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아버지는 반군 첩자에게 당해 젊은 나이에 불명예스럽기 짝이 없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작위를 되찾는 의무는 자연스레 장남인 레온의 것이 되었다.
남들보다 일찍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임관 후에는 수많은 전장과 반군 은신처를 누비며 전쟁 영웅과 흡혈귀라는 칭호를 한꺼번에 얻었다.
이젠 작위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가문의 영애와 결혼하는 것이 그의 다음 의무였다.
날 때부터 군대식 교육을 받고 자란 그였다. 하기 싫은 일을 묻지 않고 묵묵히 하는 것도 이젠 이골이 나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지나간 곳은 피투성이가 되기 마련이라는 악명 때문에 캠든의 흡혈귀라고 불리지만 실은 캠든의 충직한 군견이라는 별명이 더 어울릴지도.
‘저 여자는 대공가의 순한 양이라고 부르면 될까.’
레온은 창밖의 갑판을 바라보는 대공녀를 응시했다.
대공녀에 비해 윈스턴가의 장남은 격이 낮아도 한참 낮다. 그런데도 대공이 이 혼담에 진지하게 임하는 건 아직 내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군인이 출세 가도를 달리는 세상이다. 수많은 젊은 장교 중 가장 촉망받는 건 레온.
대공은 막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위험도가 크지만 수익도 클 만한 주식을 싼값에 사는 데 남는 딸 중 하나를 쓰는 거다. 그러니 로잘린 앨드리치는 대공의 희생양인 셈이었다.
레온은 심드렁한 낯을 한 여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곳은 마음에 드십니까?”
“…네.”
다년간 첩자를 신문해 온 그의 직감이 말하건대, 저건 거짓말이다.
“다행이군요. 레스토랑 예약을 어머니께 맡긴 게 실수가 아닌가, 조금 후회하고 있었거든요.”
대공녀의 얼굴에 설핏 웃음기가 번졌다.
“윈스턴 부인께서는 좋은 안목을 가지고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어머니께 전해 드리죠.”
아무 의미 없이 몸에 밴 미소를 지었더니 대공녀가 천천히 따라 웃었다. 하고픈 말이 있는지 여자가 굳게 다문 입을 떼는 순간 웨이터가 식사를 가져왔다. 그 후론 이따금 요리를 두고 한두 마디씩 나눈 게 대화의 전부였다.
접시를 빨리 비운다 해서 이곳에서 더 빨리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몸이 제멋대로 식사를 순식간에 끝내 버렸다.
그의 접시가 비자 대공녀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접시는 반도 채 비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군에 있으면 남자들의 식사 속도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라.”
레온은 같은 층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메뉴를 보다 뒤늦게 사과했다. 손님을 굶겨 보낼 순 없으니 케이크라도 권할 생각이었다.
“아닙니다. 사실 제가 먹기엔 양이 많았어요.”
대공녀는 숙녀답게 디저트를 사양하고 홍차를 시켰다. 차를 기다리는 사이, 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자꾸만 시선이 들러붙었다. 거북스러워진 레온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대공녀가 들켰다는 눈을 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짓을 해 놓고 웃기지도 않았다. 그러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혼자 슬며시 웃다 말문을 열었다.
“소문만큼 무서우신 분은 아니네요.”
레온은 조소를 억눌렀다.
‘멍청한 여자. 그럼 내가 네게 채찍이라도 휘두를 줄 알았나.’
소문이 얼마나 악랄한지는 몰라도 틀리지 않을 거다. 그저 그의 진면모를 대공녀에게 보일 리 없을 따름이지.
“대위님은 정말 너그럽고 친절하세요.”
진면모를 다 보고도 그를 너그럽고 친절하다고 하는 여자는 그러면 도대체 뭘까.
샐리 브리스톨.
멍청한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멍청한 척하는 여우로 보였다.
그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입과 경멸한다고 말하는 눈의 간극이 볼만했다. 가면을 벗고 속내를 완전히 드러낼 때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보고 싶었다.
그러면 그 여우가 앙큼한 암컷인지 교활한 협잡꾼인지 알 수 있을까.
‘예를 들자면….’
잔혹한 충동이 갑작스레 들끓자 레온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샐리의 검은 하녀복 치마를 걷어 올리고 그 가느다란 종아리를 벌린다. 새하얀 블루머의 한가운데를 우두둑 잡아 뜯으면 모습을 드러낼 비좁고 습한 국부에 내 권총을 쑤셔 넣는 거다.
차가운 총구로 연약한 살을 휘저어 댄다. 샐리가 쾌락보다는 고통에 가까운 신음을 흘린다.
움찔거리는 속살에서 권총을 뽑아내면 번들번들 젖은 총구를 타고 그 여자의 음란한 물이 주룩 흘러 내 손을 적시겠지.
‘참기 힘들군.’
레온은 이미 한쪽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더욱 단단히 꼬았다. 어째서 그 보잘것없는 여자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바지 앞섶이 터질 듯 단단해지는 걸까.
그 눈 탓인가.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별장에 대공녀를 내려 주었을 때는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저도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레온의 산뜻한 미소에 대공녀가 의외라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도 저처럼 선의의 거짓말을 할 줄 알았는데 진심으로 즐거웠다고 하다니.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꽤 즐거운 시간이었지.
유람선에서의 마지막 두 시간은 바지가 꽉 껴서 불편할 정도로 즐거웠으니까.
“그럼 다음에 뵙죠.”
대공녀를 별장 안으로 들여보내고 차에 타려는데 집사가 입구에서 빠르게 걸어 나왔다.
“윈스턴 대위님, 대공 저하께서 바쁘지 않다면 오늘 진 빚은 오늘 갚고 가는 게 어떠냐고 물으십니다.”
저녁때 술을 거절하고 간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런….”
레온은 낭패라는 척 검은 장갑을 낀 검지로 미간을 문질렀다.
“오늘은 술 냄새를 맡으실 일 없을 거라고 대공녀 저하께 이미 약속드렸는데…. 벌써 부인의 신용을 잃는 사내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씀드리면 저하께서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겠지. 빚은 이자까지 두둑이 쳐서 갚아 드리겠다고 전하도록.”
레온은 그를 묘한 눈으로 응시하는 대공녀와 집사를 두고 차에 올랐다. 영양가 없는 연장 근무는 사절이다.
실은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그의 바지 앞섶에서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
한마디로 더럽게 힘든 하루였다.
샐리는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삐걱.
텅 빈 방에 낡은 침대의 신음이 메아리쳤다. 별채의 다락에 자리한 하녀 방은 넷이 살아도 될 정도로 넓었다. 에델이 나가고 별채에 남은 건 그녀뿐이라 혼자 독차지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아, 오늘 정말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거야?”
그래서 머릿속으로 할 푸념도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거다.
오늘만큼 윈스턴과 지겹게 엮인 날도 없을 거다. 원체 변덕이 심한 인간이기는 하다만 오늘은 정말 유령처럼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튀어나오는 통에 제가 심장 마비로 유령이 되는 줄 알았다.
그 들짐승 같은 직감이 발동하기라도 한 걸까.
“혹시 어릴 적에 애빙턴 비치에 간 적이 있나?”
긴 한숨이 적막한 방을 가로질렀다.
빌어먹을 내 눈.
첩자는 모름지기 외모가 평범해야 한다.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몽타주를 그려 보려 할 때 자세히 묘사하기 어려울 만큼 특징 없어야 하니까.
사실 나름대로 평범한 외모라고 생각했다. 흔하디흔한 다갈색 머리에 요염함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보기 힘든 수수한 인상이었으니까.
이 청록색 눈동자만 빼면.
첩자로서의 다른 소양은 노력으로 갈고닦는다 해도 타고난 외모는 어쩔 수가 없었다. 변장도 한계가 있었다.
독특한 눈동자 탓에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이 저택에 배치되기 전 미리 경고했다. 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수뇌부가 모범을 보여야 해.”
제임스 ‘리틀 지미’ 블랜차드 주니어. 블랜차드 혁명군의 젊은 지도자이자 그녀의 약혼자.
그가 약혼녀에게 어떤 험난한 작전을 맡겨도 샐리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았다.
집에 얌전히 들어앉아 아이를 키우고 주방 용품 카탈로그를 뒤적이다 남편이 올 시간에 맞춰 코스 요리를 차리는, 그런 틀에 박힌 삶을 바란 적 없다.
약혼자에게 여자로서 사랑받기보다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그랬듯 대등한 동지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니 윈스턴가 잠입 작전을 거부한 건 그녀가 겁쟁이여서가 아니었다. 윈스턴 대위가 기억할지도 모를 신체 특징 때문에 작전을 망칠 걸 우려한 탓이었지.
‘이것 봐. 내 말이 맞잖아.’
신속히 다른 사람을 여기 투입하고 철수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균열 하나가 붕괴로 이어지는 법이다. 오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해서 윈스턴이 의혹의 싹을 완전히 잘랐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미에게 전화를 해 봐야겠는데….’
어차피 고문실은 비었으니 내일은 일이 많지 않을 거다.
‘내일 우체국에 갈까? 전화도 쓰고….’
샐리는 방 건너 서랍장을 응시했다. 돌돌 말아 접어 둔 어느 양말 속에 오늘 윈스턴에게서 본의 아니게 갈취한 거금이 들어 있었다.
‘돈도 보낼까?’
저번 주 주급과 함께 본부에 군자금으로 보내는 거다. 주급과는 달리 아무도 모르는 돈이니 제가 꿀꺽 써 버릴 수도 있지만 그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딱히 쓰고 싶은 곳도 없었다.
뭐… 마담 베노아의 카페에서 카페오레 한 잔과 케이크 한 조각 정도의 호사는 괜찮겠지.
“케이크 한 조각보다 더 좋은 게 뭔지 알아?”
알아. 한 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