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하지만 대공녀의 연설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하녀나 계속 떠올리고 있을 순 없었다.
“오늘은 술 냄새를 맡으실 일 없을 겁니다. 안심하시죠, 대공녀 저하.”
여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이 더 있는 건가. 자그마한 크리스털과 태슬이 잔뜩 박힌 이브닝 백을 쥔 손을 초조하게 꼼지락거리더니 레온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재촉하고서야 말문을 어렵사리 열었다.
“…로잘린으로 불러 주세요.”
조금도 예상치 못한 청에 레온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조금 전만 해도 겁을 잔뜩 집어먹은 걸 들키지 않으려 왈왈 짖어 대는 치와와처럼 굴던 여자가 느닷없이 거리를 좁히려 하다니.
그러나 어찌 되었든 부부로 살아야 할 사이였다. 언젠가는 좁혀야 할 거리. 상대가 먼저 내민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큰 결례였다.
“…….”
그러나 이름을 부르려 입술을 떼고도 레온의 입에서는 그 단순한 세 음절이 나오지 않았다.
로잘린 앨드리치. 로잘린. 로잘린. 이름이 입에 잘 붙지 않는다.
고리타분한 이름만큼이나 고리타분한 여자.
가르치는 듯한 말투와 수도자 같은 분위기는 고급스러운 이브닝드레스를 수녀복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윈스턴가에도 똑같은 말투와 분위기를 풍겨 고급 정장을 수사복으로 만드는 인물이 있었다.
‘나보다는 제롬과 더 잘 어울리지 않나?’
하지만 언젠가 작위를 받을지도 모르는 이는 제롬이 아니었다. 그러니 대공가의 혼담에서 그의 동생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저를 윈스턴 대위가 아니라 레온으로 불러 주신다면 기꺼이 그러죠.”
레온은 여자에게 저속한 수작이라도 부리듯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런 부류의 수작일 리 없었다.
소심한 구석이 있는 여자다. 그러니 먼저 그를 이름으로 부를 리 없는 걸 알고 내민 카드였다. 고지식하기까지 하니 사내의 가벼운 수작을 기꺼워하지도 않을 거다.
예상대로.
대공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하고, 차 안에는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레온은 무례를 범하지 않으면서 여자가 먼저 내민 손을 스스로 거둬 가게 하는 데 성공했다.
붉은 노을로 물든 선착장에 차가 멈춰 섰다. 강물은 황금빛으로 넘실대고, 고급 유람선은 주황빛 등을 휘황찬란하게 밝혔다.
레온은 차 반대편으로 건너가 문을 열어 주었다. 대공녀를 유람선으로 이끄는 길, 그는 피어스가 건네준 티켓을 꺼냈다.
유람선의 하선 시각은 네 시간 후.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지 말라는 어머니의 메시지가 티켓에 쓰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루한 밤이 되겠군.’
검은 제복을 빼입은 사환을 따라 유람선의 최상층으로 향하는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운전수가 레버를 내리고, 미끄러지듯 올라가던 승강기가 다시 레버를 올리는 순간 거칠게 멈춰 서며 덜커덩 흔들렸다.
“아….”
레온의 팔에 유령처럼 얹혀 있던 손이 그를 움켜쥐었다. 대공녀가 적잖이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곧바로 손에서 힘을 뺐다.
그녀의 뒤에 선 운전수가 레온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데이트를 하는 남녀를 위해 일부러 벌이는 깜짝 쇼인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팁이라도 원하는 눈치였지만 그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승강기의 격자문이 열리고, 사환을 따라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의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순간, 흘러나온 음악 소리에 레온은 가벼운 조소를 머금었다.
레스토랑 홀의 구석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에서 턱시도를 빼입은 남자가 건반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어머니가 상스럽다며 치를 떠는 재즈가 아닌 클래식 음악이었다.
어두운 색의 마호가니에 꽃무늬 천을 덧댄 의자. 조가비와 깃털 무늬 석고 장식이 덕지덕지 붙은 기둥과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천장. 고전적인 내부가 완벽히 어머니의 취향이었다.
코르셋이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가는 때에 아직도 고래수염으로 만든 코르셋을 고집하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그러고 보면 약혼 예정자조차 고지식한 어머니 취향대로였다.
창가의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웨이터가 가져온 메뉴를 받아 들었다. 와인 메뉴는 곧바로 돌려보내고 요리를 골랐다.
“어떤 걸 좋아하시죠?”
“추천해 주시는 걸로 할게요.”
제 의사를 드러내지 말고 얌전히 굴라는 구시대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나. 대공녀는 저녁 메뉴를 고르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금 전 당당히 술이 싫다고 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알 수 없는 여자다. 알고 싶지도 않지만.
대충 제일 값나가는 것으로 시키고 시답잖은 잡담을 시작했다. 오늘 날씨, 창밖의 경치, 대공의 건강…. 대화는 뚝뚝 끊기고 겉돌기 일쑤였다.
벌써 지루했다.
“요즘 일은 어떤가요?”
대공녀의 물음은 뜻밖이었다. 그의 별명이며 하는 일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묻다니.
‘저 여잔 정말 듣고 싶은 걸까?’
서부 사령관의 운전수로 잠입한 지 3년이나 지나서야 잡힌 블랜차드 반군의 쥐새끼 때문에 서부 사령부가 얼마나 큰 곤욕을 치렀는지.
그래서 그간 어떤 정보가 새어 나간 건지 파악하느라 며칠이나 밤낮없이 매달렸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그 교활한 놈이 공포에 벌벌 떨게 해 주었는지.
오른손의 새끼손톱을 뽑을 때 게거품을 무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말해 주면 저 여자는 새파랗게 질리겠지.’
아, 하나 더. 사령관의 뒤룩뒤룩 살진 얼굴이 요즘 미라처럼 홀쭉해진 것이 얼마나 우스운지.
말해 주면 웃을까, 불쾌해할까?
알고 보니 사령관의 수많은 정부 중 하나도 반군의 첩자여서 그는 왕도로 소환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럼 그 정부는?
첩자가 여자라니. 게다가 혁명군이라는 이름으로 창녀 짓을 하다니. 기분이 더러워서 상부에서 알아서 하도록 넘겨 버렸다.
여자를 위험천만하고 더러운 일에 쓰는 비열한 족속들.
하지만 그도 비열한 족속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상부에서 여자를 어떻게 다루든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의 손만 더럽히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이런 더러운 일, 방구석에서 시나 읊고 자수나 두는 영애가 알 필요는 없겠지.
“지루한 이야기일 겁니다.”
그의 완곡한 거절을 대공녀는 오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아, 이런…. 제가 군 기밀을 물어본 셈이 되어 버렸군요.”
“서부 사령관이 개구리를 닮은 건 기밀이 아니죠.”
시답잖은 농담에 대공녀가 성의 없이 웃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부디 가문에 ‘윈스턴 부인’을 하나 더 들이는 일이 어서 마무리되길.
들인다. 집 지키는 개를 하나 사 올 때나 할 법한 말이었다.
결혼 후 가문의 장자로서 그의 임무는 일단락된다. 이딴 시시한 ‘데이트’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더딘 걸 보니 만만치 않은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겠군.’
약혼 논의가 얼마나 진척됐는지 레온은 몰랐다. 약혼 조건은 당사자를 따돌리고 가문의 어른들만이 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은 흥미가 없어 물어본 적도 없었다.
“레온, 너는 너의 일을 하렴. 이건 나의 일이야.”
관여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어머니는 영화 주인공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뱉을 법한 말을 사뭇 진지한 낯으로 하곤 했다. 레온의 결혼을 자신의 역작으로 여기는 태도였다.
그럴 만도.
엘리자베스 윈스턴. 윈스턴 부인이 되기 전에는 어느 백작가의 영애로 불렸던 여자다.
곧 작위를 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아버지와 결혼했으나 아들이 장성하고도 아직 ‘윈스턴 부인’일 뿐이었다. 백작가의 영애로 태어났으니 백작 부인으로 죽어야 한다는 말을 결핵 말기 환자가 피를 토하듯이 하는 사람이었다.
‘운이 없군.’
윈스턴가의
선대 부인은 모두 백작 부인으로 죽었는데 말이다.
대대로 윈스턴가는 윈스턴 백작가였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반란에 쫓겨 왕가가 해외로 피신하면서 그 대가 끊어졌다.
당시 백작이었던 조부는 왕가를 단숨에 버리고 반군의 손을 잡았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다며 선지자인 양 굴었다고, 아버지가 종종 코웃음을 치며 회상하곤 했다.
그가 말한 새로운 세상은 신분이 아닌 자본이 곧 권력이 되는 세상이었다. 조부는 초대 ‘혁명 정부’의 개 노릇을 해 가며 벌인 사업으로 재산을 긁어모았다.
당시 혈기 넘치는 사관생도였던 아버지는 그런 조부를 경멸해 왕가를 따라 해외로 떠났다. 앞날을 볼 줄 모르는, 앞뒤 꽉 막힌 저능아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지만 앞날을 볼 줄 모르는 저능아는 조부였다.
‘혁명 정부’는 10년도 되지 않아 와해됐다. 이념과 이상이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그 틈으로 개인의 이해가 쉽게 스며든다.
반군의 이념을 여전히 지지하는 쥐새끼들도 고문실에서 사나흘 정도를 보내고 나면 이념 따위를 버리고 마는 게 그 증거다. 이념이 대신 채찍에 맞아 주고 손발톱을 뽑혀 줄 게 아니니까.
그 혼란한 틈을 왕가와 왕당파가 놓칠 리 없었다. 왕정은 순식간에 복고되었고 ‘리폰 공화국’은 다시 ‘리폰 왕국’이 되었다.
왕가가 돌아오자마자 배신자를 처단하는 데 나선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나마 아버지가 왕정복고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게 다행이었다. 윈스턴가는 백작 작위만 빼앗겼다. 캠든 지역의 대지주라는 지위와 재산은 지킬 수 있었다.
당시 젊었던 아버지에게 왕가는 약속했다. 반란 세력의 잔당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면 작위를 돌려주겠노라고. 본디 왕가의 개였던 아버지는 그 후로 더욱 충직한 왕가의 미친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즈음 작위는 있지만 돈은 없는 한 백작가가 앞날을 내다본 투자라며 딸을 윈스턴 부인으로 만들었다.
‘다들 어리석기 짝이 없지.’
그 약속은 여태 지켜지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