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윈스턴이 나를 덮치면 빠져나올 방법이 있을까.’
빠져나올 방법은 많았다. 특수 훈련을 받은 첩자라는 걸 들키지 않고 빠져나올 방법이 드물 따름.
윈스턴의 옆에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자 그가 샐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곧게 뻗은 다리가 다른 쪽 무릎 위로 포개어지자 날렵한 검은 구두코가 위로 들리며 샐리의 치맛자락 끝단에 걸렸다.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순간 윈스턴이 빈손을 샐리에게 내밀었다. 발은 짓궂은 소년처럼 그녀의 치마 끝을 들추면서 손은 점잖은 신사였다.
“…네?”
무얼 달라는 건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더니 그가 시가를 든 손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손을 따라가 보니 검은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다시 내렸더니 그가 샹들리에를 눈으로 가리키며 재차 손을 내밀었다.
“잠시 소파에서 기다려 주시면….”
“그냥 해.”
“먼지가 떨어질 거예요.”
“그걸 치우는 것도 네 일이지.”
이건 무슨 수작일까. 가죽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태도에서 샹들리에에서 떨어질 먼지를 그대로 맞고 있겠다는 굳센 의지가 엿보였다.
‘그래. 먼지떨이로 네 머리를 마음껏 내려쳐도 된다면 기꺼이 치워 주지.’
샐리는 하는 수 없이 양동이를 내려놓고 그 속에 꽂힌 먼지떨이를 집었다.
빚이라도 받으러 온 사람처럼 고집스럽게 제 앞으로 내민 손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구둣발로 책상에 올라갔다간 발자국을 지우는 일도 샐리의 몫이 될 거다.
책상을 짚고 선 채 한쪽 발을 뒤로 들었다. 얇은 구두끈을 잡아당겨 스르륵 풀어 버리고 구두 뒤꿈치를 손으로 쥐어 아래로 부드럽게 당겼다.
흰 스타킹으로 감싼 발이 검은 구두에서 빠져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윈스턴은 구두를 벗는 게 흥미로운 볼거리라도 되는 양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런 일상적인 일조차 신문하듯 뜯어보았다.
불편한 시선에서 빨리 벗어날 길은 시키는 걸 잽싸게 해 주고 나가는 것뿐이었다. 샐리는 그의 손을 주저 없이 잡고 책상에 무릎을 올렸다.
“앗….”
윈스턴의 손이 떨어져 나가고 책상에 한 발을 딛고 일어서려던 찰나였다. 책상 끄트머리로 삐져나와 있던 왼발을 붙잡혔다. 그 바람에 몸이 휘청하자 샐리는 두 손으로 다급히 책상을 짚었다.
출발 직전의 육상 선수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엎드린 채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혹시 치마를 들추지는 않을까. 한 손을 뒤로 뻗어 치맛자락을 눌렀지만 헛짚었다.
그의 시선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대위님?”
윈스턴은 샐리의 발끝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피식 웃었다. 굵은 엄지가 얇디얇은 스타킹을 사이에 두고 말랑한 살을 매만지고 완만한 굴곡을 부드럽게 훑었다. 샐리의 발끝부터 뒷덜미까지 소름이 바짝 돋아 올랐다.
일부러 간지럼을 태우는 듯한 손길 탓에 앓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난잡한 오해를 살 게 분명했다. 그녀는 입술을 단단히 깨물었다.
놓아 달라는 뜻으로 발을 당기자 부드럽던 손길이 변했다. 윈스턴이 길쭉한 손가락을 한데 오므려 샐리의 발을 감싸 쥐더니 물었다.
“내가 준 돈으로 뭘 한다고?”
예상치 못한 화제에 샐리의 저항이 멎었다. 갑자기 돈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는 뭘까.
“엄마의 병원비를….”
“보냈나?”
“아뇨, 아직.”
돌려 달라고 하면 줄 수 있다.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지주라는 자가 좀스럽다 싶지만 원래 가진 자일수록 탐욕스러운 법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샐리 브리스톨이라는 여자의 사적인 정보를 세세히 물고 늘어진다면 감이 좋은 저자가 허점을 눈치챌지도 몰랐다.
샐리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스타킹 한 켤레를 살 돈은 빼고 보내.”
“앗!”
무슨 소리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샐리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곧바로 튀어나왔다. 굵다란 엄지가 스타킹 속으로 파고들어 와 도톰한 살을 문질러 댄 탓이었다.
“구멍 났어.”
윈스턴의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날카로운 감이 아닌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한 것뿐이라니 다행이었지만 샐리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는 스타킹 바닥에 난 구멍에 엄지를 넣고 휘저어 댔다. 손가락이 구멍 깊숙이 들어와 새끼발가락을 괴롭혔다.
쫙. 구멍이 더욱 찢어지는 소리까지 나자 샐리의 볼이 새빨갛게 익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병원이길래, 응? 내가 주급을 적게 주나? 그런 것도 아닐 텐데 스타킹 한 켤레 살 돈이 없어서 구멍이 난 걸 신고 다니는 거야? 샐리, 이걸 보는 내 마음은 어떻겠어.”
“아, 그, 그게 아니라…. 대위님, 내일 꼭 새로 사 신을 테니 제발 좀 놔주세요. 저기, 그게, 청소는….”
레온은 웃으며 손을 거뒀다. 그래 봐야 그의 책상 위인데 하녀는 다급히 일어나 귀퉁이로 도망쳤다. 피를 봐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여자가 고작 이런 일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다니.
“재밌네.”
미치광이.
샐리는 제가 아는 온갖 상스러운 말을 속으로 퍼부으며 샹들리에를 재빠르게 털었다.
개자식. 먼지나 먹어라.
먼지떨이 끝에 달린 타조 털을 괜히 윈스턴의 금빛 정수리 위에서 털어 댔다. 그런데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먼지가 떨어지지 않았다. 샹들리에를 청소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까.
얼른 끝내고 내려가는 수밖에. 소심한 보복은 포기하고 등을 돌려 샹들리에의 앞쪽을 털던 때였다.
“맞네.”
얇은 스타킹으로 감싸인 종아리에 낮은 중얼거림이 스쳤다.
“네?”
놀라 돌아보는 찰나 삐걱 소리가 들렸다. 내려다보니 윈스턴은 아무 짓 안 한 척 의자 등받이에 멀찍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
손에 들린 시가는 피우지 않고 태우기만 했는지 회색빛 재 덩어리가 짧은 시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니, 혼잣말이야.”
“아, 네….”
하녀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청록 빛 눈이 외쳤다. 당신을 혐오한다고.
레온은 재떨이에 시가를 털며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
흰색.
오늘 저녁 대공녀와 마주 앉아 한 상상이 맞았다. 샐리의 블루머는 흰색이었다.
속옷의 색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저 속의 색을 확인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다.
내 상상과 같은 색일까.
저 검은 치마와 흰 속치마 속으로 손을 넣고 단숨에 블루머 가운데의 촘촘한 솔기를 우두둑 뜯어 벌리고 싶다.
레온은 매끈한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훑다 불현듯 날카로운 이로 짓씹었다.
이미 본 사내가 있을까.
그는 존재조차 모르는 사내의 눈을 지지듯 시가 끝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다 끝났습니다, 대위님. 그럼 저는 카펫을 치우겠습니다.”
샹들리에를 터는 시늉이 대충 끝났다. 샐리는 윈스턴이 딴소리를 하기 전에 책상 아래로 냉큼 내려왔다.
더러운 호색한. 치마 속을 훔쳐보고 있었던 주제에 신사인 양 손을 잡아 주는 게 역겨웠다.
윈스턴이 더는 귀찮게 굴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샐리는 카펫에 무릎을 꿇고 검은 얼룩을 지우기 시작했다.
얼른 치우고 나갈 생각에 열중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그사이 윈스턴은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척이 없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도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쉽게도 저자가 증발하지 않았다는 걸 이따금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로 확인했다.
쏟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잉크가 마르지 않아 지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얼룩이 있던 자리가 다른 곳보다는 아주 약간 어둡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그냥 보내 주겠지.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치마를 탁탁 펴며 뒤로 돌아 윈스턴을 마주 보았다. 그는 비스듬히 기울인 턱에 가볍게 주먹 쥔 손을 괴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시가는 안 피우는 건가. 오른손은 책상 아래에 있어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하녀가 평범하게 카펫 얼룩을 지우는 그 흔한 일이 뭐 그리 재미있는 건지. 그의 입꼬리가 슬쩍 휘어 올라가 있었다.
평소의 날카로움은 어디로 갔을까. 묘하게 부드럽고 끈적한 눈빛이 샐리의 얼굴에서 공손하게 모아 쥔 두 손으로 떨어졌다.
술이라도 한 모금 했나? 하지만 책상에는 술은커녕 물도 없었다.
“다 끝났습니다. 더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윈스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킬 일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샐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그의 시선이 턱 아래의 재떨이를 가리켰다.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재떨이에는 조금 전 윈스턴이 낭비한 고급 시가가 잿더미에 박혀 있었다.
‘재떨이를 비운다는 핑계로 나갈 수 있겠구나.’
샐리는 가벼운 걸음으로 윈스턴에게 다가가 재떨이를 집다가 돌처럼 굳었다.
책상 아래에서 굵은 힘줄과 핏줄이 매끈하게 도드라진 손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손에 쥔 구릿빛 물건 또한 힘줄과 핏줄이 매끈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헉!”
쾅. 샐리의 손에서 재떨이가 미끄러지며 책상 모서리로 떨어졌다.