단이 있다는 말은 작전 회의 시간에 듣지 못했다. 추궁하는 듯한 두 사람의 시선에 금예린은 그야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대답했다.
“제가 아무리 완벽하게 정보를 숨겨도 입 밖에 내는 순간 들킬 것 같았으니까요. 학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알고 있는 게 그 사람 혈통능력인가 싶을 정도니까.”
“···확실히.”
“타당하군.”
근거도 뭣도 없는 단순한 직감. 그럼에도 다른 두 사람은 금예린의 주장에 완전히 납득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앞쪽에서 전이 결계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사실 요호의 힘이 깃든 호선도를 사용한다 해도 도착 지점에 좌표를 중계해줄 다른 결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이는 불가능했다. 정확히 말하면 전이 자체는 가능하지만, 낙하산 없이 다이빙을 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그곳에 전이 결계를 만든 주술사와 연이 깊고 강력한 힘이 깃든 주물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등대를 따라 항해하는 배처럼 그 기척을 의지해 전이할 수가 있다.
그리고 송한솔은 언제나 여우구슬을 품에 넣고 다녔다.
이것은 확실한 정보였다. 저번 학기 내내 송한솔이 잠깐 동안이라도 몸에서 여우 구슬을 떨어뜨려 놓으면 곧바로 회수한 뒤 잘 간수 못 한 당신 탓이라며 시치미를 떼려 했지만, 절대로 몸에서 떼놓질 않아 이를 갈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금가의 가보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주물 중의 주물. 여우구슬 정도면 전이 결계 유도를 위한 촉매로서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금예린의 뒤에서 호선도가 빛나며 회전했다.
촉매를 이용한 전이 같은 고급 기술을 실전에서 성공시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없었다. 장로인 금양호가 옆에서 도와줬었다곤 해도, 저번에 검마라는 괴물을 주변째 강제로 전이시킬 땐 몇 배는 더 어려운 대작업을 해냈던 것이다.
“승부수예요. 지금 그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우승하겠죠. 학생회고 뭐고 저희들의 상대는 안 될 테니까.”
오만한 발언이었지만 딱히 이견이 나오지는 않았다. 검령과 온전히 교감하는 차대엽, 한정 탈선을 체득한 진소란, 호선도의 주인이 된 금예린. 이미 세 사람은 어떤 팀이 상대라도 힘싸움으로 지고 들어간다는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술식의 문양이 세 사람의 주변을 감싸며 은은한 금빛을 내기 시작했다. 대뜸 바로 송한솔과 싸우러 간다는데도 차대엽과 진소란에게선 당황한 기미 하나 보이지 않았다. 평소엔 속 터져도 이럴 때는 저런 대범함이 무엇보다 든든했다.
“그럼 갈까요..”
전이 결계가 활성화되고, 빛 속에서 눈을 뜨자 그곳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청년의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쓰러뜨리고 싶다고 결심한, 이번 대회 최강의 적의 모습.
송한솔의 얼굴은 평소의 느긋한 표정이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적을 어떻게 처리할지 냉정하게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금예린은 식은땀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생각해보면 진정한 의미의 적으로서 송한솔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눈치채보면 꽉 쥔 부채 끝이 긴장에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전하겠다 결심했다. 원래 천성이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것이다. 금예린이 구두 끝으로 유유히 땅에 내려앉고, 함께 착지한 차대엽과 진소란이 양옆에 섰다. 촤르륵, 부채를 펼친 금예린이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자, 긴장하세요. 시작하자마자 보스전이랍니다.”
바야흐로 송한솔 팀과의 격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