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111화 (111/113)

세한삼우(5)

정말로 악몽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참상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차대엽이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숲의 한쪽만을 나무꾼이 죄다 벌목해간 듯한 기괴한 풍경이 남아있었다. 송한솔이 손 한 번 치켜들어 만들어낸 것이었다. 원리조차 알 수 없는 불합리한 힘의 발현을 통해.

억지로 뿌드득 꺾여 날아간 수십 그루 나무들의 잔해는 저 끝에 힘으로 처박혀 뭉개진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백류로 받아내 흘려넘기고 말고 할 수준의 위력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재해급의 규모. 피한다 해도 여파에 휩쓸린다.

악몽 속의 하늘은 대낮인데도 어두운 보랏빛이 되어있었다. 차대엽은 호흡을 고르며 하늘의 적을 올려다보았다.

“···너무한걸. 내 상상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말도 안 될 거란 생각은 안 했는데.”

“생각했잖아? 뭘 생각하든 그 이상일 거라고.”

능청스런 대답에 차대엽은 반박할 말이 궁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송한솔이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큭···!”

순수한 힘의 폭발. 귀안을 흩날리며 차대엽이 몸을 굴렀다. 전조를 읽고 몇 수 앞을 수읽기해, 온 신경을 집중해도 바로 다음 순간을 살아남는 게 고작. 이 정도로 필사적인 상황에 처해본 적이 전에 있었던가. 차대엽이 눈동자를 돌렸다.

언제나 가벼운 태도로 피식대던 그 송한솔의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싸움 도중에 딴청을 피우는 묘한 느긋함과 여유도 사라져있었다. 바로 저 정색이었다. 압도적인 능력보다도 저 이질적인 분위기 쪽이 훨씬 더 상대하기 불편했다.

그저 상대를 몰아붙여 굴복시키는 것만을 생각하는, 적당히라는 것을 요만큼도 모르는 송한솔. 저런 악몽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대엽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고양감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너랑 한 번 만나보고 싶었어.”

“그래, 만나서 잘 됐네. 사인이라도 해줘?”

송한솔이 손가락을 슥 긋자, 순식간에 쏘아진 무형의 칼날이 차대엽이 어깨를 찢어냈다.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지 않았다면 오른팔이 나갔을 것이다. 차대엽이 조용히 말했다.

“···이런 점이야. 저쪽의 너는 아무리 궁지에 몰아넣는다 해도 친구 상대로 그런 표정을 보여주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진심으로 자신을 박살내려 드는 송한솔과 전력으로 부딪치는 것은 이 꿈 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였다.

직후 백류를 내리침과 함께 차대엽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아니. 마력의 잔상이 그렇게 보일 뿐이다. 진상은 폭발적인 도약. 차대엽은 공중에 뜬 송한솔의 코앞까지 순식간에 날아올라 와있었다. 그 손이 송한솔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야, 사인 해줬잖아. 난폭한 짓은···.”

“그런 너니까 쓰러뜨릴 가치가 있어.”

그대로 적을 땅바닥에 끌고 내려온다. 매다꽂힌 송한솔은 급히 힘의 소용돌이로 자신의 몸을 감쌌지만, 차대엽의 귀안은 도축하듯 흐름 사이에 검을 찔러넣었다. 순식간에 염력의 결을 따라 십수 번의 검격이 송한솔의 몸통을 갈라냈고,

“어쩌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지?”

허공을 지나간 칼날은 갈 곳을 잃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송한솔은 어느새 차대엽과 등을 맞대고 있었다. 돌아보는 것보다 빠르게, 송한솔의 손이 차대엽의 어깨를 짚었다.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면 통하지 않아. 악몽이라는 건 그런 거라고. 머리 좋으니까 알 거 아냐?”

콰아앙! 거대한 힘이 차대엽의 몸을 내리찍었고, 차대엽의 무릎이 땅바닥을 헤치며 격렬하게 지면에 부딪혔다. 내장이 흔들리는 충격에 차대엽이 쿨럭 하고 피를 토했다. 손을 뗀 송한솔은 미련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면서 지적했다.

“힘이 세다든가 기술이 정교하다든가. 이미 그런 시시한 요소들이랑은 상관없는 싸움이 됐단 말야. 너 스스로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생각하고 있는 적이 네 상대니까.”

차대엽은 말없이 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비상비비상을 통해 반사에 가까운 속도로 휘둘러진 무상의 일섬. 하지만 베였어야 할 송한솔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이번에는 무릎 꿇은 차대엽의 앞쪽에 나타났다. 송한솔이 손에 턱을 굈다.

“귀찮게 이런 짓 할 필요도 없어. 졌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내가 알아서 기절시켜줄게. 친구를 패면 나는 마음이 아프고 너는 몸이 아프고. 빨리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잖아?”

“···졌다고는 옛날 옛적에 인정했어.”

“뭐?”

쓰러진 차대엽이 옆을 향해 한쪽 손을 뻗었다.

“나는 너처럼 뭐든지 잘하지 못해. 널 도와준 일 하나 없이 이쪽이 빚만 잔뜩 졌지. 그러니까 적어도 너보다 강하지 않으면, 네 옆에서 당당히 친구라고 말할 수 없어.”

미련한 자신은 달리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도 좋다. 다만 검에 있어서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정점의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싸움에서까지 져버린다면 자신은 친구와 동등하게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자신은 최강이 된다.

내뻗은 손의 위치는, 전에 투척한 단검이 튕겨 날아간 자리였다. 악몽 속에서 차대엽의 정신이 무언가와 이어졌다.

<그 말대로다, 나의 어린 주인.>

푸른 불꽃이 휘날리며, 차대엽의 손바닥 안에 초대 검성의 신검이 쥐어졌다. 차대엽 하나만을 가둔 이 악몽 속에서 신검이 대답했다는 것은, 그것을 진정으로 자신의 수족처럼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 검령이 차대엽의 뒤에서 미소지었다.

<검사라면 최강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 돼.>

돌연 차대엽의 발밑에서 폭풍이 달리기 시작했다. 고밀도로 집속한 투기는 서로 부딪히며 더욱 커다란 소용돌이로 화했다. 살짝 닿기만 해도 휩쓸려 갈려나갈 것 같은 푸른 격류. 그것을 망설임 없이 자기 주위에서 거듭해 계속시킨다.

차대엽의 귀안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 눈에 비치는 건 수많은 화살표 더미와, 그것들이 부딪힘으로써 나타날 더욱 셀 수 없는 힘의 흐름들이었다. 또 그것이 부딪혀 더 많은 새로운 화살표들을 낳고, 다음, 다음, 그리고 또 다음. 최후의 한 수까지 모든 흐름을 읽어낸다.

“이제는 보여.”

진 양류백로는 엄밀히 말해 공격 기술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에게서 공격권을 빼앗기 위한 준비 기술일 뿐.

버들처럼 흔들리며 백 갈래 길을 골라간 끝에, 자신의 공격은 반드시 적중하며 상대방의 공격은 닿지 않는 필중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오로지 단 한 번의 공격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결함 검술. 그렇기에 추구해야 할 이상은 명확했다.

길이 수렴하는 곳은 단 두 가지. 최강의 베기와, 최강의 찌르기. 어떤 상대라도 일격으로 쓰러뜨릴 전투종료기.

즉, 양류백로 종점(終点).

최강의 베기가 그 어떤 방어라도 깔끔히 잘라내는 세련된 일섬이라면, 최강의 찌르기란 그 어떤 방어라도 찢어발겨 관통하는 난폭한 힘이다. 차대엽은 후자야말로 우둔하고 고지식한 자신에게 어울린다 생각했다. 폭풍이 다시 가속한다.

“형한테 몇 번이나 들었었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술을 대뜸 실전에서 펼치려 드는 건 일류가 아닌 증거라고.”

거대한 기계의 배기음 같은 소리가 차대엽 주변에서 우렁차게 터져나왔다. 폭주하는 흐름을 마음껏 날뛰게 하면서도 절묘하게 제어한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자멸해 죽을 거라 가슴이 아찔해질 만한 묘기였다.

“일류 따위 되지 못해도 좋아.”

사실은 위험하니까 걱정해서 해준 말일 뿐이라는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착한 동생 따위 못 되었다. 걱정받는 걸 알면서도 위험 속에 무언가 빛나는 게 보이면 도저히 손을 뻗지 않고선 넘어갈 수 없는 인종인 것이다.

투기의 폭풍이 검령의 신검을 감쌌다.

유매의 마력독재에 대한 대항책으로 마력을 둘로 나눠 회전시키는 연습을 해두지 않았다면 시도할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이다. 검을 매개로 회전하다 서로 충돌한 투기는, 엄격히 계산된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켜 훨씬 크게 승화해갔다.

그리고 차대엽은 웃었다. 그것은 이런 꿈같은 싸움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미소였다. 아마도 세한기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짓는, 어린아이처럼 티없이 맑고 환한 웃는 얼굴. 그 순간 모든 폭풍이 멎어 일점에 수렴했다.

적막. 태풍의 눈으로 화한 칼끝을 그대로 내지른다.

양류백로 종점, 파양(破陽).

하늘을 찢어버릴 듯이 몰아치던 투기의 폭풍을 더욱 증폭시켜, 억지로 한 점에 눌러담은 찌르기. 일점에서 해방된 투기는 어떤 방벽도 의미가 없는 절대적인 파괴의 역장을 만들어낸다. 그도 발을 딛은 것이다. 재해급 능력자의 영역에.

터져나간 소용돌이는 궤적 상의 모든 것을 깔끔하게 갈아내, 숲 중간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길을 만들어냈다. 순간이동 따위로 피할 수 있는 공격범위가 아니었다. 과부하시킨 투기를 무리해서 회전시킨 차대엽의 몸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상식 밖의 힘을 쓴 반동은 심각했다. 어떻게든 두 발로 서있는 것이 고작일 정도였다. 역시 아직은 실전에서 사용할 만한 기술이 아니다. 흙먼지가 내려앉고, 지면이 무너져 초토화된 그곳에선 파양에 휩쓸린 송한솔이 웃으며 서있었다.

“나보다 강해야 친구라고 말할 수 있다니.”

송한솔은 웃기는 놈이라는 듯 손으로 자기 뺨을 긁적였다. 쓰러지기 직전의 차대엽은 검을 지팡이 삼아 억지로 버티고 섰다. 송한솔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너도 참 미련하다. 친구 사이에 그런 게 어딨냐?”

“···미안. 내 고집이야.”

먼지가 완전히 걷히자, 송한솔의 상반신 반쪽은 통째로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날아가있었다. 이내 그 몸이 새까만 그림자로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차대엽은 검을 짚은 채 조금씩 무너지는 송한솔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검귀의 감각은 전투 상황의 어떤 작은 요소도 놓치지 않는다. 자신이 파양을 내지르기 직전, 송한솔은 투기의 제어를 방해해 폭주시킬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 날뛰는 투기가 그대로 역류해 차대엽은 죽었다.

그걸 알았기에 송한솔은 도중에 손을 멈추고 체념했다.

차대엽도 그럴 것이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송한솔은 송한솔이니까. 어떤 악몽같은 상상 속에서도 송한솔이 친구를 죽인다는 건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그것은 송한솔의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차대엽은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치사하게 자기 목숨 인질로나 잡고 말이야.”

죄책감으로 점철된 자책의 표정은 도저히 승자의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악몽 속의 송한솔이 입가를 이죽였다.

“짜증나긴 하는데. 나한테 이겼으면 나한테도 이겨라?”

“그래.”

얼굴이 반쯤 녹아내리면서도 농담하듯 내뱉은 송한솔의 말에, 차대엽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미련이 없어진 건지 악몽 속 송한솔은 완전히 형체를 잃었다. 주변 배경도 검게 녹아내리며 차대엽은 원래 있던 숲에 돌아왔다.

악몽 속에서 내지른 파양의 여파로 주변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자세빈은 공격에 휩쓸린 건지 저쪽의 나무에 부딪혀 쓰러져있었다. 그 덕분에 기술이 풀렸으리라.

차대엽은 자신의 몸상태를 확인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팔다리 여기저기선 핏줄이 터져 멍이 들었다. 아직 제대로 완성시키지도 못한 기술을 억지로 사용한 결과였다. 평범하게 생각해서 더 이상 전투 속행은 불가능했다.

<엉망진창이군.>

검령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사실 차대엽은 이미 주저앉아 싸움을 포기해도 충분할 정도의 일을 해냈다.

악몽 속의 송한솔은 이 대회의 어떤 참가자라 해도 잠시도 버틸 수 없을 만한 수준의 괴물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 위업이지만. 발동에 성공한 순간 승리 확정이나 마찬가지인 자세빈의 능력을 억지로 깨부수고 결과를 뒤집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쉬며 누가 우승할지라도 맞춰보도록 하자. 자신이 없는 곳에서 싸우는 두 사람을 상상하며. 비록 환상 속에서지만 자신은 송한솔에게서 승리를 거뒀다고 만족하면서.

그런 게 가능한 성격이었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곧추세운다. 싸우려는 의지만 있다면 검귀의 몸은 전투를 계속할 수 있다. 비록 환상 속에서라 해도, 자신은 송한솔과 약속을 나눈 것이다.

그리고 숲의 외곽까지 걸어나온 차대엽은 한 사람과 만났다. 천천히 주변 상황을 살펴본 차대엽이 입을 열었다.

“대단한걸. 이쪽의 압승일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할 말인데. 어떻게 세빈이가 질 수가 있지?”

지쳤다는 듯 땅바닥에 앉아 손등의 상처를 핥고 있는 건 현미나였다. 그 주변에는 금예린과 진소란이 쓰러진 채 널브러져있었다. 현미나는 정말 단신으로 저 두 사람을 공략해낸 것이다. 현미나가 엇차 하고 무릎에 손을 짚고 일어섰다.

“그래도··· 체력은 다 소모시킨 것 같네.”

그녀의 손이 옆쪽의 검을 낚아챈 건 동시였다. 발로 땅을 내리찍은 현미나가 맹수처럼 돌진해왔다. 차대엽은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오히려 시야가 맑게 개여가는 감각을 느꼈다. 차대엽의 검이 천천히 있어야 할 위치에 올라갔다.

현미나의 검이 백류를 내리쳤고, 그 힘을 그대로 받아낸 차대엽은 몸을 회전시켜 현미나의 머리를 후려쳤다. 피를 토하며 공중에 뜬 현미나는 공격당하는 채 반격하려 했지만, 차대엽은 그조차 간단히 잡아내 칼자루로 뒷목을 내리찍었다.

축 늘어진 현미나를 보고 차대엽은 숨을 내쉬었다.

“···서둘러야겠어.”

거의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팔다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회복할 여유는 없었다. 차대엽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멀리 보이는 산의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