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삼우(4)
자세빈과 차대엽은 말없이 한참 숲길을 걸어갔다. 자세빈은 기분이 좋은지 계속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이내 우뚝 선 자세빈이 차대엽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싸우기 적당한 무대지 않겠냐는 얼굴이었다. 차대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 사실 너랑은 언젠가 부딪히게 될 거라 생각했지.”
“내가 너한테 뭘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너야말로 우리 세대 최강이기 때문이다.”
자세빈이 검을 치켜들었다. 사실 제일 상대하기 껄끄러운 놈이 하나 따로 있긴 했지만, 그놈은 애초에 순위 경쟁 같은 것과는 연이 없어보이는 녀석이었다. 누가 진지하게 싸우려 해도 어울려주지 않고 사람 맥을 빠지게 하는 학년 차석.
하지만 차대엽은 달랐다. 처음 본 순간 납득했다. 저것은 모든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 꺾어내는 천재. 한 시대의 맨 앞을 걸어갈 주인공 같은 녀석이라고. 그렇기에 자세빈이 의식하는 라이벌은 입학 이래 언제나 차대엽 한 명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싸우게 돼서 유감이다.”
“시간 버는 역할이 그렇게 싫어?”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 그리고 이것도.”
자세빈이 딱 손가락을 튕기자, 짐승의 털로 장식된 새까만 망토가 천천히 내려와 그의 어깨를 덮었다. 이내 양옆에 발현된 마력이 음표와 같은 모양으로 늘어서며 날개처럼 자세빈의 몸을 감쌌다. 차대엽은 즉시 두 신검을 치켜들었다.
전투 상황에서 검귀의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까까지는 막연한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이해했다. 눈앞에 있는 자세빈을 상대로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쓰러지는 것은 이쪽이었다. 차대엽이 가늠하듯 망토를 보았다.
“쓰기가 꺼려지는 무장이라. 뭔가 강한 저주라도 담겨있는 건가? 그렇게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데.”
그 말에 자세빈은 농담하지 말라며 코웃음을 쳤다.
“반대다. 리스크 하나 없이 강대한 힘만을 가져다주지. 어떤 강적도 장비의 격만으로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이런 것에 의지해야 하는 자신에 대한 경멸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제야 차대엽은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자세빈은 혈왕궁과도 맞먹는 음지의 최대 세력, 마왕성의 정통 후계자다. 그럼에도 차대엽이 쥐고 있는 초대 검성의 신검처럼, 금예린이나 은세연이 지닌 마물의 유해 무기처럼 강력한 힘이 깃들어있는 장비를 사용한 적이 전혀 없었다.
뒷세계에 군림하는 마왕성이야말로 그런 물건을 구하기엔 최적의 환경일 텐데, 어째서 자세빈에겐 이렇다 할 장비가 없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했다. 자세빈은 그런 장비를 가지지 못한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쓰질 않은 것이다.
진정으로 마왕성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자라면 마왕성의 도움 따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기에, 상대에게 무기 때문에 진 것이라는 변명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납득한 차대엽이 자세빈과 눈을 마주쳤다.
“전력을 다한 너는 원래 이 정도였다는 거군.”
흘러나오는 위압에 대기가 떨렸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는 건 같은 반 친구인 자존심 강한 몽마 혼혈 자세빈이 아니라, 이윽고 마왕성이 모든 걸 계승받을 차기 마왕이었다.
“흥. 이런 건 단순한 반칙이다. 성의 재산을 마음대로 쓰는 건 내 규칙에 어긋나. 게다가 물건에 의지해서 간단히 이룬 성과 따위 식구들에게 가슴 펴고 자랑할 수도 없지.”
당신이 후계자여서 정말 다행입니다. 성의 모두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다. 다음 마왕의 자리에 더 어울리는 누군가 따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들고 싶다. 스스로의 태생에 긍지를 가졌기에 태생에 기대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스로 고른 자신의 사람과, 스스로 구한 자신의 무기만으로 이 학교에서 지내왔다. 마왕성의 힘을 직접 휘둘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자세빈이 자신에게 부과한 최소한의 룰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세빈은 그 제약에서 해방됐다.
“그래도 네가 상대라면 이걸 꺼내도 불공평하단 소리는 들을 일 없겠지. 그리고 내 사정이 아닌 마왕성을 위해 싸우는 지금이라면, 성의 무구를 사용하는 것은 타당하다.”
이미 이 싸움은 단순한 학교 행사가 아니라, 흑기사단까지 움직이기 시작한 마왕성의 중대 사안이었다. 애초에 친구인 담민우가 죽어라 고생하고 있는데 자신의 미학 운운하며 계속 고집 부리고 있을 만큼 낯가죽이 두껍지도 않았다.
차대엽은 뭔가 아깝다는 듯 자세빈을 바라보았다.
“좋은 무기가 있으면 손에 익도록 평소에도 열심히 쓰는 게 좋은데. 아무도 그런 걸 가지고 뭐라 하진 않아.”
“나 자신이 내게 뭐라고 한다. 그게 중요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남이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 것도 촌스러운 일이었다. 대화가 끊기고 두 사람이 조용히 마주보았다. 먼저 움직인 건 차대엽 쪽이었다. 푸른 안광이 도깨비불처럼 흩날리고, 백류를 내리친 차대엽이 급가속했다.
신속의 검격. 파앙! 휘둘러진 일섬과 함께 폭발음이 터졌다. 자세빈은 그대로 건너편의 나무까지 날아가 부딪혔다. 차대엽은 놀란 얼굴로 뒤로 날아간 자세빈을 바라보았다.
결코 멀리 날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어떤 능력도 내보일 틈을 주지 않고, 첫 일격부터 끊임없이 연격을 이어가 단번에 승부를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세빈에게 검이 닿기 직전 무언가가 반발하며 자세빈의 몸을 저 뒤로 날려보냈다.
“···공기를 압축시켜놨던 건가?”
“어이가 없군. 한 번으로 그걸 간파해?”
옷을 털고 일어난 자세빈이 헛웃음을 지었다. 차대엽의 확신에 찬 눈동자 앞에서 시치미를 떼봐야 의미가 없었다. 검귀의 귀안은 모든 힘의 흐름을 간파한다. 하지만 설마 단 한 번의 공방으로 깜짝 기술의 정체가 까발려질 줄은 몰랐다.
그 말대로 방금 자세빈을 보호한 건 충격의 순간 스스로 폭발해 사용자를 밀쳐내는 일종의 공기 보호막이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해도 한 번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게 해주지만, 전투 중에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니다.
“음파를 다루는 계열이라면 그런 식의 능력 운용도 가능한 건가. 공부가 됐어. 두 번 쓸 틈은 주지 않겠지만.”
“입이나 안 열면 밉지나 않지.”
자세빈이 장검을 역수로 쥐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저런 잔재주에 의존할 생각은 없었다. 순위전 때는 송한솔이 날파리처럼 도망다니는 탓에 충격파만 터뜨렸지만, 자세빈은 본래 검사였다. 상대가 거리를 좁혀온다 겁먹을 이유가 없다.
차대엽이 곧장 신검을 뒤로 뻗고 질주해왔다. 동시에 자세빈은 칼날 뒤쪽을 손으로 쓸어내렸고, 칼등에 빛나는 음표가 악보처럼 새겨졌다. 이윽고 서로의 검이 맞닿기 직전, 고개를 든 자세빈이 차대엽을 향해 마력이 담긴 음성을 발했다.
“<멈춰라.>.”
흰소리. 몽마의 명령이 차대엽의 몸에 강제적인 제동을 걸었다. 아주 잠깐의 덜컥거림일 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자세빈의 검 뒤쪽에 새겨진 악보가 보랏빛으로 일렁이며 아름다운 음색을 내었다. 마력에 감싸인 장검이 움직였다.
“속주검.”
차대엽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보랏빛 번개였다. 음표가 하나씩 빛날 때마다 번개는 방향을 바꿔, 차대엽의 눈으로도 쫓기 힘든 속도의 연격을 발했다. 선율이 계속해서 터져나오고 미리 설정된 악보대로 초고속의 검격이 연주되었다.
그것을 어떻게든 반응해 끊어내려는 순간, 절묘한 타이밍에 자세빈의 흰소리가 몸을 경직시켰다. 검의 연주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지휘. 자세빈 스스로도 포착할 수 없을 신속의 섬격은 연주를 따라 차대엽의 모든 급소를 내리쳤고,
“···괴물 같은 놈.”
차대엽은 기어이 그 모든 공격을 하나도 빠짐없이 막아냈다. 연주 뒤의 잔향이 보랏빛 마력과 함께 흩어졌다.
달려오는 적의 기세를 흰소리로 일순간 멈춰버리고, 강제적인 카운터로 우겨넣는 속주검. 이것은 자세빈의 가장 자신 있는 연계기였다. 제대로 기술이 들어가기만 하면 일류 기사도 대처하기 힘들 거라고 흑기사들이 확언까지 해줬다.
그럼에도 지금 자세빈의 적에게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것이 검사 대 검사로서 차대엽과 싸운다는 것의 의미였다.
멈추라는 명령이 통하지 않은 게 아니다. 저 어처구니없는 놈은 적이 어느 타이밍에 자신을 멈추려 할지 미리 예측하고, 그걸 계산한 움직임으로 몸을 비틀어 모든 공격을 튕겨낸 것이다. 그럼에도 차대엽은 불만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아까도 지금도 승부를 결정짓겠단 생각으로 한 공격이었는데. 결국 두 번 다 네 몸에 스치지도 못한 건가.”
“남의 비장의 수를 가볍게 짓밟고 말은 잘 하는군.”
조롱으로까지 들리는 말에 자세빈이 입가를 이죽였다. 음표가 모두 사라진 걸 확인한 차대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단한 기술이었어. 하지만 상성이 나빴지. 귀안으로 궤도를 읽어두면 속도 자체는 별 문제가 안 되니까.”
차대엽은 간단히 말했지만, 그 한 순간에 모든 궤도를 포착해 최소한의 동작으로 막아낼 해답을 찾아내는 건 보통의 감각으론 불가능했다. 능력이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그는 태생적인 전투의 천재였다. 자세빈은 작게 한숨을 쉬었고.
그 잠깐 동안의 이완에, 차대엽이 한쪽 신검을 단검으로 바꾸어 투척했다. 진소란과의 기술 교류에서 배운 호흡의 틈을 파고드는 전법. 날아오는 단검을 신경질적으로 쳐낸 자세빈은 자신의 장검을 지팡이처럼 쥐고 땅을 내리찍었다.
그와 함께 아래쪽의 지면이 갈라지며 거대한 충격파가 솟아올랐다. 차대엽은 반사적으로 백류를 들어 방어했지만, 사실 공격보다는 연막을 터뜨리는 것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흙먼지가 피어오른 건너편에서 자세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더 해봐야 내 패배겠군. 꼴사나운 일이야. 자존심까지 접어두고 싸웠는데 아직도 이만한 차이가 있다니.”
방금의 속주검은 차대엽이라 해도 까딱 잘못했으면 막아내지 못했을 절기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초견일 때, 기습적으로 카운터를 먹이는 게 전제인 이야기였다. 같은 기술을 다시 쓴다 한들 눈이 익숙해져 훨씬 더 손쉽게 막아내겠지.
전투 개시 직후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시점에서 자세빈이 자력으로 차대엽을 쓰러뜨릴 방법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받아내고도 신검을 쥔 차대엽의 표정에서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식은땀이 비오듯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고 했지.”
정말로 두려운 것은 이제부터라고, 검귀의 직감이 아까부터 비명 지르듯 위기 경보를 울렸다. 그는 자기 입으로 패배를 인정하고서도 전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위기감에 등골이 싸늘해진다. 자세빈의 목소리가 조금씩 일그러졌다.
“비겁하다고 경멸해도 좋아. 송한솔과 손잡았을 때부터, 규칙 안에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정했다.”
“무슨 소리지.”
그와 동시에, 검은 오선보의 돌풍이 두 사람이 서있는 숲 한복판을 감싸듯 회오리치며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내 능력은 마력으로 가공한 음파다. 짧은 명령이나 충격파라면 즉시 내쏠 수 있지만, 감각을 오인시키거나 기력을 북돋는 복잡한 선율들은 나름대로 밑준비가 필요하지.”
그 말에 차대엽은 지난번 순위전을 떠올렸다. 상대였던 송한솔을 새까만 음표들로 뒤덮어 가두었던 정체불명의 기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차대엽은 딱히 그 기술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송한솔이 새까만 음표들을 가볍게 깨뜨리고 나와버렸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게 큰 준비가 필요한 기술은 자신 앞에서 절대로 쓰지 못하게 하겠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 전제가 틀려있었다 한다면.
“내가 여기까지 걸어모며 뭘 했었는지 기억하나?”
차대엽은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눈치챘다.
“휘파람···.”
자세빈은 걷는 내내 옆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음파를 무기로 삼는 몽마가 음색이 담긴 휘파람을 몇 분이나 계속. 이것이 차대엽의 약점이었다. 패배의 경험이 치명적으로 부족하기에, 모든 것을 의심하고 보는 버릇이 들지 않았다.
자세빈이 직접 만든 악몽 속에 송한솔을 가두었던 ‘검은소리’는 어디까지나 응용의 일부일 뿐. 준비를 미리 갖춰두고 시작한다면, 이 숲을 통째로 무대 삼아 몽마의 업을 펼치는 것도 가능하다. 솟구치던 악보가 하늘 끝으로 사라지고.
“악몽에의 티켓을 선물해주지.”
선언하는 목소리조차 순식간에 멀어졌다.
먼지가 걷히자 그곳에 자세빈의 모습은 없었다. 현실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것은 진정으로 차대엽 혼자 뿐이었다. 고민해봐야 답이 안 나오니 차대엽은 무작정 숲 안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주변부터 탐색하지 않고 곧장 숲의 안쪽으로 향한 것은 굳이 말하면 직감이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예감. 이윽고 한참 걷던 차대엽이 입을 벌렸다.
“나 참. 너도 귀찮은 능력에 걸려버렸네.”
깊은 숲속의 끝. 그곳에 차대엽의 적이 있었다.
“몽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기술이야. 간단히 말해 나쁜 꿈을 꾸게 하는 거지. 상대가 생각하는 최악의 적을 악몽으로 구현화시킨다. 스스로 이길 수 없다 생각해온 대상이 앞을 막아서니 당연히 혼자 힘으론 빠져나올 도리가 없지.”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청년은 셔츠 위에 후드를 입고 가벼워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하지만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다. 그 표정에는 자신은 약하다 엄살부리는 특유의 익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나 정도 되는 놈이 아니라면 말이야.”
분명 차대엽은 평소부터 그렇게 생각했었다. 쉽게 진심을 보이지 않는 그 녀석이, 전력을 다해 승리를 쟁취하는 데에 집착한다면 필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눈앞의 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고, 그 손이 앞쪽을 향했다.
“그러니까···.”
돌연 허공에서 발현된 거대한 힘의 격류가 철퇴가 되어 숲속의 나무들을 저 멀리까지 단숨에 분쇄했다. 귓가 바로 옆을 관통한 파괴에 차대엽의 볼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만일 지금 것을 직격당했다면 한 번에 전투불능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앉아있던 그가 둥실 공중에 떠올랐다.
그가 손가락을 자그맣게 흔들자, 그것만으로 거대한 바위가 들리고 나무들이 뿌리채 뽑히며 하늘에서 춤추었다. 차대엽은 경외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신이 줄곧 마음 한구석에서 그리고 있었던 공상 속의 생물.
“뭐, 유감이다. 네 대회는 여기서 끝이야.”
악몽 속, 정색한 송한솔이 차대엽을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